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지는 외투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린 나이에 수석 변호사가 된 그녀는 또래의 여자들보다 강한 카리스마를 풍겼다.그녀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커피잔을 들어 강이한의 머리에 들이부었다.“이건 유영이 대신이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는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유영이 세강에 시집가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친구로서 참을 수 없었다.남편은 바깥으로 돌고 시어머니는 갖은 구박에 시누까지 수시로 시비를 거는 지옥 같은 생활을 유영은 3년이나 계속했다.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던 운전기사는 손에 땀을 쥐었다.항상 온화하고 큰소리 한번 낸 적 없는 사모님이었는데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거지?차로 돌아온 강이한은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출입국에 연락해서 그 여자 출국 기록 조회해.”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말도 없이 떠나버리다니.7년을 연애하고 3년을 부부로 사는 동안 유영은 한 번도 그의 허락 없이 홀로 청하를 떠난 적 없었다. 가끔 여행을 떠날 때도 그들은 함께였다.그런데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혼자 해외로 떠나 버리다니!이 일이 있기 전까지 강이한은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지금 가장 우선시 된 일은 유영을 찾는 일이었다.출입국 기록을 미리 조회하지 않은 건 그녀가 여전히 청하에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조형욱은 일 처리가 빠른 직원이었다.두 시간이 지나 조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대표님.”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지자 강이한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어디로 갔대?”“그게… 출입국 기록이 삭제되어 행선지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뭐라고?”“공항 CCTV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행선지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대체 기록까지 지우고 어디로 간 걸까?강이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분노가 서렸다.아내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분한데 누군가가 그녀의 행적을 숨겨주고 있다? 유영에게 이런 인맥이
강이한은 3개월 동안 유영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그의 주변인들은 매일을 긴장감 속에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조형욱은 해외 언론에 실린 기사에서 뜻밖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흐릿한 옆모습만 찍힌 사진이었지만 유영이 분명했다.그는 바로 강이한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남자는 움찔하더니 다급히 핸드폰을 가로챘다.사진을 확인한 남자의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조형욱이 건넨 핸드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전화를 받았다.조형욱은 새로 산 핸드폰을 아련하게 바라보았지만 상사에게 불만을 얘기할 용기는 없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무슨 일이죠?”“당장 본가로 좀 와.”수화기 너머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본가에서도 해외 기사를 본 것 같았다.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바빠요.”지금 본가로 돌아가면 또 잔소리 폭탄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진영숙의 분노한 고함이 고막을 찢을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고집 그만 피우고 걔랑 이혼해!”현재 여론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세강의 안주인이 남자랑 눈이 맞아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여론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3개월 전, 수많은 기자들이 유영을 인터뷰하러 찾아다녔지만 유영은 홀연히 사라졌다.모두가 그녀를 찾고 있을 때, 이런 폭발적인 기사가 올라올 줄이야!진영숙도 그 기사를 보고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다. 평소에 순하고 나약하기만 하던 며느리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이 폭탄 기사에 비하면 예전 기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이혼, 불륜, 납치사건 그 모든 기사를 능가하는 스캔들이었다.강이한은 과거 전국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재벌 여식들이 줄을 서서 강이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완벽했던 남자를 버리고 외국인과 함께 사랑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집중하는 모습은 엄마를 많이 닮아 있었다.유영은 외국으로 나와서 이렇게 빨리 직장을 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딸깍!라이터 소리와 함께 남자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외삼촌, 의사가 금연하라고 했잖아요.”“그래, 그래. 알았어.”남자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유영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파리로 온 3개월은 그녀에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의 인생에도 수많은 변화가 찾아왔다.그는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외할머니는 상심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외삼촌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유라가 너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을 텐데.”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정유라는 정국진의 딸이자 유영의 사촌동생이었다. 정유라는 재벌가에 태어났지만 경영에는 취미가 없고 의학 연구에 매진했다.정국진은 그런 딸을 매우 못 마땅해했는데 유영이 나타나면서 그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외삼촌도 그만해요. 저 이거 빨리 처리해야 한단 말이에요.”외삼촌과 상봉한 뒤,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말이었다.“그래, 일해.”쾅!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이어서 비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분이 꼭 회장님을 봬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셔서….”유영과 정국진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강이한이었다. 그의 뒤에는 조형욱이 따르고 있었다. 몇 달 안 본 사이에 그는 표정이 많이 험악해져 있었다.그에게서는 진한 살기마저 느껴졌다.강이한을 알아본 정국진이 인상을 찌푸렸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회장님,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끌어내겠습니다.”비서가 용기를 내서 강이한에게 다가갔지만,
귀국하는 비행기 안.유영은 전용 소파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상처를 처리해 주고 있었다.두 시간 전, 강이한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정국진의 회사로 쳐들어왔다.그가 주먹을 휘두른 순간, 유영은 정국진을 밀치고 대신 그의 주먹을 받아냈다.강이한은 화들짝 놀라며 멈추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주먹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맞았다.분노한 정국진이 강이한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강이한이 데려온 경호원들이 달려 들어와 상황을 정리했다. 혼란을 틈타 강이한은 유영을 업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비행기에 오른 순간부터 지금까지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강이한은 창가에 앉아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좀 어때요?”전담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먹에 맞아 탈골된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유영이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조형욱이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사모님이 사라진 동안 대표님은 줄곧 사모님을 찾고 계셨습니다.”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강이한과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강이한은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고 법원 소환에도 불응했다. 그녀가 뭔가를 하려고 했지만 소은지는 자신이 알아서 한다며 그녀를 말렸다.강이한이 왜 자신을 그렇게 애타게 찾았는지 그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조형욱은 그녀가 말이 없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조 비서, 이리 와!”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호출했다.조형욱은 착잡한 눈빛으로 유영을 한번 보고는 다시 강이한에게로 다가갔다.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하면서 그의 주변인들은 하루도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강이한이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둘이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유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지?강이한은 피해자의 눈을 하고 그녀를 추궁하듯 노려보고 있었다.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욕설을 퍼붓기 시
저택에 도착하자 장숙과 집사가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장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영의 안색을 살피며 반겨주었다.몇 달이나 지났지만 여기는 바뀐 것 하나 없었다.그녀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질리도록 혐오스러웠다.유독 장숙만 제외하고.그녀는 장숙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강이한이 고개를 돌리자 그 희미한 미소마저 다시 사라져 버리고 차가움만 가득했다.“들어와!”유영은 말없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침묵할수록 강이한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강이한은 소파에 털썩 앉아 담배를 꼬나물었다.익숙한 담배 연기에 유영이 인상을 찌푸렸다.“이제 나랑은 말도 섞기 싫다 그거야?”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파리에서 다시 만난 뒤로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유영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변호사 통해서 해.”“이유영!”“우리 사이에 더 할 얘기가 남았다는 것도 난 신기해.”“그 인간 때문이야? 나한테 이혼하자고 한 게 다 그 남자 때문이냐고?”“그래. 마음대로 생각해.”주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급하게 그녀를 만날 생각에 강이한은 정국진의 신분에 대해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유영도 굳이 오해를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이 남자가 이대로 포기한다면 그건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남자는 벌떡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이대로 그녀와 계속 있다가는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았다.유영이 혼자 남게 되자 장숙이 다가와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왜 그렇게 도련님을 자극하세요. 이런다고 사모님한테 좋을 것 하나 없잖아요.”유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녀에게 물었다.“아줌마도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세요?”장숙은 입을 다물었다.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유영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여전히 시댁 식구들한테 공손하게 대했고 집안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강이한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진영숙은 유영과 마주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이렇게 노려보면 유영이 전처럼 기가 죽어 잘못을 빌 줄 알았는데 유영의 덤덤한 태도는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아줌마, 차 좀 내다줘요.”“예, 사모님.”예전이었다면 유영이 직접 차를 내왔을 것이다.진영숙은 유영을 하녀 부리듯이 부렸고 고용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은 그녀가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유영은 도도하게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애착 인형을 쓰다듬고 있었다.진영은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서 바로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집으로 와!”“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그래!”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이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사 보낼 테니까 본가로 돌아가세요.”“이한아!”진영숙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의 생각은 단순했다. 당장 강이한이 유영과 이혼하고 그녀를 이 집에서 내쫓는 것.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가하게 인형이나 쓰다듬고 있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자 유영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아, 괜찮아?”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있던 진영숙에게 들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유영이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세요. 여기 일 다 처리하면 돌아갈게요.”돌아간다고?그 남자 곁으로?아침에 봤던 기사가 떠오르자 진영숙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유영은 발작하기 일보 직전인 진영숙을 보고 전화를 끊었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이유영, 이 뻔뻔한 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아무리 남자에 눈이 멀어도 좀 그럴 싸한 남자를 만나든가! 그 남자 네 아빠뻘이야! 넌 수치심도 없니?”진영숙의 욕설에 유영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의도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하세요?”“너 뭐
집에 구급차까지 출동했는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니!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강이한은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그가 이유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그녀가 변한 걸까?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당신이랑 세강 일가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왜 이렇게 변한 걸까?만약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가 아는 이유영일지도 모른다.모든 걸 바쳐 사랑했지만 불길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날의 그 절망, 그리고 굳이 찾아와서 도발하던 한지음의 모습, 이런 걸 겪고도 어찌 마냥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일 수 있을까?“뭐 하는 거야? 이거 놔.”그녀가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남자가 그녀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유영은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실망스러운 걸까?변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감히 날 무시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짝!그가 억지로 그녀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하던 순간, 유영의 차가운 손바닥이 남자의 뺨을 때렸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항상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만 바라봐주던 그런 눈빛은 어느새 증오로 바뀌었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차로 밀어 넣으려던 순간, 호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강이한은 한 손으로 유영을 도망 못 가게 꽉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빠 언제 병원에 올 거야? 지음 언니가 엄마 병실 지키고 있어.”옆에서 듣고 있던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을 미치게 했다.“있던 병실로 돌려보내.”“안 간다는 걸 어떻게 그래. 급하게 오다가 엘리베이터에 손까지 끼여서 다쳤어. 휠체어에서 떨어졌는지 무릎까지 다 까졌더라고.”강이한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유영은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자고 있던 소은지는 친구가 해외에서 귀국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돌아왔어?”“응, 곧 너 있는 곳으로 갈 거야.”“그래. 오전에 반차 낼 테니까 이쪽으로 와.”“그래.”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집을 나섰다.이곳에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옷차림도 어제 입고 왔던 대로였다.그들이 사는 홍문동 아파트는 도심과 좀 떨어진 호화 아파트라 워낙 거대해서 바깥까지 나가서 차를 잡아야 했다.길가에서 30분이나 기다렸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차가 잡히지 않았다.이때, 외제차 한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더니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유영이 짜증을 내려던 순간, 반쯤 열린 차 창밖으로 강이한이 싸늘한 얼굴을 내밀었다.“타.”명령조가 다분한 말투였다.유영이 거절하려는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 않아. 예전에는 당신 봐서 주변인들한테까지 압력을 넣지 않았어. 그래도 10년 같이 산 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지금 무슨 말을 하지?”분명한 협박이라는 건 유영도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미친 행세를 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결국 유영은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어디로 가는데?”그녀가 물었다.강이한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병원.”병원 얘기가 나오자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하나도 깨달은 게 없었다.시간만 길게 연장되었을 뿐, 지난 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유영은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물었다.“거기 가서 뭘 어쩌라고?”강이한이 말했다.“당신이 납치범을 사주한 사실을 지음이가 알았어.”“그래서?”“그렇게 과분한 걸 바라지는 않아. 사과만 한다면 그냥 넘어가겠대.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니!유영은 어처
과거에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겼으면서 이제 와서 단 하나의 일로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생각하다니?갑자기, 허리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순간, 이유영이 강이한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고 그와 동시에 키스가 마치 폭풍처럼 이유영을 휘감았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강이한의 손길은 더욱 강하고 거칠게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숨결에는 알 수 없는 절망과 말을 잃은 듯한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마치 자신을 뼛속 깊이 각인시키려는 듯한 격렬한 집착이 느껴졌다.강이한의 따뜻한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리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그렇게 해줄게.”서주의 혼란이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덫이라면, 강이한은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줄 각오를 다졌다.만약 이것이 이유영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강잏나은 모든 걸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다.“이건 네가 해주는 게 아니야. 그건 네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일 뿐이야.”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의 이유영은, 내뱉는 말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꽂혔다.이유영을 품에 안고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서도 그 숨결에서 단 한 점의 온기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강이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이유영은 마치 온기를 잃은 사람 같았다.어쩌면 이유영이 가진 마지막 온기는 강이한이 스스로 다 소진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차가움뿐이었다.“네 말이 맞아. 이건 내가 받아야 할 대가야.”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반복하며 인정했다.하지만 강이한이 그게 무엇이든 이유영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다짐했다.강이한의 키스가 다시 한번 이유영을 집요하게 덮쳤다. 그 속에는 강이한의 절박함과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이유영의 손은 강이한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을
“한지음이 당신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 내가 마지막으로 알아낸 사실이었어.”이유영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여자가 이런 고통을 감내했다면 어떤 보상으로도 그 상처를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그들은 그것이 전생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강이한이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유영의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그것은 한 여자가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아!”강이한은 지금껏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설명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과거에 한지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유영의 반응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이유영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이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떤 일이 있었던지 지금은 분명히 해명해야 했다.“갈 거야?”“...”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이한의 온몸이 굳어졌다.이유영의 말은 너무도 날카로웠다. 때로는 이유영의 날카로운 직감이 강이한의 가슴을 찌르고 아프게 했다.강이한은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그 고통은 너무도 쓰라리고 견디기 힘들었다.“떠나는 게 나을 거야. 서주에 너무 오래 머물렀잖아. 네가 돌아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기대되네.”이유영의 말은 마치 비웃음과도 같았다.엔테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그 문서를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문서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었다.하지만 절반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온전한 문서가 있어야만 가치가 있었다.문제는 전기봉이 행방불명 상태라는 것이다. 문서의 절반을 가진 강이한에게 이 문서는 귀중한 자산이 아니라 끝없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다.게다가 그의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였다. 만약 강이한에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직 이유영과 아이뿐이었을 것이다.“유영아...”강이한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었다.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곁을 지킬 권리도 자격도 없었고 이유영의 말처럼, 강이한은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이한이 이유영의 곁에서 겪었던 내적 변화를.이유영을 바라볼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쓰라리고 깊게 파고들었다....점심이 되자 또다시 쓰디쓴 약이 준비되었다.그때 박연준이 찾아왔다.박연준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의 무거운 분위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서주 쪽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현 씨.”“네, 아가씨.”우현이 이유영의 부름에 공손히 다가왔다.“국물 맛있네요. 한 그릇 더 줘요.”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가 이유영의 마음속에 묘한 위안을 주는 듯 이유영의 말투는 가벼웠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유영과 강이한, 그리고 박연준 사이의 관계였다.두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만 이유영의 마음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에서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영은 두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그들을 미워하며 마주할 때마다 이유영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건 인과응보와도 같았다.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아가씨.”우현은 조심
모두가 아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다.왜냐하면 아이가 건강해져야 이유영도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강이한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 강이한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유영이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는지를.그 아이는 이유영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언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던 아이였으니, 이유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강이한, 너 알아? 난 한 번도 너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었어.”“알아, 나도 알아.”강이한은 이유영을 끌어안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를.이유영은 단지 아이와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단순한 바람마저 결국 강이한의 손으로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서 이유영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버렸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싸움을 이어가며 아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더 이상 이유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었다.어디에도 즐거운 기억은 없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심장은 항상 불타고 있었다.그 누구도, 월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했다.“그만해.”“이게 네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아니었어?”“...”“이게 바로 그 아이를 키우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
끝없는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영의 마음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이유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길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허락된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마주하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이유영은 지금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를 파리로 돌려보내 줘.”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강이한의 마음은 이미 어둠에 억눌린 상태였는데 이유영의 요구를 듣고 나니 더욱 숨이 막혀왔다.“유영아...”“염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잖아. 그런데 약을 먹어도 전혀 좋아지는 기미가 없어.”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이유영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한지 그대로 드러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들으며 눈에 깊은 고통과 상처가 서렸다.“수술... 생각해 본 적 있어?”만약 정말 수술을 하게 된다면...수술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눈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달랐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염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어쩌면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수술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수술을 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두려웠다. 강이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유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강이한은 그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유영아, 나는 두려워.”강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그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의 수술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이유영은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이한은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