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다.”어르신의 안색은 어두울 대로 어두워졌다.“우리 진씨 저택은 너무 작아서 민 사장님 같은 분은 모실 수 없겠네.”“얘들아 손님 배웅해 드려라!”어르신의 말에 옆에 있던 노부인이 극구 말려댔다.“도준이도 어렵게 왔는데 왜 그렇게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래요?”“흥, 민씨 가문에서 도련님으로 있던 사람이 우리 같은 작은 가문이 어디 눈에 들겠나?”“영감,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해요? 도준은 우리 명주 아들이자 우리 외손자인데.”진명주라는 이름을 듣자 어르신의 표정에는 노기가 서렸다.“애초에 명주 그 애가 민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반대만 했어도, 명주 걔가 그렇게…… 그렇게…….”심지어 민도준의 두 외삼촌의 눈시울도 이내 붉어졌다.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민도준의 얼굴을 보자 어르신은 더욱 진노했다.“소혜가 어리석게 일을 찾아 한다면 난 안 말려. 하지만 우리 가문 전체가 민씨 가문의 권력 다툼에 끌어 들일 생각이걸랑 하지도 마! 꿈 깨!”“…….”어리석다고 한 소리 들은 진소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심지어 저택을 떠날 때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가운 귀를 파댔다. 보아하니 민도준이 떠난 뒤에 또 한바탕 꾸중을 들은 모양이었다.그렇게 오전 내내 꾸중을 듣고 나서인지 차에 오른 진소혜의 눈은 이미 흐릿해 있었다.“내가 뭐랬어? 할아버지는 절대 칩 개발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왜 욕을 사서 먹고 그래?”“네가 좀 쓸모 있으면 나도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러지 않았지.”담배를 피우며 한심하다는 듯 힐끗거리는 민도준의 눈빛에 진소혜는 억울했는지 자기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나 밤낮없이 소처럼 일했어. 게다가 나 혼자서 어떻게 생산팀을 이끌어? 내가 기계인 줄 알아?”진소혜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혼자서 개발 프로젝트 하나를 통째로 책임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적어도 팀 하나 정도 있어야 현실성이 있었다.그리고 그걸 실현하려면 제일 좋은 선택지는 바로 진씨 가
권하윤은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에야 진소혜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간단한 물음표를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문장 하나가 도착했다.간단히 말하면 민도준의 영웅담이었고 상세하게 말하자면 4년 전 민도준이 조 사장의 손에서 웬 부잣집 아가씨를 구했다는 내용이었다.진소혜의 말에 의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조 사장이 약을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뻔했는데 마침 민도준이 나타나 구해준 덕에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한다.하지만 그때 민도준이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 부잣집 아가씨는 해외로 멀리 떠나버렸고…….진소혜의 생동한 설명에 권하윤은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아하, 이랬다 이거지?’이윽고 진소혜가 보낸 문자를 찰칵찰칵 캡처하고 나서 [고마워요. 모자라면 소혜 씨한테서 빌릴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뭐 사람을 구해주는 건 좋은 일이라지만…… 이렇게 흘리고 다녀서야!’물론 조금 질투가 났지만 권하윤은 이일을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현재 가장 걱정되는 건 민도준의 안위뿐이었으니까.‘전화할 때 도준 씨가 내 암시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모두 사실대로 말한 거잖아.’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권하윤은 밤에 제대로 캐물으려고 결심했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약속했던 저녁이 되기도 전에 민도준을 만나고 말았다.-“저더러 민 사장님과 박민주 씨가 만나는 걸 방해하라는 말씀인가요?”민용재의 긍정적인 답변에 권하윤은 핸드폰을 꽉 그러쥐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을 보아하니 민용재는 이미 민도준이 박씨 가문과 협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게 된 것 같았다.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협력 건으로 박민주를 내세웠다는 것에서 박씨 가문의 의도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두 사람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거겠지.’이런 상황에서 권하윤이 나서면 박씨 가문과 척지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민용재가 이미 두 사람의 협력을 파괴
어안이 벙벙한 박민주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시선 속에 웬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분명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왠지 보면 볼수록 남자를 홀리는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하지만 박민주가 감탄할 새도 없이 권하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민도준과 아는체 했다.“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민 사장님도 여기 차 마시러 오셨군요.”민도준의 시선은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권하윤의 새하얀 종아리에 떨어지더니 한참 맴돌다가 점차 잘록한 허리, 그다음으로 깜빡이는 눈에 멈췄다.노골적인 시선에 권하윤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의자에 기대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참 공교롭긴 하네.”아직 나이가 어린 박민주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라 곧바로 적대심을 얼굴에 훤히 드러냈다.“누구시죠?”권하윤은 협력 건이 틀어지기라도 할까 봐 얼른 자기 정체를 밝혔다.“안녕하세요, 저는 민승현의 약혼녀 권하윤이예요. 그쪽은 박씨 가문 막내딸 맞죠?”권하윤도 민씨 가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자 박민주는 이내 경계를 늦추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네, 박민주라고 해요.”하지만 적대감을 숨겼다고 해서 권하유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옆에 서 있는 권하윤을 보면서 자리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박민주는 어렵사리 차려진 기회에 민도준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았다.권하윤도 당연히 박민주의 생각을 눈치챘기에 민도준에게 슬그머니 눈빛을 보내며 뭐라고 말하라는 암시를 해댔다.“이미 파혼했으면서 약혼녀는 무슨.”어렵사리 입을 여는 민도준의 모습에 기뻐하려던 것도 잠시, 자기의 거짓말을 바로 까발리는 모습에 권하윤은 순간 욱했다.하지만 마음속에 차오른 화를 드러내지는 않고 민도준 옆의 빈자리에 앉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건 그저 싸우면서 한 얘긴데요 뭘. 커플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요.”“오, 그래? 뭐 싸우고
권하윤이 아무리 세게 기침해도 박민주가 민도준의 말을 듣는 걸 막지는 못했다.심지어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를 뽑아 거리낌 없이 권하윤의 가슴께를 닦아주는 동작은 그야말로 야하기 그지없었다.그 때문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박민주의 분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어린 나이인지라 박민주는 이내 얼굴을 붉히며 끝내 참고 있던 한마디를 버럭 내뱉었다.“도준 씨, 남녀가 유별난데 어떻게 막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요?”민도준은 그제야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남녀가 유별나면 민주 씨는 어떻게 생겼는데요?”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던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또 한 번 사레가 들고 말았다.민도준의 시비 거는 말투와 행동에 아름다운 환상이 완전히 깨져버린 박민주는 부끄럽고 분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도준 씨, 설마 우리 가문과 협력하기 싫어요?”위협적인 한마디에 권하윤은 끝내 절망했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민도준의 표정도 그새 날카로워졌다.“하,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박씨 가문에 나랑 협력할 기회를 준 거지, 박씨 일가가 나를 선택한 거 아니에요. 알겠어요? 그리고, 민주 씨 아버지가 민주씨와 나를 만나게 하기 위해 1%의 이익을 내준 건 알아요?”민도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박민주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그도 그럴 게, 민도준이 그런 조건으로 자기를 만나줬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순간 사랑에 눈이 멀었던 소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심지어 옆에서 지켜보는 권하윤마저 박민주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박민주의 아버지가 딸을 위해 그렇게 희생했다는 걸 듣자 저도 모르게 아버지 생각이 났다.권하윤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식들 앞에서는 엄격한 아버지였는데 권하윤이 애교만 부리면 이내 마음이 약해졌고 그걸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항상 엄숙한 표정으로 “다음은 없을 줄 알아”라는 경고를 하곤 했다.지난 기억을 떠올리자 권하윤은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심지어 추억에 빠져 박
권하윤이 엉덩이를 들기 바쁘게 민도준의 손이 권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아주 끝이 없네. 연기에 맛 들였어?”민도준의 말에 원래도 가려는 마음이 없었던 권하윤은 이내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투덜거렸다.“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도준 씨와 박씨 가문의 합작 건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그런 거잖아요. 제가 한 발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는데도 불만이세요? 참 비위 맞추기 어렵네요.”“아주 점점 기어오르지?”민도준은 권하윤의 삐진 모습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더니 턱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이에 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머리를 돌렸다.“그런데 박민주 씨가 저렇게 화난 상태로 떠나면 도준 씨와 박씨 가문의 합작 건이 무산되는 거 아니에요?”“누가 박씨 가문과 손잡겠다고 했어?”권하윤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무심코 벌어진 일이지만 간접적으로 민용재가 바라던 걸 또 이뤄준 셈이니 미안함과 죄책감이 한순간 마음속에 퍼졌다.“제가 또 도준 씨 일 망친 거 아니에요?”자기가 한 일을 떠올리자 고개를 저절로 숙여졌다.하지만 그때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걸 알긴 아나 보네?”잇따른 민도준의 한마디에 괴로워하던 그때, 커다란 손이 권하윤의 목덜미를 잡더니 권하윤의 입가에 숨결을 불었다.“이리 와, 내가 만회할 방법 가르쳐 줄게.”“저…… 읍…….”난폭한 입맞춤에 목소리가 묻혀버리기도 잠시, 이내 사람의 상상을 자극하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그 시각, 민도준은 당황한 듯 도망치는 그림자를 힐끗 보더니 권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더 끈질기게 몰아붙였다.-한편 찻집에서 뛰쳐나온 박민주는 너무 급하게 달린 나머지 계단에서 발이 접질려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솔직히 박민주는 방금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마자 바로 후회했다.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민도준이 자기를 성숙하지 못한 사람으로 볼까 봐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 돌아가 사과하려고까지 결심했다.방
방금까지 의연한 얼굴로 자기 생각을 어필하던 권하윤은 순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한참 뒤, 자신감이 없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정말 그럴 거예요?”아까까지만 해도 부추기더니 이내 태도를 바꾸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흥미로운 듯 말을 이었다.“내가 뭘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질투하는 거야? 내가 만약 앞으로 합작건 때문에 박민주를 매일 만난다면 어쩌려고 그래?”“제가 설마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권하윤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여전히 대인배인 척 쿨한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민도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민도준의 말소리가 잇따라 들렸다.“계속 그렇게 연기 해봐 어디.”권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민도준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는 걸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건 더 견딜 수 없었다.민용재는 민상철 곁에서 수십 년 동안 일을 해온 사람인지라 회사 내부에서의 세력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게다가 회사에서 가장 알짜배기인 인수팀은 민시영과 민승현이 관리하고 있고 대외무역팀은 민용재 손에 있는데 만약 과학기술 단지마저 빼앗기면 민성철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날에 회사와 가문은 고스란히 민용재한테로 넘어갈 거다.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려하느라 권하윤은 한참 동안 눈알을 굴렸다.그 모습을 옆에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던 민도준은 권하윤의 코를 잡은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또 무슨 궁리를 하는 거야?”권하윤은 갑자기 민도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반짝였다.“도준 씨, 아니면 저를 도준 씨 외갓집으로 데려가 줘요.”민도준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음? 부모를 만나려고?”그 말에 담긴 의미를 바로 이해한 권하윤은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도준 씨와 외갓집 식구들의 관계를 회복해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정말이야? 미리 말해두는데 하윤 씨가 내 제수씨라는 사실을 외갓
옛날 가옥으로 된 진씨 저택은 운치가 넘치고 심지어 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 두 대마저 따뜻한 생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갓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어디선가 의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준? 네가 왜 또…….”하지만 민도준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목소리는 그대로 뚝 끊기더니 권하윤과 민도준을 번갈아 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이 아가씨는 누구야?”“아, 우리 제수씨. 제가 지난번에 한 번 보여주겠다고 했잖아요.”민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 말에 진명제는 어색한 듯 손을 비볐다.“아, 이렇게 빨리 잡아…… 아니, 이렇게 빨리 데려왔구나. 얼른 들어와.”거실에 들어서자 권하윤은 슬며시 주위를 둘러봤다.진씨 저택은 민씨 저택처럼 화려하기보다는 심플하고 소박했다.간단한 테이블과 의자, 벽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한참을 보고 있을 때, 허리에 손이 둘리더니 귓가에 희롱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서워?”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흠칫하더니 다급하게 민도준의 손길을 피했다.“이러지 마요. 누가 보면 어떡해요!”하지만 권하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민도준은 상황이 더 재미있어 권하윤한테 입을 맞출 것처럼 굴었다.이에 화가 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 나머지 권하윤은 손을 퍼덕거리다가 민도준을 물려고 입을 벌렸다.그렇게 투덕거리는 사이, 갑자기 문소리가 들려왔다.권하윤은 얼른 민도준을 밀어버리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더니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그 순간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괴이해졌다.상석에 앉은 어르신은 돋보기를 끼고 있었는데 주름 하나하나마저 권하윤을 배척하고 있었다.다행히 민도준의 외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는 태도가 괜찮았지만 여전히 걱정 가득한 모습이었다.사람들의 눈빛이 한데 모여들었는데도 민도준은 여전히 장소 불문하고 권하윤을 품에 안고 있었다.“얼른 인사하지 않고 뭐해?”권하윤은
권하윤은 이를 악물고 겉치레적인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민 사장님이 민씨 저택에서 암살당하여 크게 다쳤을 때 저게 마침 발견하고 구해줬거든요.”“뭐?”할머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물었다.“다쳤다고? 어디가 다쳤는데?”심지어 어르신마저 몸을 앞으로 기웃거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몰래 민도준을 힐끗거렸다.권하윤은 두 분이 민도준을 걱정한다는 걸 바로 보아내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위험천만했던 그날의 상황을 설명했다.뭐 손바닥만 한 상처가 났다느니, 피가 바닥에 흥건해졌다느니 하면서 말이다.그 시각 민도준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열성을 다해 설명하는 권하윤의 모습을 재미나는 듯 바라봤다.‘바닥이 아니라 침대가 흥건해졌겠지.’그날의 상황 설명을 끝낸 권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둘째네 식구는 민 사장님뿐이라서 혼자 모든 걸 버텨야 한다는 게 참 안됐죠. 민 사장님한테는 아무런 뒷배도 없으니까.”솔직히 불쌍한 척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이 모든 걸 말하고 나니 권하윤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민도준을 돌아봤다.그 시각, 민도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권하윤을 빤히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을 미혹했다.그 눈빛과 미소에 매료된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민도준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어떻게 그런 일이. 도준아, 그걸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어?”할머니의 한마디에 권하윤은 잠에서 깨기라도 하듯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나도 참, 사람들 이렇게 많은 데서 뭐 하는 거야!’잠깐 드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지자 권하윤은 아쉬운 듯 민도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맞아요. 민 사장님은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민도준은 예민한 만큼 위험하다.현재는 물론 모든 사람이 민도준을 두려워한다지만, 갓 경성에 왔을 때는 어떠했을까?민용재가 민도준의 부모님께 그런 짓을 하고 그동안 민도준을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는 만무하다.그런데 민도준은 그렇게 위험천만한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