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은 유영과 마주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이렇게 노려보면 유영이 전처럼 기가 죽어 잘못을 빌 줄 알았는데 유영의 덤덤한 태도는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아줌마, 차 좀 내다줘요.”“예, 사모님.”예전이었다면 유영이 직접 차를 내왔을 것이다.진영숙은 유영을 하녀 부리듯이 부렸고 고용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은 그녀가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유영은 도도하게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애착 인형을 쓰다듬고 있었다.진영은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서 바로 강이한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장 집으로 와!”“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그래!”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이한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기사 보낼 테니까 본가로 돌아가세요.”“이한아!”진영숙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의 생각은 단순했다. 당장 강이한이 유영과 이혼하고 그녀를 이 집에서 내쫓는 것.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한가하게 인형이나 쓰다듬고 있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자 유영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아, 괜찮아?”수화기 너머로 정국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있던 진영숙에게 들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진영숙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유영이 뭐라고 하는지는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 마세요. 여기 일 다 처리하면 돌아갈게요.”돌아간다고?그 남자 곁으로?아침에 봤던 기사가 떠오르자 진영숙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유영은 발작하기 일보 직전인 진영숙을 보고 전화를 끊었다.아니나 다를까, 진영숙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이유영, 이 뻔뻔한 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아무리 남자에 눈이 멀어도 좀 그럴 싸한 남자를 만나든가! 그 남자 네 아빠뻘이야! 넌 수치심도 없니?”진영숙의 욕설에 유영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의도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하세요?”“너 뭐
집에 구급차까지 출동했는데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자고 있었다니!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강이한은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그가 이유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그녀가 변한 걸까?유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당신이랑 세강 일가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왜 이렇게 변한 걸까?만약 그런 일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가 아는 이유영일지도 모른다.모든 걸 바쳐 사랑했지만 불길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날의 그 절망, 그리고 굳이 찾아와서 도발하던 한지음의 모습, 이런 걸 겪고도 어찌 마냥 착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일 수 있을까?“뭐 하는 거야? 이거 놔.”그녀가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남자가 그녀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유영은 몸부림쳤지만 남자의 우악스러운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실망스러운 걸까?변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감히 날 무시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짝!그가 억지로 그녀를 차에 밀어 넣으려고 하던 순간, 유영의 차가운 손바닥이 남자의 뺨을 때렸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항상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만 바라봐주던 그런 눈빛은 어느새 증오로 바뀌었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차로 밀어 넣으려던 순간, 호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강이한은 한 손으로 유영을 도망 못 가게 꽉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오빠 언제 병원에 올 거야? 지음 언니가 엄마 병실 지키고 있어.”옆에서 듣고 있던 유영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을 미치게 했다.“있던 병실로 돌려보내.”“안 간다는 걸 어떻게 그래. 급하게 오다가 엘리베이터에 손까지 끼여서 다쳤어. 휠체어에서 떨어졌는지 무릎까지 다 까졌더라고.”강이한
아침 식사가 끝난 뒤, 유영은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자고 있던 소은지는 친구가 해외에서 귀국했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너 돌아왔어?”“응, 곧 너 있는 곳으로 갈 거야.”“그래. 오전에 반차 낼 테니까 이쪽으로 와.”“그래.”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맨몸으로 집을 나섰다.이곳에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옷차림도 어제 입고 왔던 대로였다.그들이 사는 홍문동 아파트는 도심과 좀 떨어진 호화 아파트라 워낙 거대해서 바깥까지 나가서 차를 잡아야 했다.길가에서 30분이나 기다렸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차가 잡히지 않았다.이때, 외제차 한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더니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유영이 짜증을 내려던 순간, 반쯤 열린 차 창밖으로 강이한이 싸늘한 얼굴을 내밀었다.“타.”명령조가 다분한 말투였다.유영이 거절하려는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나 인내심이 그렇게 많지 않아. 예전에는 당신 봐서 주변인들한테까지 압력을 넣지 않았어. 그래도 10년 같이 산 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지금 무슨 말을 하지?”분명한 협박이라는 건 유영도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미친 행세를 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결국 유영은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어디로 가는데?”그녀가 물었다.강이한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병원.”병원 얘기가 나오자 그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3개월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하나도 깨달은 게 없었다.시간만 길게 연장되었을 뿐, 지난 생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다.유영은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물었다.“거기 가서 뭘 어쩌라고?”강이한이 말했다.“당신이 납치범을 사주한 사실을 지음이가 알았어.”“그래서?”“그렇게 과분한 걸 바라지는 않아. 사과만 한다면 그냥 넘어가겠대.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니!유영은 어처
강이한은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지음이 사실을 알고 태도로 보아 무언가를 할 것 같았다.강이한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그 전제가 내가 사과하는 거고?”그가 양보할수록 유영은 더 거칠게 파고들었다.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래.”“한지음한테 가서 전해. 어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고.”말을 마친 유영은 몸을 비틀어 강이한의 품을 떠났다.조금 전까지 누그러진 말투로 그녀를 대하던 남자의 얼굴이 급변했다.그게 자신에 대한 실망이라는 것을 유영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이런 말 할 자격이 없었다.그녀는 말없이 반대편으로 걸어가다가 분이 안 풀리는지 뒤돌아서서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증거, 나서원 씨한테 받은 거지? 어디서 찾아냈는지 확인은 해봤어? 그리고 어떤 경로로 한지음 귀에 들어갔을까?”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유영은 곧장 소은지가 있는 오피스텔로 찾아갔다. 자고 있던 소은지가 잠옷을 입은 채로 달려나와 그녀를 안아주었다.“네 전화 받고 아침 만드느라 씻지도 못했어.”그 말을 들은 순간 유영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청하시에서 소은지는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사실 긴 악몽에서 깨어나 회귀했을 때, 바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싶었다.홍문동 저택에 있는 것만으로 그녀에게는 지옥이었다.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뭔지 알기에 친구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아침을 먹고 왔다고 말하려던 유영은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서 있는 친구를 보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배고프다. 빨리 밥 먹자.”“그래.”소은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키 차이가 제법 났기에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으니 소은지가 언니 같았다.유영은 소은지가 준비해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강이한과 함께 살게 된 뒤로 아침은 항상 한식으로 고집해 왔다.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입맛까지
경찰서를 나온 유영은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앞장서서 걸었다. 소은지가 다가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유영아.”“나 괜찮아.”괜찮다고는 하지만 속은 이미 뒤집어진 상태였다.강이한이 합의를? 왜?예전이었다면 상대가 누구든 유영에게 해를 가하고자 한 사람에게 그는 자비를 베푼 적 없었다.하지만 집에 매일같이 죽은 고양이와 저주의 말을 써서 보낸 사람들을 그는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었다.“강이한 왜 그랬을까?”“그 사람들 아마 강서희와 한지음 돈을 받은 사람들일 거야.”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지도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그걸 강이한이 왜!”이유는 유영도 알지 못했다.그녀가 사라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3개월 정도 피신해 있으면 지난 생에 벌어진 일들이 사라질 줄 알았다.그녀의 도피로 인해 지난 생처럼 잔인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녀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았다.“이혼소송 무조건 이겨야겠어. 그런 인간 쓰레기랑은 멀찌감치 떨어져야 해. 정도가 심하면 네 안전에까지 위해를 가할 사람들이었어. 그런 사람들과 합의해 주다니!”소은지가 부르르 떨며 씩씩거렸다.유영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 상황에서 더 할얘기도 없었다.그들의 10년이 이토록 허무한 것이었을 줄은 몰랐다.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있을까?유영은 무슨 정신에 소은지의 오피스텔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소은지는 출근하며 점심에 집으로 배달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나 유영은 스스로 할 수 있다며 고개를 저었다.멍멍!발끝에서 통통한 강아지가 다가와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녀석은 그녀가 홍문동 저택에서 데리고 나온 그녀의 반려견이었다. 출국하면서 걱정했는데 살이 뒤룩뒤룩 찐 걸 보니 아줌마가 먹이를 잘 먹인 모양이었다.유영은 다가가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배고프지? 앞으로는 넓은 저택에서 못 살고 나랑 거리를 방황해야 할지도 몰라.”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대기업 사모님이 가정 불화로 가출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룹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다.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고 아마 내일쯤 기사가 올라올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녀가 떠나고 몇 달 사이, 세강은 항상 여론의 중심에 있었다.비록 최종적으로 좋게 해결했지만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 매체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유영도 그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었다.“이제 와서 이미지 챙긴다고? 한지음이랑 둘이 붙어다닐 때는 왜 그룹 이미지 신경 안 썼어?”“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강이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당신이랑 그 여자가 내 머리에 똥물을 끼얹었는데 나한테서 좋은 말까지 듣고 싶어?”3개월이나 이어진 여론의 질타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강이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좋게 달래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여론 얘기가 나오자 유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오늘 경찰서를 다녀왔는데 당신 그 악플러들 합의해 줬더라?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게 할 짓이야?”악플러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말 안 했으면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그건 당신이 나한테 해명해야 하지 않아? 왜 이렇게 적반하장이야?”“내가 무슨 해명? 당신 미쳤어?”유영 입장에서는 화가 나서 펄쩍 뛸 일이었다.강이한의 얼굴도 분노로 물들어 갔다.“그 사람들 계좌에 당신 명의로 입금된 기록이 있었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좀 알 수 있을까?”유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의 명의로 된 입금 내역. 전에 강이한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간 카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 본인조차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강이한은 이를 주도한 당사자가 유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그럼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당신이 나서준 덕에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었으니까?”적을 너무 방심한 유영의 잘못이었다.하지만 그랬기에 폭력
한편, 오피스텔로 돌아간 유영은 외삼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당분가는 여기 있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그래도 놀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전공을 살려 작업실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정국진은 당연하게 그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강이한과 함께할 때는 일이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대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전직주부 생활을 했다.매일 시댁과의 갈등을 겪고 집안의 사소한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이 되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유영 본인은 아니었다.재벌가의 며느리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아마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평범한 가정주부는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정국진의 든든한 지원까지 있으니 앞으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다.퇴근하고 돌아온 소은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열심히 스케치를 그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강이한과 틀어지고 엄청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실연했다고 다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유영은 시큰둥하게 대처했다.강이한과 결혼하고 유영이 스스로 백수가 되길 원한 게 아니라 그가 원했기 때문에 양보한 것이었다.그 동안 세강 식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림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지내서 널 다시 보게 됐어.”소은지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밥 했어. 반찬만 데우면 돼.”“와. 이제 밥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그 말을 들은 유영이 움찔했다.“그 집에서 내가 손 놓고 놀기만 한 건 아니야.”시어머니랑 같이 안 지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하지만 매번 본가로 가면 차라리 주방에 갇혀 일을 하는 게 편할 정도로 시달렸다.소은지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돈도 인맥도 내가 다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펜을 잡은 유영의
하지만 진영숙은 아니었다.이번 일로 화가 나는데 풀 곳이 없어서 너무 갑갑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는 25일 날 경원이 귀국할 거야. 이유영 그 계집애랑은 빨리 이혼하고 쟤도 빠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이 싫어도 지금 시점에서 시력까지 잃은 한지음을 며느리로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물론 최근 이유영이 보인 행보가 괘씸해서 단칼에 내쳐버릴 생각이었다.유경원의 귀국 소식을 들은 강이한과 강서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예전이었다면 신랄하게 반박했겠지만 그래도 진영숙의 건강을 고려해서 그는 담담히 말했다.“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좀 쉬세요.”“이한아!”말을 마치고 뒤돌아서는데 뒤에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유영 걔도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여자 만나고 싶었으면 적어도 이유영보다 더 나은 애를 만났어야지. 넌 어째 여자 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냐!”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에 성격까지 좋은 이유영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한지음을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진영숙은 아들의 철없는 행동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걸음을 멈춘 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병실을 나갔다.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달래주었다.“엄마, 의사가 화를 내면 안 좋다고 했잖아.”“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쟤 하는 꼬라지 좀 봐!”“엄마도 그만해. 이유영 때문에 그 소란이 났는데 오빠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유영 얘기가 나오자 진영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아비 뻘 되는 남자랑 바람이 난 년을 뭐가 아쉬워서 잡고 있는 거야?”진영숙이 가장 화가 난 부분은 이혼 얘기를 이유영이 먼저 꺼냈다는 점이었다.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도 정작 이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점점 아들도 미워지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놔주지 않으면서 더 보잘것없는 한지음까지 챙기니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비록 이유영이 세강의 안주인으로서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들의 이런 행보도 그녀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
이유영은 처마 밑 긴 의자에 누워 밖에서 스며드는 대나무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었다.빗방울이 대나무잎에 부딪치는 소리, 그 울림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들어가. 춥잖아.”“서주는 지금 어때?”오전에 신지수에게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요즘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대체 누가 그의 것을 박연준에게 넘긴 걸까?신지수의 조사 결과,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의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박연준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강이한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아직도 못 잊는 거야?”박연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억눌린 고통을 삼켰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못 잊는다고? 박연준은 분명 강이한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주는 이유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눈이 보였다면, 박연준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원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는 깊고도 거셌다.“못 잊는다고?”이유영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차가웠다. 한겨울의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미소였다.토끼털로 장식된 옥색 한복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옷을 입은 이유영은 차가웠다.그녀의 평온함은 한때 그의 다정함 속에 묻혀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했던 모습은 언제였던가.강이한에게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그녀는 완벽한 전업주부,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단지 대역일 뿐이었다니.“이유영.”“박연준, 너와 강이한은 한 번이라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독립적인 존재? 그렇다. 이유영은 살아있
그는 덜컥 겁이 났다.더 큰 대가가 두려웠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키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강이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염 선생의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정도였고 문제는 운명, 아니 그 대가가 이유영에게 재앙처럼 닥친 것이다.석 달의 고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만약 이 모든 고난의 대가를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강이한은 기꺼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의 빛을 되찾아주고 이유영에게 고요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우천시.마지막 3일째가 되자 박연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늘 평정심을 지키던 그도 이유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문기원이 돌아왔다.“선생님.”박연준은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남은 3일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 되었다.박연준은 연서의 죽음이 회장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그날부터 그의 밤은 끝없는 불면으로 채워졌다.그와 강이한은 모두 함정에 빠졌고 이제 와서 강이한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걸 볼 수는 없었다.점심 식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박연준은 남은 이틀 동안, 이유영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방울의 약이라도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처럼.“펑!”이유영은 빈 그릇을 세게 내려놓았다.박연준은 텅 비어 있는 그릇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물었다.“다른 느낌은 없어?”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이유영의 말 한마디에 박연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한 그릇 더 마셔야 해?”박연준은 말없이 침묵했고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이미 체념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영은 이미 약이 소용없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이해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거라니?소은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넌 한지음과의 관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거야?”소은지는 강이한의 뻔뻔한 대답에 또다시 놀랐다.이유영을 위해 희생하는 강이한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소은지, 넌 몰라.”“그래, 모르겠어.”소은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고 강이한을 향한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내뱉었다.“한지음을 돌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굳이 곁에 두어서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어?”“...”“강이한, 이유영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네 응보야!”만약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아마 강이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소은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았다.강이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응보라고? 그래, 강이한도 그것이 응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이 한지음을 곁에 둘 거야?”한지음은 이유영 비극의 시작이었다. 소은지는 지금까지도 강이한이 그 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이런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소은지의 물음에 강이한은 눈을 크게 뜨고 깊은 고통이 서린 눈빛으로 답했다.“물론이지.”“...”소은지는 한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강이한의 얼굴에 뿌렸다.예전에 우천시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았을 때, 강이한이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우스웠다.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소은지는 분노에 찬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씁쓸한 고통이 가득했다.후회할까? 물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강이한은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운명은 바꾸려고 한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강이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쓰라린 마음이었던 것이다.“유영이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만나고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사실...”“제가 빚진 거예요.”정국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한이 말을 잘랐다.그는 정국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고 강이한도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결국 이유영의 눈에 다른 사람의 빛이 비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휴...”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은 한 번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깨달음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지금의 강이한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깨달았고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게 된 것이다....소은지는 강이한이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오후에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은지였기 때문이다.“후회해?”소은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이한에게 물었다.“...”한지음 일로 후회하냐는 것이었다. 소은지는 강이한과 한지음의 관계를 가장 혐오했다. 소은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에 수많은 부부의 파탄을 목격하면서 자연히 불륜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그런 소은지가 강이한에게 후회하느냐고 묻자, 강이한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질문, 몇 번이나 해봤어?”“...”소은지의 머릿속에 설선비가 떠올랐다.당시 그 사건은 청하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고 만약 소은지의 변호가 없었다면 설선비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소식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우연히 식당에서 설선비를 만난 소은지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후회하니?”설선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은지 씨,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지금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어떤 절망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절망은 마치 끝없이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혹한 절망은 없었다.조용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강 선생님, 이만 가주세요. 선생님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악몽과 마주할 때 쉽게 맞설 수 없다. 어린 월이도 마찬가지였다.오는 길 내내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월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른 채 망연히 서 있었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결국, 그는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서는 순간, 유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 아가씨, 이제 괜찮아요.”“으흑, 으흑...”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소리에 강이한의 마음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그저 아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아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강이한은 그저 아이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고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아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한 아버지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복도 끝에 정국진이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강이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듯했다.상처 입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정국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이가 아직도 너를 무서워해?”“...”‘무서워한다'는 단어가 강이한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과거의 강이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다 제 잘못이에요.”그는 깊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강이한의 잘못이 확실했다.하지만 마냥 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강이한은 월이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강이한은 아이가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소중히 자라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최고의 스승이셨고 외삼촌 또한 훌륭한 삼촌이었으며 엄마 역시 다정한 어머니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의 삶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한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마치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유씨 할머니, 유씨 할머니?”아이는 강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소중한 바비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 인형은 이유영을 똑 닮아 있었다. 이유영을 볼 수 없는 아이는 온 마음을 그 인형에 의지하고 있었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아는 아이와 달리, 그는 무엇을 지켜냈던가?아이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강이한의 가슴은 다시금 깊은 고통에 잠겼다.아이를 돌보는 유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아가씨.”“나쁜, 나쁜 사람!”유 아주머니도 강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곳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정 선생님과 사모님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정씨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다시 만나게 하는 거냐고, 차라리 바깥 여자의 아이와 함께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유 아주머니는 아이를 꼭 껴안고 강이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고통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장 가까운 딸에게 원수처럼 취급받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월이를 통해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그는 아이에
강이한의 가슴은 칼날에 도려내듯 아려왔다.영원히 기다릴 수 없는 이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둬야 하는 고통을, 이제야 강이한은 깨달았다.한때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자리는 이유영에게는 비극이었다.이유영의 모든 기다림을 강이한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그렇기에 지금, 이유영의 냉담함을 견뎌내는 고통은 그만큼 절망스러웠다.“이제 그만 울어, 응?”“엄마가 보고 싶어요.”작은 아이는 울먹이며 강이한을 바라보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강이한은 눈가에 맺힌 씁쓸함과 고통을 감추려는 듯 눈을 감았다.강이한 역시도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우천시를 떠난 후, 그는 이유영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3개월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서주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대부분 마무리되었다.그 일들은 서주와 파리 엔데스 가문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정국진뿐이었고 나머지는 강이한이 미쳤다고 여겼다.강이한은 다시 파리에 오게 되었다.강이한의 방문에 임소미는 여전히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태도와 분위기에서 분명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임소미는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위층에 있어.”임소미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지난번처럼 아이를 보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고맙습니다.”“...”강이한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임소미는 이것이 아이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에 더욱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강이한에게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며칠 동안,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염 선생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며칠이라도 모두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임소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이 여전히 호전되지 않는다면, 오늘 강이한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해
강이한은 아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착하게 있어야 해.”“아빠, 엄마 찾으러 가는 거야?”“...”아빠, 엄마...그 두 단어가 온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강이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는 온유의 아빠였고 이유영은 온유의 마음속에서 엄마였다.월이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어쩌면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까?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과거와 현재의 악연, 그리고 연서까지... 이 모든 것이 쌓인 이상,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온유야.”강이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답답함을 억눌렀다.온유는 멍한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아빠?”“엄마는 잊어.”“...”아이의 눈에서 순간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강이한의 눌러 두었던 아픔이 다시 치밀어 올라 목이 메었고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엄마는... 잊어, 응?”이유영은 엄마가 아니었고 이제는 영원히 엄마가 될 수 없었다.강이한은 온유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었다.“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아요?”“...”“엄마는 동생만 원하는 거죠?”작은 아이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강이한은 알고 있었다.온유는 태어난 이후로 한지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박연준의 계략 때문이었다.온유에게 엄마는 항상 이유영이었다.박연준의 가장 잔혹한 행동은 온유에게 화살을 돌렸다는 건데, 하지만 강이한은 박연준이 온유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온유를 보았다면 아마도...돌이켜보면 박연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강이한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작지 않았다.“잊어, 응? “이 아이가 이유영을 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고통이 뒤따랐다.과거, 한지음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 때문에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이한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오자, 늘 강이한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이정과 신시욱 모두 한지음이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지음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각막을 기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유영의 각막을 기증하겠다고 말했지만 모두 그가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수술실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 기간 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누구도 강이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강이한이 직접 이유영을 감옥에 보냈을 때, 그들은 한지음이야말로 강이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이제야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분명해졌다.우천시에서 이유영은 침착하고 태연했으며 한지음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결심을 굳혔다. 만약 염 선생의 약으로 회복이 되지 않을 경우, 이유영을 위해 본인이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이유영 씨는...”생각에 잠긴 이정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 결국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온유 아가씨와 오셨습니다.”“...”온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정의 가슴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험난했던 과거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병원에서 이유영이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강이한이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연서의 존재마저도 온유와 월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서는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다.“들어오라고 해.”강이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썹에는 떨쳐낼 수 없는 긴장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