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재능이 있으니까 강이한의 그늘을 벗어나더라도 잘살 수 있어. 여자는 남편에게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맞아.”유영도 그 말에 공감했다.소은지가 살아온 행보를 보면 혼자 외롭긴 해도 자유를 억압받는 적은 없었다. 유영이 그녀를 부러워하는 이유였다.시댁과의 복잡한 관계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애는 언제 갖냐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소은지의 유일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하고 의뢰인의 권익을 보호하는가에 있었다.휴가가 나면 해외로 보드 타러 가고 바닷가에 가서 자연을 감상했다.모든 여자가 꿈꾸지만 감히 실천할 용기가 없었던 삶을 소은지는 살고 있었다.한지음과 진영숙이 청하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걸 몰랐기에 소은지는 근처의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그들은 들어가자마자 의사에게 가정폭력 전치 진단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고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의사는 신속히 상처를 확인하고 진단서를 상세하게 끊어주었다.진단서를 건네 의사가 유영에게 말했다.“모든 게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감사합니다.”진단서를 챙긴 유영이 뒤돌아서려는데 의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자주 아픈 편은 아니라 병원에 다닌 적은 별로 없어요. 비슷하게 생긴 사람과 착각하신 것 같네요.”유영은 대답을 던져주고 재빨리 의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의사가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최근 외삼촌과의 스캔들과 한지음과의 대립에서 신문에 자주 올라왔으니 가십거리를 즐겨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사진도 봤을 것이다.밖에서 기다리던 소은지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됐어?”“진단서 끊었으니까 가자.”“이리 줘.”소은지는 그녀의 이혼 소송 변호사로서 증거를 요구했다.유영은 말없이 진단서를 그녀에게 건넸고 소은지는 그것을 잘 챙겨 핸드백에 넣었다.그러는데 뒤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어쩐 일이지?”소리가 난 곳을 따라 고
유영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아까 소은지랑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조금 믿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한지음이란 여자를 위해 자신에게 손찌검을 했단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러는지부터 설명해 줘.”유영이 말했다.“뭐라고?”“한지음이란 여자를 위해 나한테 폭력을 휘두를 때 당신 마음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고.”그 말을 들은 남자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올랐다.그는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내가 단지 그것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해?”“아니야?”남자가 침묵했다.하지만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유영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서로간의 신뢰가 이 정도로 무너진 걸까?언젠가 그와 대립하게 될 줄 알았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봐야겠어.”남자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영의 가슴은 차갑게 식었다. 이미 그를 완전히 내려놓기로 한 시점에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도 혐오스러웠다.“말을 안 하면 내가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아?”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이것으로 부족해?”당연히 부족했다.“조 비서!”“예, 대표님.”“가서 확인해 봐.”뭘 확인하라는지는 당연히 물을 필요도 없었다.유영은 점점 머리가 울렁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조형욱은 강이한 신변에서 수년간 일을 처리해 온 엘리트답게 순식간에 답을 알아냈다.물론, 유영이 출국하는 걸 못 잡은 건 그의 실수였다.잠시 후, 되돌아온 조형욱은 뭔가 달라진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았다.“대표님.”“말해.”조형욱의 불안한 시선이 유영에게 닿았다. 그럴수록 강이한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더해져만 갔다.조형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전치 진단을 끊어줬다고 의사가 그러더군요.”강이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유영을 노려보았다.
세강의 안주인이라는 사람이 법을 근거로 그를 압박하는 상황!남자의 음침한 눈빛에서 지난 날의 애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유영도 개의치 않았다.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이 이렇게까지 한다면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 마.”문고리를 잡던 유영이 움찔했다.원망?지금까지 뭘 해준 게 있다고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전생의 기억대로라면 그는 아직 할 게 많은 사람이었다.한번 경험한 사람으로서 유영은 당연히 두려움 없이 맞설 것이다.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마음대로 해. 뭘 하든 당신 자유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홀로 남은 남자의 몸에서 섬뜩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항상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었던 아내가 이렇듯 낯선 사람처럼 변해버리다니!주제도 모르고!병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유영은 마주 오는 강서희와 마주쳤다. 그제야 진영숙이 입원해 있는 병원이 이곳이라는 것을 눈치챘다.강서희는 그녀를 보자마자 습관적으로 시비부터 걸어왔다.“대체 세강 안주인이라는 자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시어머니가 입원했는데 며느리라는 사람이 한번도 문안을 안 와?”“난 세강 안주인이 아니야. 네가 그토록 바라던 결과잖아? 굳이 그 신분으로 날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야?”“너….”강서희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매번 힘없는 그녀를 무시하고 시비를 건 주체는 그녀와 그녀의 엄마 진영숙이었다. 유영은 알면서도 고분고분 당하는 쪽에 속했다.그런데 지금 태도가 확 바뀌었으니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정말 많이 변했네. 칭찬해 줘야 하나?”“하.”유영이 냉소를 터뜨렸다.자신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유영의 눈빛에 강서희는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전에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감히 주제도 모르고 받아치던 유영의 얼굴이 떠올랐다.강서희가 이를 갈며 말했다.“고아 주제에 세강에 시집왔으면 고분고분 납작 엎드릴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직전에 입양아라고 비꼬았던 유영의 발
유영이 병원을 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앞뒤로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병원에서 시간을 꽤 오래 끌었던 탓이다.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소은지에게 말했다.“미안해, 많이 기다렸지?”“됐다. 나한테 그런 말하지 마.”소은지는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친구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그녀는 무조건 이 소송을 이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러다가 저 여린 친구의 신변 안전에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됐다.강이한의 주변에는 전부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유영이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안 봐도 눈에 뻔했다.그들은 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조작된 증거 이야기를 들은 순간, 소은지는 유영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날 밤, 유영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였다.한지음의 두 눈이 감염되어 긴박한 치료가 진행 중이었다.의사는 감염까지 온 상태라면 빠른 수술 만이 답이라고 했다.수술을 하려면 시망막이 가장 큰 난관인데 조형욱을 시켜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이렇다 할 답은 오지 않았다.그들이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산 사람에게서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시국에 아무리 돈이 급해도 자신의 시력을 담보로 거래를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다음 날, 진영숙은 빨리 퇴원하겠다며 난동을 부렸다.강이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간곡히 말했다.“의사가 그러는데 아직 3일 정도 병원에서 지켜보는 게 좋다고 했어요.”“됐어. 내 몸은 내가 알아.”말은 그렇게 해도 환자가 의사보다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할 리가 없었다. 괜한 고집이었다.강이한은 바빠 죽겠는데 여기저기에서 일이 터지자 미쳐버릴 것 같았다.강서희가 물었다.“지음 언니 상황은 어때?”질문은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앞에 진영숙과 강이한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유영을 떠올리자 진영숙은 또 다시 화가 치밀었다.“유영 그 계집애가 이런 악수를 둘 줄 누가 알았겠니? 순하
한편, 못 잔 잠을 보충하고 유영이 느긋하게 침실을 나섰을 때, 소은지는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식탁에는 친구가 남긴 메모가 붙여져 있었다.[아침 준비했으니 데워서 먹어.]용건만 적은 메모임에도 유영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소은지는 여전히 그녀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재벌 사모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자기도 출근하느라 피곤할 텐데 아침까지 챙겨주다니.그 마음에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아침을 먹고 있는데 외삼촌 정국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네, 외삼촌.”“조민정 씨를 청하에 보냈어. 앞으로는 네가 하려는 일을 도울 거야.”조민정?해외에 3개월 동안 같이 있으며 조민정이 정국진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에게 이 소식은 뜻밖이었다. 이렇게까지 배려해 줄 줄이야.이제는 나가봐야 할 시간이었다.“감사해요, 외삼촌.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고.”“그 인간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지. 내 조카는 놈들이 마구 쥐고 흔들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말이야!”예상치 못했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정국진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과거에는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라서 강이한에게 모든 걸 의지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유영은 꽤 배움이 빠른 사람이었다.취직은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굳이 강이한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스스로 먹고 살 일자리를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강이한의 입장은 달랐다.“내 여자는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할 필요 없어!”이게 그의 주장이었고 지금은 그 주장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요구였는지 알고 있다.강이한과 결혼한 뒤로 사람들은 그녀가 돈을 보고 그와 결혼했다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그녀를 새장 안에 가둔 사람은 강이한이었다.물론 거기에는 쉽게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유영의 미성숙함도 있었다.진영숙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해 유영을 압박한 것이었다. 유영이 강이한이 쳐준 울타리를 떠나면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한 시간 뒤.유영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전에 강이한 때문에 다쳤던 팔이 결국 또 탈골되었다.“푹 쉬고 조심하셔야 해요. 한번 탈골된 뼈는 재발하기 쉬워요.”의사가 그녀의 팔에 깁스를 해주며 당부했다.유영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강이한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치료가 끝난 뒤, 의사와 간호사는 병실을 나갔다.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유영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강이한이 명령하듯 말했다.“앞으로 운전대 절대 잡지 마.”다행히 경차랑 부딪혀서 최악의 상황을 피했지만 상대 차량이 트럭이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유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대답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그녀가 대답이 없자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내 말 안 들려?”유영은 드디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뭐라?”강이한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모습이 가소로우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그는 숨을 고르고 뭔가 얘기를 꺼내려던 찰나, 조형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말해.”“대표님, 산 사람의 망막을 기증 받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아무리 돈이 궁한 사람이라도 그런 제안을 받을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청하시는 원래 장기 기증이 활성화된 도시가 아닙니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대부분이라 기증 동의를 받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한지음의 망막 이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유영도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됐다.그녀는 조용히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강이한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착잡함, 안타까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유영은 그 배후에 숨은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은 말없이 유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유심히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이 가물
그는 유영이 모든 것을 꾸몄다고 확신했기에 망막을 되돌려주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핸드폰이 울리며 유영이 상념에서 깨어났다.조민정이었다.“미안해요. 지금 병원이라 오늘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괜찮아요. 이미 알고 있어요.”정유라의 말에 유연이 흠칫 놀랐다. 이렇게 빨리 그쪽까지 소식이 들어갔을 줄이야.역시 괜히 정국진 오른팔이 아니었다. 소식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유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많이 다쳤어요?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아니에요. 내가 그쪽으로 지금 갈게요.”“그럴 필요는 없어요. 일단 다친 곳 잘 치료하고 이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이제 다 나았어요. 정말 괜찮아요.”유영이 고집스럽게 말했다.정국진까지 나서서 밀어주는데 스스로 더 강해져야 그 도움에 보답할 수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유능한 직원을 보내준 그의 마음에 미안할 지경이었다.파리에서 그토록 잘나가던 조민정을 국내로 불러들였으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가 괜히 시간 낭비하게 할 수 없었다.유영은 고집스럽게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문을 나서는데 마주 오던 강이한과 마주치고 말았다.“어딜 가?”남자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싸늘했다.의사가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외출하겠다는 거지?“나랑 얘기 좀 해.”유영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그녀를 압박하여 병실로 다시 들어갔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해.”유영은 병상에 앉고 강이한도 의자를 끌어와서 그녀와 마주하고 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착잡했다.그리고 유영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결국 얘기하려는 건가?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유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수술 말인데….”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뒤돌아선 그녀의 눈에는 사무치는 증오가 그대로 드러났다.결국 이
그녀에게서 증오를 그도 느꼈다.하지만 이미 결단을 내린 이상 굽힐 수 없었다.“평생 시력을 잃고 살아가게 하지 않을 거야. 일시적인 거야. 한지음 씨는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어. 이번 수술만 무사히 마치면 당신에게 적합한 기증자를 내가 꼭 찾아줄 거야….”짝!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영은 손을 번쩍 들어 남자의 뺨을 때렸다.일시적?어떻게 저런 말을 쉽게 뱉을 수 있을까?유영은 마지막으로 남자를 힐끗 바라보고는 뒤돌아섰다.“난 망막을 기증할 이유 없어. 못 들은 걸로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떠는 남자를 남겨둔 채, 병실을 나갔다.결국 그에게서 그 말을 듣고 말았다.더 이상 그에게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쓰렸다.10년을 함께해 온 정을 뿌리칠 만큼 그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걸까?아니면 진짜 다른 말 못할 이유가 있었을까?유영은 스스로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강이한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유영은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핸드폰이 울려서 받으니 절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은지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유영아.”“은지야, 너 괜찮은 거지?”강이한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가슴이 철렁했다.강이한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라이였다. 결국 그 피해가 소은지에게까지 간 걸까?“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넌 집이야?”“나도… 곧 갈 거야.”“가는 길에 장 봐서 갈게. 내가 오늘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기대해.”소은지는 애써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유영의 짐작대로라면 그녀는 아마 로펌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결국… 칼을 빼들었구나!하긴, 그녀에게조차 이렇듯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이 그녀의 주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리는 없었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한참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증오로 가득한 눈동자에 물기가 돌았고 투명하고 광 나던 피부는
배준석이 돌아왔다.용성시에서 돌아온 뒤로 배준석은 이유영 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한때 배준석은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둘러싸고 이유영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검진을 마친 뒤, 배준석이 말했다.“회복은 잘 되고 있지만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시력을 수술로 되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배준석의 말에는 단순한 의학적 조언을 넘어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듯한 씁쓸함이 배어 있었고 이유영은 그 속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배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연히 잘 관리해야죠.”이유영이 담담하게 말했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번 생에 겪었던 고통은 특히 더 절망적이었는데 전생의 수천 배는 될 터였다.아이가 없을 때에 비해 아이가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커가는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힘겹게 되찾은 시력인 만큼 더 소중히 여기며 관리해야 했다.“이유영 씨.”“네?”“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 관심도 없는 거예요?”배준석은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배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배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이유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제가 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그 말투에는 단호함보다 차가움이 앞섰다.강이한의 이름만 나와도 이유영의 말투는 도저히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진다.배준석은 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음에 놀라며 물었다.“서주에서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알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관심을 가져요?”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차가운 말이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배준석은 순간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서재에서 나오자 여진우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그의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분명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러나 이유영을 보는 순간,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우고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여진우의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언제 돌아왔어?”여진우가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방금.”“그 사람, 만났어?”“누구?”그 말을 뱉고 여진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엔데스 신우 때문에 돌아왔음을 직감했다.더블루 리버스에서 마주한 엔데스 신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바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파리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여진우가 돌아온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 가고 싶지 않았어...”떠나기 전부터 이미 엔데스 셋째 도련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이런 간교한 방법으로 이유영을 끌어들인 걸 봐서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넌 먼저 월이한테 가 봐.”여진우는 짧게 말하고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때,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고 여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왜?”“우리... 파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정씨 가문과 로열 글로벌 그룹 전체를 의미했다.말이 끝나자 복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엔데스 신우를 만나고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은 후, 이유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엔데스 가문의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정씨 가문도 결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떠나고 싶었다.파리는 이제 너무 위험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이었고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겉으로는 조용했던 정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셋째 도련님을 만난 후, 이유영은 그 아래에 도사린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돌아온 이유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요즘은 스튜디오에 가지 마. 집에 조용히 있어.”“네.”지금은 정국진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유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셋째 도련님이 준 거야?”그 이름을 듣자 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머니가 언급했던 전화도 아마 셋째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의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두껍지는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쾅!”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순간 정국진은 서류를 힘껏 책상 위에 내리쳤다.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기마저 흔들 듯 강렬했다.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임소미와 이유영 앞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셋째 도련님의 변화에 신경이 쏠려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의 정국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가져온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려 하자 정국진이 손을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보지 마.”“아빠.”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고 정국진의 반응에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외부에 바보로 알려진 세월이 길었던 만큼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정국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너 먼저 나가 있어.”이유영은 그를
그리고 그 남자는 단지 눈빛만 깊은 게 아니라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오랫동안 바보라 여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엔데스 가문은 지난 세월 동안 격동의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 바보 같은 연기마저 이 순간 이유영의 눈에는 마치 하나의 능력처럼 보였다.엔데스 신우는 갑자기 조용히 서류봉투를 내밀었다.“가져가서 아버지께 드리세요.”이유영은 멍하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게 뭐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박연준과 이혼할지 말지 결정하세요.”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결혼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이 남자는 무서운 존재감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이유영은 단단한 눈빛으로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바보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과연 엔데스 가문의 다른 이들은 알고 있었을까?“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실지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동시에 감춰질 수 없는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은 어떻게 더블루 리버스를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슴은 점점 더 죄어왔다.혼란스러웠다.파리는 원래도 복잡한 곳이었지만 특히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이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는 여전히 독자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모든 일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하지만 오늘,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을 만난 이후 이유영은 확신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거라 믿어서는 안 된다.“바로 집으로 가요.”지혁이 차를 스튜디오 쪽으로 돌리려 하자 이유영이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엔데스 신우를 만난 후, 그녀는 더 이상 회사에 갈 마음이 없어졌고 머릿속을 정
결국 이유영은 엔데스 신우와 마주 앉았고 정적 속에 무언의 압박이 흐르고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며 이유영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셋째 도련님께서는 원하시는 게 뭔가요?”계속해서 현금으로만 결제를 요구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파리로 돌아오기 전 그녀가 접한 소식으로 봤을 때, 파리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심지어 박연준과의 결혼도 결국 파리와 얽혀 있었다.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는 영리하니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죠?”“셋째 도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 역시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 남자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차갑고 위험한 미소였다.심장은 이미 터질 듯 뛰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아가씨와 박연준의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무슨 의미든 간에, 저는 그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긴장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그 말을 듣고 엔데스 신우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의 조롱이 섞인 웃음소리에 이미 굳어 있던 이유영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정씨 가문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과 어떤 협력도, 관계도 맺지 않았는지 알고 있나요?”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의 아버지 정국진은 언제나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는 사실뿐이었다.솔직히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정국진이 엔데스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피해 왔고 엔데스 가문은 그동안 언제나 중립을 유지해 왔다.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지닌 듯, 이유영을 강하게 짓눌렀다.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을 지울 수 없
이유영이 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호적에 적힌 이름은 ‘정유영’으로 바뀌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유영’ 혹은 ‘유영’이라 불렀다.집사가 단호하게 ‘정씨 가문 아가씨’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뒤에 거대한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음을 실감했다.가족이 있다는 건 곧 얽매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이유영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그래도 안에 누가 기다리는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집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씨 가문 아가씨께서 직접 오셨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셔서요.”그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고 이유영의 마음속 의심은 점점 커졌다.그날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은 틀림없이 엔데스 가문의 전설적인 셋째 도련님, 엔데스 신우였다.소문에는 ‘바보’로 불렸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낮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요.”“아가씨.”“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사람들 저한테 감히 어쩌지 못할 거예요.”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엔데스 가문의 누구도 지금 그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지혁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밖에서 볼 때도 건물의 웅장함이 느껴졌지만 내부는 더 압도적이었다. 곳곳에 스며든 고급스러운 디테일과 섬세한 감각이 주인의 까다로운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대형 홀을 지나 집사는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그제야 이유영은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길고 긴 테이블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맑고 고고한 분위기는 첫눈에 보아도 비범한 존재감이었다.그런 아우라는 절대 ‘바보’라 불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셋째 도련님, 정씨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었던 이유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한 번 도망쳐 봐.”비서는 순간 움찔했다.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은 로열 글로벌의 것이었고 그녀는 로열 글로벌의 전 대표님이었기에 서주에서 살아남으려면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두 시간 후, 비서와 지혁이 돈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오자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거기 경비원들이 바로 내쫓았어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유영은 혼란스러웠다.“윙!”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내일까지 안 오면 변호사가 찾아갈 거야.]‘협박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차 수리비는 물론이고 직접 사과까지 하라는 건가?’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런 일일수록 더 읽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아직 더블루 리버스에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빨리 사과하고 이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통화하다가 부딪혔으니 명백한 본인 불찰로 생긴 사고였고 CCTV에도 찍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곧 답장이 왔다.[네.]아직 그곳에 있다면 된 것이다. 이유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지혁 씨.”“네, 아가씨.”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지혁이 이유영 앞으로 다가갔다.“저랑 같이 가요.”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지혁과 함께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유영은 코트를 걸치며 돈을 지혁에게 건넸고 돈을 건네받은 지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오늘 일정으로 바쁜 하루였지만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30분 후에 더블루 리버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경비원들이 막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들이 온다는
“바래다줬어?”“네.”“서재욱은 아직도 거기 살아?”“네.”말이 떨어지자 박연준은 온몸에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그의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기원의 심장은 긴장감에 조여들었다.박연준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문기원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지금 나온 기사는 다 찌라시잖아요.”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박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문기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재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모습 한 장면만이 가득했다.“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는 게 어떻습니까?”문기원은 신중하게 조언했다.오늘 이유영이 서재욱을 만난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퍼졌다.이건 누군가가 분명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게 누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혹시 엔데스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재욱을 끌어들이려는 걸까?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연준은 그저 단호하게 문기원에게 말했다.“너 먼저 들어가.”그 순간 그가 얼마나 큰 힘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문기원은 알 수 있었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시간 박연준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상, 지금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면 오늘 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그날 밤, 이유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래라면 내일 서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미뤘다.아침 식탁.“월이야, 빨리 먹어.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어제 엄마가 말했지, 늦으면 안 된다고.”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월이에게 말했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집에 없는 관계로 이유영이 월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은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