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은 유영과 마주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이렇게 노려보면 유영이 전처럼 기가 죽어 잘못을 빌 줄 알았는데 유영의 덤덤한 태도는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아줌마, 차 좀 내다줘요.”“예, 사모님.”예전이었다면 유영이 직접 차를 내왔을 것이다.진영숙은 유영을 하녀 부리듯이 부렸고 고용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은 그녀가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유영은 도도하게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애착 인형을 쓰다듬고 있었다.진영은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서 바로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집으로 와!”“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그래!”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이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사 보낼 테니까 본가로 돌아가세요.”“이한아!”진영숙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의 생각은 단순했다. 당장 강이한이 유영과 이혼하고 그녀를 이 집에서 내쫓는 것.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가하게 인형이나 쓰다듬고 있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자 유영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아, 괜찮아?”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있던 진영숙에게 들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유영이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세요. 여기 일 다 처리하면 돌아갈게요.”돌아간다고?그 남자 곁으로?아침에 봤던 기사가 떠오르자 진영숙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유영은 발작하기 일보 직전인 진영숙을 보고 전화를 끊었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이유영, 이 뻔뻔한 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아무리 남자에 눈이 멀어도 좀 그럴 싸한 남자를 만나든가! 그 남자 네 아빠뻘이야! 넌 수치심도 없니?”진영숙의 욕설에 유영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의도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하세요?”“너 뭐
집에 구급차까지 출동했는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니!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강이한은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그가 이유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그녀가 변한 걸까?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당신이랑 세강 일가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왜 이렇게 변한 걸까?만약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가 아는 이유영일지도 모른다.모든 걸 바쳐 사랑했지만 불길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날의 그 절망, 그리고 굳이 찾아와서 도발하던 한지음의 모습, 이런 걸 겪고도 어찌 마냥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일 수 있을까?“뭐 하는 거야? 이거 놔.”그녀가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남자가 그녀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유영은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실망스러운 걸까?변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감히 날 무시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짝!그가 억지로 그녀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하던 순간, 유영의 차가운 손바닥이 남자의 뺨을 때렸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항상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만 바라봐주던 그런 눈빛은 어느새 증오로 바뀌었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차로 밀어 넣으려던 순간, 호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강이한은 한 손으로 유영을 도망 못 가게 꽉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빠 언제 병원에 올 거야? 지음 언니가 엄마 병실 지키고 있어.”옆에서 듣고 있던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을 미치게 했다.“있던 병실로 돌려보내.”“안 간다는 걸 어떻게 그래. 급하게 오다가 엘리베이터에 손까지 끼여서 다쳤어. 휠체어에서 떨어졌는지 무릎까지 다 까졌더라고.”강이한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유영은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자고 있던 소은지는 친구가 해외에서 귀국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돌아왔어?”“응, 곧 너 있는 곳으로 갈 거야.”“그래. 오전에 반차 낼 테니까 이쪽으로 와.”“그래.”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집을 나섰다.이곳에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옷차림도 어제 입고 왔던 대로였다.그들이 사는 홍문동 아파트는 도심과 좀 떨어진 호화 아파트라 워낙 거대해서 바깥까지 나가서 차를 잡아야 했다.길가에서 30분이나 기다렸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차가 잡히지 않았다.이때, 외제차 한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더니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유영이 짜증을 내려던 순간, 반쯤 열린 차 창밖으로 강이한이 싸늘한 얼굴을 내밀었다.“타.”명령조가 다분한 말투였다.유영이 거절하려는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 않아. 예전에는 당신 봐서 주변인들한테까지 압력을 넣지 않았어. 그래도 10년 같이 산 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지금 무슨 말을 하지?”분명한 협박이라는 건 유영도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미친 행세를 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결국 유영은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어디로 가는데?”그녀가 물었다.강이한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병원.”병원 얘기가 나오자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하나도 깨달은 게 없었다.시간만 길게 연장되었을 뿐, 지난 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유영은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물었다.“거기 가서 뭘 어쩌라고?”강이한이 말했다.“당신이 납치범을 사주한 사실을 지음이가 알았어.”“그래서?”“그렇게 과분한 걸 바라지는 않아. 사과만 한다면 그냥 넘어가겠대.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니!유영은 어처
강이한은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지음이 사실을 알고 태도로 보아 무언가를 할 것 같았다.강이한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그 전제가 내가 사과하는 거고?”그가 양보할수록 유영은 더 거칠게 파고들었다.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래.”“한지음한테 가서 전해. 어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고.”말을 마친 유영은 몸을 비틀어 강이한의 품을 떠났다.조금 전까지 누그러진 말투로 그녀를 대하던 남자의 얼굴이 급변했다.그게 자신에 대한 실망이라는 것을 유영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었다.그녀는 말없이 반대편으로 걸어가다가 분이 안 풀리는지 뒤돌아서서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증거, 나서원 씨한테 받은 거지? 어디서 찾아냈는지 확인은 해봤어? 그리고 어떤 경로로 한지음 귀에 들어갔을까?”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유영은 곧장 소은지가 있는 오피스텔로 찾아갔다. 자고 있던 소은지가 잠옷을 입은 채로 달려나와 그녀를 안아주었다.“네 전화 받고 아침 만드느라 씻지도 못했어.”그 말을 들은 순간 유영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청하시에서 소은지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사실 긴 악몽에서 깨어나 회귀했을 때, 바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싶었다.홍문동 저택에 있는 것만으로 그녀에게는 지옥이었다.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뭔지 알기에 친구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아침을 먹고 왔다고 말하려던 유영은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서 있는 친구를 보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배고프다. 빨리 밥 먹자.”“그래.”소은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키 차이가 제법 났기에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으니 소은지가 언니 같았다.유영은 소은지가 준비해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강이한과 함께 살게 된 뒤로 아침은 항상 한식으로 고집해 왔다.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입맛까지
경찰서를 나온 유영은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앞장서서 걸었다. 소은지가 다가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유영아.”“나 괜찮아.”괜찮다고는 하지만 속은 이미 뒤집어진 상태였다.강이한이 합의를? 왜?예전이었다면 상대가 누구든 유영에게 해를 가하고자 한 사람에게 그는 자비를 베푼 적 없었다.하지만 집에 매일같이 죽은 고양이와 저주의 말을 써서 보낸 사람들을 그는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었다.“강이한 왜 그랬을까?”“그 사람들 아마 강서희와 한지음 돈을 받은 사람들일 거야.”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지도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걸 강이한이 왜!”이유는 유영도 알지 못했다.그녀가 사라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3개월 정도 피신해 있으면 지난 생에 벌어진 일들이 사라질 줄 알았다.그녀의 도피로 인해 지난 생처럼 잔인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녀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았다.“이혼소송 무조건 이겨야겠어. 그런 인간 쓰레기랑은 멀찌감치 떨어져야 해. 정도가 심하면 네 안전에까지 위해를 가할 사람들이었어. 그런 사람들과 합의해 주다니!”소은지가 부르르 떨며 씩씩거렸다.유영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 상황에서 더 할얘기도 없었다.그들의 10년이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있을까?유영은 무슨 정신에 소은지의 오피스텔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소은지는 출근하며 점심에 집으로 배달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나 유영은 스스로 할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멍멍!발끝에서 통통한 강아지가 다가와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녀석은 그녀가 홍문동 저택에서 데리고 나온 그녀의 반려견이었다. 출국하면서 걱정했는데 살이 뒤룩뒤룩 찐 걸 보니 아줌마가 먹이를 잘 먹인 모양이었다.유영은 다가가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배고프지? 앞으로는 넓은 저택에서 못 살고 나랑 거리를 방황해야 할지도 몰라.”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대기업 사모님이 가정 불화로 가출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룹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다.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고 아마 내일쯤 기사가 올라올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녀가 떠나고 몇 달 사이, 세강은 항상 여론의 중심에 있었다.비록 최종적으로 좋게 해결했지만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 매체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유영도 그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었다.“이제 와서 이미지 챙긴다고? 한지음이랑 둘이 붙어다닐 때는 왜 그룹 이미지 신경 안 썼어?”“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강이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당신이랑 그 여자가 내 머리에 똥물을 끼얹었는데 나한테서 좋은 말까지 듣고 싶어?”3개월이나 이어진 여론의 질타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강이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좋게 달래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여론 얘기가 나오자 유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오늘 경찰서를 다녀왔는데 당신 그 악플러들 합의해 줬더라?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게 할 짓이야?”악플러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말 안 했으면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그건 당신이 나한테 해명해야 하지 않아? 왜 이렇게 적반하장이야?”“내가 무슨 해명? 당신 미쳤어?”유영 입장에서는 화가 나서 펄쩍 뛸 일이었다.강이한의 얼굴도 분노로 물들어 갔다.“그 사람들 계좌에 당신 명의로 입금된 기록이 있었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좀 알 수 있을까?”유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의 명의로 된 입금 내역. 전에 강이한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간 카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 본인조차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강이한은 이를 주도한 당사자가 유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그럼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당신이 나서준 덕에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었으니까?”적을 너무 방심한 유영의 잘못이었다.하지만 그랬기에 폭력
한편, 오피스텔로 돌아간 유영은 외삼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당분가는 여기 있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그래도 놀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전공을 살려 작업실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정국진은 당연하게 그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강이한과 함께할 때는 일이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대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전직주부 생활을 했다.매일 시댁과의 갈등을 겪고 집안의 사소한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이 되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유영 본인은 아니었다.재벌가의 며느리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아마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평범한 가정주부는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정국진의 든든한 지원까지 있으니 앞으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다.퇴근하고 돌아온 소은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열심히 스케치를 그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강이한과 틀어지고 엄청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실연했다고 다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유영은 시큰둥하게 대처했다.강이한과 결혼하고 유영이 스스로 백수가 되길 원한 게 아니라 그가 원했기 때문에 양보한 것이었다.그 동안 세강 식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림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지내서 널 다시 보게 됐어.”소은지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밥 했어. 반찬만 데우면 돼.”“와. 이제 밥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그 말을 들은 유영이 움찔했다.“그 집에서 내가 손 놓고 놀기만 한 건 아니야.”시어머니랑 같이 안 지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하지만 매번 본가로 가면 차라리 주방에 갇혀 일을 하는 게 편할 정도로 시달렸다.소은지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돈도 인맥도 내가 다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펜을 잡은 유영의
하지만 진영숙은 아니었다.이번 일로 화가 나는데 풀 곳이 없어서 너무 갑갑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는 25일 날 경원이 귀국할 거야. 이유영 그 계집애랑은 빨리 이혼하고 쟤도 빠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이 싫어도 지금 시점에서 시력까지 잃은 한지음을 며느리로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물론 최근 이유영이 보인 행보가 괘씸해서 단칼에 내쳐버릴 생각이었다.유경원의 귀국 소식을 들은 강이한과 강서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예전이었다면 신랄하게 반박했겠지만 그래도 진영숙의 건강을 고려해서 그는 담담히 말했다.“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좀 쉬세요.”“이한아!”말을 마치고 뒤돌아서는데 뒤에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유영 걔도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여자 만나고 싶었으면 적어도 이유영보다 더 나은 애를 만났어야지. 넌 어째 여자 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냐!”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에 성격까지 좋은 이유영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한지음을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진영숙은 아들의 철없는 행동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걸음을 멈춘 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병실을 나갔다.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달래주었다.“엄마, 의사가 화를 내면 안 좋다고 했잖아.”“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쟤 하는 꼬라지 좀 봐!”“엄마도 그만해. 이유영 때문에 그 소란이 났는데 오빠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유영 얘기가 나오자 진영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아비 뻘 되는 남자랑 바람이 난 년을 뭐가 아쉬워서 잡고 있는 거야?”진영숙이 가장 화가 난 부분은 이혼 얘기를 이유영이 먼저 꺼냈다는 점이었다.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도 정작 이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점점 아들도 미워지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놔주지 않으면서 더 보잘것없는 한지음까지 챙기니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비록 이유영이 세강의 안주인으로서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들의 이런 행보도 그녀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
연서.그 이름은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그 기억은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잔인했다.만약 이유영이 이번에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강이한과 박연준은 평생 서로를 외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연준, 참 가엾네.”연서… 박연준은 연서에게 흔들린 적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연서를 데려가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었다.“가엾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게 할 거야, 말 거야?”그가 말하는 것은 서주였다. 강이한은 그의 말을 듣고 조소를 터뜨렸다.“평생 계획하던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과거 박연준의 계획 중심에는 항상 서주가 있었다.처음엔 연서가 그 중심이었고 이후엔 이유영이 그 중심이었다. 박연준의 복잡한 속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강이한조차 박연준의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런 박연준이 이제 와서 포기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 말 뒤에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박연준은 단호히 말했다.“나는 이유영만 있으면 돼.”다른 건 모두 필요 없었다.과거의 교훈은 피로 새겨진 기억처럼 그에게 깊게 남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무의미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는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웃기지 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놓고 이렇게 대립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이한의 눈에 비친 박연준은 감정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만 원한다고?“이유영은 사람이야. 살아있는 사람!”이유영은 물건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사람의 감정은 상호 존중이 기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이 사실을 강이한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박연준은 냉소적으로 되받아쳤다.“이유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박연준은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
이유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지금...”“넌 이미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이유영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평생토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박연준은 강이한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박연준 자신은?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늘 모든 사람을 조종하던 강이한이 이번에는 스스로 그 틀에 갇힌 셈이었다.이유영의 눈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은 폭풍처럼 요동쳤다.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가 끝나게 된 이유는 강이한의 우유부단함이 컸다.하지만 자신이 꾸민 일과 계산도 분명히 한몫했다.만약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심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감옥에서 일어난 화재 같은 비극도 이유영의 삶에 없었을 것이다.그 화재만 없었다면, 이유영의 눈은 무사했을 것이다.“하하, 참 우습군!”오랜 침묵 끝에 강이한이 비웃음을 터뜨렸다.“이건 네가 내게 진 빚이야.”진 빚? 그렇다.강이한은 연서와 관련된 일로 박연준에게 진 빚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빚을 갚기 위해 이유영을 이용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품은 마음을 오래전부터 알아차렸다.그렇지 않았다면 이유영이 연서에 대해 알아갈 무렵, 박연준이 급히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그 모든 행동은 박연준이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음을 보여줬다.그리고 그 당황의 이유는 바로 이유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유영과의 관계를 위해 박연준에게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뜻인가?강이한은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속여왔으면서, 진실이 뭔지 알고나 있어?”진실?오랫동안 사람들을 조종하며 살아오다 보니, 박연준은 자신조차 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박연준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강이한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박연준, 감정이라는
병원 맞은편의 카페.박연준은 강이한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놀랍네. 이런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지금 서주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이한의 차가운 눈빛에는 점점 더 날 선 위협이 깃들었다.“아무래도 엔데스 회장은 이번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네.”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이번 달은 못 넘긴다고?”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이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지금까지도 엔데스 회장의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따라서 이 시점에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 결과는 대단히 끔찍할 수 있었다.서주는 지금 아주 중요하 시기를 맞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문서는 핵심 열쇠로 작용할 거였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기봉...”그 세 글자를 뱉어내며 강이한은 이를 악물었다.전기봉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지만, 모두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을 찾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박연준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냉소를 띤 채 말했다.“전기봉, 네가 데리고 있지?”“박연준!”강이한은 이를 갈며 말했다.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박연준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돌린 것이 분명했다.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모든 걸 넘길게.”“...”그 뜻밖의 말에 강이한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모두 넘겨준다니?“전기봉의 행방을 찾는 즉시, 너에게 넘길게.”“무슨 뜻이야?”강이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연준은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눈빛에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박연준은 강이한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염 선생이 그러더라고. 석 달 후에도 약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이유영의
염 선생의 눈빛에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전남편이든 현재 남편이든, 두 분 모두 이유영 씨를 아꼈다면 어째서 이유영 씨의 눈을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했나요?”눈은 사람의 창밖을 비추는 창문과도 같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체 부위였다. 하지만 이유영의 눈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특히 이유영이 정국진의 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비극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석 달 후, 이유영 씨는 어떻게 되나요?”그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만약 석 달 후에도 아무런 개선이 없다면... 이유영 씨의 눈은 아마...”염 선생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박연준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고 이어서 염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유영 씨의 두 눈은... 아마 복구가 불가능할 겁니다."“...”복구 불가능. 그 단어가 박연준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박연준의 머릿속은 갑자기 울리는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끔찍한 결과가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조차 너무 끔찍했다.만약 이유영의 눈에 희망이 없다면, 이유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와 위협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염 선생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를 협박하는 겁니까?”박연준은 차갑게 말했다.“선생님의 아들, 염명훈 말입니다.”“뭐라고요?”“이유영 씨의 눈이 회복된다면, 선생님의 아들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염명훈. 염 선생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자 동시에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이었다. 염 선생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도 상당 부분이 아들 때문이었다.“좋습니다.”현재 염명훈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거래를 승낙하는 순간, 염 선생의 눈에는 깊은 체념과 결심이 스쳐 지나갔다.박연준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렇다면 잘 부탁드립니다.”설득만으
지난밤은 단지 짧은 하룻밤이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정말로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우지가 이유영에게 이불을 더 덮어주었지만,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그 추위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유난히 불편했다.결국 링거를 맞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올 때마다, 이유영은 항상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무서워하지 마.”박연준은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유영을 달랬지만, 이유영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이유영은 마치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 무기력했다.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더욱 단단해진 듯 보였다.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벽이 느껴졌다.병실 침대에서.“물 좀 마셔.”박연준은 컵에 빨대를 꽂아 이유영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유영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목마르지 않아.”사람들은 열이 나면 몸이 뜨겁고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곤 했다.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려고 하는데 이유영은 그런 느낌 대신 온몸이 춥기만 했다.병원에서 제공한 얇은 담요는 추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고 링거를 맞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이 팔 전체로 번졌다.“박연준.”“응?”“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왜 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왔을 때, 진료 후의 협상은 모두 강이한과 염 선생이 나섰기 때문에 이유영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박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염 선생은 왜 만나려고 해?”박연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유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
파리 지역에서는 엔데스 회장과 관련된 소문이 계속 퍼졌지만, 신뢰할 만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 문서가 핵심이 될 것이다.“잘 감시해!”강이한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뒷모습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 같았다. 강이한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신시욱은 강이한의 단호한 결심에 자신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이번에 강이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유영의 편에 서겠다는 굳은 결심을 내리고 있었다.그것이 바로 강이한이었다. 과거에 이유영 곁에 머물지 못했던 자신을 대신해, 이제 어떤 일이 생겨도 이유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다....우천시.날씨는 변덕스럽고 험난했다.“콜록콜록...”이유영은 기침을 멈추지 못했고 코도 막혀 있었다. 이유영의 모습은 몹시 기운 없어 보였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의 쇠약해진 상태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여기 공기가 좋긴 하지만, 기후가 너무 험난하네요.”우지는 걱정스레 말했다.이유영은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증상이 시작된 것 같았다.더욱이 이유영은 이미 많은 약을 복용 중이었고 약기운 탓에 어지럼증까지 호소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힘겨운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이유영을 가로로 들어 올렸다.“병원으로 가자.”“박 선생님! 박 선생님!”이유영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는 박연준을 보고 우지가 급히 그를 막아섰다.지금 밖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병원은 안 가!”이유영은 힘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약한 목소리에서 현재 이유영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잘 버티는 듯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이다.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유영은 더욱 힘들었을 거였다.이유영의 몸 상태는 원래도 좋지 않았고 파리에 있을 때는 임소미가 세심히 돌봤지만 이제 임소미도 곁에 없었다.이유영의 건
이유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이 날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도 다르지 않을 거야.”강이한은 연서 때문에 이유영에게 접근했고 박연준은 강이한과 연서 때문에 이유영에게 접근했다.그 말이 끝나자, 박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박연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두 사람은 서로 무엇 때문에 대립하든, 하나의 공통점은 분명해.”“유영아!”“연서는 너와 강이한에게 똑같이 특별한 사람이잖아.”박연준은 연서로 인해 강이한을 증오했고 그 감정은 이유영까지 복잡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연서라는 여자가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응시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박연준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이유영의 차가운 손등을 감쌌지만, 이유영은 즉각 손을 빼냈다.“유영아.”“이럴 필요 없잖아.”이유영은 냉소를 띤 채 다시 말했다.그 한마디는 박연준의 가슴을 옥죄며 숨이 막히게 했다.그는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진실을 알아버린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이 두려워했던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이유영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한편, 강이한 쪽.강이한이 서주에 도착한 후, 신시욱의 말을 듣고 아이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가씨는 단순히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을 뿐이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단순한 감기라니?“게다가 지금은 이식 거부 위험 기간도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신시욱은 강이한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강이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박연준은 지금 어디에 있어?”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강이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신시욱은 대답했다.“박연준 씨는 며칠째 서주에 계시지 않았습니다.”서주에 없다고?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박연준 또한 이유영에게는 마찬가지였다.남자는 이유영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유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물었다.“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박연준의 질문에 이유영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박연준은 조용히 의자를 끌어 이유영의 옆에 앉았다.테이블 위에는 우지와 우현이 정성껏 끓인 영양죽이 놓여 있었다. 대추를 넣어 이유영의 몸 상태를 배려한 것이었다.정씨 가문 사람들은 늘 이유영을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정말 미안해.”박연준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박연준의 사과는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는 단지 이유영이 연서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프산의 눈과 태양이 이유영에게 이렇게 깊은 상처를 줄 줄은 몰랐다.이유영은 담담히 말했다.“결국 일어날 일이었어.”이유영은 박연준의 사과를 의외로 평온하게 받아들였다.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유영은 이제 그런 사람이었다.이유영에게는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과거의 이유영이었다면 분명 감정을 폭발시키고 히스테릭하게 굴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이유영은 자신의 시력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과거 의사 선생님은 이유영의 눈은 수술 외에는 회복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다만 염 선생이 있었다면 수술 없이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가능성일 뿐, 절대적인 보장은 없었다.“네가 그랬어?”이유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유영이 묻는 것은 이온유의 일이었다.강이한이 떠나자마자 박연준이 우천시에 나타난 것을 보고 이유영은 이 사건은 박연준과 관계있다고 생각했다.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이미 눈치챘군.”이유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역시 네가 꾸민 일이네.”강이한이 또다시 박연준의 손에 놀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유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이제는 강이한을 멍청
결국 강이한은 떠났다.이온유의 병세가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유영 앞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식당은 한동안 적막에 잠겼다.우지와 우현은 고개를 숙인 채 마음 아프게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아가씨.”우지가 앞으로 다가가 이유영을 안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차분히 손을 들어 우지의 움직임을 멈췄다.“편애가 뭔지 알겠죠?”편애.그랬다. 만약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많은 순간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선택할 것이다.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결국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과거의 이유영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다.이유영은 강이한의 마음속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물론 이유영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역으로서의 자리였다. 대역은 결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아가씨, 이제 더는 신경 쓰지 말아요. 네?”우지가 다정하게 위로하며 말했다. 우지의 말에 이유영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우지 씨.”“네, 아가씨.”“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해요.”세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았다.과거 강이한과의 관계에서, 이유영은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그리고 그 과신은 결국 이유영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네, 아가씨.”“...”“기억할게요.”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를 본 이상,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는지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다....강이한은 우천시를 떠났다.강이한의 행적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박연준은 강이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박연준은 즉시 우천시로 향했다.강이한은 서주에 도착했고 박연준은 우천시에 도착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의 방에는 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