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으로 올라온 이유영은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이한은 그녀에게서 낯선 분노를 느꼈다.이렇게 작고 여린 여자에게 이런 모습도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유영아, 우리….”탁!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이유영!”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홀연히 그를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1층으로 다시 내려온 이유영은 곧장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진영숙에게로 다가갔다.이유영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기세등등하던 진영숙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너… 뭐 하자는 거야?”얘 갑자기 왜 이래?이유영은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벗어 진영숙의 얼굴에 던졌다.“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이한이 달려가서 말리려고 했지만, 유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뭔지 알아요?”“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진영숙이 빽 소리를 질렀다.2년 전부터 유영은 항상 이 팬던트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싸구려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진영숙에게 얼마나 훈계를 들었는지 모른다.진영숙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세강의 체면을 깎는다고 시비를 걸어왔다.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당연히 모르시겠지! 이 안에 당신 손자의 유골이 들어 있어!”모두가 입을 다물었다.“나한테 애도 못 낳는 병신이라고 욕했었지? 그러면서 비열하게도 내가 먹는 음료수에 더러운 약을 타서 내 아이를 죽였잖아. 그 아이도 당신 손자인데 왜 그랬어?”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그는 경악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진영숙이 순간 당황하더니 시선을 회피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구나.”“몰랐다고? 신안병원 진헌수 과장이 당신 중학교 동창이잖아. 그 사람 와이프 불러서 삼자대면이라도 해야 인정할 거야?”“너… 너….”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간 유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진영숙은 처음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이를 유산하게 된 배후에 시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유영은 강이한에게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때는 바보처럼 자신이 부족해서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때의 유영은 자신이 노력하면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고 믿었다.부모님과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본 적 없었기에 어렵게 이룬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든 참고 인내했지만, 현실은 참혹했다.유영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강이한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있는 유영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혔다.“유영아.”유영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남자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왜 전에는 말 안 했어?”“하!”유영은 싸늘한 비웃음을 터뜨렸다.친동생도 아닌 강서희에게 말 한마디 했다고 전화해서 다짜고짜 따지는 사람에게 네 가족이 우리 아이를 죽였다고 말한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을까?강이한의 그런 애매한 태도 때문에 진영숙의 괴롭힘은 심해져만 갔다. 만약 강이한이 이 일로 엄마를 원망했다면 그가 없을 때 찾아와서 더 심하게 괴롭혔을 것이다.강이한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유영의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상대가 뭐라고 한 건지, 강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말을 마친 강이한은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한지음이 발견된 것이다.“지음이 찾았대. 나 잠깐 나갔다 올게.”“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강이한을 빤히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강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뒤, 부드러운
집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며칠째 그녀는 언론과 네티즌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고 있었다. 세강은 자연스럽게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그래서 안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들조차도 악질 네티즌들이 이렇게 변태적인 행보를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모님, 이걸 어떡할까요?”집사와 고용인들은 연민과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영은 우아하게 수저를 내려놓고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절제된 단아함이 몸에 배긴 손놀림이었다.평소에도 차분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유영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경찰에 신고하죠.”“신고요?”“당연한 거 아닌가요?”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네티즌들이 보낸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신고까지 한다면….”집사는 말끝을 흐렸지만 아마 경찰이 나서도 악질 네티즌들을 모조리 처벌하기엔 무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인터넷에 숨어 횡포를 가하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예요.”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이들은 한지음이 매수한 심부름꾼들이었다.한지음은 공인도 아니었고 두터운 팬층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납치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다지만 그녀를 위해 세강의 안주인에게 이 정도로 협박을 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이한은 며칠째 외박 중이었다.상대는 지금쯤 유영의 정신이 온전치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이런 무리수를 강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이번 생의 유영은 전생처럼 나약하지 않았다.아직은 기댈 곳이 남편밖에 없는 전직주부에 불과하지만 유영은 자신의 방식대로 반격해 나갈 것이다.“알겠습니다.”집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경찰에 연락했다.하루 사이에 유영은 택배를 수십 개나 받았다.거실에는 온갖 동물 시체와 면도칼, 혈서 같은 것들이 스산하게 쌓여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그것들을 보고 겁에 질려 며칠 밤을 잠들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이들의 목적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유영은 피아노실에서 빗소리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긴 생머리를 그대로 드리우고 피아노에 심취한 그녀의 모습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은 조용히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리가 멎고 유영이 고개를 돌렸다.“언제 왔어?”“10분 정도 됐나?”남자는 며칠 전 집을 나가기 전 입은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집에 안 돌아온 그 시간 동안 병원에서 한지음의 옆을 지킨 모양이었다.그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유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거실에 쌓인 물건들 봤어?”“왜 버리지 않고 그대로 뒀어?”“누가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남자의 눈빛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그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를 비난하던 네티즌들이 이런 미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그가 아는 유영은 겁이 많은 여자였다.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그는 유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최근 며칠 사이 그녀가 보여준 행보는 그가 아는 유영이 아니었다.그래서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영이 기댈 곳은 강이한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유영에게서는 끝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보냈는지 알아?”“몰라.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어.”“신고했어?”강이한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가장 먼저 남편을 찾지 않고 경찰에 신고 하다니!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다.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영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유영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경찰에서는 뭐래?”“조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야.”“왜 나한테 연락도 하지 않았어?”예전에는 사소한 일 하나로도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하던 여자였다.유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에는 매끄럽던 피부가 많이 거칠어진 것이 느껴졌다.그녀가 웃으며
강이한의 분노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집사가 문을 노크했다.“도련님, 나서원 씨께서 오셨습니다.”“서재에서 기다리라고 해요.”유영은 나서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강이한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서원은 비밀리에 개인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돈만 충분하면 그가 파내지 못할 증거는 없었다.수많은 재벌 사모님들이 남편의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오늘 나서원이 뭘 가지고 왔는지 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그 정황 증거들이 전생에 강이한을 완전히 그녀에게서 등 돌리게 한 발단이 되었다.강이한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더 이상 이혼 얘기 꺼내지 마.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말을 마친 그는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유영은 울컥하는 마음에 그를 잡았다.“잠깐만.”“더 하고 싶은 얘기 있어?”“날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남은 신뢰가 있기는 해?”전생의 유영이 가장 궁금했던 문제였다.이미 한번 겪었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은 그녀에게 두렵고 잔인했다.이 남자가 곧 자신에게 완전히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무섭고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강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유영은, 이 순간을 기억에 새겨 넣으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줄곧 당신을 믿었어. 물론 지금도.”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유영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이대로 멈추고 싶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전생의 극본대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청하 병원 VIP병동.온몸에 붕대를 두른 한지음의 모습은 처참했다.병실에는 강서희가 와 있었다.그녀는 음침한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말했다.“내가 그년을 너무 얕잡아 봤어. 죽더라도 날 물고 늘어질 줄이야.”그들의 처음 계획대로라면 유영은
얇은 A4용지가 피부를 긁고 빨간 상처를 냈다.유영은 절망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본 강이한은 흠칫하며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표정을 바꾸고 실망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에게 정말 실망했어.”유영은 다시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바깥에 내리는 비를 닮은, 그의 실망보다 더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강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쓰렸다.“왜 그랬어?”그가 물었다.그가 이 질문을 내뱉는 순간 이유영도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그는 절대 모를 것이다.유영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정성 들여 가꾼 정원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에 모든 것은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그녀는 줄곧 이곳을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생각하고 아꼈다.이제야 그 생각이 큰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그녀를 믿는다고 했던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정황 증거를 들이밀며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뭘 말하는 거야?”“이유영!”남자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예전과 같이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럴수록 그는 혼란스럽고 절망에 빠졌다.“왜 이렇게 변했니?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당신의 그 복수심 때문에 한 여자가 인생을 망쳤어. 한지음이 그렇게 미웠어?”세강의 직원과 협력사 직원들, 세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강이한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유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표현들보다 그녀는 더욱 잔인하고 냉혹했다.강이한의 실망은 깊어져만 갔다.그가 아는 이유영은 어디로 간 걸까?이렇게 예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 거지?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나라고 확신하나 봐?”“더 할 말 있어?”적어도 강이한은 이 증
유영의 고개가 돌아갔다.입술이 터지며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진영숙은 순간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너 그게 무슨 눈빛이야? 너 때문에 세강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네 주제에 감히 이혼을 얘기해? 버려도 우리가 버려야지!”진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희가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엄마, 진정해. 화내면 몸만 망가져.”“얼마면 되니?”진영숙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유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우습고 역겨웠다.유영이 물었다.“얼마를 줄 생각인데요? 우리 결혼해서 3년을 살았어요. 부부 공동재산이라는 게 있는데 어머님 재력으로 감당이 될까요?”“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재산을 분할해? 너 시집와서 한 게 뭐가 있어? 이한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고 놀고 먹었으면서!”“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제가 집에서 내조를 열심히 했으니까 그 사람이 밖에서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너….”진영숙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처음부터 순진한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속은 엉큼해 가지고! 내가 그렇게 말렸건만 믿지를 않더니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유영은 진영숙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그와 서로 사랑할 때는 뭔가를 바란 적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어차피 사랑을 잃었으니 챙겨야 할 건 다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본모습이라니요? 그 사람한테 갖다 바친 제 10년은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더 손해 아닌가요?”“네 청춘이 얼마나 한다고!”“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신 아들이 좋아서 한 결혼이에요!”진영숙과 강서희는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은 서로 멍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이곳에 오기 전에는 강이한이 그녀에게 실망한 기회를 틈타 돈으로 유영을 쫓아버릴 생각이었다.여론에 그만큼 시달렸으니
며칠 외박할 줄 알았던 강이한은 저녁 열 시가 되어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욕실에서 씻고 나온 유영은 나갔을 때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강이한을 보자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술 냄새 때문에라도 도저히 그와 한방을 쓰고 싶지 않았다.“거기 서!”문고리를 잡는데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전생에 저런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었는데 지금의 유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강이한은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이혼부터 꺼내는 그녀가 낯설기만 했다.예전의 유영은 삐져 있다가도 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면 다가와서 그의 화를 먼저 달래주었다. “더 할 얘기 있어?”고개를 돌린 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유영은 고개를 저었다.“없어.”등 뒤에서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영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익숙한 그의 향기와 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하자 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어 그의 귀뺨을 쳤다.“더러우니까 저리 꺼져.”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남자는 실망과 분노가 뒤섞인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은 힘껏 그를 밀쳤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에 혐오의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에 한지음이 찾아와서 임신했다고 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매번 그와 마주할 때면 그때 의기양양하게 지껄이던 한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내가 잘해줬잖아.”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어떤 걸 말하는 거야?”“꼭 그렇게 해야 했어?”남자가 재차 그녀를 다그쳤다.지금 강이한은 납치 사건의 범인이 유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10년을 함께한 아내가 한지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 눈을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었던 이유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한 번 도망쳐 봐.”비서는 순간 움찔했다.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은 로열 글로벌의 것이었고 그녀는 로열 글로벌의 전 대표님이었기에 서주에서 살아남으려면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두 시간 후, 비서와 지혁이 돈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오자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거기 경비원들이 바로 내쫓았어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유영은 혼란스러웠다.“윙!”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내일까지 안 오면 변호사가 찾아갈 거야.]‘협박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차 수리비는 물론이고 직접 사과까지 하라는 건가?’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런 일일수록 더 읽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아직 더블루 리버스에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빨리 사과하고 이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통화하다가 부딪혔으니 명백한 본인 불찰로 생긴 사고였고 CCTV에도 찍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곧 답장이 왔다.[네.]아직 그곳에 있다면 된 것이다. 이유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지혁 씨.”“네, 아가씨.”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지혁이 이유영 앞으로 다가갔다.“저랑 같이 가요.”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지혁과 함께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유영은 코트를 걸치며 돈을 지혁에게 건넸고 돈을 건네받은 지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오늘 일정으로 바쁜 하루였지만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30분 후에 더블루 리버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경비원들이 막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들이 온다는
“바래다줬어?”“네.”“서재욱은 아직도 거기 살아?”“네.”말이 떨어지자 박연준은 온몸에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그의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기원의 심장은 긴장감에 조여들었다.박연준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문기원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지금 나온 기사는 다 찌라시잖아요.”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박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문기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재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모습 한 장면만이 가득했다.“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는 게 어떻습니까?”문기원은 신중하게 조언했다.오늘 이유영이 서재욱을 만난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퍼졌다.이건 누군가가 분명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게 누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혹시 엔데스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재욱을 끌어들이려는 걸까?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연준은 그저 단호하게 문기원에게 말했다.“너 먼저 들어가.”그 순간 그가 얼마나 큰 힘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문기원은 알 수 있었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시간 박연준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상, 지금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면 오늘 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그날 밤, 이유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래라면 내일 서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미뤘다.아침 식탁.“월이야, 빨리 먹어.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어제 엄마가 말했지, 늦으면 안 된다고.”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월이에게 말했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집에 없는 관계로 이유영이 월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은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
마음이 이 정도로 깊지 않았다면 감정을 이렇게까지 억누를 수 있었을까?박연준은 아마도 과거 연서에게조차 이렇게까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을 것이다.강이한이 마지막 순간 이유영을 놓아주면서도 박연준과 그녀 사이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 이유였을 것이다.지금 보니, 박연준은 언제나 진심이었다.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였기에 오늘 밤 벌어진 모든 일이 이토록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내일 가도 되잖아.”박연준은 돌아서며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는 동안 감정을 철저히 억눌렀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끝없는 아픔뿐이었다.“그 여자는?”진영숙을 말하는 것이었다.박연준은 순간 미세하게 움찔했고 그 반응을 본 이유영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띠었다.“흥!”진영숙과 이유영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너와 그 여자가 또 어떤 거래를 했을지 누가 알아.”그녀는 한 발 다가가며 비꼬듯 물었다. 강이한의 어머니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묘하게 신경 쓰였다.진영숙을 대하던 태도가 나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며 박연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박연준은 잠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딱 하루만이야.”“넌 내가 그 여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이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과거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강이한을 위해 모든 건 참아내면서조차 강씨 집안에 머문 적은 없었다.신분과 지위가 아무리 다르고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이유영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돼.”“뭐라고?”이건 어제부터 박연준이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지 이유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과거의 일들이 떠오르자 이유영은 다시 진영숙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박연준의 말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남자의 시선이 이유영에게 고정되었다.이 지경이
그런 말은 원래 박연준의 입에서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그가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자라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이가 침범하는 것을 참지 못할 테니까.“강이한과 한지음은 불륜이었어. 재욱 씨는 연우 씨에게 분명히 이야기할 거야. 어떻게 같아?”강이한은 한지음과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키면서도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고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서재욱과 이유영 사이에는 애초에 그런 감정이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박연준의 말은 아무런 책임감 없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박연준은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평생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순간은 보통 강이한에게서 많이 봤었다. 강이한은 박연준의 공격과 복수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분노하곤 했다.그리고 지금, 이유영은 그 모든 것을 박연준에게 되돌려주고 있었다.“너...”박연준은 이유영의 무심한 태도를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그 사람 만나지 마. 유영아, 내가 억지로 조치 취하게 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무겁고도 위험했다.박연준의 말 속에 담긴 위협을 이유영은 단번에 알아채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 그러면 어쩔 건데?”아무도 박연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유영은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그가 다시 이유영을 바라볼 때, 그의 눈빛에는 끝없는 위험이 서려 있었다.“내가 뭘 할 것 같아?”10년 동안 한 사람을 계략적으로 속일 수 있었던 남자였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날 협박하는 거야?”“난 그럴 생각이 없어.”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파리에 돌아온 이후, 이유영의 행동은
그때의 박연준은 결코 이런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서재욱이야?”박연준은 분노를 억누르며 쏘아붙였다.“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서재욱은 좋은 사람이잖아.”좋은 사람? 그녀의 태도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었다.그녀의 말에 박연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은 사람은 서재욱을 두고 하는 말인가? 정말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그 사람을 믿는 거야?”마치 이빨 사이로 힘겹게 짜내듯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거칠었다.이유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너희들보다 훨씬 믿음직한 사람이야.”이유영의 눈에는 서재욱이 박연준이나 강이한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적어도 10년 동안이나 한 사람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런 말을 주저 없이 내뱉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이것이 바로 강이한이 말한, 그들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는 진짜 의미였을까? 그렇다면 그에게 미래란 존재하는 걸까? 그녀는 정말 단 한 조각의 마음도 남기지 않은 걸까?“서재욱 비서가 임신한 건 알아? 그의 아이라고!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예전 같았으면 박연준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쓰레기라고? 단지 서재욱에게서 이유영을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건가?“알아.”“뭐?”“그 애를 지우고 나에게 좋은 미래를 약속했어. 안 될 이유라도 있어?”박연준이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충격을 주려는 거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 판은 이유영이 이겼다.박연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은 오랜만에 묘한 통쾌함을 맛보았다.사람들은 말한다. 감정이란 더 많이 신경 쓰는 쪽이 지는 거라고. 예전에 강이한 앞에서 언제나 졌던 것처럼.하지만 지금의 이유영은 이런 일에 진심을 다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꼭 서재욱과 함께해야겠다는 거지?”박연준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는 항상
이유영은 몽롱한 상태로 박연준에게 이끌려 파리 타워를 나섰다.차에 오르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과 날 선 분위기가 온몸을 감쌌고 운전석에는 문기원이 앉아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직접 운전했다면 차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속도로 내달렸을 것이다.문기원조차도 그의 음산한 기류를 감지한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왜 하필 그 사람과 함께 있었어?”한참을 침묵하던 박연준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고 이유영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왜, 안 돼?”“이유영!”그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음산한 기운이 차 안을 더욱 짙게 뒤덮었고 문기원의 손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며 핸들이 살짝 틀어져 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이유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비웃듯 물었다.“설마 우리 진짜 결혼한 사이로 생각했던 거야?”박연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어두웠던 눈빛이 한층 더 깊은 먹구름으로 가려졌다.“어이가 없군.”이유영은 냉소를 띠며 웃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이유영의 태도에 좁은 차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성냥이 켜졌다.“치익.”박연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거칠게 몇 모금 빨아들였다.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담배 연기로 짙어졌고 살짝 내려진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와 연기를 천천히 흩어놓았다.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에게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고 이 이야기만 나오면 박연준은 언제나 격렬하게 반응했다.서재욱이 파자마 차림으로 문을 열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에 어떤 격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의 모든 이성이 무너져 내렸었다.차가 풍산 그룹에 거의 다다를 즈음, 박연준이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이유영,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목소리에는 한계에 다다른 감정이 묻어 있었다.“왜?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못 참겠어?”그렇다면 그
“재욱 씨가 보기엔 아직 가능성이 있을 것 같나요?”서재욱은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반문했다.아직 가능성이 있을까?분명 없었다.청하시에서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강이한이 그녀에게 얼마나 냉혹한지 직접 목격했다.강이한의 매서운 눈빛을 보며 서재욱은 그가 평생 후회할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만약 후회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파멸을 의미할 것이었다.그리고 지금, 강이한은 결국 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일말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았다.“그럼 박연준은 어떻습니까?”최근 김연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서재욱은 이유영과 박연준의 관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이유영은 박연준의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딩동딩동!”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급하게 울렸다.이유영과 서재욱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다른 손님이 또 있나요?”“아니요.”그는 오직 이유영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왔기에 다른 사람과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이유영은 서재욱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서 확인해 보죠.”“네.”서재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함에 지친 파자마 차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는 문 앞에 서서 먼저 문 너머를 살피고는 이내 뒤돌아보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에요?”왜 문을 열지 않는 거지?“박연준이에요.”‘박연준? 여길 왜 온 거지?’서재욱을 찾아온 걸까?박연준은 어떤 소식이든 빨리 접하다 보니 서재욱이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서재욱이 문을 열자 박연준의 주먹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서재욱이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굴을 맞았을 것이다.이유영은 문 앞에서 벌어진 소란을 들으며 긴장하고 있었다.박연준이 온몸에 살기를 내뿜자 이유영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
이유영은 서재욱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거절할 여지도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서재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분노하게 해야만 나타날 거야.”‘분노해야만 나타난다고? 얼마나 몰아세웠기에 분노해야만 모습을 드러낼 정도란 말인가?’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자신과 강이한의 관계가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얽히고설킨 관계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결국 그녀는 서재욱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웠다....한편, 풍산 그룹에서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몇 차례나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응답은 없었다.결국 문기원이 그녀의 행방을 알아냈고 그 사실을 보고받은 박연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문기원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물었다.“지금 파리 타워에 있다고?”“네. 이미 방에 들어갔다고 합니다.”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연준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결혼 증명서를 발급할 때부터 시작된 반격이 계속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까지 나오다니.’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하필 서재욱과 얽히는 것에 박연준은 내심 못마땅했다.‘나와 서재욱의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파리 타워 레스토랑에서 저녁 시사를 마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습니다.”문기원의 목소리에도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이유영이 서재욱과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박연준을 겨냥한 의도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그 말에 박연준은 벌떡 일어났고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문기원이 말릴 틈도 없이 그는 성난 황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차가운 분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하려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문기원은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차는 빠른 속도로 밤거리를 질주하며 파리 타워를 향해 달렸다.평소에도 거친 운전 실력으로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