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모님이 가정 불화로 가출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룹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다.수많은 눈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고 아마 내일쯤 기사가 올라올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녀가 떠나고 몇 달 사이, 세강은 항상 여론의 중심에 있었다.비록 최종적으로 좋게 해결했지만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 매체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유영도 그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었다.“이제 와서 이미지 챙긴다고? 한지음이랑 둘이 붙어다닐 때는 왜 그룹 이미지 신경 안 썼어?”“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강이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럼 무슨 말이 듣고 싶어? 당신이랑 그 여자가 내 머리에 똥물을 끼얹었는데 나한테서 좋은 말까지 듣고 싶어?”3개월이나 이어진 여론의 질타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강이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좋게 달래서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여론 얘기가 나오자 유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강이한에게 말했다.“오늘 경찰서를 다녀왔는데 당신 그 악플러들 합의해 줬더라?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게 할 짓이야?”악플러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말 안 했으면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그건 당신이 나한테 해명해야 하지 않아? 왜 이렇게 적반하장이야?”“내가 무슨 해명? 당신 미쳤어?”유영 입장에서는 화가 나서 펄쩍 뛸 일이었다.강이한의 얼굴도 분노로 물들어 갔다.“그 사람들 계좌에 당신 명의로 입금된 기록이 있었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좀 알 수 있을까?”유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의 명의로 된 입금 내역. 전에 강이한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간 카드를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 본인조차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강이한은 이를 주도한 당사자가 유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그럼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당신이 나서준 덕에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었으니까?”적을 너무 방심한 유영의 잘못이었다.하지만 그랬기에 폭력
한편, 오피스텔로 돌아간 유영은 외삼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당분가는 여기 있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그래도 놀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전공을 살려 작업실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정국진은 당연하게 그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강이한과 함께할 때는 일이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반대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전직주부 생활을 했다.매일 시댁과의 갈등을 겪고 집안의 사소한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이 되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유영 본인은 아니었다.재벌가의 며느리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아마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평범한 가정주부는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정국진의 든든한 지원까지 있으니 앞으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다.퇴근하고 돌아온 소은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열심히 스케치를 그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강이한과 틀어지고 엄청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실연했다고 다 죽으라는 법은 없잖아.”유영은 시큰둥하게 대처했다.강이한과 결혼하고 유영이 스스로 백수가 되길 원한 게 아니라 그가 원했기 때문에 양보한 것이었다.그 동안 세강 식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림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지내서 널 다시 보게 됐어.”소은지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밥 했어. 반찬만 데우면 돼.”“와. 이제 밥도 할 줄 알아? 대단한데?”그 말을 들은 유영이 움찔했다.“그 집에서 내가 손 놓고 놀기만 한 건 아니야.”시어머니랑 같이 안 지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하지만 매번 본가로 가면 차라리 주방에 갇혀 일을 하는 게 편할 정도로 시달렸다.소은지가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돈도 인맥도 내가 다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펜을 잡은 유영의
하지만 진영숙은 아니었다.이번 일로 화가 나는데 풀 곳이 없어서 너무 갑갑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는 25일 날 경원이 귀국할 거야. 이유영 그 계집애랑은 빨리 이혼하고 쟤도 빠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이 싫어도 지금 시점에서 시력까지 잃은 한지음을 며느리로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물론 최근 이유영이 보인 행보가 괘씸해서 단칼에 내쳐버릴 생각이었다.유경원의 귀국 소식을 들은 강이한과 강서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예전이었다면 신랄하게 반박했겠지만 그래도 진영숙의 건강을 고려해서 그는 담담히 말했다.“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좀 쉬세요.”“이한아!”말을 마치고 뒤돌아서는데 뒤에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유영 걔도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여자 만나고 싶었으면 적어도 이유영보다 더 나은 애를 만났어야지. 넌 어째 여자 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냐!”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에 성격까지 좋은 이유영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한지음을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진영숙은 아들의 철없는 행동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걸음을 멈춘 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병실을 나갔다.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달래주었다.“엄마, 의사가 화를 내면 안 좋다고 했잖아.”“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쟤 하는 꼬라지 좀 봐!”“엄마도 그만해. 이유영 때문에 그 소란이 났는데 오빠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유영 얘기가 나오자 진영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아비 뻘 되는 남자랑 바람이 난 년을 뭐가 아쉬워서 잡고 있는 거야?”진영숙이 가장 화가 난 부분은 이혼 얘기를 이유영이 먼저 꺼냈다는 점이었다.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도 정작 이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점점 아들도 미워지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놔주지 않으면서 더 보잘것없는 한지음까지 챙기니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비록 이유영이 세강의 안주인으로서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들의 이런 행보도 그녀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
한지음은 고개를 숙이며 표독스러운 표정을 감췄다. 대신 입에서는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도 대표님 어머님이시잖아요. 문안을 가는 건 후배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불편하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해요.”“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강이한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매번 한지음이 약해진 모습을 보일 때면 마음이 흔들렸다.과거 유영도 이렇듯 약하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이유인지 지금은 여기저기 공격 당하는 상황에서도 한 번도 그에게 굽히고 들지 않았다.경찰에 도움을 요청할지언정 그에게 지켜달라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한지음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머님이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런 모습이 된 건 제가 원한 게 아니잖아요. 저도 피해자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요.”갑자기 한지음이 말끝을 흐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강이한은 그녀에게 증거 관련해서 추궁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전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걱정 마. 다시 앞을 보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내가 만들 거야.”단호한 그의 결심이 담긴 한마디였다.한지음은 그럼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제가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죠. 의사가 그랬어요. 지금 당장 적합한 망막을 이식 받지 못하면 평생 앞을 못 보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요.”강이한은 숨이 막혀왔다.의사한테 이미 들은 내용이었고 그래서 최근 열심히 적합한 기증자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시망막 이식 수술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쉽지 않았다. 살아 있는 기증자는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었고 뇌사 환자들을 찾아봤는데도 쉽지 않았다.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그분이 부러워요.”강이한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지음이 애통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현재 모든
그 모습을 본 유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다급히 소은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친구의 손에서 칼을 빼앗은 뒤, 강아지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말했다.“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어.”“하지만 유영아….”“내가 응대할 게.”강이한이 왜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영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소은지와 그의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소은지는 씩씩거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듣고 강아지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손으로 안 되니 발로 걷어차는 소리까지 들려왔다.문밖에서 남자의 성난 고함도 같이 들려왔다.“이유영, 나와!”밤잠을 방해받은 이웃들이 문을 열고 욕설을 퍼부었다.“뭘 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워!”“요즘 젊은 것들이란….”하지만 곧 그 소리는 잠잠해졌고 다급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섬뜩한 눈빛에 겁을 먹은 탓이었다.유영은 안 보고도 돌아가는 상황이 뻔히 보였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서 현관문을 열었다.남자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눈빛과는 결이 다른 눈빛이었다.마치 자식에게 실망한 부모마냥, 마음은 아프지만 어떻게든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보였다.유영도 기죽지 않고 따졌다.“미친 거 아니야? 병원 예약해 줘?”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목에서 강한 힘이 전해지더니 그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다친 팔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끌려가다 보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대로 무릎을 시멘트 바닥에 박아버렸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남자는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는 그녀를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유영은 거꾸로 매달린 채,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이거 놔, 이 미친 놈아!”하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주차장까지 간 남자는 유영을 차에 억지로 밀어넣었다.그 과정에서 유영이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덜미를 단단히 잡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얌전히 있어,
고개가 돌아가고 얼굴에서 얼얼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차량 내부에는 삭막한 정적이 잠시 감돌았다.강이한도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한참이 지난 뒤, 고개를 돌린 유영은 남자를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지금 그 여자 때문에 나를 친 거야?”머리가 웅웅거리고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강이한이 불륜녀를 위해 자신에게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다.예전에 그에게 실망하고 슬펐던 마음뿐이었다면 이 순간에는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져 버렸다.내려놓는 건 한순간이라고 했던가.마음이 완전히 돌아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더 이상 강이한이라는 남자에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강이한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뻘겋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유영아.”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나한테 손대지 마!”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차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그녀는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열어!”“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우리 사이에 더 얘기할 게 남았어?”이성을 상실한 유영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세강 대표로서의 품위는 지켜. 앞으로 무슨 일이든 변호사 통해서 얘기해. 내가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경찰에 신고해. 내가 도와줘?”말을 마친 유영은 핸드폰을 꺼내 112 신고버튼을 눌렀다.강이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당신 미쳤어?”그가 울부짖었다.이 여자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유영은 그런 남자를 비웃듯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떳떳하다는데 당신은 뭐가 두려운 거야?”그랬다. 왜 두려운 거지?증거를 받았을 때 강이한은 경찰에 바로 제출하는 대신, 증거를 들이밀며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협박했다.무슨 상황이 와도 가장 먼저 떠오른 반응은 절대 이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반면 유영은 어땠을까?증거 앞에서도
그는 손을 뻗어 그 가녀린 목을 움켜잡았다.이대로 숨통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컥….”유영이 고통에 신음했다.“죽고 싶어?”분노한 강이한이 으르렁거렸다.둘이 함께한 세월 동안 유영은 항상 그의 그늘 아래 살았다. 적어도 강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자신이 오랜 세월 지켜준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세강 일가는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다는 얘기, 내가 안 했었나?”유영이 말이 없자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명백한 경고였다.“나도 말했잖아. 당신이 그 시작이 되거나 나가서 죽어버리라고. 지금 나한테 당신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협소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럼 내가 살아 있단 걸 느끼게 해줘야겠군.”“꺼져!”남자의 손이 옷섶을 비집고 들어오자 유영은 뺨을 날려버릴 기세로 손을 번쩍 들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남자가 가녀린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전에는 항상 부드럽게 그녀를 대하던 강이한이었다.갑자기 왜 이렇게 파렴치하고 우악스럽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영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내 몸에 손대지 마!”“우린 아직 공식적으로 부부야.”“부부라는 자각이 있기나 해?”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면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부라고 주장하고 있었다.“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당신 같은 남편을 뒀는지 모르겠네! 가장 힘들 때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도움이나 받고 말이야.”그 말은 참고 있던 강이한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게 만들었다.분노한 두 사람은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한편, 청하병원.한지음은 두 눈을 가리던 붕대를 풀어 헤쳤다. 유경원이 입국한다는 소식에 안 그래도 기분이 상했던 강서희는 그 모습을 보고 부루퉁한 말투로 말했다.“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병원 관계자는 내가
긴 싸움 끝에 유영은 다시 오피스텔로 올라갔다.엉망이 된 얼굴로 돌아온 친구를 본 소은지의 분노가 폭발했다.“그 인간이 너 때렸어?”소은지가 부르르 떨며 물었다.유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불도저 같이 달려들던 강이한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귀뺨을 때리던 강이한의 모습을 떠올렸다.지금도 얼굴이 얼얼하고 숨통을 옥죄던 느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소은지는 다가와서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고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일단 병원부터 가자.”“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유영은 친구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소은지가 차분하게 말했다.“이 정도면 가정폭력으로 신고가 가능해. 우리 이혼소송에도 도움이 될 거야.”유영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곧이어 그녀는 소은지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정폭력!전에는 한 번도 가정폭력과 강이한을 연관 짓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그가 보인 행보를 보면 이건 가정폭력이 분명했다.과거에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믿고 이 세상에 강이한 말고 기댈 사람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그에게 모든 걸 의지했다. 그리고 강이한 주변 사람들도 그들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바라봤다.유영은 회귀하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소은지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백지장이 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렇게까지 몰아가는 건 싫어?”유영이 말했다.“그게 아니라 좀 믿기지 않아서.”강이한에게 귀뺨을 맞고 목까지 졸렸지만 아직도 이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그가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걸 알았을 때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가정폭력까지 언급되다니.“그 사람은 너랑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야. 아마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거야.”소은지가 말했다.마치 모든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말투였다.유영은 온몸을 바짝 긴장했다.“그건 알아….”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전생에 그가 보인 행보를 보면 더 심한 건 아직 시작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
마음이 이 정도로 깊지 않았다면 감정을 이렇게까지 억누를 수 있었을까?박연준은 아마도 과거 연서에게조차 이렇게까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을 것이다.강이한이 마지막 순간 이유영을 놓아주면서도 박연준과 그녀 사이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 이유였을 것이다.지금 보니, 박연준은 언제나 진심이었다.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였기에 오늘 밤 벌어진 모든 일이 이토록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내일 가도 되잖아.”박연준은 돌아서며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는 동안 감정을 철저히 억눌렀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끝없는 아픔뿐이었다.“그 여자는?”진영숙을 말하는 것이었다.박연준은 순간 미세하게 움찔했고 그 반응을 본 이유영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띠었다.“흥!”진영숙과 이유영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너와 그 여자가 또 어떤 거래를 했을지 누가 알아.”그녀는 한 발 다가가며 비꼬듯 물었다. 강이한의 어머니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묘하게 신경 쓰였다.진영숙을 대하던 태도가 나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며 박연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박연준은 잠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딱 하루만이야.”“넌 내가 그 여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이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과거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강이한을 위해 모든 건 참아내면서조차 강씨 집안에 머문 적은 없었다.신분과 지위가 아무리 다르고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이유영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돼.”“뭐라고?”이건 어제부터 박연준이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지 이유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과거의 일들이 떠오르자 이유영은 다시 진영숙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박연준의 말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남자의 시선이 이유영에게 고정되었다.이 지경이
그런 말은 원래 박연준의 입에서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그가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자라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이가 침범하는 것을 참지 못할 테니까.“강이한과 한지음은 불륜이었어. 재욱 씨는 연우 씨에게 분명히 이야기할 거야. 어떻게 같아?”강이한은 한지음과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키면서도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고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서재욱과 이유영 사이에는 애초에 그런 감정이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박연준의 말은 아무런 책임감 없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박연준은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평생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순간은 보통 강이한에게서 많이 봤었다. 강이한은 박연준의 공격과 복수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분노하곤 했다.그리고 지금, 이유영은 그 모든 것을 박연준에게 되돌려주고 있었다.“너...”박연준은 이유영의 무심한 태도를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그 사람 만나지 마. 유영아, 내가 억지로 조치 취하게 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무겁고도 위험했다.박연준의 말 속에 담긴 위협을 이유영은 단번에 알아채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 그러면 어쩔 건데?”아무도 박연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유영은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그가 다시 이유영을 바라볼 때, 그의 눈빛에는 끝없는 위험이 서려 있었다.“내가 뭘 할 것 같아?”10년 동안 한 사람을 계략적으로 속일 수 있었던 남자였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날 협박하는 거야?”“난 그럴 생각이 없어.”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파리에 돌아온 이후, 이유영의 행동은
그때의 박연준은 결코 이런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서재욱이야?”박연준은 분노를 억누르며 쏘아붙였다.“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서재욱은 좋은 사람이잖아.”좋은 사람? 그녀의 태도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었다.그녀의 말에 박연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은 사람은 서재욱을 두고 하는 말인가? 정말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그 사람을 믿는 거야?”마치 이빨 사이로 힘겹게 짜내듯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거칠었다.이유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너희들보다 훨씬 믿음직한 사람이야.”이유영의 눈에는 서재욱이 박연준이나 강이한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적어도 10년 동안이나 한 사람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런 말을 주저 없이 내뱉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이것이 바로 강이한이 말한, 그들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는 진짜 의미였을까? 그렇다면 그에게 미래란 존재하는 걸까? 그녀는 정말 단 한 조각의 마음도 남기지 않은 걸까?“서재욱 비서가 임신한 건 알아? 그의 아이라고!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예전 같았으면 박연준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쓰레기라고? 단지 서재욱에게서 이유영을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건가?“알아.”“뭐?”“그 애를 지우고 나에게 좋은 미래를 약속했어. 안 될 이유라도 있어?”박연준이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충격을 주려는 거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 판은 이유영이 이겼다.박연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은 오랜만에 묘한 통쾌함을 맛보았다.사람들은 말한다. 감정이란 더 많이 신경 쓰는 쪽이 지는 거라고. 예전에 강이한 앞에서 언제나 졌던 것처럼.하지만 지금의 이유영은 이런 일에 진심을 다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꼭 서재욱과 함께해야겠다는 거지?”박연준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는 항상
이유영은 몽롱한 상태로 박연준에게 이끌려 파리 타워를 나섰다.차에 오르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과 날 선 분위기가 온몸을 감쌌고 운전석에는 문기원이 앉아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직접 운전했다면 차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속도로 내달렸을 것이다.문기원조차도 그의 음산한 기류를 감지한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왜 하필 그 사람과 함께 있었어?”한참을 침묵하던 박연준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고 이유영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왜, 안 돼?”“이유영!”그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음산한 기운이 차 안을 더욱 짙게 뒤덮었고 문기원의 손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며 핸들이 살짝 틀어져 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이유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비웃듯 물었다.“설마 우리 진짜 결혼한 사이로 생각했던 거야?”박연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어두웠던 눈빛이 한층 더 깊은 먹구름으로 가려졌다.“어이가 없군.”이유영은 냉소를 띠며 웃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이유영의 태도에 좁은 차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성냥이 켜졌다.“치익.”박연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거칠게 몇 모금 빨아들였다.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담배 연기로 짙어졌고 살짝 내려진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와 연기를 천천히 흩어놓았다.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에게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고 이 이야기만 나오면 박연준은 언제나 격렬하게 반응했다.서재욱이 파자마 차림으로 문을 열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에 어떤 격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의 모든 이성이 무너져 내렸었다.차가 풍산 그룹에 거의 다다를 즈음, 박연준이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이유영,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목소리에는 한계에 다다른 감정이 묻어 있었다.“왜?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못 참겠어?”그렇다면 그
“재욱 씨가 보기엔 아직 가능성이 있을 것 같나요?”서재욱은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반문했다.아직 가능성이 있을까?분명 없었다.청하시에서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강이한이 그녀에게 얼마나 냉혹한지 직접 목격했다.강이한의 매서운 눈빛을 보며 서재욱은 그가 평생 후회할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만약 후회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파멸을 의미할 것이었다.그리고 지금, 강이한은 결국 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일말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았다.“그럼 박연준은 어떻습니까?”최근 김연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서재욱은 이유영과 박연준의 관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이유영은 박연준의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딩동딩동!”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급하게 울렸다.이유영과 서재욱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다른 손님이 또 있나요?”“아니요.”그는 오직 이유영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왔기에 다른 사람과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이유영은 서재욱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서 확인해 보죠.”“네.”서재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함에 지친 파자마 차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는 문 앞에 서서 먼저 문 너머를 살피고는 이내 뒤돌아보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에요?”왜 문을 열지 않는 거지?“박연준이에요.”‘박연준? 여길 왜 온 거지?’서재욱을 찾아온 걸까?박연준은 어떤 소식이든 빨리 접하다 보니 서재욱이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서재욱이 문을 열자 박연준의 주먹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서재욱이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굴을 맞았을 것이다.이유영은 문 앞에서 벌어진 소란을 들으며 긴장하고 있었다.박연준이 온몸에 살기를 내뿜자 이유영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
이유영은 서재욱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거절할 여지도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서재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분노하게 해야만 나타날 거야.”‘분노해야만 나타난다고? 얼마나 몰아세웠기에 분노해야만 모습을 드러낼 정도란 말인가?’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자신과 강이한의 관계가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얽히고설킨 관계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결국 그녀는 서재욱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웠다....한편, 풍산 그룹에서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몇 차례나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응답은 없었다.결국 문기원이 그녀의 행방을 알아냈고 그 사실을 보고받은 박연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문기원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물었다.“지금 파리 타워에 있다고?”“네. 이미 방에 들어갔다고 합니다.”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연준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결혼 증명서를 발급할 때부터 시작된 반격이 계속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까지 나오다니.’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하필 서재욱과 얽히는 것에 박연준은 내심 못마땅했다.‘나와 서재욱의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파리 타워 레스토랑에서 저녁 시사를 마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습니다.”문기원의 목소리에도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이유영이 서재욱과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박연준을 겨냥한 의도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그 말에 박연준은 벌떡 일어났고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문기원이 말릴 틈도 없이 그는 성난 황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차가운 분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하려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문기원은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차는 빠른 속도로 밤거리를 질주하며 파리 타워를 향해 달렸다.평소에도 거친 운전 실력으로 유명
뒤늦게 그런 장면들이 펼쳐졌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그럼, 저를 찾아온 이유는 뭔가요?”이유영은 서재욱을 바라보며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오랜 시간 함께 일을 진행하며 두 사람은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제 피할 수 있는 불행이라면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그녀와 강이한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행했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굳이 고통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서재욱은 이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죠.”“네?”이유영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는 말인가?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걸까?이유영은 서재욱의 말에 도무지 감지 잡히지 않았다.“떠난 지 한참 됐으니 지금쯤이면 배도 많이 불러 있겠죠. 그런데도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계산해 보면 두 달 후에 출산 예정일이에요. 그 전에 제 곁으로 돌아오게 해야죠.”출산은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그래서 어떻게 하려고요?”이제 와서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그가 원하는 대로 될지 의문이었다.임신한 여성은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예민해진다. 서재욱의 행동이 어쩌면 7개월 된 임산부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는 있는 것이다.이유영은 걱정이 앞섰다. 혹시라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김연우를 몰아세우다간 정말 돌이킬 수 있게 될 수도 있었다.하지만 서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제가 파리에 있는 한동안은 제가 어딜 가든 저와 함께 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네?”설마 이런 방식일 줄이야.“안 돼요. 그러다가 연우 씨가 충격받을 수도 있어요.”이유영도 엄마가 된 사람으로서 임신기간에 임산부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나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서재욱은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엄마는 강한 법이에요.”그의 말은 이유영의 가슴에 그대로 날아와 꽂혔다.‘그래. 엄마는 강
“끼익.”칼과 포크가 접시에서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순간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듯했다.이유영은 멍한 눈으로 서재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뭐라고요? 못 들었어요.”사실은 들렸지만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다시 물어본 것이다.공항에서 김연우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할 때, 이유영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지금 서재욱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서재욱은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아마, 그 이전이었을 겁니다.”“그 이전요?”이유영은 더욱 혼란스러웠다.설마 김연우가 임신한 걸 알게 된 시점이, 월이가 서재욱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 전이라는 건가?망했다.그렇다면 그녀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뻔했다.이유영은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설명해야겠어요!”이건 반드시 설명해야 했다. 그녀는 서재욱과 김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임신한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이제 와서 모두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때 제대로 알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하자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서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설명할 수 없어요.”“왜요?”“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졌어요.”“...”‘사라졌다고? 잠적했다고?’이건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이유영은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마셨지만 가슴속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다시 물었다.“그때 김연우 씨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서재욱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연우가 회사를 그만둔 지 일주일 뒤에 알았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찾을 수가 없었어요.”이제 모든 게 이해되었다.김연우가 임신했을 때, 월이가 서재욱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커졌다.김연우는 청하시로 돌아간 후, 바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