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협박에서 끝났다면 이렇게까지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유영은 어떤 말로 지금 기분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삼갔다.강이한을 죽여 버리고 싶을 마큼 증오가 차올랐다. 과거에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은지야, 넌 이제 내 일에서 손을 떼.”“바보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너 도와주겠어?”소은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걱정 마. 이미 컨택이 온 로펌이 있어. 곧 새로운 로펌으로 옮길 거야. 소송은 끝까지 내가 책임질게.”소은지에게 유영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친구였다.지금 안 도와주면 강이한 옆에서 또 무슨 꼴을 당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손등에 무언가가 툭툭 떨어졌다.그것은 유영의 눈물이었다.“뭐야? 고작 이런 거로 감동했어? 그 눈물 닦아두고 너 스스로 일어서. 그 인간들에게 우리 유영이가 남자한테만 기대는 못난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풉….”슬픔에 잠겼던 유영은 마치 웃어른처럼 자신을 가르치는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 거봐. 웃으니까 예쁘잖아. 남자 하나 때문에 눈물 흘리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야.”“그럼!”유영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와의 10년이 아까워서 눈물을 흘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소은정은 유영을 끌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사실 직접 요리를 할 기분은 아니었기에 배달을 시켰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은지는 깁스를 하고 있는 유영의 팔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별거 아니야.”“빨리 말해!”소은지가 정색하며 말했다.유영은 다가온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강이한 때문이지 뭐. 네가 로펌에서 잘린 것도 그 인간이 한 짓이고.”“그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유영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이미 알고 있었어?”“뻔하잖아. 너랑 소송하기 싫으니까 로펌에 수를 써서 날 내치게 한 거지.”소은지는 이혼
유영은 최근 해외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소은지에게 얘기해 주었고 소은지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그리고 막장 드라마를 봤을 때나 짓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변호사 일로 바쁜 몸이지만 일이 없을 때 소설을 보는 게 소은지의 취미였다.그리고 유영이 겪은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소설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외삼촌이라고?”“맞아. 해외 언론에 보도된 사진에서 나랑 같이 있었던 분은 내 외삼촌이야.”“강이한은 그걸 모르고 그 난리를 피운 거고?”“알았으면 파리까지 찾아가서 외삼촌한테 달려들지는 않았겠지.”“왜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오해가 이대로 쌓이는 건 너한테도 불리할 텐데?”“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해야 이혼을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만약 이런 오해로 그 사람이 이혼할 결심을 내린다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소은지에게도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믿기지 않았다.유영도 마찬가지였다.지난 생의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하늘이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서 없던 외삼촌을 보내준 걸까?그래도 지난 생처럼 신변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그때는 강이한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를 잃으면 세상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강이한한테 배신을 당해서 안타까워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대단한 외삼촌이 나타났으니 내 도움도 필요 없겠네?”소은지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로열 글로벌, 우리 로펌에서 금융 소송 전담인 진금용 씨라고 있는데 그분 큰아버지가 그 회사에 계시잖아. 연봉만 해도 20억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대단한 회사 회장님이 네 외삼촌이라는 거 아니야?”소은지는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유영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그런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말라고.”“오늘부터 네가 내 여신님이야.”소은지가 정색하며 말했다.그러면서 예전에 불쾌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너희 시어머니 있잖아. 만
그날의 사고는 유영에게 지우지 못할 악몽이 되었다.“네 말이 맞아. 아이가 없을 때 끝내는 게 깔끔하지.”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세강 오너 일가가 그들의 아이를 원치 않았다.임신한 그녀를 끝까지 몰아세워 유산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빌미로 그녀를 그 집안에서 밀어내려고 했다.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처음 아이를 잃었을 때, 유영은 그 사실을 강이한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한 결정이었다.그들이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덮은 일이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유영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소은지가 소송에서 손을 떼게 되면서 유영은 법률대리인을 양승호 변호사로 변경했다. 소은지는 소송에서 손을 떼게 되었기에 원래 로펌으로 출근했다.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 소식은 강이한에게 전해졌다.이날은 유영과 조민정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그들은 조민정이 새로 구한 사무실에서 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이한의 세강바이오 건물 바로 옆 건물이었다.물론 세강바이오는 건물 전체가 세강 소유였고 유영의 사무실은 옆 건물의 한 층만 차지했다.조민정이 유영에게 말했다.“관련 서류는 다 준비되었고 오후에 고객사 미팅이 있어요. 내일에도 있고요.”“알겠어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조민정이 말했다.“일이 조금 많기도 하고 새로 창설된 집단이라 서로 부딪힐 일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유영 씨한테 돌아가는 일은 제가 특별히 신경 썼으니까 너무 조급할 건 없어요.”“고마워요.”처음부터 미팅이 잡혔다는 게 중요했다.조민정은 참 능력 있는 직원이었다.청하에 도착한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을 따냈다는 게 그 증거였다.아마 해외에 있을 때부터 청하시 상황에 대해 공부했을 것이다.첫 시작은 유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순조로웠다.오후가 되자 유영은 조민정과 함께 고객을 만나러 건물을 나섰다. 건물 대문을 나서는데 하필이면 회사로 돌아오는 강이한의 차와 마주쳤다.남자가 차를
예전에 그와 사이가 좋았을 때 야근하는 직원을 챙긴다고 직접 도시락을 싸서 직원들에게 돌린 적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이 기억하는 유영은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최근 도는 소문이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사무실로 들어간 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유영과 마주 앉았다.커피잔을 쾅 소리 나게 테이블로 내려놓은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홍문동으로 들어가. 거기가 당신 집이야.”“나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어.”“여자 둘이서 20평도 안 되는 좁은 오피스텔에서 비집고 사는 게 편하다고?”남자가 차갑게 물었다.유영도 온기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랬다.소은지가 사는 오피스텔은 그의 기준에서 크지 않았다.거실 하나 방 두 개 딸린 작은 오피스텔이었다.물론 큰 집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이 보기에 좁은 건 맞았다.유영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래. 당신을 만나고 내 삶의 질이 풍족해진 건 사실이야. 먹는 거 입는 거 사는 곳, 모두 최상을 누렸지.”“하지만 좁은 욕실에서 간단히 샤워하고 옷방도 따로 없는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아침은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는 이런 생활이지만 자유롭고 만족해.”“뭐라?”“인정해. 당신이 사는 세상에는 모든 게 완벽하고 안일했지. 하지만 한번이라도 나한테 물어본 적 있어? 지금 사는 삶에 만족하냐고?”강이한은 침묵했다.“당신이 사랑하는 바깥의 애인을 위해 나한테 시망막을 기증하라고 하면 내가 얼마나 아파할지는 생각해 봤어? 아니면 당신은 나를 그저 당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거야?”강이한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살아온 시간에 대해서 그녀가 자신의 입장을 얘기한 건 처음이었다.유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당신하고 결혼하고 세강의 며느리로 살아온 3년이 내 인생에서는 가장 비참한 경험이었어. 당신은 나한테 풍족한 물질적 삶을 줬지만 당신 옆에 있는 난 사람들의 냉대를 받아야 했고 수많은 스트레스를 견뎌야 했어.”“난 당신이 기르는 강아
지금 뭘 들은 거지?너무 화가 나서 환각이 들린 게 틀림없었다.그는 유영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면서 만족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젠장! 정말 미쳤네!”잘 달래서 홍문동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아무리 생각해도 한지음 일 때문에 그녀가 성질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예전처럼 생각할 시간만 주면 알아서 다가와줄 줄 알았다.이제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망막 기증에 관한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건물을 나오자 조민정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객을 만나러 가는 길, 잠시 고민하던 유영이 말했다.“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 인간이 방해를 놓지 않을까요?”청하시에서 강이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유영이 가장 잘 알았다.로펌의 최고 에이스인 소은지마저 퇴사를 시킬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지금도 그들의 싸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러다가 새로 생긴 사무실마저 영향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조민정이 말했다.“회장님도 그 부분을 걱정하셔서 유영 씨에게 주는 의뢰는 전부 회장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들로만 선별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그분들도 저와 외삼촌의 관계에 대해 안다는 얘기예요?”“그건 아니고 회장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잘 부탁한다고 미리 말씀하셨을 거예요.”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최근 그녀와 정국진의 스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상황에서 그런 연락을 받고 의뢰인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기업과 기업 사이에 얽힌 것도 많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한의 귀까지 들어간다고 봐야 했다.그렇게 된다면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고객 미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들은 그녀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기로 했다.그런데 다음 날 만나기로 예정된 고객은 만만치 않았다.청하시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가 세강타워라는 강이한의
“들어보니 그렇네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사무실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큰 계약이니 만큼, 그녀는 신뢰를 보여줘야 했다.그녀는 속으로 예상 질문을 복기하며 어떻게 대화를 끌어나갈지 집중해서 생각했다.엘리베이터를 나선 유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만큼 큰 회사라는 것이 느껴졌다.“긴장 풀어요.”“네.”유영은 여전히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을 본 비서실 직원이 공손히 인사했다.“일단은 손님 접대실로 가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은 지금 회의 들어가셨습니다.”“네.”두 사람은 함께 직원을 따라 접대실로 갔다.비서가 차를 내왔다. 그러는 모습조차 평소에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대기업 출근 경험이 없는 유영이었지만 강이한의 회사에서 직원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었다.어제 만났던 고객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위기와 품위가 느껴졌다.잠시 후, 접대실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을 착용하고 머리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서늘하면서도 차분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문 비서님, 안녕하세요. 저는 로열 글로벌의 조민정입니다.”“대표님께서는 사무실로 가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네.”자리에서 일어선 유영은 문 비서라는 사람을 따라 안으로 이동했다.남자의 걸음걸이는 차분하고 흔들림 없었다.저런 사람을 부하 직원으로 부린다는 건 대표의 취향도 깐깐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조금 풀렸던 긴장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문 비서가 가볍게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목소리가 참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이게 박 대표에게 느낀 유영의 첫인상이었다.조민정이 말했다.“들어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 비서가 불러세웠다.“이유영 씨만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당황한
유영은 길게 심호흡하고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정중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 스튜디오의 이유영이라고 합니다. 예약하고 대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그녀가 신분을 밝히자 남자의 깐깐한 시성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유영이 바짝 긴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대… 대표님?”“아는 얼굴이군요.”유영은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시군요.”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로 서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앉으시죠.”“네, 그래요.”유영이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소파로 다가가서 앉았다.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190은 넘을 것 같은 훤칠한 신장에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게 됐다.소파로 다가온 남자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유영은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남자에게 건넸다.“이건 전에 제가 그렸던 디자인 초안인데 한번 보시겠어요?”“내려놔요.”존대는 하고 있지만 뭔가 명령 어투가 담긴 말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됐다.유영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았다.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준비한 멘트는 떠오르지 않고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에게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느낌이었다.그녀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남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에 유영이 흠칫했다.남자가 입을 열었다.“기한은 3일입니다.”“네?”“15일에 동교 신도시 개발 입찰이 있습니다. 오늘은 11일이니까 늦어도 14일 전에는 디자인을 끝내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유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기회를 주겠다는 건가?비록 일정이 빠듯했지만 이 남자에게서 디자인 업무를 따냈다는 것 자체가 좋아할만한 일이었다.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3일이면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3일 안에 멋진 디자인으로 이 회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한테 3일 준다고 했어요. 14일 퇴근하기 전까지 설계도를 마무리하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의뢰를 우리한테만 준 것 같지는 않았어요.”“그건 당연하겠죠. 동교 신도시 프로젝트면 청하 시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라고요. 우리만 믿고 일을 추진할 이유는 없어요.”오늘 미팅을 오기 전에 조민정은 이미 강성건설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진행했고 대략 어떤 의뢰를 맡게 될지 예측한 바가 있었다.하지만 느닷없이 동교 프로젝트를 내어줄 줄은 몰랐다.“많이 바빠질 것 같네요.”“네. 그래서 일단은 현장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유영이 말했다.어쨌든 건설 현장을 가봐야 대략적인 방향이 잡힐 것 같았다.동교로 이동하는 중에 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진영숙,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본가의 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였다.“받아봐요.”조민정이 말했다.“계속 이런 식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고객들의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유영은 그제야 자신은 이미 전직 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이제 그녀는 업무 상으로도 연락을 많이 주고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어제 두 명의 고객을 만나본 뒤로 그쪽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해야 한다며 벌써 네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진 여사님께서 어쩐 일이시죠?”“뭐라? 진 여사?”새로운 호칭에 당황한 건 진영숙이었다.“아직 이혼도 하기 전인데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싫다는 거야, 뭐야? 그 아비 뻘 되는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유영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세강과는 상관없는 일이죠. 바라던 바 아닌가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이혼한다고 하더라도 내 아들이 널 버린 게 되어야 해. 넌 먼저 이혼을 말할 자격이 없어.”“어쨌든 제가 먼저 이혼을 얘기했고 여사님께서 그게 불만이시라면 당장 소송을 철회할게요. 아드님한테 다시 소송을 제기하라고 설득해 보시겠어요?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
시윤이 직접 가져온 소식이었기에 진영숙은 이 사실에 대해 더욱 부정할 수 없었다.너무도 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가슴은 내내 울렁거렸다.“도련님이 이번엔 너무하셨어요.”시윤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그 또한 믿기 어려운 사실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건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저지른 이 일은 지금껏 사람들이 믿고 있던 모든 인식을 뒤흔드는 일이었다.“한지음의 딸이라고?”“네, 그 아이는 분명히 한지음 씨가 남기고 간 아이입니다.”진영숙의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사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이한과 이유영의 관계가 끝난 것은 자신의 방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들의 사랑을 막았다면 그때 결혼식장 문턱조차 밟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들의 사랑을 무너뜨린 진짜 원인은 한지음이었다.시작도 끝도 모두 그 여자 때문이었고 이유영이 보여준 그 차가움도 한지음의 딸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이건 재앙이야.”진영숙은 한지음과 이온유를 묘사할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그래서 이 일은...”시윤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진영숙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왜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그렇게 냉담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여자라면 알 수 있다. 이유영이 감당한 고통과 아이가 겪었을 고통이 어떤 것인지.이유영이 강이한을 미워한다면 그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진심 어린 증오일 것이다.지금의 이 미움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등을 돌리겠다는 의미였다.“배준석은 왔어?”“배준석 도련님은 지금 해외에 나가 있어서 파리에 없습니다.”진영숙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너무도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어떻게 그토록 냉정할 수 있었단 말인가?’너무 갑작스러운 진실 앞에서 진영숙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아이의 존재는
임소미는 풍산 그룹에서 돌아오는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이유영을 바라보는 임소미의 눈에는 많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풍산 그룹에 다녀온 거야?”“네.”“진영숙을 만났어?”임소미는 진영숙이 풍산 그룹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정말이지 귀신처럼 따라붙는 여자였다.강이한이 이유영의 인생에서 간신히 사라진 지금, 진영숙은 파리에 머물며 떠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희생하지만 않았다면 진영숙은 이미 파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네.”진영숙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의 얼굴은 금세 아무런 온기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졌다.“앞으로는 만나지 마.”임소미의 말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이유영이 강씨 가문의 모든 사람과 더 이상 얽히지 않길 바랐다.과거를 떠올리면 더 이상 얽힐 이유도 없었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저도 더 이상 그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없을 거예요.”“내가 걱정하는 거 알면 됐어.”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이유영이 겪어야 했던 시간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그 많은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너무나도 잔혹했다.“오늘 그 여자가 월이를 만나러 왔다는 얘기를 듣고...”임소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두 사람 모두 가슴 깊은 상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한때 이유영은 강씨 가문에 있으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하지만 정작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이유영이 실제로 임신했고 그 아이가 강이한의 아이였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그리고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은 바로 진영숙이었다. 그녀는 직접 이유영의 뱃속 아이의 생명을 끊었고 이유영을 향한 악의적인 말들을 세상에 퍼뜨렸다.그 모든 사실을 생각하면 임소미는 도무지 진영숙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는 너무나도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웠다.“그러게요.”진영숙이 아이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이유영과 임소미는 같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유영을 그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태도는 무척이나 강경했다.“제가 너무 당돌했어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줬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의 실종에 소은지의 마음은 여전히 심란했다.이유영이 의지할만한 곳은 정씨 가문이었다.이유영이 소은지를 도와준다는 것은 곧 정씨 가문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오늘 여진우가 소은지를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소은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우리 여진우 씨의 소식 더 이상 기다리지 말아요. 그쪽 사람들은 이미 완전히 철수했어요.”남기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점점 더 깊어졌다.“이 일, 단순한 일이 아니에요.”처음에는 분명히 여진우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다.‘혹시 그가 무언가를 눈치챘던 걸까?’소은지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여진우는 막 차에 오르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려던 찰나, 소은지가 급히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브레이크가 작동하고 남자의 눈에는 차가운 기운이 번졌다.소은지는 차 문 앞까지 다가가서 말했다.“일곱째 사모님, 이러면 위험한 거 몰라요?”이런 행동은 단순히 무모한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일이었다.소은지는 창백한 얼굴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도대체 뭘 알아내신 거죠?”‘금유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말로 무언가를 알아챘던 걸까?’그는 소은지에게 일곱째 사모님의 역할을 잘하라던 말은 조금 전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기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여진우는 묵직한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깊은 생각과 차가운 확신이 서려 있었다.“지금 소은지 씨는 잘하고 있습니다.”그 말은 곧 현우의 소식을 숨긴 일에 대한 지지였다.“여진우 씨.”그녀는 여진우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