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까지 의연한 얼굴로 자기 생각을 어필하던 권하윤은 순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한참 뒤, 자신감이 없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정말 그럴 거예요?”아까까지만 해도 부추기더니 이내 태도를 바꾸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흥미로운 듯 말을 이었다.“내가 뭘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질투하는 거야? 내가 만약 앞으로 합작건 때문에 박민주를 매일 만난다면 어쩌려고 그래?”“제가 설마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권하윤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여전히 대인배인 척 쿨한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민도준의 말소리가 잇따라 들렸다.“계속 그렇게 연기 해봐 어디.”권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민도준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건 더 견딜 수 없었다.민용재는 민상철 곁에서 수십 년 동안 일을 해온 사람인지라 회사 내부에서의 세력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게다가 회사에서 가장 알짜배기인 인수팀은 민시영과 민승현이 관리하고 있고 대외무역팀은 민용재 손에 있는데 만약 과학기술 단지마저 빼앗기면 민성철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날에 회사와 가문은 고스란히 민용재한테로 넘어갈 거다.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려하느라 권하윤은 한참 동안 눈알을 굴렸다.그 모습을 옆에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던 민도준은 권하윤의 코를 잡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또 무슨 궁리를 하는 거야?”권하윤은 갑자기 민도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반짝였다.“도준 씨, 아니면 저를 도준 씨 외갓집으로 데려가 줘요.”민도준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음? 부모를 만나려고?”그 말에 담긴 의미를 바로 이해한 권하윤은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도준 씨와 외갓집 식구들의 관계를 회복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정말이야? 미리 말해두는데 하윤 씨가 내 제수씨라는 사실을 외갓
옛날 가옥으로 된 진씨 저택은 운치가 넘치고 심지어 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 두 대마저 따뜻한 생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갓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어디선가 의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준? 네가 왜 또…….”하지만 민도준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목소리는 그대로 뚝 끊기더니 권하윤과 민도준을 번갈아 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이 아가씨는 누구야?”“아, 우리 제수씨. 제가 지난번에 한 번 보여주겠다고 했잖아요.”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 말에 진명제는 어색한 듯 손을 비볐다.“아, 이렇게 빨리 잡아…… 아니, 이렇게 빨리 데려왔구나. 얼른 들어와.”거실에 들어서자 권하윤은 슬며시 주위를 둘러봤다.진씨 저택은 민씨 저택처럼 화려하기보다는 심플하고 소박했다.간단한 테이블과 의자, 벽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한참을 보고 있을 때, 허리에 손이 둘리더니 귓가에 희롱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서워?”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흠칫하더니 다급하게 민도준의 손길을 피했다.“이러지 마요. 누가 보면 어떡해요!”하지만 권하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민도준은 상황이 더 재미있어 권하윤한테 입을 맞출 것처럼 굴었다.이에 화가 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 나머지 권하윤은 손을 퍼덕거리다가 민도준을 물려고 입을 벌렸다.그렇게 투덕거리는 사이, 갑자기 문소리가 들려왔다.권하윤은 얼른 민도준을 밀어버리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더니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그 순간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이해졌다.상석에 앉은 어르신은 돋보기를 끼고 있었는데 주름 하나하나마저 권하윤을 배척하고 있었다.다행히 민도준의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는 태도가 괜찮았지만 여전히 걱정 가득한 모습이었다.사람들의 눈빛이 한데 모여들었는데도 민도준은 여전히 장소 불문하고 권하윤을 품에 안고 있었다.“얼른 인사하지 않고 뭐해?”권하윤은
권하윤은 이를 악물고 겉치레적인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민 사장님이 민씨 저택에서 암살당하여 크게 다쳤을 때 저게 마침 발견하고 구해줬거든요.”“뭐?”할머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물었다.“다쳤다고? 어디가 다쳤는데?”심지어 어르신마저 몸을 앞으로 기웃거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몰래 민도준을 힐끗거렸다.권하윤은 두 분이 민도준을 걱정한다는 걸 바로 보아내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위험천만했던 그날의 상황을 설명했다.뭐 손바닥만 한 상처가 났다느니, 피가 바닥에 흥건해졌다느니 하면서 말이다.그 시각 민도준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열성을 다해 설명하는 권하윤의 모습을 재미나는 듯 바라봤다.‘바닥이 아니라 침대가 흥건해졌겠지.’그날의 상황 설명을 끝낸 권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둘째네 식구는 민 사장님뿐이라서 혼자 모든 걸 버텨야 한다는 게 참 안됐죠. 민 사장님한테는 아무런 뒷배도 없으니까.”솔직히 불쌍한 척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이 모든 걸 말하고 나니 권하윤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민도준을 돌아봤다.그 시각, 민도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권하윤을 빤히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을 미혹했다.그 눈빛과 미소에 매료된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민도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어떻게 그런 일이. 도준아,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어?”할머니의 한마디에 권하윤은 잠에서 깨기라도 하듯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나도 참, 사람들 이렇게 많은 데서 뭐 하는 거야!’잠깐 드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지자 권하윤은 아쉬운 듯 민도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맞아요. 민 사장님은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민도준은 예민한 만큼 위험하다.현재는 물론 모든 사람이 민도준을 두려워한다지만, 갓 경성에 왔을 때는 어떠했을까?민용재가 민도준의 부모님께 그런 짓을 하고 그동안 민도준을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는 만무하다.그런데 민도준은 그렇게 위험천만한
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서 모르쇠로 일관했다.“네? 제 말 진짜예요.”권하윤의 표정을 보자 할머니는 빙그레 웃을뿐 계속해서 간파하지 않았다.“똑똑한 아가씨네. 두 사람이 그런…….”“하.”할머니가 말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권하윤은 한 순간에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어찌 됐든 자기가 민도준의 제수씨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하윤 양이 참한 아가씨라는 건 나도 아네. 우리 도준이한테 진심이라는 것도.”할머니는 권하윤을 빤히 바라봤다.“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앞으로 사람들이 손가락질해 대고 뒤에서 말들이 많을 거네. 두 사람이 앞으로 아이를 가져도 그 아이마저 손가락질받을 수 있겠지.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면 모를까, 하필이면 민씨 가문과 얽힌 사람이니 누군가 일부러 안 좋게 여론을 만들 것도 뻔하고. 이런 것들은 생각해 봤나?”안 생각해 봤을 리 없다.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권하윤을 동생과 몸을 섞고 또 그 형과도 섞은 가벼운 여자로 볼 거라는 것도 안다.심지어 민도준마저 인륜을 파괴하는 파렴치한이라고 말을 듣겠지.권하윤이 고개를 숙이자 할머니는 끝내 마음이 아팠는지 권하윤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하윤 양, 내 말에 마음이 안 좋을 거란 거 아네. 그런데 나중에 후회하며 서로를 원망하기보다 지금 서로 놓아주는 게 더 좋지 않겠나? 만약 두 사람의 마음이 확고하다면 나도 더 말하지는 않겠다만.”할머니는 심한 말도, 꾸짖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이 가장 숨기고 싶고 가장 모른 체 하고 싶었던 문제를 앞에 내놓았다.하지만 이럴수록 권하윤의 마음은 답답하고 불안했다.민도준이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쓰는 것도 싫었고, 자기 때문에 안 좋은 일에 휘말리는 것도 싫었으니까.그러던 그때, 숙였던 고개가 갑자기 들리며 자의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민도준은 권하윤 눈가에 아직 가시지 않은 물기를 보자 눈썹을 들여 올렸다.“누가 이랬어? 아주 땅 파겠네.”말
민씨 저택에 도착했는데도 권하윤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울부짖었다.“어떡해, 너무 쪽팔려.”민도준은 권하윤의 칭얼거리는 소리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권하윤의 손을 내렸다.하지만 진짜로 눈시울을 붉힌 권하윤을 보는 순간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권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진짜 울었어?”권하윤은 그저 살짝 답답한 것뿐이었는데 민도준이 이렇게 묻자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도준 씨 외가 식구들이 제가 도준 씨 제수씨라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데 이제 이미지가 더 나빠졌잖아요.”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민도준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내 외가 식구들이 하윤 씨를 어떻게 보든 그게 뭔 상관이야?”권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혀 물기 촉촉한 눈을 들어 민도준을 바라봤다. 그 순간 호박색 눈동자에 드리운 막연함과 서러움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다른 사람한테 잘 보일 시간에 오늘 밤을 어떻게 버틸지나 생각해 보는 게 어때?”권하윤의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은 아래로 쓱 내려와 권하윤의 가는 목덜미를 야릇하게 비벼댔다.“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한 거 하윤 씨가 말했던 거 맞지?”‘어, 맞는 것 같기는 한데…….’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하지만 권하윤이 잔뜩 긴장해서 오늘은 망했다고 울상을 지을 때 민도준의 전화가 울렸다.두 마디 옆에서 엿들어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차에서 내린 권하윤은 민도준을 빤히 쳐다봤다.“어디 가게요?”“응.”이상하게도 방금 전까지 민도준이 너무 자기를 몰아붙이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는데 이제 가봐야 한다고 하니 오히려 아쉬워졌다.“지금 가요?”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채 권하윤은 민도준을 바라봤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권하윤을 자기와 차 사이에 가운 채로 입을 열었다.“왜? 아쉬워?”권하윤은 그 자세 그대로 민도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하게 “네”라고 속삭였다.그 순간 얼굴에는 남자의 손이 문지르는 촉감이 전해지더니 장난기 섞인 목소리
상세한 상황을 들어보니 오빠가 사용했던 신약의 효과가 좋아 의학적으로 획기적인 결과를 얻어냈다. 그걸 들은 누군가 비싼 돈을 드려 치료를 요구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민씨 가문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듣자 권하윤은 곧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이 갔다.“민용재가 그쪽에 도착했어요? 혹시 대면한 적 있어요?”“민용재?”양현숙은 그 이름에 대해 몰랐기에 어리둥절해했다.“시영이가 몰래 엿들었는데 웬 여자라고 하던데? 성이 원씨라고 하는 것 같았어.”‘원혜정이네.’그 생각이 드는 순간 권하윤은 당황함과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원혜정은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 같지만 웃음 뒤에 칼을 숨긴 악독한 사람이다. 심지어 민용재와 똑같은 부류라고 할 수도 있다.그런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더욱이 민용재가 해외로 가 수술을 받게 된다면 민씨 집안 사람과 맞닥뜨리게 될 지도 모른다.물론 정체를 들킬 가능성은 적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오빠가 아직 퇴원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어떡하지?’권하윤은 마음이 불안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 그 사람들 엄마네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평소에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말고, 집안일은 더더욱 입 밖에 내지 마요. 다른 건 저한테 맡겨주고요.”“그래.”답은 이렇게 했지만 양현숙은 그래도 여전히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너도 조심해. 네 쪽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오빠는 우선…….”“그런 말 하지 마요.”권하윤은 양현숙의 말을 끊어버렸다.“우리 가족 모두가 잘 지내야죠.”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권하윤은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다.‘도준 씨한테 도움을 요청할까?’만약 USB를 보지 않았다면 그럴 배짱이 있겠지만 민도준이 공은채와 한번 또 한 번의 생일을 함께 보낸 걸 몇 년 간의 정을 생각하니 왠지 주눅이 들었다.예전에는 단지 가족과 자기의 안위만 걱정됐다면 지금은 민도준이
창밖에서 싸늘한 바람이 안으로 불어드는 데다 민도준의 눈을 마주 보고 있으니 권하윤은 순간 몸이 떨려왔다.낮의 따뜻함은 어느새 사라졌는지 밤이 되자 눈앞의 남자도 밖의 날씨와 함께 식어버렸다.그렇듯 덮쳐온 압박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지난날 민도준의 공포스러운 모습이 이미 머리에 박혀 있어 심장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댔다.가족에 관한 일은 절대로 모험할 수 없으니까. 그건 예나 지금이나 권하윤이 지키는 철칙과도 같다.이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생각하던 권하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사실 무서워서 그래요. 오늘 할머님이 하신 말을 듣고 나니 도준 씨한테 폐가 될까 봐요.”불안한 목소리는 방문이 방 안에서 울려 퍼지더니 끝내 정적만 남겼다.권하윤은 감히 고개를 들지조차 못하고 눈을 오롯이 민도준의 가슴에 고정했다.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있던 손가락은 긴 머리카락을 따라 끝까지 쓸어내리더니 마침 엉켜 있는 뭉치에 걸렸는지 두피를 잡아당겨 고통을 전해주었다.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순간 시선 속에는 남자의 말아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정서를 알 수 없는 호를 그린 채로.권하윤은 더욱 당황해 민도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 혹시 화났어요?”물기 촉촉한 눈에는 남자의 인영이 비쳐 있었다.“내가 화내야 하나?”되돌아온 물음에 권하윤은 당황한 나머지 민도준의 손에 자기 얼굴을 비벼댔다.“화내지 마요. 저 무시하지 마요.”민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자기 손에 얼굴을 비벼대는 권하윤의 얼굴을 바라봤다.손의 온기는 권하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심지어 권하윤은 현재 자기의 심정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도 몰랐다.눈앞의 남자가 좋으면서도 무서웠다.민도준이 가족을 대할 때의 태도에서 권하윤은 눈앞의 남자는 가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남자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가장 친한 가족한테도 그러는데 남남인 자기한테는 오죽할까?그러던 그때, 얼굴에 느껴지는 통증이 권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권하윤은 눈앞이 몽롱해졌다.지난 이틀 동안의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상황이 모두 꿈만 같았다.그 아름다움이 모두 민도준의 관용 덕에 유지될 수 있다는 걸 간과해 버린 탓일까?그 관용마저 사라지자 모든게 신기루처럼 한 순간 사라졌다.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담배를 눌러 끈 민도준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권하윤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 웃음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그 순간, 이미 한번 잃어버렸다 다시 얻은 남자의 따뚯함을 또다시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다른 상황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비틀비틀 달려가 민도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가지 마요. 제발 가지 마요. 저 도준 씨 좋아해요. 도준 씨가 제 곁에서 떠나는 거 싫어요.”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까 봐, 또 자기한테 실망했을까 봐 무서웠다.그보다 사실 자기가 처음부터 욕서받지 못했을까 봐 더 무서웠다.소리 없이 흐느끼며 떠나지 말라고, 저를 무시하지 말라고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새하얀 두 팔이 남자의 손에 의해 풀어지는가 싶더니 민도준은 뒤돌아서서 권하윤이 넘어질세라 꼭 붙잡았다.속눈썹을 촉촉하게 적신 눈물이 볼을 타고 턱까지 흘러내렸다가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내가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권하윤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말해 봐. 오늘 이렇게 죽치고 앉아 밥도 안 먹은 게 무엇 때문인지.”가뜩이나 눈물을 흘려 퉁퉁 부은 두 눈이 따끔할 정도로 아파 났다.속이고 싶지 않았지만 속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꾸만 권하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그리고 끝내 눈을 감고 내뱉은 한마디.“은우가 걱정돼서요…….”“하.”민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그 개자식이 사고라도 나면 언제나 이렇게 걱정했었지. 전에 뭐라고 했던가? 나더러 그 자식을 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했던가?”권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약속할게.”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