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외박할 줄 알았던 강이한은 저녁 열 시가 되어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욕실에서 씻고 나온 유영은 나갔을 때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강이한을 보자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술 냄새 때문에라도 도저히 그와 한방을 쓰고 싶지 않았다.“거기 서!”문고리를 잡는데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전생에 저런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었는데 지금의 유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강이한은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이혼부터 꺼내는 그녀가 낯설기만 했다.예전의 유영은 삐져 있다가도 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면 다가와서 그의 화를 먼저 달래주었다. “더 할 얘기 있어?”고개를 돌린 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유영은 고개를 저었다.“없어.”등 뒤에서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영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익숙한 그의 향기와 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하자 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어 그의 귀뺨을 쳤다.“더러우니까 저리 꺼져.”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남자는 실망과 분노가 뒤섞인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은 힘껏 그를 밀쳤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에 혐오의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에 한지음이 찾아와서 임신했다고 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매번 그와 마주할 때면 그때 의기양양하게 지껄이던 한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내가 잘해줬잖아.”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어떤 걸 말하는 거야?”“꼭 그렇게 해야 했어?”남자가 재차 그녀를 다그쳤다.지금 강이한은 납치 사건의 범인이 유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10년을 함께한 아내가 한지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 눈을
유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강이한은 계속 해서 말했다.“당장 이혼 소송 철회해.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세강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야.”아침부터 저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해댄 이유가 고작 이혼 소송을 철회하라는 말을 하려고?게다가 솔직히 그가 내건 조건은 꽤 유혹적이었다. 한지음은 어떻게 하려고 저런 조건을 제시한 걸까?유영은 그들 사이에 남은 게 돈밖에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결국 여기까지 왔구나….그녀는 애써 느긋하게 손을 뻗어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초췌한 얼굴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절세의 외모라도 숙취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마치 선심 쓰듯이 말하는 그 태도가 좀 우습네.”두 사람 사이에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강이한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불쾌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그 증거들 다 봤어?”나서원이 가져온 출입금 기록을 말하는 것 같았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며 물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고작 그것들로 협박하는 건가?강이한은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드디어 받아들였다.그들은 고등학교 때 만나 사랑을 싹틔웠고 줄곧 결혼까지 함께했다. 수많은 장애물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놓아주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내가 아는 유영이는 현명한 여자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 거야.”그는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녀가 이혼 소송을 제기한 날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금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방치해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그가 뿌린 서류에 스쳐 얼굴에 상처까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내가 끝까지 이혼을 고집하면 나를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말로 들리네. 맞아?”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그녀는 조용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현재 상황을 지켜보면 여론은 점점 더 뜨거워질 것이다.한번 그것을 경험했기에 유영은 또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강이한이 이혼하지 않고 버티는 한, 그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었다.그녀는 한지음이 시력을 잃었다는 것도 어쩌면 거짓말일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들은 유영을 미치게 만들면 강이한이 그녀를 버릴 거로 생각하는 듯했다.그녀는 일단 피해 있으면서 반격을 준비하기로 했다.“내가 데려다줄까?”“아니야. 너도 바쁜데 일해야지. 그리고…”잠시 고민하던 유영이 말했다.“만약 이혼 소송으로 강이한이 너한테 협박하거나 하면 무리해서 그 사람과 맞설 필요는 없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난 그 인간 두렵지 않아.”소은지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무서워서 그래.”강이한은 세강의 오너로 부임한 뒤로 외부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친구가 다치는 건 싫었다.“끝까지 도와줄게. 걱정 마.”이 소송이 힘들어질 건 알지만 소은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을 느꼈다.공항으로 가는 길.유영은 진영숙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이유영,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 소송이야? 당장 소송 취하 안 해?”이 시어머니는 대체 어떤 여자가 와야 아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할까? 아마 그녀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재벌 사모님들 사이에서 아들 자랑만 하고 다니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한지음이랑 스캔들이 난 것도 모자라 이혼 소송까지… 요즘은 바깥에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힘들었다.“당장 본가로 와.”유영이 말이 없자 진영숙은 명령하듯 그녀를 다그쳤다.유영은 차창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맡으며 싸늘하게 되물었다.“거길 제가 왜 가요? 또 제 얼굴에 수표 한 장 던져주려고요?”“이유영
유영은 청하시에 폭탄을 투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청하일보는 ‘세강의 안주인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 제기’라는 뉴스가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첨부된 사진에는 사건이 있기 전, 유영이 사인한 이혼 서류와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한 필적 감정서가 포함되어 있었다.시간은 한지음 납치 사건이 있기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유영이 한지음을 납치했다던 여론은 점점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그녀를 비난하던 여론은 이혼까지 준비한 사람이 불륜녀를 납치하고 폭행할 이유가 없다며 떠들어댔다.사람들은 남편에게 실망한 한 여자가 이혼까지 제기한 마당에 그런 과격한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떠들어댔다.그리하여 사람들은 강이한의 사생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지음 납치 사건은 강이한의 뭇 애인들 중 한 명이 못 참고 저지른 일이 아닌가 하는 여론도 돌기 시작했다.한지음과 세강그룹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사무실에서 회의를 진행 중이던 강이한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줄곧 꺼진 상태였다. 저택에 연락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남자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조 비서!”“네, 대표님.”“당장 그 여자를 찾아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거대한 폭탄을 던지고 사라진 발칙한 여자! 강이한은 입술을 앙다물었다.한편, 강서희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한지음은 눈을 싸맸던 붕대를 제거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강서희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굳었다.“아직은 조심해야지.”지금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다.한지음이 창백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어떻게 됐어? 그 여자 지금 어딨어?”강서희의 표정을 보니 일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항상 단정하게 찰랑이던 머리가 부스스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온 세강 일가 사람들이 유영을 찾고 있었다.한지음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유영에게 더 큰 선물을 준비하고 터뜨릴
강이한은 그대로 본가를 떠나 회사로 돌아왔다.비서인 조형욱이 조심스럽게 그의 사무실을 노크했다.“대표님.”“어떻게 됐어?”강이한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기사는 거의 다 내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났기에 기사를 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세강은 기사를 보자마자 각 언론사에 압력을 넣어 기사를 내렸다.하지만 워낙 충격적인 기사였기에 이러쿵저러쿵 의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남자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다시 물었다.“이유영은 찾았어?”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사가 나간 순간부터 그녀를 찾고 있었지만 청하시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목격되지 않았다.예전처럼 쇼핑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종일 핸드폰도 꺼지고 연락이 닫지 않았다.조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아직 못 찾았습니다.”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비록 여론은 그녀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지만 악질 네티즌들이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조형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혼자 남게 되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여보세요, 말씀하세요!”“알았어. 지금 가지.”전화를 끊은 그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기사는 모두 내려갔지만 소문은 이미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전국 네티즌들이 강이한과 한지음의 추잡스러운 사생활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세강은 그나마 힘으로 찍어 누르면서 소문을 잠재웠지만 한지음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진영숙은 바깥에 외출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모두가 유영을 찾고 있었다.한지음, 세강의 일원들, 그리고 강이한까지!하지만 유영은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처럼 며칠째 아무런 연락도 닿지 않고 있었다.결국 강이한은 소은지를 찾아갔다.“그 사람 지금 어딨습니까?”날이 선 말투와 짜증스러운 표정. 아무리 유영의 친구라도 그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소은지가 시치미를 떼면 협박을 가해서라도 소식을 알아낼 생각이었
소은지는 외투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린 나이에 수석 변호사가 된 그녀는 또래의 여자들보다 강한 카리스마를 풍겼다.그녀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커피잔을 들어 강이한의 머리에 들이부었다.“이건 유영이 대신이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는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유영이 세강에 시집가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친구로서 참을 수 없었다.남편은 바깥으로 돌고 시어머니는 갖은 구박에 시누까지 수시로 시비를 거는 지옥 같은 생활을 유영은 3년이나 계속했다.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던 운전기사는 손에 땀을 쥐었다.항상 온화하고 큰소리 한번 낸 적 없는 사모님이었는데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거지?차로 돌아온 강이한은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출입국에 연락해서 그 여자 출국 기록 조회해.”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말도 없이 떠나버리다니.7년을 연애하고 3년을 부부로 사는 동안 유영은 한 번도 그의 허락 없이 홀로 청하를 떠난 적 없었다. 가끔 여행을 떠날 때도 그들은 함께였다.그런데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혼자 해외로 떠나 버리다니!이 일이 있기 전까지 강이한은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지금 가장 우선시 된 일은 유영을 찾는 일이었다.출입국 기록을 미리 조회하지 않은 건 그녀가 여전히 청하에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조형욱은 일 처리가 빠른 직원이었다.두 시간이 지나 조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대표님.”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지자 강이한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어디로 갔대?”“그게… 출입국 기록이 삭제되어 행선지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뭐라고?”“공항 CCTV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행선지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대체 기록까지 지우고 어디로 간 걸까?강이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분노가 서렸다.아내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분한데 누군가가 그녀의 행적을 숨겨주고 있다? 유영에게 이런 인맥이
강이한은 3개월 동안 유영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그의 주변인들은 매일을 긴장감 속에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조형욱은 해외 언론에 실린 기사에서 뜻밖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흐릿한 옆모습만 찍힌 사진이었지만 유영이 분명했다.그는 바로 강이한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남자는 움찔하더니 다급히 핸드폰을 가로챘다.사진을 확인한 남자의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조형욱이 건넨 핸드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전화를 받았다.조형욱은 새로 산 핸드폰을 아련하게 바라보았지만 상사에게 불만을 얘기할 용기는 없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무슨 일이죠?”“당장 본가로 좀 와.”수화기 너머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본가에서도 해외 기사를 본 것 같았다.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바빠요.”지금 본가로 돌아가면 또 잔소리 폭탄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진영숙의 분노한 고함이 고막을 찢을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고집 그만 피우고 걔랑 이혼해!”현재 여론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세강의 안주인이 남자랑 눈이 맞아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여론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3개월 전, 수많은 기자들이 유영을 인터뷰하러 찾아다녔지만 유영은 홀연히 사라졌다.모두가 그녀를 찾고 있을 때, 이런 폭발적인 기사가 올라올 줄이야!진영숙도 그 기사를 보고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다. 평소에 순하고 나약하기만 하던 며느리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이 폭탄 기사에 비하면 예전 기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이혼, 불륜, 납치사건 그 모든 기사를 능가하는 스캔들이었다.강이한은 과거 전국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재벌 여식들이 줄을 서서 강이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완벽했던 남자를 버리고 외국인과 함께 사랑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집중하는 모습은 엄마를 많이 닮아 있었다.유영은 외국으로 나와서 이렇게 빨리 직장을 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딸깍!라이터 소리와 함께 남자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외삼촌, 의사가 금연하라고 했잖아요.”“그래, 그래. 알았어.”남자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유영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파리로 온 3개월은 그녀에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의 인생에도 수많은 변화가 찾아왔다.그는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외할머니는 상심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외삼촌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유라가 너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을 텐데.”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정유라는 정국진의 딸이자 유영의 사촌동생이었다. 정유라는 재벌가에 태어났지만 경영에는 취미가 없고 의학 연구에 매진했다.정국진은 그런 딸을 매우 못 마땅해했는데 유영이 나타나면서 그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외삼촌도 그만해요. 저 이거 빨리 처리해야 한단 말이에요.”외삼촌과 상봉한 뒤,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말이었다.“그래, 일해.”쾅!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이어서 비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분이 꼭 회장님을 봬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셔서….”유영과 정국진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강이한이었다. 그의 뒤에는 조형욱이 따르고 있었다. 몇 달 안 본 사이에 그는 표정이 많이 험악해져 있었다.그에게서는 진한 살기마저 느껴졌다.강이한을 알아본 정국진이 인상을 찌푸렸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회장님,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끌어내겠습니다.”비서가 용기를 내서 강이한에게 다가갔지만,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
벤츠 옆에 서 있던 배천명이 깊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소은지는 배천명의 공손한 태도에 잠시 멍하니 말을 잇지 못했다.엔데스 명우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이야.“일곱째 사모님...”“비켜.”소은지는 차갑게 두 글자를 뱉었다.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힐끗 바라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차로 향했다.차 문을 열려던 순간, 배천명이 공손하게 다가와 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의 행동은 오히려 소은지의 화를 돋웠다.“여섯째 도련님께서 이미 한 시간째 기다리고 계십니다.”배천명의 목소리는 공손하면서도 냉정했다.한 시간? 소은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현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두 알게 됐을 터였다.결국, 소은지는 체념한 듯 엔데스 명우의 차에 올랐다.겉보기에도 웅장했던 차량 내부는 기대 이상으로 널찍하고 화려했다.차에 올라탄 순간, 소은지는 목덜미에 닿는 강한 힘을 느꼈다. 곧이어 소은지의 시야가 휘청거리더니 뒷좌석에 강하게 눌렸다.남성 특유의 날카롭고 위협적인 기운이 소은지를 완전히 에워쌌다. 소은지는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으로 엔데스 명우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잔혹함을 마주하며 소은지의 입가에는 도발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여섯째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지? 얼마나 바람둥이인지 파리 사람들한테 더 확실히 각인시키고 싶은 거야?”“소은지.”엔데스 명우는 이를 악물며 무겁게 소은지의 이름을 불렀다.소은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응수했다.“난 다른 여자들과 달라. 잘 생각해.”“어떻게 다르다는 거지?”평소도 차갑던 엔데스 명우의 기운은 소은지의 말을 들은 뒤 더욱 서늘해졌다.“난 네... 제수씨야.”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에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폭발할 듯 피가 서린 눈빛으로 소은지를 노려보았다.그 말은 엔데스 명우의 신경을 강하게 건드렸다.“너... 현우랑 잤어?”그의 목소리는
그렇다.이유영은 아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소은지는 이유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믿기 어렵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체념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큰 선물을 강이한에게 줄 수 있다면, 이제 내가 더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그 선물은 신지수와 신씨 가문이었다.서주에서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서주 사람들은 물론이고 파리 지역 사람들조차 다 알 정도였다.그러니 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기 전부터 강이한에게 조금의 사정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유영은 신씨 가문이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그러므로 지금… 이유영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단지 그 십 년의 시간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그게 소은지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 십 년이 만약 소은지의 인생에 일어났더라면 소은지도 이유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십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그렇게 오랜 세월 쌓아온 감정이 결국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소은지도 마찬가지다.시간은 이미 침전되었고 그 속에 얽매이다 보면 박연준이든 강이한이든 결국 마주할 것은 더 거센 파도일 뿐이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이유영의 평온함을 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결국 그들 손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었다.“도대체 신씨 가문에 뭘 준 거야?”소은지는 호기심에 이유영에게 물었다. 이유영이 도대체 신씨 가문에게 뭘 주었는지 너무 궁금했다.강이한이 어떤 사람인지 소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지금껏 신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일은 피해 왔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었다.그래서 소은지는 더욱 궁금해졌다.도대체 신씨 가문에 뭘 줬길래 강이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