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은 10년이라는 시간을 바쳐 남편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불륜녀에 의해 불에 타서 죽는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강이한은 언젠가부터 그녀를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는 가정부로 취급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혼 서류를 당당하게 내밀었을 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강이한은 그녀가 자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사라져야 그 여자랑 알콩달콩 잘 살 거 아니야?" 유영은 비웃음을 머금고 차갑게 말했다. "강이한, 이번 생에는 절대 장님으로 살지 않을 거야!" 회귀하고 시력을 잃기 전으로 돌아온 유영은 싸늘한 얼굴로 전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던졌다. 기자회견 때, 한 기자가 물었다. "먼저 이혼을 제기한 이유가 뭔가요?" 유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질렸거든요." 그날 화재는 그에 대한 그녀의 모든 사랑도 같이 불태워 버렸다. 다시 되돌아 보면 아마 처음부터 모든 게 거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View More강이한은 파리와 얽히며 복잡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또한 깊은 사연을 품고 있었다.저녁 식사 시간, 이유영은 반산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조명은 대부분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우지와 우현은 용성시의 모이산에서 돌아온 뒤 반산월을 돌보며 분주히 움직였다.그때 이유영이 환한 조명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조명이 밝아지니까 너무 좋아.”이유영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우지와 우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도 좋아요.”이유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빛을 마주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다쳐도 눈만은 다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눈을 잃는다는 건, 곧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웅웅.”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이유영이 화면을 확인하니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어디야?”“반산월에 있어.”“문기원이 널 데리러 갈 거야.”“내가 말했잖아...”“유영아, 내 말대로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일만 있어.”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그들이 진짜 부부라고 믿게 만들려면 최소한 이 3일 동안은 완벽한 연극을 해야 했다.“…”이유영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너도 뭐가 더 중요한지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을 거라고?몰랐다 해도 그의 잔소리 덕분에 뼛속까지 깨닫게 될 터였다.“오라고 해.”이유영은 짧게 말하고는 박연준이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연준과 함께 지내는 건 고사하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조차 불쾌했지만 쉽게 물러설 박연준이 아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기원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이유영은 문기원을 마주하기가 어색했지만 결국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이유영은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던 중 문기원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너무 미워하지 마세요.”이유영은 놀란 눈으로 문기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려 있었는데 그 속엔 차가운 냉기마저
제대로 된 가치관조차 가지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을 임소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진영숙은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사모님, 제발 부탁드립니다.”그러나 임소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저한테 부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그냥...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고 싶어요.”진영숙이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량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과거에 이유영을 괴롭힐 때는 이유영의 부모가 파리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유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진영숙은 한동안 임소미를 마주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임소미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두 사람의 삶에서 조용히 발을 빼는 것뿐이었다.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떤가?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영숙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저 아들이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요.”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임소미 역시 엄마였다.과거, 이유영과 여진우를 위해 밤마다 하늘에 기도했던 사람인 만큼, 지금 눈앞의 진영숙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이 과거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강이한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서주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이제 보니 진영숙 씨는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나 보네요.”임소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은 충격받은 듯 굳어 있었다.아무리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어떻게 엄마를 버릴 수 있는 걸까?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진영숙에게 어떤 의미인지, 강이한은 모를 것이다.비록 최근 들어 아들 일에 많이 간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늘 관심 가졌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 일로 강이한한테 많이 실망하긴 했어도 그래도 결국 친아들 아닌가?아무리 실망하고 원망스러워도 자신의 하나밖
진영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결국 이런 소식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이유영은 끝없이 진영숙을 몰아세웠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난 몇 년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복수하려면 저한테 하라고 해요. 제가 유영이를 무시하며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했어요.”진영숙의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렇다. 두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든 장본인은 진영숙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가 됐을 때,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소미는 진영숙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결말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영을 봐서 적어도 이유영의 인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저한테 복수하지 않았잖아요.”진영숙은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강이한만 무사하다면 어떤 결과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임소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복수라니?“이제 보니 우리와 생각이 너무 다르네요.”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이유영이 강이한에게 한 건 결코 복수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내 아들은 잘못한 게 없어요...”진영숙은 임소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이유영에 관한 일에서 강이한은 잘못이 없었다. 단 하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과거에 이유영과 함께하려 했던 것뿐이다.누가 뭐라든 듣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과 함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게 바로 진영숙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었다.그때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왜소한 몸을 보며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
진영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유영을 만나겠다고?이유영을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누구 탓일까?결국, 이 지경이 된 건 다 진영숙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유영이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꺼져!”임소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임소미는 알고 있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이유영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를.이제 와서 다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들추게 할 순 없었다.진영숙과 그 무리는 이유영에게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기에 어떤 이유로든, 이유영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진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사모님!”“당신은 늘 밑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유영이를 찾겠다는 거지?”진영숙은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과거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던가.임소미는 그 심정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이제 진영숙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임소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할 말이 없었다.진영숙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결국, 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제발, 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목소리는 애써 억누른 듯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났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계시잖아요!”그래, 아무것도 없었다.아들은 사라졌고 강서희는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서희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임소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그 모든 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안 그래?”“왜
얼마나 오래됐을까?이 이름을 마주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강이한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이 이름은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며 무엇을 하든 만족하지 못했고 이유영을 끝없이 깎아내렸던 이름이었다.감옥 화재 이후로 이유영은 진영숙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유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강이한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영숙이 나타난 것이다.대체 왜?“왜 온 거예요?”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진영숙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선생님이 실종되었대요.”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진영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리고 결국, 진영숙은 미쳐버릴 듯 강이한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이유영은 평생 진영숙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진영숙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강이한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진영숙은 영원히 이유영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알았어요.”짧은 대답을 남기고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원래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뒤돌아 계단 입구를 바라보았다. 박연준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고 혼자 남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유영은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반산월로 향했다....한편, 정씨 가문에서.진영숙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소미를 바라보았다.“돌아가세요. 그녀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사모님, 당신도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지금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진영숙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유영의 정체를 알았고 강이한과의 관계에서도 조용히 물러났다.그렇게 조용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서주에서 실종
그가 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강이한과 이유영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계획했던 일인지도 몰랐다.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자 숨이 막혔다.어쩌면 연서에 대한 일을 몰랐다면 좀 더 담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강이한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달랐다.“걱정하지 마. 강이한은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이유영이 낮게 되물었다.“응,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어졌다.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에 서로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절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이유영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이유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박연준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이유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식사 후.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사흘.”“뭐라고?”“내가 있는 사흘 동안, 너는 풍산 그룹에 머물러야 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불쾌했던 눈빛이 그 말과 함께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아주 민감해. 착한 사람 하나 없어. 그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사흘 정도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잖아. 아니야?”“나한테는 너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도 숨 막혀.”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고 답답했던 박연준의 가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깊이 내려앉았다.‘숨 막힌다고?’박연준은 그제가 알았다. 강이한이 말했던 '막막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어둠 속에서 힘겹게 버
정국진은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 하지만 피하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엔데스 가문이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든다면 상상도 못 할 갈등이 벌어질 것이다.어떻게 분석해 봐도 지금은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단호한 모습이었다.정씨 가문은 엔데스 가문과 엮이길 원치 않고 이유영과 박연준 역시 마찬가지다.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에서 이유영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박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서 이혼하자, 응?”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이 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사라졌고 전기봉도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일이 마무리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그 도장이 누구에게 발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의 당주 자리는 단순히 도장이나 문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명문가들의 지지도 필요했다.즉, 지금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정씨 가문이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해?”“그럼 너는?”견뎌낼 수 있을까?이유영은 정씨 가문을 그 소용돌이에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칼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녀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되자 박연준은 웃었다.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선택의 이유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이유영은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입을 열었다.“너랑 그 사람,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거야?”“누구?”뜻밖의 질문에 박연준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다 곧 깨달았다.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너는 무슨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박연준은 되묻으며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이유영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겠어.”이유영
이유영은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후에 시간 있어?”“왜?”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흰색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엄격함은 타고난 것이었다.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려고.”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떨어지자, 맞은편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이 그의 동요를 말해주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유영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익힌 소고기를 집어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 응?”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그러나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치 그때의 강이한처럼.이유영은 강이한의 세계에서 한지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때, 미친 듯이 이혼을 요구했었다.그때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단호하게 행동했다.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정씨 가문이 있다.이유영의 결심은 박연준에게 거대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몸이 멀어지는 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너랑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박연준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난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균열이 깊어져 있었다.박연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나랑 이혼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과거, 강이한과 이혼하려 했을 때, 강이한은 이유영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날 떠나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아?”전생이든 현생이든, 그 질문은 반복되었다.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은 그의 곁에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지금, 박연준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마치 이유영이 하는 모든 선택이 신중해야
이유영은 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살아왔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묻지 않았다.그때 이유영이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다.여진우의 물음은 곧 이유영이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는 뜻이었다.“회사에 나가서 일해야지. 근데 난 더 이상 경영은 하고 싶지 않아.”그 말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과거, 여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열 글로벌의 모든 무게가 이유영의 어깨를 짓눌렀다.특히 그때는, 정유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오빠가 있고 그 덕에 선택지도 훨씬 많아졌기에 더 이상 예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뭔가 하긴 해야지.”여진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이유영은 곧장 물었다.“그럼 뭐 하면 좋을 것 같아?”“네가 하고 싶은 건?”“네 비서!”그 말에, 여진우는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건 아무리 봐도 재능 낭비였고 아버지가 이유영을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비서를 하겠다고?여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야망이 없네.”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신이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없는 건가?사실 이유영은 높은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무언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개 있다던데, 내가 디자인해 볼까?”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예전, 청하시에서 로열 글로벌로 정식 복귀하기 전, 오로라 스튜디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여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람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우리 이혼해요.”격렬한 사랑이 끝난 뒤, 유영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달뜬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상기된 볼을 살짝 가렸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표정은 처량했다.남자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욕구를 방출시킨 남자, 그 어디에도 유영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10년을 사랑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미련은 남지 않았다.단추를 잠그던 강이한의 손이 움찔하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갑자기?”“네.”유영의 말투는 단호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기억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손 이리 줘봐.”탁!유영은 매몰차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저리 치워요. 당신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더러워.”이 남자와 같은 지붕 아래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거북하고 불쾌했다.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내민 채, 신경질적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지금 나한테 더럽다고 한 건가?유영은 바닥을 더듬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로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을 씻어냈다.할 수만 있다면 그의 손길이 닿았던 피부를 모두 도려내고 싶었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벽을 더듬으며 옷장으로 향했다. 시력을 잃게 된 시간이 길지 않아서 암흑 같은 이 세상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유영은 손끝에 닿은 느낌을 따라 옷 한 벌을 꺼내 입고는 호적 등본을 챙기고 그에게 말했다.“지금 법원으로 가요.”“이유영.”강이한이 이를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는 벌떡 일어나서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런 모습으로 나랑 이혼하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그녀는 가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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