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은 그대로 본가를 떠나 회사로 돌아왔다.비서인 조형욱이 조심스럽게 그의 사무실을 노크했다.“대표님.”“어떻게 됐어?”강이한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기사는 거의 다 내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났기에 기사를 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세강은 기사를 보자마자 각 언론사에 압력을 넣어 기사를 내렸다.하지만 워낙 충격적인 기사였기에 이러쿵저러쿵 의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남자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다시 물었다.“이유영은 찾았어?”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사가 나간 순간부터 그녀를 찾고 있었지만 청하시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목격되지 않았다.예전처럼 쇼핑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종일 핸드폰도 꺼지고 연락이 닫지 않았다.조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아직 못 찾았습니다.”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비록 여론은 그녀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지만 악질 네티즌들이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조형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혼자 남게 되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여보세요, 말씀하세요!”“알았어. 지금 가지.”전화를 끊은 그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기사는 모두 내려갔지만 소문은 이미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전국 네티즌들이 강이한과 한지음의 추잡스러운 사생활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세강은 그나마 힘으로 찍어 누르면서 소문을 잠재웠지만 한지음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진영숙은 바깥에 외출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모두가 유영을 찾고 있었다.한지음, 세강의 일원들, 그리고 강이한까지!하지만 유영은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처럼 며칠째 아무런 연락도 닿지 않고 있었다.결국 강이한은 소은지를 찾아갔다.“그 사람 지금 어딨습니까?”날이 선 말투와 짜증스러운 표정. 아무리 유영의 친구라도 그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했다.소은지가 시치미를 떼면 협박을 가해서라도 소식을 알아낼 생각이었
소은지는 외투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린 나이에 수석 변호사가 된 그녀는 또래의 여자들보다 강한 카리스마를 풍겼다.그녀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커피잔을 들어 강이한의 머리에 들이부었다.“이건 유영이 대신이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는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유영이 세강에 시집가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친구로서 참을 수 없었다.남편은 바깥으로 돌고 시어머니는 갖은 구박에 시누까지 수시로 시비를 거는 지옥 같은 생활을 유영은 3년이나 계속했다.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던 운전기사는 손에 땀을 쥐었다.항상 온화하고 큰소리 한번 낸 적 없는 사모님이었는데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거지?차로 돌아온 강이한은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출입국에 연락해서 그 여자 출국 기록 조회해.”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말도 없이 떠나버리다니.7년을 연애하고 3년을 부부로 사는 동안 유영은 한 번도 그의 허락 없이 홀로 청하를 떠난 적 없었다. 가끔 여행을 떠날 때도 그들은 함께였다.그런데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혼자 해외로 떠나 버리다니!이 일이 있기 전까지 강이한은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지금 가장 우선시 된 일은 유영을 찾는 일이었다.출입국 기록을 미리 조회하지 않은 건 그녀가 여전히 청하에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조형욱은 일 처리가 빠른 직원이었다.두 시간이 지나 조 비서에게서 연락이 왔다.“대표님.”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지자 강이한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어디로 갔대?”“그게… 출입국 기록이 삭제되어 행선지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뭐라고?”“공항 CCTV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행선지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대체 기록까지 지우고 어디로 간 걸까?강이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분노가 서렸다.아내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분한데 누군가가 그녀의 행적을 숨겨주고 있다? 유영에게 이런 인맥이
강이한은 3개월 동안 유영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그의 주변인들은 매일을 긴장감 속에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조형욱은 해외 언론에 실린 기사에서 뜻밖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흐릿한 옆모습만 찍힌 사진이었지만 유영이 분명했다.그는 바로 강이한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남자는 움찔하더니 다급히 핸드폰을 가로챘다.사진을 확인한 남자의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조형욱이 건넨 핸드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전화를 받았다.조형욱은 새로 산 핸드폰을 아련하게 바라보았지만 상사에게 불만을 얘기할 용기는 없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목소리로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무슨 일이죠?”“당장 본가로 좀 와.”수화기 너머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본가에서도 해외 기사를 본 것 같았다.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두 눈을 감았다.“바빠요.”지금 본가로 돌아가면 또 잔소리 폭탄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진영숙의 분노한 고함이 고막을 찢을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고집 그만 피우고 걔랑 이혼해!”현재 여론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세강의 안주인이 남자랑 눈이 맞아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여론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3개월 전, 수많은 기자들이 유영을 인터뷰하러 찾아다녔지만 유영은 홀연히 사라졌다.모두가 그녀를 찾고 있을 때, 이런 폭발적인 기사가 올라올 줄이야!진영숙도 그 기사를 보고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다. 평소에 순하고 나약하기만 하던 며느리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이 폭탄 기사에 비하면 예전 기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이혼, 불륜, 납치사건 그 모든 기사를 능가하는 스캔들이었다.강이한은 과거 전국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재벌 여식들이 줄을 서서 강이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완벽했던 남자를 버리고 외국인과 함께 사랑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집중하는 모습은 엄마를 많이 닮아 있었다.유영은 외국으로 나와서 이렇게 빨리 직장을 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딸깍!라이터 소리와 함께 남자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외삼촌, 의사가 금연하라고 했잖아요.”“그래, 그래. 알았어.”남자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유영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파리로 온 3개월은 그녀에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의 인생에도 수많은 변화가 찾아왔다.그는 이곳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외할머니는 상심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을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외삼촌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유라가 너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을 텐데.”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정유라는 정국진의 딸이자 유영의 사촌동생이었다. 정유라는 재벌가에 태어났지만 경영에는 취미가 없고 의학 연구에 매진했다.정국진은 그런 딸을 매우 못 마땅해했는데 유영이 나타나면서 그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외삼촌도 그만해요. 저 이거 빨리 처리해야 한단 말이에요.”외삼촌과 상봉한 뒤, 귀에 피가 나도록 들은 말이었다.“그래, 일해.”쾅!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이어서 비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분이 꼭 회장님을 봬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셔서….”유영과 정국진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강이한이었다. 그의 뒤에는 조형욱이 따르고 있었다. 몇 달 안 본 사이에 그는 표정이 많이 험악해져 있었다.그에게서는 진한 살기마저 느껴졌다.강이한을 알아본 정국진이 인상을 찌푸렸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회장님,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끌어내겠습니다.”비서가 용기를 내서 강이한에게 다가갔지만,
귀국하는 비행기 안.유영은 전용 소파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상처를 처리해 주고 있었다.두 시간 전, 강이한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정국진의 회사로 쳐들어왔다.그가 주먹을 휘두른 순간, 유영은 정국진을 밀치고 대신 그의 주먹을 받아냈다.강이한은 화들짝 놀라며 멈추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주먹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맞았다.분노한 정국진이 강이한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강이한이 데려온 경호원들이 달려 들어와 상황을 정리했다. 혼란을 틈타 강이한은 유영을 업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비행기에 오른 순간부터 지금까지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강이한은 창가에 앉아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좀 어때요?”전담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먹에 맞아 탈골된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유영이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조형욱이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사모님이 사라진 동안 대표님은 줄곧 사모님을 찾고 계셨습니다.”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강이한과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나도 강이한은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고 법원 소환에도 불응했다. 그녀가 뭔가를 하려고 했지만 소은지는 자신이 알아서 한다며 그녀를 말렸다.강이한이 왜 자신을 그렇게 애타게 찾았는지 그 이유는 궁금하지 않았다.조형욱은 그녀가 말이 없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조 비서, 이리 와!”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호출했다.조형욱은 착잡한 눈빛으로 유영을 한번 보고는 다시 강이한에게로 다가갔다.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하면서 그의 주변인들은 하루도 편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강이한이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둘이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유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지?강이한은 피해자의 눈을 하고 그녀를 추궁하듯 노려보고 있었다.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욕설을 퍼붓기 시
저택에 도착하자 장숙과 집사가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장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영의 안색을 살피며 반겨주었다.몇 달이나 지났지만 여기는 바뀐 것 하나 없었다.그녀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질리도록 혐오스러웠다.유독 장숙만 제외하고.그녀는 장숙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강이한이 고개를 돌리자 그 희미한 미소마저 다시 사라져 버리고 차가움만 가득했다.“들어와!”유영은 말없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침묵할수록 강이한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강이한은 소파에 털썩 앉아 담배를 꼬나물었다.익숙한 담배 연기에 유영이 인상을 찌푸렸다.“이제 나랑은 말도 섞기 싫다 그거야?”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파리에서 다시 만난 뒤로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유영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변호사 통해서 해.”“이유영!”“우리 사이에 더 할 얘기가 남았다는 것도 난 신기해.”“그 인간 때문이야? 나한테 이혼하자고 한 게 다 그 남자 때문이냐고?”“그래. 마음대로 생각해.”주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급하게 그녀를 만날 생각에 강이한은 정국진의 신분에 대해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유영도 굳이 오해를 정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이 남자가 이대로 포기한다면 그건 그녀가 바라는 바였다.남자는 벌떡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이대로 그녀와 계속 있다가는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았다.유영이 혼자 남게 되자 장숙이 다가와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왜 그렇게 도련님을 자극하세요. 이런다고 사모님한테 좋을 것 하나 없잖아요.”유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그녀에게 물었다.“아줌마도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세요?”장숙은 입을 다물었다.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유영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여전히 시댁 식구들한테 공손하게 대했고 집안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강이한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진영숙은 유영과 마주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이렇게 노려보면 유영이 전처럼 기가 죽어 잘못을 빌 줄 알았는데 유영의 덤덤한 태도는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아줌마, 차 좀 내다줘요.”“예, 사모님.”예전이었다면 유영이 직접 차를 내왔을 것이다.진영숙은 유영을 하녀 부리듯이 부렸고 고용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은 그녀가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유영은 도도하게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애착 인형을 쓰다듬고 있었다.진영은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서 바로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집으로 와!”“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그래!”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이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사 보낼 테니까 본가로 돌아가세요.”“이한아!”진영숙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의 생각은 단순했다. 당장 강이한이 유영과 이혼하고 그녀를 이 집에서 내쫓는 것.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가하게 인형이나 쓰다듬고 있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자 유영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아, 괜찮아?”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있던 진영숙에게 들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유영이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세요. 여기 일 다 처리하면 돌아갈게요.”돌아간다고?그 남자 곁으로?아침에 봤던 기사가 떠오르자 진영숙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유영은 발작하기 일보 직전인 진영숙을 보고 전화를 끊었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이유영, 이 뻔뻔한 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아무리 남자에 눈이 멀어도 좀 그럴 싸한 남자를 만나든가! 그 남자 네 아빠뻘이야! 넌 수치심도 없니?”진영숙의 욕설에 유영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의도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하세요?”“너 뭐
집에 구급차까지 출동했는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니!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강이한은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그가 이유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그녀가 변한 걸까?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당신이랑 세강 일가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왜 이렇게 변한 걸까?만약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가 아는 이유영일지도 모른다.모든 걸 바쳐 사랑했지만 불길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날의 그 절망, 그리고 굳이 찾아와서 도발하던 한지음의 모습, 이런 걸 겪고도 어찌 마냥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일 수 있을까?“뭐 하는 거야? 이거 놔.”그녀가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남자가 그녀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유영은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실망스러운 걸까?변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감히 날 무시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짝!그가 억지로 그녀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하던 순간, 유영의 차가운 손바닥이 남자의 뺨을 때렸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항상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만 바라봐주던 그런 눈빛은 어느새 증오로 바뀌었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차로 밀어 넣으려던 순간, 호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강이한은 한 손으로 유영을 도망 못 가게 꽉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빠 언제 병원에 올 거야? 지음 언니가 엄마 병실 지키고 있어.”옆에서 듣고 있던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을 미치게 했다.“있던 병실로 돌려보내.”“안 간다는 걸 어떻게 그래. 급하게 오다가 엘리베이터에 손까지 끼여서 다쳤어. 휠체어에서 떨어졌는지 무릎까지 다 까졌더라고.”강이한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강이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쓰라린 마음이었던 것이다.“유영이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만나고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사실...”“제가 빚진 거예요.”정국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한이 말을 잘랐다.그는 정국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고 강이한도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결국 이유영의 눈에 다른 사람의 빛이 비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휴...”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은 한 번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깨달음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지금의 강이한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깨달았고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게 된 것이다....소은지는 강이한이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오후에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은지였기 때문이다.“후회해?”소은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이한에게 물었다.“...”한지음 일로 후회하냐는 것이었다. 소은지는 강이한과 한지음의 관계를 가장 혐오했다. 소은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에 수많은 부부의 파탄을 목격하면서 자연히 불륜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그런 소은지가 강이한에게 후회하느냐고 묻자, 강이한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질문, 몇 번이나 해봤어?”“...”소은지의 머릿속에 설선비가 떠올랐다.당시 그 사건은 청하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고 만약 소은지의 변호가 없었다면 설선비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소식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우연히 식당에서 설선비를 만난 소은지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후회하니?”설선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은지 씨,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지금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어떤 절망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절망은 마치 끝없이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혹한 절망은 없었다.조용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강 선생님, 이만 가주세요. 선생님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악몽과 마주할 때 쉽게 맞설 수 없다. 어린 월이도 마찬가지였다.오는 길 내내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월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른 채 망연히 서 있었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결국, 그는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서는 순간, 유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 아가씨, 이제 괜찮아요.”“으흑, 으흑...”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소리에 강이한의 마음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그저 아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아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강이한은 그저 아이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고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아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한 아버지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복도 끝에 정국진이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강이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듯했다.상처 입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정국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이가 아직도 너를 무서워해?”“...”‘무서워한다'는 단어가 강이한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과거의 강이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다 제 잘못이에요.”그는 깊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강이한의 잘못이 확실했다.하지만 마냥 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강이한은 월이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강이한은 아이가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소중히 자라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최고의 스승이셨고 외삼촌 또한 훌륭한 삼촌이었으며 엄마 역시 다정한 어머니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의 삶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한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마치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유씨 할머니, 유씨 할머니?”아이는 강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소중한 바비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 인형은 이유영을 똑 닮아 있었다. 이유영을 볼 수 없는 아이는 온 마음을 그 인형에 의지하고 있었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아는 아이와 달리, 그는 무엇을 지켜냈던가?아이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강이한의 가슴은 다시금 깊은 고통에 잠겼다.아이를 돌보는 유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아가씨.”“나쁜, 나쁜 사람!”유 아주머니도 강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곳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정 선생님과 사모님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정씨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다시 만나게 하는 거냐고, 차라리 바깥 여자의 아이와 함께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유 아주머니는 아이를 꼭 껴안고 강이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고통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장 가까운 딸에게 원수처럼 취급받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월이를 통해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그는 아이에
강이한의 가슴은 칼날에 도려내듯 아려왔다.영원히 기다릴 수 없는 이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둬야 하는 고통을, 이제야 강이한은 깨달았다.한때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자리는 이유영에게는 비극이었다.이유영의 모든 기다림을 강이한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그렇기에 지금, 이유영의 냉담함을 견뎌내는 고통은 그만큼 절망스러웠다.“이제 그만 울어, 응?”“엄마가 보고 싶어요.”작은 아이는 울먹이며 강이한을 바라보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강이한은 눈가에 맺힌 씁쓸함과 고통을 감추려는 듯 눈을 감았다.강이한 역시도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우천시를 떠난 후, 그는 이유영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3개월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서주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대부분 마무리되었다.그 일들은 서주와 파리 엔데스 가문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정국진뿐이었고 나머지는 강이한이 미쳤다고 여겼다.강이한은 다시 파리에 오게 되었다.강이한의 방문에 임소미는 여전히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태도와 분위기에서 분명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임소미는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위층에 있어.”임소미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지난번처럼 아이를 보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고맙습니다.”“...”강이한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임소미는 이것이 아이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에 더욱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강이한에게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며칠 동안,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염 선생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며칠이라도 모두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임소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이 여전히 호전되지 않는다면, 오늘 강이한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해
강이한은 아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착하게 있어야 해.”“아빠, 엄마 찾으러 가는 거야?”“...”아빠, 엄마...그 두 단어가 온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강이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는 온유의 아빠였고 이유영은 온유의 마음속에서 엄마였다.월이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어쩌면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까?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과거와 현재의 악연, 그리고 연서까지... 이 모든 것이 쌓인 이상,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온유야.”강이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답답함을 억눌렀다.온유는 멍한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아빠?”“엄마는 잊어.”“...”아이의 눈에서 순간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강이한의 눌러 두었던 아픔이 다시 치밀어 올라 목이 메었고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엄마는... 잊어, 응?”이유영은 엄마가 아니었고 이제는 영원히 엄마가 될 수 없었다.강이한은 온유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었다.“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아요?”“...”“엄마는 동생만 원하는 거죠?”작은 아이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강이한은 알고 있었다.온유는 태어난 이후로 한지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박연준의 계략 때문이었다.온유에게 엄마는 항상 이유영이었다.박연준의 가장 잔혹한 행동은 온유에게 화살을 돌렸다는 건데, 하지만 강이한은 박연준이 온유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온유를 보았다면 아마도...돌이켜보면 박연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강이한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작지 않았다.“잊어, 응? “이 아이가 이유영을 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고통이 뒤따랐다.과거, 한지음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 때문에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이한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오자, 늘 강이한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이정과 신시욱 모두 한지음이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지음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각막을 기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유영의 각막을 기증하겠다고 말했지만 모두 그가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수술실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 기간 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누구도 강이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강이한이 직접 이유영을 감옥에 보냈을 때, 그들은 한지음이야말로 강이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이제야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분명해졌다.우천시에서 이유영은 침착하고 태연했으며 한지음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결심을 굳혔다. 만약 염 선생의 약으로 회복이 되지 않을 경우, 이유영을 위해 본인이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이유영 씨는...”생각에 잠긴 이정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 결국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온유 아가씨와 오셨습니다.”“...”온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정의 가슴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험난했던 과거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병원에서 이유영이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강이한이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연서의 존재마저도 온유와 월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서는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다.“들어오라고 해.”강이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썹에는 떨쳐낼 수 없는 긴장감이
“반드시 확인해야 해요.”현우의 불확실한 대답에 소은지의 답답했던 가슴이 순간 목까지 차올랐다.지금의 전기봉은 비록 인장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아직 핵심 인물임은 분명했기에 이런 상황에서 실수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현우는 더욱 깊은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봤다. 소은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었고 소은지는 강렬한 현우의 시선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윙윙윙.”소은지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현우의 휴대전화가 진동했고 현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현우는 굳은 얼굴로 일어섰고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더욱 날카롭고 위엄 있어 보였다.그 기세에 소은지의 마음도 거세게 요동쳤다.“알았어.”현우는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현우의 시선은 소은지에게로 향했고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잠깐 나갔다 올게요.”“저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요.”소은지는 어색하게 말했다.최근 몇 달 동안 늘 바빴던 현우이기에 굳이 어디 가는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소은지를 향해 말했다.“그 사람, 시험하려 하지 마요.”현우는 지금 소은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엔데스 회장이 돌아가기 전, 현우는 항상 본가에 머물렀지만 소은지는 계속해서 엔데스 명우와 대립했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엔데스 가문이 중요한 시기를 맞게 된 지금, 소은지가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엔데스 명우의 한계를 건드릴 것이다.설선비 사건이 채 마무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설유나마저 목숨을 잃었다.엔데스 명우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소은지에게 돌렸고 용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소은지의 말에 현우의 미간은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소은지가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멀리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
정국진과 임소미는 부모로서 이유영이 강이한과 박연준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 누구도 강이한이 이유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런 선택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유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우천시에 있었고 염 선생님의 약이 그녀에게 효과가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유영은 어떤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이에 그들은 마음을 조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유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임소미는 잠깐의 고민을 거친 후 정국진에게 말했다.“당신 지금?”“그건 그 사람이 유영이에게 빚진 것이에요!”정국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임소미가 이 문제에 대해 고집을 세우며 말했다.맞는 말이다.그것은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빚진 것이기 때문에 이제 어떤 고통을 겪든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비록 독한 마음을 먹고 그렇게 말했지만 임소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퍼지고 있었다.이유영과 강이한 두 사람의 감정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복잡했다.이유영이 강이한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 뛰어드는 것을 보았을 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괴로움을 느꼈다....소은지도 그 뉴스를 보았다.이유영과 박연준이 혼인 신고를 마쳤다는 기사를 본 순간 그녀는 이유영이 머지않아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방에 들어올 때 마침 소은지가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모습을 본 엔데스 현우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소은지는 엔데스 현우가 돌아온 걸 보고 품속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유영이와 박연준 씨가 결혼했대요.”이 말을 하는 그녀의 시선은 한순간도 엔데스 현우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엔데스 현우의 표정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엔데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그것
“부러워?”옆에 있는 남자가 불만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그래, 부러워. 내가 저 여자였으면 좋겠어. 저 남자 정말 잘생겼어!”“알았어. 그만 입 다물어.”남자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이유영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 미소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오직 박연준뿐이었다.혼인 신고 절차는 복잡했지만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서류에 사인할 때 박연준이 이유영 대신 사인을 했다. 원칙상 이러면 안 되지만 이유영이 시각장애인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잘생긴 남자가 시각장애인과 결혼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당연히 축복할 만한 일이었다.시청에서 나온 박연준는 두 사람의 혼인 관계 증명서를 문기원에게 건넸다.“얼른 가봐.” 박연준의 목소리는 깊고 무게가 있었다. 문기원은 박연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아직 3일이 남아있지만 박연준은 이유영의 눈이 더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곧 파리로 돌아갈 예정이기에 돌아가기 전에 그들을 막는 장애물은 모두 제거해야 했다.“유영아, 결혼 축하해.” 박연준이 이유영의 귀에 가볍게 입맞춤하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유영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이유영이 대답했다.“결혼 축하해!”그 다섯 글자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고 예리한 비수처럼 박연준의 가슴에 박혔다. 가슴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지만 박연준은 그 고통과 씁쓸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함께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그는 이를 악 물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낼 것이다.그 누구도 미래에 이유영이 박연준와 강이한 사이에서 어떤 소용돌이를 일으킬지 몰랐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의 눈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이유영이 눈을 회복한 후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박연준와 강이한은 반드시 그녀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이다....박연준은 이미 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