상세한 상황을 들어보니 오빠가 사용했던 신약의 효과가 좋아 의학적으로 획기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그걸 들은 누군가 비싼 돈을 드려 치료를 요구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민씨 가문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곧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이 갔다.“민용재가 그쪽에 도착했어요? 혹시 대면한 적 있어요?”“민용재?”양현숙은 그 이름에 대해 몰랐기에 어리둥절해했다.“시영이가 몰래 엿들었는데 웬 여자라고 하던데? 성이 원씨라고 하는 것 같았어.”‘원혜정이네.’그 생각이 드는 순간 권하윤은 당황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원혜정은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 같지만 웃음 뒤에 칼을 숨긴 악독한 사람이다. 심지어 민용재와 똑같은 부류라고 할 수도 있다.그런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더욱이 민용재가 해외로 가 수술을 받게 된다면 민씨 집안 사람과 맞닥뜨리게 될 지도 모른다.물론 정체를 들킬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오빠가 아직 퇴원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어떡하지?’권하윤은 마음이 불안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 그 사람들 엄마네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평소에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말고, 집안일은 더더욱 입 밖에 내지 마요. 다른 건 저한테 맡겨주고요.”“그래.”답은 이렇게 했지만 양현숙은 그래도 여전히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너도 조심해. 네 쪽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오빠는 우선…….”“그런 말 하지 마요.”권하윤은 양현숙의 말을 끊어버렸다.“우리 가족 모두가 잘 지내야죠.”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하윤은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다.‘도준 씨한테 도움을 요청할까?’만약 USB를 보지 않았다면 그럴 배짱이 있겠지만 민도준이 공은채와 한번 또 한 번의 생일을 함께 보낸 걸 몇 년 간의 정을 생각하니 왠지 주눅이 들었다.예전에는 단지 가족과 자기의 안위만 걱정됐다면 지금은 민도준이
창밖에서 싸늘한 바람이 안으로 불어드는 데다 민도준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권하윤은 순간 몸이 떨려왔다.낮의 따뜻함은 어느새 사라졌는지 밤이 되자 눈앞의 남자도 밖의 날씨와 함께 식어버렸다.그렇듯 덮쳐온 압박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지난날 민도준의 공포스러운 모습이 이미 머리에 박혀 있어 심장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댔다.가족에 관한 일은 절대로 모험할 수 없으니까. 그건 예나 지금이나 권하윤이 지키는 철칙과도 같다.이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생각하던 권하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사실 무서워서 그래요. 오늘 할머님이 하신 말을 듣고 나니 도준 씨한테 폐가 될까 봐요.”불안한 목소리는 방문이 방 안에서 울려 퍼지더니 끝내 정적만 남겼다.권하윤은 감히 고개를 들지조차 못하고 눈을 오롯이 민도준의 가슴에 고정했다.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있던 손가락은 긴 머리카락을 따라 끝까지 쓸어내리더니 마침 엉켜 있는 뭉치에 걸렸는지 두피를 잡아당겨 고통을 전해주었다.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순간 시선 속에는 남자의 말아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정서를 알 수 없는 호를 그린 채로.권하윤은 더욱 당황해 민도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혹시 화났어요?”물기 촉촉한 눈에는 남자의 인영이 비쳐 있었다.“내가 화내야 하나?”되돌아온 물음에 권하윤은 당황한 나머지 민도준의 손에 자기 얼굴을 비벼댔다.“화내지 마요. 저 무시하지 마요.”민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자기 손에 얼굴을 비벼대는 권하윤의 얼굴을 바라봤다.손의 온기는 권하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심지어 권하윤은 현재 자기의 심정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도 몰랐다.눈앞의 남자가 좋으면서도 무서웠다.민도준이 가족을 대할 때의 태도에서 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는 가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남자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가장 친한 가족한테도 그러는데 남남인 자기한테는 오죽할까?그러던 그때, 얼굴에 느껴지는 통증이 권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권하윤은 눈앞이 몽롱해졌다.지난 이틀 동안의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상황이 모두 꿈만 같았다.그 아름다움이 모두 민도준의 관용 덕에 유지될 수 있다는 걸 간과해 버린 탓일까?그 관용마저 사라지자 모든게 신기루처럼 한 순간 사라졌다.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담배를 눌러 끈 민도준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권하윤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 웃음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그 순간, 이미 한번 잃어버렸다 다시 얻은 남자의 따뚯함을 또다시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다른 상황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틀비틀 달려가 민도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가지 마요. 제발 가지 마요. 저 도준 씨 좋아해요. 도준 씨가 제 곁에서 떠나는 거 싫어요.”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까 봐, 또 자기한테 실망했을까 봐 무서웠다.그보다 사실 자기가 처음부터 욕서받지 못했을까 봐 더 무서웠다.소리 없이 흐느끼며 떠나지 말라고, 저를 무시하지 말라고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새하얀 두 팔이 남자의 손에 의해 풀어지는가 싶더니 민도준은 뒤돌아서서 권하윤이 넘어질세라 꼭 붙잡았다.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신 눈물이 볼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가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내가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권하윤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말해 봐. 오늘 이렇게 죽치고 앉아 밥도 안 먹은 게 무엇 때문인지.”가뜩이나 눈물을 흘려 퉁퉁 부은 두 눈이 따끔할 정도로 아파 났다.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속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꾸만 권하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그리고 끝내 눈을 감고 내뱉은 한마디.“은우가 걱정돼서요…….”“하.”민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그 개자식이 사고라도 나면 언제나 이렇게 걱정했었지. 전에 뭐라고 했던가? 나더러 그 자식을 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했던가?”권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약속할게.”권하
민도준은 권하윤이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잠깐 의외라는 눈빛을 하더니 두 팔로 침대 가장자리를 짚은 채 권하윤을 내려다보았다.“좋아하지, 그럼. 그런데 그것도 어제까지야.”순간 반짝이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민도준도 권하윤의 그런 변화를 눈치챘는지 악랄하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권하윤을 톡톡 건드렸다.“걱정하지 마. 하윤 씨를 안 좋아해도 이 몸뚱아리는 아직 좋아하니까.”권하윤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심장이 텅 빈듯한 느낌은 확실히 느껴졌다.권하윤은 마치 생명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민도준의 손가락을 꼭 자았다.“그럼 도준 씨는 다른 사람 좋아해 본 적 있어요?”민도준은 기대에 찬 권하윤의 두 눈을 빤히 보다가 달콤한 말을 내뱉던 권하윤의 입술로 시선을 옮기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있지.”순간 민도준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조금 풀리더니 마지막 힘을 끌어내는 듯 어렵사리 질문을 던졌다.“얼마나 좋아했어요?”“…….”민도준의 답을 듣는 순간 권하윤은 손을 스르르 풀며 멍하니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부터 네 글자가 자꾸만 메아리치듯 귓가에 들려왔다.‘죽을 만큼.’순간 암흑 속으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말라버린 것 같던 눈물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죽을…… 만큼…….’끝없는 어둠에 악몽마저 뒤섞였다.공씨 저택에서 시련을 겪던 캄캄한 시절과 민도준이 목을 조르며 자기가 공은채를 해친 건가 하고 묻는 모습까지 머릿속에 자꾸만 흘러들어 권하윤을 괴롭혔다.심지어 귓가에 전화벨이 울릴 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손목에는 벌건 흔적이 남아 힘조차 쓰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버둥거리며 애를 쓰고 나서야 권하윤은 핸드폰을 손에 넣었다.액정에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여보세요?”“저예요.”차분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 동작을 하려던 찰나
전화를 끊은 권하윤은 핸드폰에서 낯선 번호를 찾기 바쁘게 고민도 없이 전화했다.그리고 권하윤이 전화 올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다.“당신이야?”“그래요.”그 말을 들은 순간 권하윤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불을 꽉 움켜쥐고 나서야 소리 지르는 걸 면할 수 있었다.살짝 흐트러진 권하윤의 숨소리를 알아차렸는지 공태준은 바로 설명했다.“미안해요. 미리 말하지 않아서.”언제나 변하지 않는 평온한 어조에 꾹꾹 눌러 뒀던 권하윤의 감정은 끝내 폭발했다.“공태준, 지금 나를 죽이려는 거야?”어렵사리 가족을 안전한 곳에 보내놓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공태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니.그런 기분은 마치 그물에 사지와 목이 칭칭 감긴 것처럼 도망갈 수도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전화 건너편에서 공태준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런 뜻 아니에요. 저도 하윤 씨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그 병원은 저랑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이니 떠나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떠나도 돼요.”그 말을 들으니 솜에 주먹이라도 휘두른 것처럼 허무했다.“대체 뭐 하려는 거야?”“저랑 말 몇 마디 해줘요. 네?”저와 똑같이 애원하는 목소리에 아까는 거절할 권리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마저 없었다.공태준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의 모든 길을 막아버리니까.애써 냉정을 되찾은 권하윤은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뭔 말이 듣고 싶은데?”“혹시 기억해요? 어느 하루 하윤 씨가 공씨 저택에 있을 때 서원에서 춤췄던 날?”권하윤은 기억한다.그날 성은우가 마침내 하모니카로 음악 한 소절을 불 수 있게 되자 권하윤은 그 멜로디에 맞춰 자유자재로 춤을 췄었다.그러다가 성은우가 분 하모니카 소리가 음 이탈이 나자 권하윤이 얼마나 놀려댔는지 모른다.고작 몇십초 될까말까한 장면이었을 텐데 그게 공태준의 눈에 든 거다.그때는 권하윤이 공씨 저택에 간 지 얼마 되지않는 때었다. 때문에 여전히 미래에
전화를 끊은 순간 권하윤은 힘이 빠지기라도 한 듯 침대 머리맡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낮에 하루 종일 자고 나니 오히려 저녁이 되자 졸음이 없어진 모양이다.공태준이 마침 이런 때에 오빠를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갔다는 건 권하윤의 일거수일투족이 공태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런 감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걸 생각하니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끄집어 올렸다.‘괜찮아, 은우도 이제 곧 올 테니까. 소중한 사람들만 무사하면 나는 아무렴 괜찮아.’‘도준 씨는…….’민도준이 성은우를 정말로 데려왔다는 걸 생각하자 권하윤은 씁쓸한 느낌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든 건 자꾸만 귓가에 맴돌던 네 글자였다.‘죽을 만큼.’‘도준 씨가 공은채를 그렇게 사랑하나? 그러면 나는?’‘아마 전에 마음이 조금 있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완전히 소멸했겠지?’민도준과 오래 지내왔기에 권하윤은 민도준이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심지어 그런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완전한 균열이 생겨났다.맑게 갠 날에는 선명하지 않겠지만 비 오는 말이면 세찬 빗물이 그 속을 파고들어 두 사람의 거리를 갈라놓고 늦게 깨달은 권하윤의 진심을 잠가버릴 테고.이불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 지금도 권하윤은 마치 물속에 점점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었다.권하윤은 무얼 잡아야 하고 무얼 내려놓아야 할지 막막했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 종점은 어디인지조차 몰랐다.‘어쩌다 이렇게 됐지?’밤새도록 멍하니 온갖 생각에 잠겨 잠을 자지 못한 권하윤은 이튿날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마치 구름 위를 밟는 것만 같았다.어느새 준비했는지 권하윤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은찬은 이미 아침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그러고는 마치 좀비처럼 영혼 없이 걸어 다니는 권하윤을 보자 은찬은 수저를 반듯하게 놓고 일부러 활발한 말투로 권하윤을 달랬다.“오늘 제가 부엌에 다녀왔을 때 뭘 들었는지 아세요? 강민정이 무슨 냄새를 맡든 헛구
권하윤은 허둥지둥 옷소매를 내렸지만 성은우의 표정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렸다.“민 사장이겠네.”“네가 생각한 그런 거 아니야.”권하윤은 사고라도 날까 봐 얼른 소매를 내렸다.“민 사장이 너를 이렇게 대하는 데도 그 사람 편을 들어?”“내가 너무 많이 속여서 그래. 너도 나만 아니었다면 이렇게…….”“윤아.”성은우는 권하윤의 말을 끊었다.“너 누구한테도 잘못한 거 없어.”권하윤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오롯이 자리를 바라보는 성은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네 삶도 이렇지 않았어야 했어. 너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은데 너 자신마저 자기를 편히 놔두지 않으면 어떡해?”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권하윤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러 버린 것만 같았다.애써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순간 권하윤을 잠식시키는 바람에 침대에 엎드린 채 서러움을 토해 내버릴 것처럼 서럽게 울어버렸다.끝없이 떨리는 권하윤의 등을 보자 성은우는 손을 들고 잠깐 머뭇거리다 끝내 아무 말도 없이 등을 토닥였다. 평생 여자 한번 달래본 적 없는 것처럼 뻣뻣한 동작이었지만 권하윤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었다.병실에 있는 남자는 여자의 등을 한번 또 한 번 토닥였다.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힘으로.너무 가볍게 두드리면 위로가 안 될까 봐, 너무 힘을 주면 놀라기라도 할까 봐 힘 조절하는 모습은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다정해 보였다.“얼씨구, 하소연이라도 하는 건가?”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병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 권하윤은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눈에는 아직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전날의 기억이 눈앞에 또렷이 스쳐지나 권하윤은 민도준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렸다.두려움에 질린 얼굴과 표정은 성은우를 마주하고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가끔은 가까워졌다 멀리 도망가 버리는 눈앞의 여자를 두고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민도준은 권하윤의 경계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가며 권하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일어나.
성은우의 몇 마디 말은 마치 가시처럼 권하윤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성은우는 스스로 멍에를 쓰더라도 권하윤을 속박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하지만 권하윤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냈다.“싫어요.”“음?”민도준의 목소리는 정서를 분별할 수 없었다.“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경성을 떠나게 해요. 그러면 도준 씨가 말했던 것처럼…….”권하윤은 목구멍에서 자꾸만 올라오는 떫은맛을 삼키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은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게요.”민도준은 일전에 권하윤에게 이런 선택지를 준 적이 있다. 성은우가 살았든 죽었든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면 예전의 일은 모두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그때는 성은우가 죽었든 살았든 관계하지 않을 수 없어 동의하지 못했지만 성은우가 안전한 지금, 권하윤은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이렇게 얽매여 있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민도준은 권하윤과 성은우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다.“없는 사람이다 생각하겠다는 거 진심은 맞아? 혹시 내가 없는 곳에서 밀회라도 하려는 건 아니고? 우리 성은우 킬러님이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사실인데 몰래 어디 숨어들어 만나고 갈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권하윤은 민도준이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기에 갑자기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마 권하윤의 약속은 민도준에게는 믿을만한 게 아닐 거다.하지만 권하윤이 어떻게 하면 민도준이 이 사실을 믿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총성이 들려왔다.“탕, 탕, 탕.”연속 세 번 울리는 총성에 놀라 고개를 돌린 권하윤은 성은우 무릎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피를 보고야 말았다.순간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만 뻐금거릴 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성은우는 마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침대를 짚은 채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아직도 마음 놓이지 않으시다면 다른 한쪽도 부러트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