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으로 올라온 이유영은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이한은 그녀에게서 낯선 분노를 느꼈다.이렇게 작고 여린 여자에게 이런 모습도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유영아, 우리….”탁!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이유영!”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홀연히 그를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1층으로 다시 내려온 이유영은 곧장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진영숙에게로 다가갔다.이유영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기세등등하던 진영숙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너… 뭐 하자는 거야?”얘 갑자기 왜 이래?이유영은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벗어 진영숙의 얼굴에 던졌다.“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이한이 달려가서 말리려고 했지만, 유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뭔지 알아요?”“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진영숙이 빽 소리를 질렀다.2년 전부터 유영은 항상 이 팬던트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싸구려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진영숙에게 얼마나 훈계를 들었는지 모른다.진영숙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세강의 체면을 깎는다고 시비를 걸어왔다.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당연히 모르시겠지! 이 안에 당신 손자의 유골이 들어 있어!”모두가 입을 다물었다.“나한테 애도 못 낳는 병신이라고 욕했었지? 그러면서 비열하게도 내가 먹는 음료수에 더러운 약을 타서 내 아이를 죽였잖아. 그 아이도 당신 손자인데 왜 그랬어?”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그는 경악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진영숙이 순간 당황하더니 시선을 회피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구나.”“몰랐다고? 신안병원 진헌수 과장이 당신 중학교 동창이잖아. 그 사람 와이프 불러서 삼자대면이라도 해야 인정할 거야?”“너… 너….”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간 유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진영숙은 처음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이를 유산하게 된 배후에 시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유영은 강이한에게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때는 바보처럼 자신이 부족해서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때의 유영은 자신이 노력하면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고 믿었다.부모님과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본 적 없었기에 어렵게 이룬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든 참고 인내했지만, 현실은 참혹했다.유영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강이한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있는 유영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혔다.“유영아.”유영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남자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왜 전에는 말 안 했어?”“하!”유영은 싸늘한 비웃음을 터뜨렸다.친동생도 아닌 강서희에게 말 한마디 했다고 전화해서 다짜고짜 따지는 사람에게 네 가족이 우리 아이를 죽였다고 말한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을까?강이한의 그런 애매한 태도 때문에 진영숙의 괴롭힘은 심해져만 갔다. 만약 강이한이 이 일로 엄마를 원망했다면 그가 없을 때 찾아와서 더 심하게 괴롭혔을 것이다.강이한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유영의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상대가 뭐라고 한 건지, 강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말을 마친 강이한은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한지음이 발견된 것이다.“지음이 찾았대. 나 잠깐 나갔다 올게.”“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강이한을 빤히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강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뒤, 부드러운
집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며칠째 그녀는 언론과 네티즌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고 있었다. 세강은 자연스럽게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그래서 안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들조차도 악질 네티즌들이 이렇게 변태적인 행보를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모님, 이걸 어떡할까요?”집사와 고용인들은 연민과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영은 우아하게 수저를 내려놓고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절제된 단아함이 몸에 배긴 손놀림이었다.평소에도 차분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유영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경찰에 신고하죠.”“신고요?”“당연한 거 아닌가요?”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네티즌들이 보낸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신고까지 한다면….”집사는 말끝을 흐렸지만 아마 경찰이 나서도 악질 네티즌들을 모조리 처벌하기엔 무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인터넷에 숨어 횡포를 가하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예요.”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이들은 한지음이 매수한 심부름꾼들이었다.한지음은 공인도 아니었고 두터운 팬층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납치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다지만 그녀를 위해 세강의 안주인에게 이 정도로 협박을 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이한은 며칠째 외박 중이었다.상대는 지금쯤 유영의 정신이 온전치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이런 무리수를 강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이번 생의 유영은 전생처럼 나약하지 않았다.아직은 기댈 곳이 남편밖에 없는 전직주부에 불과하지만 유영은 자신의 방식대로 반격해 나갈 것이다.“알겠습니다.”집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경찰에 연락했다.하루 사이에 유영은 택배를 수십 개나 받았다.거실에는 온갖 동물 시체와 면도칼, 혈서 같은 것들이 스산하게 쌓여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그것들을 보고 겁에 질려 며칠 밤을 잠들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이들의 목적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유영은 피아노실에서 빗소리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긴 생머리를 그대로 드리우고 피아노에 심취한 그녀의 모습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은 조용히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리가 멎고 유영이 고개를 돌렸다.“언제 왔어?”“10분 정도 됐나?”남자는 며칠 전 집을 나가기 전 입은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집에 안 돌아온 그 시간 동안 병원에서 한지음의 옆을 지킨 모양이었다.그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유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거실에 쌓인 물건들 봤어?”“왜 버리지 않고 그대로 뒀어?”“누가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남자의 눈빛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그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를 비난하던 네티즌들이 이런 미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그가 아는 유영은 겁이 많은 여자였다.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그는 유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최근 며칠 사이 그녀가 보여준 행보는 그가 아는 유영이 아니었다.그래서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영이 기댈 곳은 강이한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유영에게서는 끝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보냈는지 알아?”“몰라.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어.”“신고했어?”강이한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가장 먼저 남편을 찾지 않고 경찰에 신고 하다니!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다.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영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유영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경찰에서는 뭐래?”“조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야.”“왜 나한테 연락도 하지 않았어?”예전에는 사소한 일 하나로도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하던 여자였다.유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에는 매끄럽던 피부가 많이 거칠어진 것이 느껴졌다.그녀가 웃으며
강이한의 분노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집사가 문을 노크했다.“도련님, 나서원 씨께서 오셨습니다.”“서재에서 기다리라고 해요.”유영은 나서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강이한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서원은 비밀리에 개인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돈만 충분하면 그가 파내지 못할 증거는 없었다.수많은 재벌 사모님들이 남편의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오늘 나서원이 뭘 가지고 왔는지 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그 정황 증거들이 전생에 강이한을 완전히 그녀에게서 등 돌리게 한 발단이 되었다.강이한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더 이상 이혼 얘기 꺼내지 마.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말을 마친 그는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유영은 울컥하는 마음에 그를 잡았다.“잠깐만.”“더 하고 싶은 얘기 있어?”“날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남은 신뢰가 있기는 해?”전생의 유영이 가장 궁금했던 문제였다.이미 한번 겪었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은 그녀에게 두렵고 잔인했다.이 남자가 곧 자신에게 완전히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무섭고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강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유영은, 이 순간을 기억에 새겨 넣으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줄곧 당신을 믿었어. 물론 지금도.”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유영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이대로 멈추고 싶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전생의 극본대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청하 병원 VIP병동.온몸에 붕대를 두른 한지음의 모습은 처참했다.병실에는 강서희가 와 있었다.그녀는 음침한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말했다.“내가 그년을 너무 얕잡아 봤어. 죽더라도 날 물고 늘어질 줄이야.”그들의 처음 계획대로라면 유영은
얇은 A4용지가 피부를 긁고 빨간 상처를 냈다.유영은 절망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본 강이한은 흠칫하며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표정을 바꾸고 실망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에게 정말 실망했어.”유영은 다시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바깥에 내리는 비를 닮은, 그의 실망보다 더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강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쓰렸다.“왜 그랬어?”그가 물었다.그가 이 질문을 내뱉는 순간 이유영도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그는 절대 모를 것이다.유영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정성 들여 가꾼 정원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에 모든 것은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그녀는 줄곧 이곳을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생각하고 아꼈다.이제야 그 생각이 큰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그녀를 믿는다고 했던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정황 증거를 들이밀며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뭘 말하는 거야?”“이유영!”남자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예전과 같이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럴수록 그는 혼란스럽고 절망에 빠졌다.“왜 이렇게 변했니?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당신의 그 복수심 때문에 한 여자가 인생을 망쳤어. 한지음이 그렇게 미웠어?”세강의 직원과 협력사 직원들, 세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강이한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유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표현들보다 그녀는 더욱 잔인하고 냉혹했다.강이한의 실망은 깊어져만 갔다.그가 아는 이유영은 어디로 간 걸까?이렇게 예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 거지?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나라고 확신하나 봐?”“더 할 말 있어?”적어도 강이한은 이 증
유영의 고개가 돌아갔다.입술이 터지며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진영숙은 순간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너 그게 무슨 눈빛이야? 너 때문에 세강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네 주제에 감히 이혼을 얘기해? 버려도 우리가 버려야지!”진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희가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엄마, 진정해. 화내면 몸만 망가져.”“얼마면 되니?”진영숙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유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우습고 역겨웠다.유영이 물었다.“얼마를 줄 생각인데요? 우리 결혼해서 3년을 살았어요. 부부 공동재산이라는 게 있는데 어머님 재력으로 감당이 될까요?”“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재산을 분할해? 너 시집와서 한 게 뭐가 있어? 이한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고 놀고 먹었으면서!”“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제가 집에서 내조를 열심히 했으니까 그 사람이 밖에서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너….”진영숙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처음부터 순진한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속은 엉큼해 가지고! 내가 그렇게 말렸건만 믿지를 않더니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유영은 진영숙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그와 서로 사랑할 때는 뭔가를 바란 적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어차피 사랑을 잃었으니 챙겨야 할 건 다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본모습이라니요? 그 사람한테 갖다 바친 제 10년은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더 손해 아닌가요?”“네 청춘이 얼마나 한다고!”“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신 아들이 좋아서 한 결혼이에요!”진영숙과 강서희는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은 서로 멍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이곳에 오기 전에는 강이한이 그녀에게 실망한 기회를 틈타 돈으로 유영을 쫓아버릴 생각이었다.여론에 그만큼 시달렸으니
며칠 외박할 줄 알았던 강이한은 저녁 열 시가 되어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욕실에서 씻고 나온 유영은 나갔을 때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강이한을 보자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술 냄새 때문에라도 도저히 그와 한방을 쓰고 싶지 않았다.“거기 서!”문고리를 잡는데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전생에 저런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었는데 지금의 유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강이한은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이혼부터 꺼내는 그녀가 낯설기만 했다.예전의 유영은 삐져 있다가도 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면 다가와서 그의 화를 먼저 달래주었다. “더 할 얘기 있어?”고개를 돌린 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유영은 고개를 저었다.“없어.”등 뒤에서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영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익숙한 그의 향기와 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하자 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어 그의 귀뺨을 쳤다.“더러우니까 저리 꺼져.”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남자는 실망과 분노가 뒤섞인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은 힘껏 그를 밀쳤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에 혐오의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에 한지음이 찾아와서 임신했다고 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매번 그와 마주할 때면 그때 의기양양하게 지껄이던 한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내가 잘해줬잖아.”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어떤 걸 말하는 거야?”“꼭 그렇게 해야 했어?”남자가 재차 그녀를 다그쳤다.지금 강이한은 납치 사건의 범인이 유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10년을 함께한 아내가 한지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 눈을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