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은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수선한 분위기를 직감했다. 문을 열어준 장숙이 긴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와계십니다.”유영은 눈썹을 꿈틀했다.어제 쌀쌀맞게 대했으니, 어젯밤에 당장 쳐들어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영숙은 소파에 앉아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은 매번 진영숙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시종처럼 납작 엎드려서 비위를 맞춰주었다.그때는 강이한을 사랑했기에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서 핸드백을 소파에 던졌다.“아줌마!”“예, 사모님.”장숙은 다급히 다가와서 진영숙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집안에 굿을 좀 해야겠어. 여자 하나 잘못 들였더니 망조가 든 건지 사고가 끊이지를 않아.”유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그리고 냉랭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노려보았다.장숙은 난감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유영은 조용히 외투를 벗더니 바닥에 던졌다.진영숙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영을 바라보았다.얘 요즘 뭘 잘못 먹었나?“지금 뭐 하자는 거니?”“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집에 망조가 들었는지 재수 없는 일이 끊이지를 않네요.”유영은 진영숙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유영은 시어머니가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이유영 너 미쳤어?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들먹여?”“세강의 며느리 자리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이한이랑 이혼하고 싶어?”집으로 들어서던 강이한은 그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그를 발견한 장숙이 다급히 다가왔다.“도련님 오셨어요?”진영숙은 아들을 보자마자 표정을 바꾸고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아들에게 말했다.“넌 마누
2층으로 올라온 이유영은 걸음을 멈추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이한은 그녀에게서 낯선 분노를 느꼈다.이렇게 작고 여린 여자에게 이런 모습도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유영아, 우리….”탁!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러세웠다.“이유영!”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홀연히 그를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1층으로 다시 내려온 이유영은 곧장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진영숙에게로 다가갔다.이유영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기세등등하던 진영숙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너… 뭐 하자는 거야?”얘 갑자기 왜 이래?이유영은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벗어 진영숙의 얼굴에 던졌다.“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강이한이 달려가서 말리려고 했지만, 유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뭔지 알아요?”“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진영숙이 빽 소리를 질렀다.2년 전부터 유영은 항상 이 팬던트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싸구려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진영숙에게 얼마나 훈계를 들었는지 모른다.진영숙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세강의 체면을 깎는다고 시비를 걸어왔다.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당연히 모르시겠지! 이 안에 당신 손자의 유골이 들어 있어!”모두가 입을 다물었다.“나한테 애도 못 낳는 병신이라고 욕했었지? 그러면서 비열하게도 내가 먹는 음료수에 더러운 약을 타서 내 아이를 죽였잖아. 그 아이도 당신 손자인데 왜 그랬어?”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대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그는 경악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진영숙이 순간 당황하더니 시선을 회피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구나.”“몰랐다고? 신안병원 진헌수 과장이 당신 중학교 동창이잖아. 그 사람 와이프 불러서 삼자대면이라도 해야 인정할 거야?”“너… 너….”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간 유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진영숙은 처음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이를 유산하게 된 배후에 시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유영은 강이한에게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때는 바보처럼 자신이 부족해서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때의 유영은 자신이 노력하면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고 믿었다.부모님과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본 적 없었기에 어렵게 이룬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든 참고 인내했지만, 현실은 참혹했다.유영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강이한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있는 유영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혔다.“유영아.”유영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남자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왜 전에는 말 안 했어?”“하!”유영은 싸늘한 비웃음을 터뜨렸다.친동생도 아닌 강서희에게 말 한마디 했다고 전화해서 다짜고짜 따지는 사람에게 네 가족이 우리 아이를 죽였다고 말한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을까?강이한의 그런 애매한 태도 때문에 진영숙의 괴롭힘은 심해져만 갔다. 만약 강이한이 이 일로 엄마를 원망했다면 그가 없을 때 찾아와서 더 심하게 괴롭혔을 것이다.강이한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유영의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상대가 뭐라고 한 건지, 강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말을 마친 강이한은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한지음이 발견된 것이다.“지음이 찾았대. 나 잠깐 나갔다 올게.”“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강이한을 빤히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강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뒤, 부드러운
집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며칠째 그녀는 언론과 네티즌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고 있었다. 세강은 자연스럽게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그래서 안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들조차도 악질 네티즌들이 이렇게 변태적인 행보를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모님, 이걸 어떡할까요?”집사와 고용인들은 연민과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영은 우아하게 수저를 내려놓고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절제된 단아함이 몸에 배긴 손놀림이었다.평소에도 차분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유영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경찰에 신고하죠.”“신고요?”“당연한 거 아닌가요?”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네티즌들이 보낸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신고까지 한다면….”집사는 말끝을 흐렸지만 아마 경찰이 나서도 악질 네티즌들을 모조리 처벌하기엔 무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인터넷에 숨어 횡포를 가하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예요.”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이들은 한지음이 매수한 심부름꾼들이었다.한지음은 공인도 아니었고 두터운 팬층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납치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다지만 그녀를 위해 세강의 안주인에게 이 정도로 협박을 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이한은 며칠째 외박 중이었다.상대는 지금쯤 유영의 정신이 온전치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이런 무리수를 강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이번 생의 유영은 전생처럼 나약하지 않았다.아직은 기댈 곳이 남편밖에 없는 전직주부에 불과하지만 유영은 자신의 방식대로 반격해 나갈 것이다.“알겠습니다.”집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경찰에 연락했다.하루 사이에 유영은 택배를 수십 개나 받았다.거실에는 온갖 동물 시체와 면도칼, 혈서 같은 것들이 스산하게 쌓여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그것들을 보고 겁에 질려 며칠 밤을 잠들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이들의 목적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유영은 피아노실에서 빗소리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긴 생머리를 그대로 드리우고 피아노에 심취한 그녀의 모습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은 조용히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리가 멎고 유영이 고개를 돌렸다.“언제 왔어?”“10분 정도 됐나?”남자는 며칠 전 집을 나가기 전 입은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집에 안 돌아온 그 시간 동안 병원에서 한지음의 옆을 지킨 모양이었다.그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유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거실에 쌓인 물건들 봤어?”“왜 버리지 않고 그대로 뒀어?”“누가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남자의 눈빛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그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를 비난하던 네티즌들이 이런 미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그가 아는 유영은 겁이 많은 여자였다.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그는 유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최근 며칠 사이 그녀가 보여준 행보는 그가 아는 유영이 아니었다.그래서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영이 기댈 곳은 강이한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유영에게서는 끝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보냈는지 알아?”“몰라.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어.”“신고했어?”강이한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가장 먼저 남편을 찾지 않고 경찰에 신고 하다니!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다.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영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유영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경찰에서는 뭐래?”“조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야.”“왜 나한테 연락도 하지 않았어?”예전에는 사소한 일 하나로도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하던 여자였다.유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에는 매끄럽던 피부가 많이 거칠어진 것이 느껴졌다.그녀가 웃으며
강이한의 분노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집사가 문을 노크했다.“도련님, 나서원 씨께서 오셨습니다.”“서재에서 기다리라고 해요.”유영은 나서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강이한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서원은 비밀리에 개인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돈만 충분하면 그가 파내지 못할 증거는 없었다.수많은 재벌 사모님들이 남편의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오늘 나서원이 뭘 가지고 왔는지 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그 정황 증거들이 전생에 강이한을 완전히 그녀에게서 등 돌리게 한 발단이 되었다.강이한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더 이상 이혼 얘기 꺼내지 마.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말을 마친 그는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유영은 울컥하는 마음에 그를 잡았다.“잠깐만.”“더 하고 싶은 얘기 있어?”“날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남은 신뢰가 있기는 해?”전생의 유영이 가장 궁금했던 문제였다.이미 한번 겪었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은 그녀에게 두렵고 잔인했다.이 남자가 곧 자신에게 완전히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무섭고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강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유영은, 이 순간을 기억에 새겨 넣으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줄곧 당신을 믿었어. 물론 지금도.”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유영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이대로 멈추고 싶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전생의 극본대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청하 병원 VIP병동.온몸에 붕대를 두른 한지음의 모습은 처참했다.병실에는 강서희가 와 있었다.그녀는 음침한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말했다.“내가 그년을 너무 얕잡아 봤어. 죽더라도 날 물고 늘어질 줄이야.”그들의 처음 계획대로라면 유영은
얇은 A4용지가 피부를 긁고 빨간 상처를 냈다.유영은 절망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본 강이한은 흠칫하며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표정을 바꾸고 실망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에게 정말 실망했어.”유영은 다시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바깥에 내리는 비를 닮은, 그의 실망보다 더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강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쓰렸다.“왜 그랬어?”그가 물었다.그가 이 질문을 내뱉는 순간 이유영도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그는 절대 모를 것이다.유영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정성 들여 가꾼 정원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에 모든 것은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그녀는 줄곧 이곳을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생각하고 아꼈다.이제야 그 생각이 큰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그녀를 믿는다고 했던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정황 증거를 들이밀며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뭘 말하는 거야?”“이유영!”남자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예전과 같이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럴수록 그는 혼란스럽고 절망에 빠졌다.“왜 이렇게 변했니?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당신의 그 복수심 때문에 한 여자가 인생을 망쳤어. 한지음이 그렇게 미웠어?”세강의 직원과 협력사 직원들, 세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강이한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유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표현들보다 그녀는 더욱 잔인하고 냉혹했다.강이한의 실망은 깊어져만 갔다.그가 아는 이유영은 어디로 간 걸까?이렇게 예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 거지?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나라고 확신하나 봐?”“더 할 말 있어?”적어도 강이한은 이 증
유영의 고개가 돌아갔다.입술이 터지며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진영숙은 순간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너 그게 무슨 눈빛이야? 너 때문에 세강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네 주제에 감히 이혼을 얘기해? 버려도 우리가 버려야지!”진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희가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엄마, 진정해. 화내면 몸만 망가져.”“얼마면 되니?”진영숙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유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우습고 역겨웠다.유영이 물었다.“얼마를 줄 생각인데요? 우리 결혼해서 3년을 살았어요. 부부 공동재산이라는 게 있는데 어머님 재력으로 감당이 될까요?”“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재산을 분할해? 너 시집와서 한 게 뭐가 있어? 이한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고 놀고 먹었으면서!”“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제가 집에서 내조를 열심히 했으니까 그 사람이 밖에서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너….”진영숙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처음부터 순진한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속은 엉큼해 가지고! 내가 그렇게 말렸건만 믿지를 않더니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유영은 진영숙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그와 서로 사랑할 때는 뭔가를 바란 적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어차피 사랑을 잃었으니 챙겨야 할 건 다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본모습이라니요? 그 사람한테 갖다 바친 제 10년은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더 손해 아닌가요?”“네 청춘이 얼마나 한다고!”“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신 아들이 좋아서 한 결혼이에요!”진영숙과 강서희는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은 서로 멍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이곳에 오기 전에는 강이한이 그녀에게 실망한 기회를 틈타 돈으로 유영을 쫓아버릴 생각이었다.여론에 그만큼 시달렸으니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강이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쓰라린 마음이었던 것이다.“유영이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만나고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사실...”“제가 빚진 거예요.”정국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한이 말을 잘랐다.그는 정국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고 강이한도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결국 이유영의 눈에 다른 사람의 빛이 비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휴...”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은 한 번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깨달음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지금의 강이한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깨달았고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게 된 것이다....소은지는 강이한이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오후에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은지였기 때문이다.“후회해?”소은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이한에게 물었다.“...”한지음 일로 후회하냐는 것이었다. 소은지는 강이한과 한지음의 관계를 가장 혐오했다. 소은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에 수많은 부부의 파탄을 목격하면서 자연히 불륜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그런 소은지가 강이한에게 후회하느냐고 묻자, 강이한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질문, 몇 번이나 해봤어?”“...”소은지의 머릿속에 설선비가 떠올랐다.당시 그 사건은 청하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고 만약 소은지의 변호가 없었다면 설선비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소식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우연히 식당에서 설선비를 만난 소은지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후회하니?”설선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은지 씨,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지금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어떤 절망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절망은 마치 끝없이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혹한 절망은 없었다.조용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강 선생님, 이만 가주세요. 선생님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악몽과 마주할 때 쉽게 맞설 수 없다. 어린 월이도 마찬가지였다.오는 길 내내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월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른 채 망연히 서 있었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결국, 그는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서는 순간, 유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 아가씨, 이제 괜찮아요.”“으흑, 으흑...”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소리에 강이한의 마음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그저 아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아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강이한은 그저 아이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고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아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한 아버지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복도 끝에 정국진이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강이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듯했다.상처 입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정국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이가 아직도 너를 무서워해?”“...”‘무서워한다'는 단어가 강이한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과거의 강이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다 제 잘못이에요.”그는 깊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강이한의 잘못이 확실했다.하지만 마냥 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강이한은 월이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강이한은 아이가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소중히 자라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최고의 스승이셨고 외삼촌 또한 훌륭한 삼촌이었으며 엄마 역시 다정한 어머니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의 삶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한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마치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유씨 할머니, 유씨 할머니?”아이는 강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소중한 바비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 인형은 이유영을 똑 닮아 있었다. 이유영을 볼 수 없는 아이는 온 마음을 그 인형에 의지하고 있었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아는 아이와 달리, 그는 무엇을 지켜냈던가?아이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강이한의 가슴은 다시금 깊은 고통에 잠겼다.아이를 돌보는 유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아가씨.”“나쁜, 나쁜 사람!”유 아주머니도 강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곳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정 선생님과 사모님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정씨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다시 만나게 하는 거냐고, 차라리 바깥 여자의 아이와 함께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유 아주머니는 아이를 꼭 껴안고 강이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고통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장 가까운 딸에게 원수처럼 취급받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월이를 통해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그는 아이에
강이한의 가슴은 칼날에 도려내듯 아려왔다.영원히 기다릴 수 없는 이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둬야 하는 고통을, 이제야 강이한은 깨달았다.한때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자리는 이유영에게는 비극이었다.이유영의 모든 기다림을 강이한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그렇기에 지금, 이유영의 냉담함을 견뎌내는 고통은 그만큼 절망스러웠다.“이제 그만 울어, 응?”“엄마가 보고 싶어요.”작은 아이는 울먹이며 강이한을 바라보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강이한은 눈가에 맺힌 씁쓸함과 고통을 감추려는 듯 눈을 감았다.강이한 역시도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우천시를 떠난 후, 그는 이유영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3개월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서주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대부분 마무리되었다.그 일들은 서주와 파리 엔데스 가문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정국진뿐이었고 나머지는 강이한이 미쳤다고 여겼다.강이한은 다시 파리에 오게 되었다.강이한의 방문에 임소미는 여전히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태도와 분위기에서 분명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임소미는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위층에 있어.”임소미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지난번처럼 아이를 보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고맙습니다.”“...”강이한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임소미는 이것이 아이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에 더욱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강이한에게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며칠 동안,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염 선생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며칠이라도 모두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임소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이 여전히 호전되지 않는다면, 오늘 강이한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해
강이한은 아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착하게 있어야 해.”“아빠, 엄마 찾으러 가는 거야?”“...”아빠, 엄마...그 두 단어가 온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강이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는 온유의 아빠였고 이유영은 온유의 마음속에서 엄마였다.월이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어쩌면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까?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과거와 현재의 악연, 그리고 연서까지... 이 모든 것이 쌓인 이상,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온유야.”강이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답답함을 억눌렀다.온유는 멍한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아빠?”“엄마는 잊어.”“...”아이의 눈에서 순간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강이한의 눌러 두었던 아픔이 다시 치밀어 올라 목이 메었고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엄마는... 잊어, 응?”이유영은 엄마가 아니었고 이제는 영원히 엄마가 될 수 없었다.강이한은 온유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었다.“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아요?”“...”“엄마는 동생만 원하는 거죠?”작은 아이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강이한은 알고 있었다.온유는 태어난 이후로 한지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박연준의 계략 때문이었다.온유에게 엄마는 항상 이유영이었다.박연준의 가장 잔혹한 행동은 온유에게 화살을 돌렸다는 건데, 하지만 강이한은 박연준이 온유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온유를 보았다면 아마도...돌이켜보면 박연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강이한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작지 않았다.“잊어, 응? “이 아이가 이유영을 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고통이 뒤따랐다.과거, 한지음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 때문에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이한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오자, 늘 강이한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이정과 신시욱 모두 한지음이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지음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각막을 기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유영의 각막을 기증하겠다고 말했지만 모두 그가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수술실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 기간 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누구도 강이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강이한이 직접 이유영을 감옥에 보냈을 때, 그들은 한지음이야말로 강이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이제야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분명해졌다.우천시에서 이유영은 침착하고 태연했으며 한지음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결심을 굳혔다. 만약 염 선생의 약으로 회복이 되지 않을 경우, 이유영을 위해 본인이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이유영 씨는...”생각에 잠긴 이정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 결국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온유 아가씨와 오셨습니다.”“...”온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정의 가슴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험난했던 과거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병원에서 이유영이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강이한이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연서의 존재마저도 온유와 월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서는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다.“들어오라고 해.”강이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썹에는 떨쳐낼 수 없는 긴장감이
“반드시 확인해야 해요.”현우의 불확실한 대답에 소은지의 답답했던 가슴이 순간 목까지 차올랐다.지금의 전기봉은 비록 인장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아직 핵심 인물임은 분명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실수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현우는 더욱 깊은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봤다. 소은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고 소은지는 강렬한 현우의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윙윙윙.”소은지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현우의 휴대전화가 진동했고 현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현우는 굳은 얼굴로 일어섰고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더욱 날카롭고 위엄 있어 보였다.그 기세에 소은지의 마음도 거세게 요동쳤다.“알았어.”현우는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현우의 시선은 소은지에게로 향했고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잠깐 나갔다 올게요.”“저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요.”소은지는 어색하게 말했다.최근 몇 달 동안 늘 바빴던 현우이기에 굳이 어디 가는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소은지를 향해 말했다.“그 사람, 시험하려 하지 마요.”현우는 지금 소은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엔데스 회장이 돌아가기 전, 현우는 항상 본가에 머물렀지만 소은지는 계속해서 엔데스 명우와 대립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된 지금, 소은지가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엔데스 명우의 한계를 건드릴 것이다.설선비 사건이 채 마무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설유나마저 목숨을 잃었다.엔데스 명우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소은지에게 돌렸고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의 말에 현우의 미간은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소은지가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멀리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
정국진과 임소미는 부모로서 이유영이 강이한과 박연준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 누구도 강이한이 이유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런 선택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유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우천시에 있었고 염 선생님의 약이 그녀에게 효과가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유영은 어떤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이에 그들은 마음을 조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유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임소미는 잠깐의 고민을 거친 후 정국진에게 말했다.“당신 지금?”“그건 그 사람이 유영이에게 빚진 것이에요!”정국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임소미가 이 문제에 대해 고집을 세우며 말했다.맞는 말이다.그것은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어떤 고통을 겪든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비록 독한 마음을 먹고 그렇게 말했지만 임소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퍼지고 있었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복잡했다.이유영이 강이한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 뛰어드는 것을 보았을 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괴로움을 느꼈다....소은지도 그 뉴스를 보았다.이유영과 박연준이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기사를 본 순간 그녀는 이유영이 머지않아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방에 들어올 때 마침 소은지가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모습을 본 엔데스 현우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가 돌아온 걸 보고 품속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유영이와 박연준 씨가 결혼했대요.”이 말을 하는 그녀의 시선은 한순간도 엔데스 현우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엔데스 현우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엔데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그것
“부러워?”옆에 있는 남자가 불만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그래, 부러워. 내가 저 여자였으면 좋겠어. 저 남자 정말 잘생겼어!”“알았어. 그만 입 다물어.”남자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이유영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 미소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오직 박연준뿐이었다.혼인 신고 절차는 복잡했지만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서류에 사인할 때 박연준이 이유영 대신 사인을 했다. 원칙상 이러면 안 되지만 이유영이 시각장애인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잘생긴 남자가 시각장애인과 결혼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당연히 축복할 만한 일이었다.시청에서 나온 박연준는 두 사람의 혼인 관계 증명서를 문기원에게 건넸다.“얼른 가봐.” 박연준의 목소리는 깊고 무게가 있었다. 문기원은 박연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아직 3일이 남아있지만 박연준은 이유영의 눈이 더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곧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기에 돌아가기 전에 그들을 막는 장애물은 모두 제거해야 했다.“유영아, 결혼 축하해.” 박연준이 이유영의 귀에 가볍게 입맞춤하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유영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이유영이 대답했다.“결혼 축하해!”그 다섯 글자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고 예리한 비수처럼 박연준의 가슴에 박혔다. 가슴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지만 박연준은 그 고통과 씁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함께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그는 이를 악 물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낼 것이다.그 누구도 미래에 이유영이 박연준와 강이한 사이에서 어떤 소용돌이를 일으킬지 몰랐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의 눈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이유영이 눈을 회복한 후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박연준와 강이한은 반드시 그녀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이다....박연준은 이미 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