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인이 점심식사를 식탁에 올렸다.강이한은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수저를 들지도 않았다.반면 이유영은 우아하게 꼭꼭 씹어서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강이한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오후에 남영에 출장 가야 해. 3일 정도 있을 거야.”그는 며칠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며칠 사이에 기분을 정리하고 다시는 이 불쾌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조용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이유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은 지금도 미치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의 동공이 확 수축하고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저런 모습은 여전히 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이유영은 그제야 과거에도 이날 강이한이 출장 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물론 한지음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돌아왔지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그렇게 해. 마침 오후에 은지 만나서 그 한지음 씨를 찾아가 봐야겠어. 법률적으로 얘기할 것도 있고.”절대 강이한을 출장 가게 둘 수 없었다. 무조건 오늘은 그와 같이 있어야 한다.강이한의 참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에 폭발했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당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내 예전 모습 정말 기억해? 난 당신이 예전에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은 기억나?”뻔뻔하게 과거를 말하다니!강이한은 그제야 반년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녀가 쌓았던 불만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기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잘 참고 있다가 갑자기 이혼이라니!“결국 그 일 때문이구나.”그들 사이에 신뢰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착각이었다니!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와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우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강이한과 한지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과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재촉하던 그의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7년의 달콤했던 연애와 3년간의 결혼 생활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었다.어제 오후, 그녀는 이혼 협의서를 필적 감정 센터로 보냈다. 아침에 깨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해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녀는 소은지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소은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오피스룩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유영이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유영도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강이한과 결혼한 뒤에는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지 않았다.매번 소은지를 만날 때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녀가 부러웠다.“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왜 기다리고 있어?”“고귀하신 우리 세강 사모님이 워낙 비싼 곳을 예약해서 말이지. 회원 아니면 못 들어가잖아.”그 말에 유영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친구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몰랐어.”“장난이야.”소은지는 침울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이한과 함께한 뒤로 이유영은 점차 그의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 갔다.간단히 먹는 아침도 일반 직장인의 한달 월급을 육박했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두고 강이한의 돈 보고 결혼했다고 비난했다.“어쩌다가 생각을 바꾼 거야?”소은지가 커피잔을 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반년 전, 소은지가 이혼을 처음 권유했을 때, 유영은 홧김에 3개월이나 그녀와 연락을 끊은 적 있었다.유영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은지야, 전에는 미안했어. 사실 너한테 화낼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냥 두려웠었어.”그녀는 외부에 전해지는 소문이 진짜일까 봐 두려웠다.10년이나 사랑한 사람을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데 두려운 게 어쩌면 당연했다.소은지는 대수
“유영아, 나 때문에 저런 인간들이랑 싸울 필요 없어. 난 전혀 신경 안 써.”밖으로 나온 뒤, 소은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시댁에서 친구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다.유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야. 곧 이혼할 건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강이한을 위해 시댁에서 아무리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혀도 유영은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시댁의 횡포는 더 심해져만 갔다.핸드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강이한의 연락이었다.“이거 봐. 그새를 못 참고.”유영은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서희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강서희한테 다 들었을 거면서 왜 물어봐? 한지음이랑 둘이 같이 있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래?”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소은지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둘이 언제 이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거야?”전화를 끊고 일분도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영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은지야, 일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없을 것 같아. 나 먼저 갈게.”그녀는 친구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비록 그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을지라도.소은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유영은 차로 돌아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불쾌한 목소리가 전해졌다.“지금 당장 본가로 와.”“싫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뒤,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 뒤로 휴대폰 화면이 여러 번 깜빡였지만 그녀는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살갑게
오후가 되자 강이한이 돌아왔다.그는 오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 한참이나 어딘가로 통화하다가 나왔다. 유영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애착 인형을 품에 안은 뒤, 소파에서 TV를 시청했다.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품에서 인형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유영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한지음이 납치당했다고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가?“왜 이래?”“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그럼 그냥 말하면 되지 인형은 왜 던지고 그래?”강이한도 짜증이 치밀었다. 남편이 얘기 좀 하자는데 그까짓 인형 좀 던졌다고 성질을 낼 일인가?그녀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그를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그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다가가서 앉았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고는 인형을 다시 품에 안았다.“내가 말을 말아야지.”그녀의 이런 행동은 남자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오늘 지음이 만났다고 들었어.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지?”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그래, 전생에도 이런 말투였었지.전생에 한지음이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출장 중에 부랴부랴 돌아와서 지금처럼 범인을 심문하는 태도로 그녀에게 따진 적 있었다.그때 그녀는 어떻게 다른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억울함을 토로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건 나한테 질문할 게 아니라 당신 여동생한테 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그건 또 무슨 소리야?”유영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뭐야? 우리 아직 부부 아니야? 지금 바깥 여자 때문에 날 추궁하는 거야?”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내를 보자 강이한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외부인이 납치를 당했다고 10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추궁하는 꼴이라니!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영아, 한지음이 납치당했어.”“그래서?”“당신은 오늘 한지음을 만났었고.”“그래서?”계속해
“이한 씨한테는 어제 이혼하자고 말했어요. 그러니 회사가 망하든 말든 그건 이제 제 알 바가 아니에요.”시어머니의 맹비난에도 이유영은 느긋하게 대처했다.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뭐라고 했니?”“우리 이혼할 거라고요.”주변 공기마저 싸늘해졌다.며느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시어머니도 그 말을 듣고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어쩐지 아침에 연락했을 때도 태도가 시큰둥하더니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어?반면 이유영은 더 이상 시댁 식구들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강서희에게도 그랬고 시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니 그렇게 속 편할 수가 없었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이 집에서 고용인들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 그들의 구박 때문에 아이도 잃었다.재벌가에서 아이를 임신하면 대우가 좋아진다는 말은 세강 일가에게 통하지 않았다.그들이 한 역겨운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얘기해? 네가 뭔데?”이성을 상실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유영은 듣고 있을 가치조차 안 느껴져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예전의 나약하고 온순하던 이유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더 이상 시댁 식구들의 횡포를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여론은 예상보다 더 빨리 이상한 방향으로 퍼졌다.형사가 저택으로 찾아왔다. 강이한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형사의 뒤를 따라온 강이한을 발견한 순간, 이유영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가 형사에게 뭐라고 했는지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한지음 씨 납치 사건 때문에 참고인 조사가 필요하니 저희랑 같이 가주시죠.”젊은 형사가 그녀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강이한을 쏘아보았다.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더니 말했다.“유영아, 나도 이 사건과 당신이 관련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야.”유영은 냉소를 머금었다.그런 사람이 형사를 집까지 데려와?“10년이야.
조사가 끝나 경찰서를 나오자 밖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강이한과 소은지가 보였다. 강이한은 유영을 발견하자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유영은 그를 무시하고 소은지에게 다가갔다.뒤쫓아 온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집?”유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거긴 이제 내 집이 아니잖아.”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분하게 말했다.죽음을 겪고 돌아온 뒤로 어떤 일에도 흥분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전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시의 그녀는 넋이 나간 상태로 경찰서에 불려 와서 3일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소은지가 보석금을 낸 뒤에야 그녀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유영아!”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날카로운 눈매와 높이 솟은 콧대, 그리고 강인한 턱선, 모든 게 그녀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이 정도 외모와 재력을 갖춘 남자라면 결혼을 했더라도 들러붙는 여자가 많은 게 당연했다.처음 그와 시작할 때 그녀도 그의 매력에 푹 빠졌으니까.지금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잘난 면상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놔.”아무런 온도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강이한은 그녀가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유영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소은지를 향해 다가갔다.강이한은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껴안아 주고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저렇게 작고 나약한데 그들 사이에 무언가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차에 오른 유영의 얼굴은 약간 초췌해 보였다.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더 가늘어져 있었다.소은지는 따뜻한 음료수를 그녀에게 건넸다.“뭐라도 좀 마셔.”“고마워.”유영은 음료수를 받아 힘껏 뚜껑을 비틀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리 줘. 내가 해줄게.”유영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열 수 있어.”어떻
유영은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를 직감했다. 문을 열어준 장숙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와계십니다.”유영은 눈썹을 꿈틀했다.어제 쌀쌀맞게 대했으니, 어젯밤에 당장 쳐들어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영숙은 소파에 앉아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은 매번 진영숙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시종처럼 납작 엎드려서 비위를 맞춰주었다.그때는 강이한을 사랑했기에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서 핸드백을 소파에 던졌다.“아줌마!”“예, 사모님.”장숙은 다급히 다가와서 진영숙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집안에 굿을 좀 해야겠어. 여자 하나 잘못 들였더니 망조가 든 건지 사고가 끊이지를 않아.”유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그리고 냉랭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노려보았다.장숙은 난감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유영은 조용히 외투를 벗더니 바닥에 던졌다.진영숙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영을 바라보았다.얘 요즘 뭘 잘못 먹었나?“지금 뭐 하자는 거니?”“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집에 망조가 들었는지 재수 없는 일이 끊이지를 않네요.”유영은 진영숙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유영은 시어머니가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이유영 너 미쳤어?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들먹여?”“세강의 며느리 자리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이한이랑 이혼하고 싶어?”집으로 들어서던 강이한은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그를 발견한 장숙이 다급히 다가왔다.“도련님 오셨어요?”진영숙은 아들을 보자마자 표정을 바꾸고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아들에게 말했다.“넌 마누
2층으로 올라온 이유영은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이한은 그녀에게서 낯선 분노를 느꼈다.이렇게 작고 여린 여자에게 이런 모습도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유영아, 우리….”탁!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이유영!”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홀연히 그를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1층으로 다시 내려온 이유영은 곧장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진영숙에게로 다가갔다.이유영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기세등등하던 진영숙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너… 뭐 하자는 거야?”얘 갑자기 왜 이래?이유영은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벗어 진영숙의 얼굴에 던졌다.“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이한이 달려가서 말리려고 했지만, 유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뭔지 알아요?”“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진영숙이 빽 소리를 질렀다.2년 전부터 유영은 항상 이 팬던트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싸구려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진영숙에게 얼마나 훈계를 들었는지 모른다.진영숙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세강의 체면을 깎는다고 시비를 걸어왔다.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당연히 모르시겠지! 이 안에 당신 손자의 유골이 들어 있어!”모두가 입을 다물었다.“나한테 애도 못 낳는 병신이라고 욕했었지? 그러면서 비열하게도 내가 먹는 음료수에 더러운 약을 타서 내 아이를 죽였잖아. 그 아이도 당신 손자인데 왜 그랬어?”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그는 경악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진영숙이 순간 당황하더니 시선을 회피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구나.”“몰랐다고? 신안병원 진헌수 과장이 당신 중학교 동창이잖아. 그 사람 와이프 불러서 삼자대면이라도 해야 인정할 거야?”“너… 너….”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병원 맞은편의 카페.박연준은 강이한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놀랍네. 이런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지금 서주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이한의 차가운 눈빛에는 점점 더 날 선 위협이 깃들었다.“아무래도 엔데스 회장은 이번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네.”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이번 달은 못 넘긴다고?”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이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지금까지도 엔데스 회장의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따라서 이 시점에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 결과는 대단히 끔찍할 수 있었다.서주는 지금 아주 중요하 시기를 맞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문서는 핵심 열쇠로 작용할 거였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기봉...”그 세 글자를 뱉어내며 강이한은 이를 악물었다.전기봉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지만, 모두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을 찾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박연준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냉소를 띤 채 말했다.“전기봉, 네가 데리고 있지?”“박연준!”강이한은 이를 갈며 말했다.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박연준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돌린 것이 분명했다.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모든 걸 넘길게.”“...”그 뜻밖의 말에 강이한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모두 넘겨준다니?“전기봉의 행방을 찾는 즉시, 너에게 넘길게.”“무슨 뜻이야?”강이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연준은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눈빛에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박연준은 강이한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염 선생이 그러더라고. 석 달 후에도 약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이유영의
염 선생의 눈빛에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전남편이든 현재 남편이든, 두 분 모두 이유영 씨를 아꼈다면 어째서 이유영 씨의 눈을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했나요?”눈은 사람의 창밖을 비추는 창문과도 같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체 부위였다. 하지만 이유영의 눈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특히 이유영이 정국진의 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비극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석 달 후, 이유영 씨는 어떻게 되나요?”그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만약 석 달 후에도 아무런 개선이 없다면... 이유영 씨의 눈은 아마...”염 선생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박연준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고 이어서 염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유영 씨의 두 눈은... 아마 복구가 불가능할 겁니다."“...”복구 불가능. 그 단어가 박연준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박연준의 머릿속은 갑자기 울리는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끔찍한 결과가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조차 너무 끔찍했다.만약 이유영의 눈에 희망이 없다면, 이유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와 위협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염 선생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를 협박하는 겁니까?”박연준은 차갑게 말했다.“선생님의 아들, 염명훈 말입니다.”“뭐라고요?”“이유영 씨의 눈이 회복된다면, 선생님의 아들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염명훈. 염 선생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자 동시에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이었다. 염 선생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도 상당 부분이 아들 때문이었다.“좋습니다.”현재 염명훈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거래를 승낙하는 순간, 염 선생의 눈에는 깊은 체념과 결심이 스쳐 지나갔다.박연준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렇다면 잘 부탁드립니다.”설득만으
지난밤은 단지 짧은 하룻밤이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정말로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우지가 이유영에게 이불을 더 덮어주었지만,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그 추위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유난히 불편했다.결국 링거를 맞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올 때마다, 이유영은 항상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무서워하지 마.”박연준은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유영을 달랬지만, 이유영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이유영은 마치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 무기력했다.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더욱 단단해진 듯 보였다.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벽이 느껴졌다.병실 침대에서.“물 좀 마셔.”박연준은 컵에 빨대를 꽂아 이유영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유영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목마르지 않아.”사람들은 열이 나면 몸이 뜨겁고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곤 했다.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려고 하는데 이유영은 그런 느낌 대신 온몸이 춥기만 했다.병원에서 제공한 얇은 담요는 추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고 링거를 맞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이 팔 전체로 번졌다.“박연준.”“응?”“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왜 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왔을 때, 진료 후의 협상은 모두 강이한과 염 선생이 나섰기 때문에 이유영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박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염 선생은 왜 만나려고 해?”박연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유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
파리 지역에서는 엔데스 회장과 관련된 소문이 계속 퍼졌지만, 신뢰할 만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 문서가 핵심이 될 것이다.“잘 감시해!”강이한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뒷모습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 같았다. 강이한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신시욱은 강이한의 단호한 결심에 자신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이번에 강이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유영의 편에 서겠다는 굳은 결심을 내리고 있었다.그것이 바로 강이한이었다. 과거에 이유영 곁에 머물지 못했던 자신을 대신해, 이제 어떤 일이 생겨도 이유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다....우천시.날씨는 변덕스럽고 험난했다.“콜록콜록...”이유영은 기침을 멈추지 못했고 코도 막혀 있었다. 이유영의 모습은 몹시 기운 없어 보였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의 쇠약해진 상태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여기 공기가 좋긴 하지만, 기후가 너무 험난하네요.”우지는 걱정스레 말했다.이유영은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증상이 시작된 것 같았다.더욱이 이유영은 이미 많은 약을 복용 중이었고 약기운 탓에 어지럼증까지 호소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힘겨운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이유영을 가로로 들어 올렸다.“병원으로 가자.”“박 선생님! 박 선생님!”이유영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는 박연준을 보고 우지가 급히 그를 막아섰다.지금 밖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병원은 안 가!”이유영은 힘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약한 목소리에서 현재 이유영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잘 버티는 듯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이다.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유영은 더욱 힘들었을 거였다.이유영의 몸 상태는 원래도 좋지 않았고 파리에 있을 때는 임소미가 세심히 돌봤지만 이제 임소미도 곁에 없었다.이유영의 건
이유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이 날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도 다르지 않을 거야.”강이한은 연서 때문에 이유영에게 접근했고 박연준은 강이한과 연서 때문에 이유영에게 접근했다.그 말이 끝나자, 박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박연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두 사람은 서로 무엇 때문에 대립하든, 하나의 공통점은 분명해.”“유영아!”“연서는 너와 강이한에게 똑같이 특별한 사람이잖아.”박연준은 연서로 인해 강이한을 증오했고 그 감정은 이유영까지 복잡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연서라는 여자가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응시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박연준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이유영의 차가운 손등을 감쌌지만, 이유영은 즉각 손을 빼냈다.“유영아.”“이럴 필요 없잖아.”이유영은 냉소를 띤 채 다시 말했다.그 한마디는 박연준의 가슴을 옥죄며 숨이 막히게 했다.그는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진실을 알아버린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이 두려워했던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이유영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한편, 강이한 쪽.강이한이 서주에 도착한 후, 신시욱의 말을 듣고 아이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가씨는 단순히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을 뿐이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단순한 감기라니?“게다가 지금은 이식 거부 위험 기간도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신시욱은 강이한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강이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박연준은 지금 어디에 있어?”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강이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신시욱은 대답했다.“박연준 씨는 며칠째 서주에 계시지 않았습니다.”서주에 없다고?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박연준 또한 이유영에게는 마찬가지였다.남자는 이유영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유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물었다.“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박연준의 질문에 이유영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의자를 끌어 이유영의 옆에 앉았다.테이블 위에는 우지와 우현이 정성껏 끓인 영양죽이 놓여 있었다. 대추를 넣어 이유영의 몸 상태를 배려한 것이었다.정씨 가문 사람들은 늘 이유영을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정말 미안해.”박연준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박연준의 사과는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는 단지 이유영이 연서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프산의 눈과 태양이 이유영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를 줄 줄은 몰랐다.이유영은 담담히 말했다.“결국 일어날 일이었어.”이유영은 박연준의 사과를 의외로 평온하게 받아들였다.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유영은 이제 그런 사람이었다.이유영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과거의 이유영이었다면 분명 감정을 폭발시키고 히스테릭하게 굴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이유영은 자신의 시력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과거 의사 선생님은 이유영의 눈은 수술 외에는 회복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다만 염 선생이 있었다면 수술 없이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가능성일 뿐, 절대적인 보장은 없었다.“네가 그랬어?”이유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유영이 묻는 것은 이온유의 일이었다.강이한이 떠나자마자 박연준이 우천시에 나타난 것을 보고 이유영은 이 사건은 박연준과 관계있다고 생각했다.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미 눈치챘군.”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역시 네가 꾸민 일이네.”강이한이 또다시 박연준의 손에 놀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유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이제는 강이한을 멍청
결국 강이한은 떠났다.이온유의 병세가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유영 앞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식당은 한동안 적막에 잠겼다.우지와 우현은 고개를 숙인 채 마음 아프게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아가씨.”우지가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안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차분히 손을 들어 우지의 움직임을 멈췄다.“편애가 뭔지 알겠죠?”편애.그랬다. 만약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많은 순간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선택할 것이다.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결국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과거의 이유영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마음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물론 이유영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역으로서의 자리였다. 대역은 결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아가씨,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말아요. 네?”우지가 다정하게 위로하며 말했다. 우지의 말에 이유영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우지 씨.”“네, 아가씨.”“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해요.”세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았다.과거 강이한과의 관계에서, 이유영은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그리고 그 과신은 결국 이유영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네, 아가씨.”“...”“기억할게요.”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를 본 이상,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다....강이한은 우천시를 떠났다.강이한의 행적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박연준은 강이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연준은 즉시 우천시로 향했다.강이한은 서주에 도착했고 박연준은 우천시에 도착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의 방에는 여전
“유영아.”결국 강이한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 있었다.이유영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그릇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 동작에는 신중함이 가득했다.강이한이 수없이 시력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영은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며 스스로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과거, 전생에서 이유영은 결국 삶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이번 생의 이유영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다. 부모님, 오빠, 그리고... 월이. 그래서 어떤 상황이 와도 이유영은 살아가야만 했다.염 선생의 의술도 수술도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유영은 누구에게도 희망을 걸지 않았다.그래서 이 어둠 속에서도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이유영은 묵묵히 적응하고 있었다.그리고 곁에 있는 이 남자는... 결코 이유영의 의지가 되어준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이번 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은 그것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떠날 거야?”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요했다.“유영아.”“가 봐.”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그 차분함은 강이한의 마음을 단숨에 얼어붙게 했다. 강이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쓰라렸다.과거, 전생에서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떠날 때마다 이유영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그 불편함조차 완전히 사라졌다.이런 이유영을 보며 강이한의 마음속에 죄책감과 불안이 들끓었다. 요즘, 우천시에서 이유영과 함께하는 동안,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이유영과의 대화는 강이한의 내면을 죄책감으로 잠식해 갔다.“유영아.”강이한은 깊은숨을 내쉬며 이유영의 이름을 불렀다.이유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나 그 미소는 너무나 평온했다.“나도 알아. 생사가 걸린 문제잖아. 어쩔 수 없겠지.”이유영은 너무도 침착했다.이 말을 하는 도중에도 이유영은 침착함을 유지했다.이런 태도가 오히려 강이한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
이 평온함은 강이한의 세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어디선가 ‘윙’ 하고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이한 세계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그의 내면에 깊게 박힌 감정을 쪼개고 흩뿌리는 메아리였다.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이유영이 겪어야 했던 모든 아픔을 이제는 강이한이 차례로 되새기며 겪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그를 파괴하는 기억의 폭풍이었다.한 여자가 처음엔 히스테릭하게 소란을 피우다가 고요해진다면, 그것은 실망과 고통이 충분히 쌓였음을 의미한다.“유영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이유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누구의 대신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독립된 존재로서 강이한을 마주했었다.이유영이 살짝 웃어 보였다.이유영의 눈앞은 어두웠고 세상이 흐릿하게 느껴졌다.사물조차 보이지 않는데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유영은... 볼 수 없었다.과거에는 정말로 알고 싶었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이제는 아예 알아보기를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강이한은 이유영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유영아, 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이유영은 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특히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자존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강이한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유영이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을 했을 때, 강이한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이유영의 말을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유영은 침묵했다.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었다. 이 남자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그의 몫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러나 강이한은 떠날 기색이 없었다.서주는 지금 혼란 그 자체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강이한은 이유영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때, 소식이 전해졌다.이온유의 병세가 재발했다는 것이다.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