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한테 3일 준다고 했어요. 14일 퇴근하기 전까지 설계도를 마무리하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의뢰를 우리한테만 준 것 같지는 않았어요.”“그건 당연하겠죠. 동교 신도시 프로젝트면 청하 시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라고요. 우리만 믿고 일을 추진할 이유는 없어요.”오늘 미팅을 오기 전에 조민정은 이미 강성건설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진행했고 대략 어떤 의뢰를 맡게 될지 예측한 바가 있었다.하지만 느닷없이 동교 프로젝트를 내어줄 줄은 몰랐다.“많이 바빠질 것 같네요.”“네. 그래서 일단은 현장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유영이 말했다.어쨌든 건설 현장을 가봐야 대략적인 방향이 잡힐 것 같았다.동교로 이동하는 중에 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진영숙,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본가의 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였다.“받아봐요.”조민정이 말했다.“계속 이런 식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고객들의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유영은 그제야 자신은 이미 전직 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이제 그녀는 업무 상으로도 연락을 많이 주고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어제 두 명의 고객을 만나본 뒤로 그쪽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해야 한다며 벌써 네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진 여사님께서 어쩐 일이시죠?”“뭐라? 진 여사?”새로운 호칭에 당황한 건 진영숙이었다.“아직 이혼도 하기 전인데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싫다는 거야, 뭐야? 그 아비 뻘 되는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유영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세강과는 상관없는 일이죠. 바라던 바 아닌가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이혼한다고 하더라도 내 아들이 널 버린 게 되어야 해. 넌 먼저 이혼을 말할 자격이 없어.”“어쨌든 제가 먼저 이혼을 얘기했고 여사님께서 그게 불만이시라면 당장 소송을 철회할게요. 아드님한테 다시 소송을 제기하라고 설득해 보시겠어요?
그쪽에서 감정을 앞세워 그녀를 가해자로 몰고 간다면 그녀는 있는 사실을 토대로 반격할 것이다.“알겠어요. 제게 맡겨요.”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정국진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유영이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걱정스러웠는데 지금 보니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유영은 외부의 비난과 선동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조민정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폭력의 가해자, 세강의 안주인, 사과 거부. 권력자들의 갑질은 어디까지….’왜 진영숙이 유영을 본가로 불렀는지 기사를 보고 알 것 같았다.“정말 시끄럽게 떠들어대네.”유영이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제대로 반격하지 않으면 그들의 횡포는 점점 선을 넘을 것이다.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쯤 파리면 잠자는 시간일 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유영아.”“죄송해요. 주무시는데 깨웠죠?”유영이 미안한 어투로 말했다.비록 모든 걸 무시로 일관하기로 했지만 기사에 한번씩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가슴이 옥죄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괜찮으니까 어서 말해봐.”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할 일도 없다는 걸 알기에 정국진은 여전히 자상한 목소리로 달래주듯 말했다.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강이한이 악플러들과 합의해 줬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지음쪽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한지음 납치범들을 빨리 찾고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요.”이 사건은 길게 끌수록 유영에게 불리했다.강이한이 이렇게 그녀를 공격하는 이유도 한지음이 두 다리와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몰아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랑에 눈이 멀었단 걸까?하지만 진짜 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절대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래, 알았어. 내가 알아보마.”정국진이 말했다.그가 나서기로 한 이상 이 일은 별 차질 없이 마무리될
한지음이 강이한을 좋아한다는 건 뉴스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랬다면 강이한을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진영숙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나간 거야?”“이유영이 사과를 거부하고 있으니까.”강서희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다시 뒷목을 잡았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유영이 앞에 있었으면 머리카락이라도 쥐여뜯고 싶었다.“그런 악랄한 짓을 해놓고 망막을 기증해 줘도 모자랄 판에 사과를 거부해?”진영식이 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욕설을 뱉었다.대체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는데 사과를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강서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계속 저렇게 나오면 한지음도 증거를 경찰에 넘기겠다고 했어.”“이런 망할 년!”진영숙이 발을 동동 굴렀다.이미 온갖 기사와 억측이 난무하는 상황에 세강의 이미지는 날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유영이 감옥에라도 간다면 세강에게도 큰 타격이 될 것이다.생각할수록 분했다.결국 진영숙은 다시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본가로 와.”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유영이 사과하고 이 사건을 무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시어머니라면 자다가도 벌벌 떨던 유영이 차갑게 대꾸했다.“바빠요.”“네가 바쁠 게 뭐가 있어? 너 우리 집에 시집온 뒤로 놀고 먹기만 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어디서 거짓말이야?”하지만 전화는 끊어졌고 시끄러운 알림음만 들려올 뿐이었다.진영숙은 부잣집 사모님의 품위는 이미 포기했는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정말 날이 갈수록 건방져지는구나!”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더 부추겼다.“오빠도 문제야. 이혼하지 않을 거면 마누라 관리는 똑바로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오빠가 데리고 가서 사과하면 다 끝날 일을 왜 여태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거야?”물론 강서희는 유영이 끝까지 사과는 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 유영과 강이한의 유대감을 끊어버리려는
그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파헤쳐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는 없었다.“이미 주요 언론사에 언질을 주었습니다.”그의 일 처리 스타일을 알기에 조형욱은 뉴스를 보자마자 바로 언론사에 연락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고 확인해 보니 본가의 전화번호였다.강이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각 회사에 연락해서 이유영에게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 어기는 회사는 우리와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그녀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면 그에게도 방법이 있었다.일을 해서 스스로 생활비를 벌겠다고?그렇다면 그 희망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조형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았다.사모님을 업계에서 매장시킬 의도란 말인가? 벌써부터 그들이 싸우는 장면이 떠올랐다.강이한이 보기에 유영은 확실히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평소에도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시간을 두고 냉각기를 거치면 오히려 다가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민 쪽은 항상 유영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여론에서 떠드는 그와 한지음의 관계를 그대로 믿어서인지 여자는 점점 더 도를 넘고 있었다.그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자신을 떠나면 독립할 기회도 없다는 현실을 그녀에게 깨우쳐주고 싶었다.해외에서 그녀와 바람을 피운 그 남자를 해결하는 건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될 일이고 그가 원하는 건 유영의 복귀였다.본가에서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왔기에 강이한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요?”불쾌감이 잔뜩 드러나는 말투였다.진영숙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유영이 고년 때문에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어!”강이한이 말이 없자 진영숙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당장 유영이 시켜서 한지음한테 사과하라고 해.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게 다 네가 걔를 너무 오냐오냐 해서 그래!”“대체 얼마나 오
계약 해지를 통보하더라도 디자인 도면을 보고 불만족한 상황에 해지해야 맞다. 하지만 아직 디자인 초안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해지를 통보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말했다.“죄송해요, 이유영 씨. 계약 당시에는 유영 씨가 세강의 사모님인 줄 모르고 계약했어요. 그렇게 높으신 분인 줄 알았으면 저희도 안 썼죠.”“일단 그쪽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상대 측에서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는 건 강이한 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일하는 것을 반대하더니 이제는 그녀와 함께 일하려는 회사까지 찾아가서 훼방을 놓았다.전화를 끊고 유영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조민정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요. 우리한테는 의뢰가 넘쳐나니까요.”자신감 넘치는 말에 유영은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강이한이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나선다면 앞으로 고난이 예상될 텐데도 조민정은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그렇기 때문에 강성건설과의 계약은 무조건 따내야 했다. 그나마 강성건설은 세강과 세력이 비등비등하기에 그쪽의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규모가 작은 회사라면 강이한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지만 오늘 만난 박 대표란 사람은 그런 장난에 휘둘릴 사람 같지 않았다.“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유영이 말이 없자 조민정이 물었다.“박 대표님은 누구 눈치 보면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겠죠?”그녀는 우려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조민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몰랐어요?”“뭐를요?”“박 대표님과 세강은 원래부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번 의뢰는 우리 실력만 보고 판단할 거예요.”예전에 강이한과 박 대표가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건 다행이네요.”상황이 확실해지자 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남은 건 더 열심히 해서 전에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박 대표의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는 일만 남았다.강성과 거래를 트게 된다면 다른 건
작은 사무실이지만 직원들 간의 소통도 좋았고 업무 분장도 확실해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강이한이나 진영숙의 전화는 전부 끊어버렸다.그런데 이번에는 박 대표의 비서인 문 비서의 연락이었다.“네, 문 비서님.”“동교 신도시 주변 개발 기획안 혹시 필요해요?”“네, 주시면 좋죠.”유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건축 디자이너에게는 주변 상황도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주변에 뭐가 서는지, 지리적 우세가 어떤 게 있는지 알면 그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그리기도 쉬워진다.“저 지금 아래층에 있어요.”“네?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외투도 챙기지 않고 아래층으로 뛰었다.건물 앞에 한정판 롤스로이스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임원까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걸 보면 강성건설이 얼마나 강대한지 알 수 있었다.유영이 다가가자 문 비서가 차창을 내리더니 서류 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이미 심사가 통과한 기획안입니다.”“감사합니다.”유영은 공손하게 받아서 보물처럼 서류를 품에 안았다.일반인은 가질 수 없는 고급 정보였기에 그만큼 이 프로젝트에 목숨을 건 유영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다.이런 고급 정보를 가지고도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건 그녀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깔끔히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조심히 가세요. 나중에 시간 되실 때 제가 밥 한끼 사드릴게요.”솔직히 지금 심정이라면 당장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유영에게는 시간이 촉박했다.차가 출발 시동을 걸자 차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박 대표님이?’한편, 건물 밖으로 나오던 강이한은 박연준의 차량과 가까이 서 있는 유영을 보자 순식간에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그는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뒤돌아서던 유영은 마주 오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히고 사과했다.“죄송합니다.”강이한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고개를 든
잡힌 손목이 아파왔지만 유영은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거기에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남자의 동공이 확 수축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잖아. 난 절대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거란 거.”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그 뜻인즉, 알면 순순히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전에는 강이한이 조금만 강압적으로 나오면 유영은 한발 양보했는데 지금은 전과 달랐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다른 여자 눈 뜨게 해준다고 나한테 망막을 내놓으라는 남자한테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강이한은 숨이 막혔다.그와 한지음의 관계는 지금 시한폭탄과도 같았다.그가 유영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 관계가 발목을 잡았다.그는 고집스러운 눈빛을 한 여자를 실망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여론의 평판을 떠올렸다.예전에는 그녀에게 기울었던 우호 여론도 현재는 한지음에게로 기울고 있었다.“그거 알아? 전 청하시가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러다가 당신 이 도시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야.”그의 보호막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처지는 더욱 가시밭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심지어 소은지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유영이 말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청하시에 미련이 남은 건 없으니까.”그녀가 청하시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이유는 강이한 때문이었다.지금 이 도시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이혼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만약 그들이 정말로 갈라서게 될 날이 온다면 이 도시는 그녀에게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어딜 가든 이곳보다는 나을 테니까.물론 한지음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그녀의 용기는 가상하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까지 올라가려 하는 건 괘씸했다.강이한이 얘기했던 것처럼 여론은 지금 폭풍의 소용돌이였다.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온 소은지는 문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택배를 보고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지음도 그 말을 듣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예쁨을 추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눈가 피부에 뾰루지가 난 것을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미는데 잔소리 때문에 더 화가 났다.“대체 둘은 언제 이혼한대?”그녀와 강서희의 역할 분담은 매우 명확했다. 한지음은 병원에서 장님 행세를 하며 강이한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강서희는 여론과 감성팔이를 이용해서 유영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원래 예상대로라면 강이한이 유영에게 실망하고 이혼이 일사천리로 진행해야 맞았다.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방향은 그들의 예상을 초월했다.밖에서 유영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그들 사이에도 심각한 감정의 곬이 생겨버렸지만 여전히 이혼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계속 장님행세하고 싶지 않으면 유영 그 여자의 눈을 멀게 만들어. 그러면 힘들게 붕대 감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유영에게서 망막을 빼앗으라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한지음의 표정이 훨씬 편안해졌다.“알았어.”강이한은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으니 조금만 더 감정을 자극하면 될 것이다.모든 것이 순조롭다면.병원에만 있다 보니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강서희는 확신에 찬 한지음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런데 넌 왜 그렇게 이유영을 미워하는 거야? 오빠랑 결혼한 뒤로 그 여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서 둘이 접점이 아예 없었을 텐데?”물론 강서희도 유영을 싫어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대 유영은 강이한의 아내로서 흠잡을 곳 하나 없었고 평소에 적을 만드는 성격도 아니었다.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한지음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궁금했다.질문을 듣자마자 한지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녀는 증오로 번뜩이는 눈을 하고 대답했다.“그냥 미워. 피를 말려 죽이고 싶을 정도로.”그렇게 말하는 한지음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오싹하고 섬뜩했다.하지만 왜 그렇게 증오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지음에게 있어 강서희는 괜찮은 거래 대상이었을 뿐
파리는 이유영과 엔데스 신우 사이의 일로 들썩였다. 그리고 지금 서재욱은 이유영의 아이까지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거기에 박연준까지 얽혀 있는 이 상황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파티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서재욱이 물었다.“이 정도면 연우가 나타날 만하지 않겠어요?”오늘 저녁 내내 서재욱과 함께하며 두 사람은 보기에도 제법 잘 어울렸고 주변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이유영은 의심스러웠다.‘정말 이런다고 해서 연우 씨가 모습을 드러낼까?’서재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오늘 고마웠어요.”“연우 씨가 돌아온다면 저도 오늘 할 일 한 거예요.”이유영은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았다. 목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이미 온몸이 더럽혀졌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명예 따위엔 별로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상황에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윙윙윙.”서재욱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리자 그는 이유영에게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화를 받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이유영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설마 또 나와 관련된 일인가?’요즘 파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같이 그녀와 관련되어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벅찬데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면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서재욱은 전화를 끊고 급히 다가왔다.“연우 소식이에요. 저기...”“어서 가봐요. 전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김연우가 나타난 걸 봐서 서재욱은 김연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잘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이유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서재욱은 미안한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눈빛이 한층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영 씨,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이제 파리를 떠날 건가요?”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서재욱의 말에 이유영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정말 내가 부정적으로만 생각
‘본인도 연우 씨에 대해 잘 몰랐던 것 아닌가?’이유영은 눈을 피하며 말했다.“연우 씨가 돌아오면 잘 좀 얘기해줘요. 전 남의 남자 뺏는 그런 여우 같은 여자 아니니까.”김연우가 오해할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무서웠다.서재욱은 웃음을 터뜨렸다.“확실해요? 괜히 유영 씨 감싸려다 오히려 불똥만 더 튀는 거 아닐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유영은 눈을 부릅떴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저 두 사람이 장난치는 줄로만 여겼다. 서재욱의 미소는 여유가 있었고 여느 때처럼 매혹적이었다.“애초에 이런 자리에 함께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이유영은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자리에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김연우가 자신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에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그저 출산 전까지는 서재욱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두 사람의 춤은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이유영의 작은 체구는 오히려 춤을 출 때 더한 매력을 발했고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다.그때 서재욱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오늘... 셋째 도련님 만났어요?”“어떻게 알았어요?”이유영은 당황했다. 오후 내내 백산 별장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서재욱의 갑작스러운 말은 그녀 안의 무언가를 터질 듯 흔들어놓았다.“몰랐어요?”서재욱이 되물었다.“뭘 말하는 거예요?”‘도대체 뭘 알아야 한다는 거야?’파리는 현재 어느 때보다 불안정했고 예측 불가능한 소문들이 만무했기에 굳이 새삼스럽게 소문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알 필요도 없었다.“지금 떠도는 소문으로 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과 혼인을 추진 중이래요. 상대는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고요.”“소문이 그렇게 퍼졌다고요?”이유영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진 걸까?’셋째 도련님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지혁조차 집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소문이 퍼진 거지?’“셋째 도련님이 회복을 선언했대요
두 사람은 밖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은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반산월조차 절대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었다.간신히 정리한 일인데 벌써 또 시작되고 있었다....지금의 엔데스 가문은 평온한 날이 없었다. 그것이 정국진이 무슨 일이 있어도 엔데스 가문과 얽히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한편 백산 별장에서 임소미는 이유영의 저녁으로 싱거운 음식들을 정성껏 준비해 두었다.그런데 저녁 무렵, 이유영은 밥도 먹지 않고 외출하기로 한 것이다.“어디 가는데?”“친구가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해서요.”“아, 그래?”임소미는 이유영이 밖에서 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삶에 큰 변화를 겪었던 이유영이기에 이럴 때일수록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계속 자책하며 혼자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정국진은 2층에서 조용히 내려왔다.여진우는 오후에 들렀다가 금세 나가야 했기에 저녁 식사는 하지 않을 듯했다.정국진과 임소미, 두 사람은 함께 식탁으로 향했다.“강이한 일, 아는 사람 별로 없죠?”임소미가 조심스레 물었다.“걱정 말아요. 파리 쪽엔 아는 사람 없어요.”강이한이 각막을 이식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그는 임소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절대 알면 안 될 진실을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정국진은 조용히 브로콜리를 임소미의 접시에 덜어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니까.”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결국 어느 순간엔가 드러나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그래도 걱정돼요.”임소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곳을 여러 번 찾아왔을 때, 아이를 바라보던 그의 쓸쓸한 눈빛을 떠올리면 마음이 저려왔다.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유영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유영이가 이 사실을 평생 몰랐으면 좋겠어요.”임소미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아이가 상처받을
그동안 가장 유력한 후보는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였다.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바보로 지내던 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갑자기 회복을 선언하면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결코 단순한 바보 연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눈빛은 전보다 깊고 낯설었다.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코트를 받아서 들었다.“엔데스 명우는 지금 어디 있어요?”소은지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엔데스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다 알고 있었어요?”“네.”모를 수가 없는 행보였다.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였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지의 마음은 내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은지 씨.”“네.”현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그 조용한 틈 속에 퍼지는 묘한 기운이 오히려 소은지의 마음을 더 흔들었다.“왜 그래요?”현우가 물었다.“셋째 형님이 지금 이 타이밍에 갑자기 회복을 선언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소은지는 짧게 대답했다.“처음부터 바보가 아니었겠죠.”지금 엔데스 가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현우가 피식 웃었고 그 웃음에 소은지는 괜스레 심장이 내려앉았다.“왜 웃어요?”“은지 씨 말이 맞아요. 애초에 바보가 아니었어요.”“그럼 지금 이 상황은...”소은지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 한켠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만약 엔데스 신우가 처음부터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은 근본부터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누구도 섣불리 단정 내릴 수 없는 국면이었다.“이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네?”현우는 소은지의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대신 그녀를 바라보며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눈빛을 건넸다.그 시선에 소은지의 마음은 잠시 흔들렸지만 곧 평정을 되
배준석이 떠나기 전, 그는 이유영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남겼다.“그 사람이 유영 씨를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이유영은 배준석의 질문에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 사람과 저 사이에 이제 용서하고 말고는 없어요. 그저 남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죠.”그 말을 내뱉은 후, 이유영은 어둑한 방 안에 앉아 쓴웃음을 흘렸다.“흥!”‘나를 위해 뭘 했는데?’‘강이한이 나를 위해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강이한이 해왔던 모든 일은 결국 연서와 관련된 것뿐이었고 그렇게 연서라는 존재는 이유영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 사이에 쌓인 모든 순간은 언제나 다른 여자인 연서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이유영을 위해서라면 강이한이 무슨 짓이든 할 거라던 배준석의 말을 되새기며 입가에 다시 한 번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유영을 위해 했다는 강이한의 모든 행동은 그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그날 오후, 이유영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그 사이 바깥세상은 요란하게 술렁였다. 이유영이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과 만났다는 소식이 퍼져 나간 것이다.상류 사회는 단숨에 떠들썩해졌고 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과 혼인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쏟아졌다.하지만 그 결혼 상대는 예상밖의 인물이었고 함께 전해진 소식으로는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완전히 회복이라니, 그는 애초부터 바보였던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그 시각, 풍산 그룹의 서재에서 박연준이 분노에 찬 손으로 휴대폰을 책상에 내리쳤다.“쾅!”남자의 눈빛은 한겨울 밤처럼 짙고 어두웠다.문기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그 셋째 도련님이 설마...”말끝을 흐린 채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박연준은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렸다.“흥!”박연준의 기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그 안엔 억눌린 분노가 또렷이 맴돌았다.
배준석은 이유영이 어떤 밤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 사람이 말한 거예요?”“이유영 씨!”“그 사람이 배준석 씨한테 아이를 없애 달라고 했어요?”배준석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아이 문제는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서 가장 깊고 아픈 상처였기에 그 이야기가 나오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아팠다.“유영 씨.”배준석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하다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배준석은 이미 알 것도 같았다.한때 온화하기만 했던 이 여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는지를.“그런데도 제가 그 사람을 계속 궁금해해야 하고 관심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이유영은 강이한과 관련된 것들이라면 그녀의 인생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강이한은 서주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많은 이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유영은 속이 후련했다.강이한이 사라지고 나서 비로소 이유영의 인생이 안정된 것만 같았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도...”“준석 씨, 설마 그 사람이 저를 사랑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이유영은 그의 말을 무정하게 잘라 버렸고 배준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유영이 말한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 차갑고 아프게 들려왔다.“연서, 알고 있죠?”배준석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이유영은 그 침묵에서 알 수 있었다.연서가 강이한에게 어떤 존재인지, 사실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고 심지어 한지음보다도 더 중요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결국 그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속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도 그 사람이 저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사랑이라는 말은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서 참 무거운 단어였다.그렇게 숱한 일을 겪고서 이제야 이유영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어둠 속에서 살게 된 강이한을 떠올리며 배준석은 문득 이유영이 너무 무정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강이한은 서주에서 사라졌고 그가 어딨는지 아무
배준석이 돌아왔다.용성시에서 돌아온 뒤로 배준석은 이유영 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한때 배준석은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둘러싸고 이유영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검진을 마친 뒤, 배준석이 말했다.“회복은 잘 되고 있지만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시력을 수술로 되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배준석의 말에는 단순한 의학적 조언을 넘어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듯한 씁쓸함이 배어 있었고 이유영은 그 속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배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연히 잘 관리해야죠.”이유영이 담담하게 말했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번 생에 겪었던 고통은 특히 더 절망적이었는데 전생의 수천 배는 될 터였다.아이가 없을 때에 비해 아이가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커가는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힘겹게 되찾은 시력인 만큼 더 소중히 여기며 관리해야 했다.“이유영 씨.”“네?”“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 관심도 없는 거예요?”배준석은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배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배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이유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제가 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그 말투에는 단호함보다 차가움이 앞섰다.강이한의 이름만 나와도 이유영의 말투는 도저히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진다.배준석은 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음에 놀라며 물었다.“서주에서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알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관심을 가져요?”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차가운 말이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배준석은 순간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서재에서 나오자 여진우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그의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분명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러나 이유영을 보는 순간,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우고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여진우의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언제 돌아왔어?”여진우가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방금.”“그 사람, 만났어?”“누구?”그 말을 뱉고 여진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엔데스 신우 때문에 돌아왔음을 직감했다.더블루 리버스에서 마주한 엔데스 신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바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파리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여진우가 돌아온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 가고 싶지 않았어...”떠나기 전부터 이미 엔데스 셋째 도련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이런 간교한 방법으로 이유영을 끌어들인 걸 봐서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넌 먼저 월이한테 가 봐.”여진우는 짧게 말하고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때,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고 여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왜?”“우리... 파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정씨 가문과 로열 글로벌 그룹 전체를 의미했다.말이 끝나자 복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엔데스 신우를 만나고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은 후, 이유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엔데스 가문의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정씨 가문도 결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떠나고 싶었다.파리는 이제 너무 위험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이었고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겉으로는 조용했던 정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셋째 도련님을 만난 후, 이유영은 그 아래에 도사린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돌아온 이유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요즘은 스튜디오에 가지 마. 집에 조용히 있어.”“네.”지금은 정국진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유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셋째 도련님이 준 거야?”그 이름을 듣자 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머니가 언급했던 전화도 아마 셋째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의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두껍지는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쾅!”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순간 정국진은 서류를 힘껏 책상 위에 내리쳤다.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기마저 흔들 듯 강렬했다.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임소미와 이유영 앞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셋째 도련님의 변화에 신경이 쏠려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의 정국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가져온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려 하자 정국진이 손을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보지 마.”“아빠.”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고 정국진의 반응에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외부에 바보로 알려진 세월이 길었던 만큼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정국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너 먼저 나가 있어.”이유영은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