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영은 홧김에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강이한은 그제야 이유영이 단지 기분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줄곧 온화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얌전한 현모양처였다. 정말 화가 나는 순간이 와도 그녀는 혼자 삭히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줄 줄 아는 여자였다.이유영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곧 있으면 법원 직원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야. 일단 서류부터 제출하고 다시 얘기하자.”“이유영!”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강이한은 운전 기사에게 곧장 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어차피 기분이 엉망이라 돌아가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도 무리였다.돌아가는 길, 운전기사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집에 도착한 뒤, 이유영과 강이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이제 얘기해 봐.”“더 얘기할 것도 없어. 말하긴 뭘 말해?”반년 사이 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온 청하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이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이유영, 세강 일가에게 이혼이란 존재할 수 없어. 사별이면 몰라도.”이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착잡한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래서 지난 생에 나를 불에 태워 죽인 거니?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첫 이혼이면 되겠네. 아니면 나가서 죽거나.”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왕의 기질을 타고난 이 남자는 화가 날 때면 항상 이
고용인이 점심식사를 식탁에 올렸다.강이한은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수저를 들지도 않았다.반면 이유영은 우아하게 꼭꼭 씹어서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강이한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오후에 남영에 출장 가야 해. 3일 정도 있을 거야.”그는 며칠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며칠 사이에 기분을 정리하고 다시는 이 불쾌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조용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이유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은 지금도 미치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의 동공이 확 수축하고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저런 모습은 여전히 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이유영은 그제야 과거에도 이날 강이한이 출장 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물론 한지음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돌아왔지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그렇게 해. 마침 오후에 은지 만나서 그 한지음 씨를 찾아가 봐야겠어. 법률적으로 얘기할 것도 있고.”절대 강이한을 출장 가게 둘 수 없었다. 무조건 오늘은 그와 같이 있어야 한다.강이한의 참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에 폭발했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당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내 예전 모습 정말 기억해? 난 당신이 예전에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은 기억나?”뻔뻔하게 과거를 말하다니!강이한은 그제야 반년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녀가 쌓았던 불만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기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잘 참고 있다가 갑자기 이혼이라니!“결국 그 일 때문이구나.”그들 사이에 신뢰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착각이었다니!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와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우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강이한과 한지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과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재촉하던 그의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7년의 달콤했던 연애와 3년간의 결혼 생활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었다.어제 오후, 그녀는 이혼 협의서를 필적 감정 센터로 보냈다. 아침에 깨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해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녀는 소은지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소은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오피스룩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유영이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유영도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강이한과 결혼한 뒤에는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지 않았다.매번 소은지를 만날 때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녀가 부러웠다.“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왜 기다리고 있어?”“고귀하신 우리 세강 사모님이 워낙 비싼 곳을 예약해서 말이지. 회원 아니면 못 들어가잖아.”그 말에 유영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친구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몰랐어.”“장난이야.”소은지는 침울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이한과 함께한 뒤로 이유영은 점차 그의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 갔다.간단히 먹는 아침도 일반 직장인의 한달 월급을 육박했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두고 강이한의 돈 보고 결혼했다고 비난했다.“어쩌다가 생각을 바꾼 거야?”소은지가 커피잔을 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반년 전, 소은지가 이혼을 처음 권유했을 때, 유영은 홧김에 3개월이나 그녀와 연락을 끊은 적 있었다.유영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은지야, 전에는 미안했어. 사실 너한테 화낼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냥 두려웠었어.”그녀는 외부에 전해지는 소문이 진짜일까 봐 두려웠다.10년이나 사랑한 사람을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데 두려운 게 어쩌면 당연했다.소은지는 대수
“유영아, 나 때문에 저런 인간들이랑 싸울 필요 없어. 난 전혀 신경 안 써.”밖으로 나온 뒤, 소은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시댁에서 친구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다.유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야. 곧 이혼할 건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강이한을 위해 시댁에서 아무리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혀도 유영은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시댁의 횡포는 더 심해져만 갔다.핸드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강이한의 연락이었다.“이거 봐. 그새를 못 참고.”유영은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서희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강서희한테 다 들었을 거면서 왜 물어봐? 한지음이랑 둘이 같이 있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래?”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소은지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둘이 언제 이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거야?”전화를 끊고 일분도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영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은지야, 일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없을 것 같아. 나 먼저 갈게.”그녀는 친구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비록 그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을지라도.소은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유영은 차로 돌아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불쾌한 목소리가 전해졌다.“지금 당장 본가로 와.”“싫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뒤,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 뒤로 휴대폰 화면이 여러 번 깜빡였지만 그녀는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살갑게
오후가 되자 강이한이 돌아왔다.그는 오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 한참이나 어딘가로 통화하다가 나왔다. 유영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애착 인형을 품에 안은 뒤, 소파에서 TV를 시청했다.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품에서 인형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유영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한지음이 납치당했다고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가?“왜 이래?”“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그럼 그냥 말하면 되지 인형은 왜 던지고 그래?”강이한도 짜증이 치밀었다. 남편이 얘기 좀 하자는데 그까짓 인형 좀 던졌다고 성질을 낼 일인가?그녀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그를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그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다가가서 앉았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고는 인형을 다시 품에 안았다.“내가 말을 말아야지.”그녀의 이런 행동은 남자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오늘 지음이 만났다고 들었어.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지?”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그래, 전생에도 이런 말투였었지.전생에 한지음이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출장 중에 부랴부랴 돌아와서 지금처럼 범인을 심문하는 태도로 그녀에게 따진 적 있었다.그때 그녀는 어떻게 다른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억울함을 토로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건 나한테 질문할 게 아니라 당신 여동생한테 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그건 또 무슨 소리야?”유영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뭐야? 우리 아직 부부 아니야? 지금 바깥 여자 때문에 날 추궁하는 거야?”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내를 보자 강이한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외부인이 납치를 당했다고 10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추궁하는 꼴이라니!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영아, 한지음이 납치당했어.”“그래서?”“당신은 오늘 한지음을 만났었고.”“그래서?”계속해
“이한 씨한테는 어제 이혼하자고 말했어요. 그러니 회사가 망하든 말든 그건 이제 제 알 바가 아니에요.”시어머니의 맹비난에도 이유영은 느긋하게 대처했다.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뭐라고 했니?”“우리 이혼할 거라고요.”주변 공기마저 싸늘해졌다.며느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시어머니도 그 말을 듣고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어쩐지 아침에 연락했을 때도 태도가 시큰둥하더니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어?반면 이유영은 더 이상 시댁 식구들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강서희에게도 그랬고 시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니 그렇게 속 편할 수가 없었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이 집에서 고용인들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 그들의 구박 때문에 아이도 잃었다.재벌가에서 아이를 임신하면 대우가 좋아진다는 말은 세강 일가에게 통하지 않았다.그들이 한 역겨운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얘기해? 네가 뭔데?”이성을 상실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유영은 듣고 있을 가치조차 안 느껴져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예전의 나약하고 온순하던 이유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더 이상 시댁 식구들의 횡포를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여론은 예상보다 더 빨리 이상한 방향으로 퍼졌다.형사가 저택으로 찾아왔다. 강이한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형사의 뒤를 따라온 강이한을 발견한 순간, 이유영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가 형사에게 뭐라고 했는지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한지음 씨 납치 사건 때문에 참고인 조사가 필요하니 저희랑 같이 가주시죠.”젊은 형사가 그녀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강이한을 쏘아보았다.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더니 말했다.“유영아, 나도 이 사건과 당신이 관련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야.”유영은 냉소를 머금었다.그런 사람이 형사를 집까지 데려와?“10년이야.
조사가 끝나 경찰서를 나오자 밖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강이한과 소은지가 보였다. 강이한은 유영을 발견하자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유영은 그를 무시하고 소은지에게 다가갔다.뒤쫓아 온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집?”유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거긴 이제 내 집이 아니잖아.”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분하게 말했다.죽음을 겪고 돌아온 뒤로 어떤 일에도 흥분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전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시의 그녀는 넋이 나간 상태로 경찰서에 불려 와서 3일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소은지가 보석금을 낸 뒤에야 그녀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유영아!”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날카로운 눈매와 높이 솟은 콧대, 그리고 강인한 턱선, 모든 게 그녀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이 정도 외모와 재력을 갖춘 남자라면 결혼을 했더라도 들러붙는 여자가 많은 게 당연했다.처음 그와 시작할 때 그녀도 그의 매력에 푹 빠졌으니까.지금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잘난 면상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놔.”아무런 온도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강이한은 그녀가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유영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소은지를 향해 다가갔다.강이한은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껴안아 주고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저렇게 작고 나약한데 그들 사이에 무언가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차에 오른 유영의 얼굴은 약간 초췌해 보였다.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더 가늘어져 있었다.소은지는 따뜻한 음료수를 그녀에게 건넸다.“뭐라도 좀 마셔.”“고마워.”유영은 음료수를 받아 힘껏 뚜껑을 비틀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리 줘. 내가 해줄게.”유영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열 수 있어.”어떻
유영은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를 직감했다. 문을 열어준 장숙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와계십니다.”유영은 눈썹을 꿈틀했다.어제 쌀쌀맞게 대했으니, 어젯밤에 당장 쳐들어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영숙은 소파에 앉아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은 매번 진영숙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시종처럼 납작 엎드려서 비위를 맞춰주었다.그때는 강이한을 사랑했기에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서 핸드백을 소파에 던졌다.“아줌마!”“예, 사모님.”장숙은 다급히 다가와서 진영숙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집안에 굿을 좀 해야겠어. 여자 하나 잘못 들였더니 망조가 든 건지 사고가 끊이지를 않아.”유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그리고 냉랭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노려보았다.장숙은 난감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유영은 조용히 외투를 벗더니 바닥에 던졌다.진영숙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영을 바라보았다.얘 요즘 뭘 잘못 먹었나?“지금 뭐 하자는 거니?”“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집에 망조가 들었는지 재수 없는 일이 끊이지를 않네요.”유영은 진영숙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유영은 시어머니가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이유영 너 미쳤어?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들먹여?”“세강의 며느리 자리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이한이랑 이혼하고 싶어?”집으로 들어서던 강이한은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그를 발견한 장숙이 다급히 다가왔다.“도련님 오셨어요?”진영숙은 아들을 보자마자 표정을 바꾸고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아들에게 말했다.“넌 마누
배준석이 돌아왔다.용성시에서 돌아온 뒤로 배준석은 이유영 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한때 배준석은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둘러싸고 이유영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검진을 마친 뒤, 배준석이 말했다.“회복은 잘 되고 있지만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시력을 수술로 되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배준석의 말에는 단순한 의학적 조언을 넘어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듯한 씁쓸함이 배어 있었고 이유영은 그 속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배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연히 잘 관리해야죠.”이유영이 담담하게 말했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번 생에 겪었던 고통은 특히 더 절망적이었는데 전생의 수천 배는 될 터였다.아이가 없을 때에 비해 아이가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커가는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힘겹게 되찾은 시력인 만큼 더 소중히 여기며 관리해야 했다.“이유영 씨.”“네?”“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 관심도 없는 거예요?”배준석은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배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배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이유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제가 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그 말투에는 단호함보다 차가움이 앞섰다.강이한의 이름만 나와도 이유영의 말투는 도저히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진다.배준석은 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음에 놀라며 물었다.“서주에서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알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관심을 가져요?”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차가운 말이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배준석은 순간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서재에서 나오자 여진우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그의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분명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러나 이유영을 보는 순간,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우고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여진우의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언제 돌아왔어?”여진우가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방금.”“그 사람, 만났어?”“누구?”그 말을 뱉고 여진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엔데스 신우 때문에 돌아왔음을 직감했다.더블루 리버스에서 마주한 엔데스 신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바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파리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여진우가 돌아온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 가고 싶지 않았어...”떠나기 전부터 이미 엔데스 셋째 도련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이런 간교한 방법으로 이유영을 끌어들인 걸 봐서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넌 먼저 월이한테 가 봐.”여진우는 짧게 말하고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때,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고 여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왜?”“우리... 파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정씨 가문과 로열 글로벌 그룹 전체를 의미했다.말이 끝나자 복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엔데스 신우를 만나고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은 후, 이유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엔데스 가문의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정씨 가문도 결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떠나고 싶었다.파리는 이제 너무 위험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이었고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겉으로는 조용했던 정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셋째 도련님을 만난 후, 이유영은 그 아래에 도사린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돌아온 이유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요즘은 스튜디오에 가지 마. 집에 조용히 있어.”“네.”지금은 정국진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유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셋째 도련님이 준 거야?”그 이름을 듣자 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머니가 언급했던 전화도 아마 셋째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의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두껍지는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쾅!”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순간 정국진은 서류를 힘껏 책상 위에 내리쳤다.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기마저 흔들 듯 강렬했다.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임소미와 이유영 앞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셋째 도련님의 변화에 신경이 쏠려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의 정국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가져온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려 하자 정국진이 손을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보지 마.”“아빠.”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고 정국진의 반응에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외부에 바보로 알려진 세월이 길었던 만큼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정국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너 먼저 나가 있어.”이유영은 그를
그리고 그 남자는 단지 눈빛만 깊은 게 아니라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오랫동안 바보라 여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엔데스 가문은 지난 세월 동안 격동의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 바보 같은 연기마저 이 순간 이유영의 눈에는 마치 하나의 능력처럼 보였다.엔데스 신우는 갑자기 조용히 서류봉투를 내밀었다.“가져가서 아버지께 드리세요.”이유영은 멍하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게 뭐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박연준과 이혼할지 말지 결정하세요.”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결혼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이 남자는 무서운 존재감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이유영은 단단한 눈빛으로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바보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과연 엔데스 가문의 다른 이들은 알고 있었을까?“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실지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동시에 감춰질 수 없는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은 어떻게 더블루 리버스를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슴은 점점 더 죄어왔다.혼란스러웠다.파리는 원래도 복잡한 곳이었지만 특히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이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는 여전히 독자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모든 일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하지만 오늘,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을 만난 이후 이유영은 확신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거라 믿어서는 안 된다.“바로 집으로 가요.”지혁이 차를 스튜디오 쪽으로 돌리려 하자 이유영이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엔데스 신우를 만난 후, 그녀는 더 이상 회사에 갈 마음이 없어졌고 머릿속을 정
결국 이유영은 엔데스 신우와 마주 앉았고 정적 속에 무언의 압박이 흐르고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며 이유영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셋째 도련님께서는 원하시는 게 뭔가요?”계속해서 현금으로만 결제를 요구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파리로 돌아오기 전 그녀가 접한 소식으로 봤을 때, 파리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심지어 박연준과의 결혼도 결국 파리와 얽혀 있었다.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는 영리하니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죠?”“셋째 도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 역시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 남자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차갑고 위험한 미소였다.심장은 이미 터질 듯 뛰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아가씨와 박연준의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무슨 의미든 간에, 저는 그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긴장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그 말을 듣고 엔데스 신우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의 조롱이 섞인 웃음소리에 이미 굳어 있던 이유영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정씨 가문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과 어떤 협력도, 관계도 맺지 않았는지 알고 있나요?”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의 아버지 정국진은 언제나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는 사실뿐이었다.솔직히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정국진이 엔데스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피해 왔고 엔데스 가문은 그동안 언제나 중립을 유지해 왔다.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지닌 듯, 이유영을 강하게 짓눌렀다.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을 지울 수 없
이유영이 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호적에 적힌 이름은 ‘정유영’으로 바뀌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유영’ 혹은 ‘유영’이라 불렀다.집사가 단호하게 ‘정씨 가문 아가씨’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뒤에 거대한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음을 실감했다.가족이 있다는 건 곧 얽매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이유영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그래도 안에 누가 기다리는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집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씨 가문 아가씨께서 직접 오셨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셔서요.”그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고 이유영의 마음속 의심은 점점 커졌다.그날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은 틀림없이 엔데스 가문의 전설적인 셋째 도련님, 엔데스 신우였다.소문에는 ‘바보’로 불렸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낮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요.”“아가씨.”“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사람들 저한테 감히 어쩌지 못할 거예요.”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엔데스 가문의 누구도 지금 그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지혁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밖에서 볼 때도 건물의 웅장함이 느껴졌지만 내부는 더 압도적이었다. 곳곳에 스며든 고급스러운 디테일과 섬세한 감각이 주인의 까다로운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대형 홀을 지나 집사는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그제야 이유영은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길고 긴 테이블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맑고 고고한 분위기는 첫눈에 보아도 비범한 존재감이었다.그런 아우라는 절대 ‘바보’라 불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셋째 도련님, 정씨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었던 이유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한 번 도망쳐 봐.”비서는 순간 움찔했다.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은 로열 글로벌의 것이었고 그녀는 로열 글로벌의 전 대표님이었기에 서주에서 살아남으려면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두 시간 후, 비서와 지혁이 돈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오자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거기 경비원들이 바로 내쫓았어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유영은 혼란스러웠다.“윙!”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내일까지 안 오면 변호사가 찾아갈 거야.]‘협박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차 수리비는 물론이고 직접 사과까지 하라는 건가?’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런 일일수록 더 읽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아직 더블루 리버스에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빨리 사과하고 이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통화하다가 부딪혔으니 명백한 본인 불찰로 생긴 사고였고 CCTV에도 찍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곧 답장이 왔다.[네.]아직 그곳에 있다면 된 것이다. 이유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지혁 씨.”“네, 아가씨.”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지혁이 이유영 앞으로 다가갔다.“저랑 같이 가요.”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지혁과 함께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유영은 코트를 걸치며 돈을 지혁에게 건넸고 돈을 건네받은 지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오늘 일정으로 바쁜 하루였지만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30분 후에 더블루 리버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경비원들이 막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들이 온다는
“바래다줬어?”“네.”“서재욱은 아직도 거기 살아?”“네.”말이 떨어지자 박연준은 온몸에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그의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기원의 심장은 긴장감에 조여들었다.박연준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문기원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지금 나온 기사는 다 찌라시잖아요.”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박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문기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재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모습 한 장면만이 가득했다.“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는 게 어떻습니까?”문기원은 신중하게 조언했다.오늘 이유영이 서재욱을 만난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퍼졌다.이건 누군가가 분명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게 누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혹시 엔데스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재욱을 끌어들이려는 걸까?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연준은 그저 단호하게 문기원에게 말했다.“너 먼저 들어가.”그 순간 그가 얼마나 큰 힘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문기원은 알 수 있었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시간 박연준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상, 지금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면 오늘 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그날 밤, 이유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래라면 내일 서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미뤘다.아침 식탁.“월이야, 빨리 먹어.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어제 엄마가 말했지, 늦으면 안 된다고.”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월이에게 말했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집에 없는 관계로 이유영이 월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은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