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힌 손목이 아파왔지만 유영은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거기에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남자의 동공이 확 수축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잖아. 난 절대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거란 거.”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그 뜻인즉, 알면 순순히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전에는 강이한이 조금만 강압적으로 나오면 유영은 한발 양보했는데 지금은 전과 달랐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다른 여자 눈 뜨게 해준다고 나한테 망막을 내놓으라는 남자한테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강이한은 숨이 막혔다.그와 한지음의 관계는 지금 시한폭탄과도 같았다.그가 유영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 관계가 발목을 잡았다.그는 고집스러운 눈빛을 한 여자를 실망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여론의 평판을 떠올렸다.예전에는 그녀에게 기울었던 우호 여론도 현재는 한지음에게로 기울고 있었다.“그거 알아? 전 청하시가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러다가 당신 이 도시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야.”그의 보호막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처지는 더욱 가시밭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심지어 소은지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유영이 말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청하시에 미련이 남은 건 없으니까.”그녀가 청하시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이유는 강이한 때문이었다.지금 이 도시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이혼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만약 그들이 정말로 갈라서게 될 날이 온다면 이 도시는 그녀에게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어딜 가든 이곳보다는 나을 테니까.물론 한지음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그녀의 용기는 가상하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까지 올라가려 하는 건 괘씸했다.강이한이 얘기했던 것처럼 여론은 지금 폭풍의 소용돌이였다.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온 소은지는 문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택배를 보고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지음도 그 말을 듣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예쁨을 추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눈가 피부에 뾰루지가 난 것을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미는데 잔소리 때문에 더 화가 났다.“대체 둘은 언제 이혼한대?”그녀와 강서희의 역할 분담은 매우 명확했다. 한지음은 병원에서 장님 행세를 하며 강이한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강서희는 여론과 감성팔이를 이용해서 유영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원래 예상대로라면 강이한이 유영에게 실망하고 이혼이 일사천리로 진행해야 맞았다.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방향은 그들의 예상을 초월했다.밖에서 유영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그들 사이에도 심각한 감정의 곬이 생겨버렸지만 여전히 이혼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계속 장님행세하고 싶지 않으면 유영 그 여자의 눈을 멀게 만들어. 그러면 힘들게 붕대 감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유영에게서 망막을 빼앗으라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한지음의 표정이 훨씬 편안해졌다.“알았어.”강이한은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으니 조금만 더 감정을 자극하면 될 것이다.모든 것이 순조롭다면.병원에만 있다 보니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강서희는 확신에 찬 한지음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런데 넌 왜 그렇게 이유영을 미워하는 거야? 오빠랑 결혼한 뒤로 그 여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서 둘이 접점이 아예 없었을 텐데?”물론 강서희도 유영을 싫어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대 유영은 강이한의 아내로서 흠잡을 곳 하나 없었고 평소에 적을 만드는 성격도 아니었다.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한지음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궁금했다.질문을 듣자마자 한지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녀는 증오로 번뜩이는 눈을 하고 대답했다.“그냥 미워. 피를 말려 죽이고 싶을 정도로.”그렇게 말하는 한지음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오싹하고 섬뜩했다.하지만 왜 그렇게 증오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지음에게 있어 강서희는 괜찮은 거래 대상이었을 뿐
그러고 보면 강이한은 스캔들이 나기 전까지는 꽤 모범적인 남편이었던 것 같았다.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지 않은 이상은 꼬박꼬박 집에 돌아왔고 술자리가 있다고 해도 밤 열한 시를 넘기지 않았다.그래서 유영도 그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항상 열한 시 전에는 잠을 잤던 것 같았다.그러다가 갑자기 밤을 새우니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삐걱거렸다.휴식실로 들어온 유영은 담요를 몸에 두르고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조민정이 넌지시 말했다.“소은지 씨네 집에서 빨리 나오는 게 좋겠어요.”“알아요.”조민정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이미 소은지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었고 그녀의 생활에도 엄중한 피해를 끼치게 되었다. 3개월 전에 바로 소은지네로 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저쪽에서 끈질기게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강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남자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어?”“돌아간다고 한 적도 없잖아.”“소은지가 언제까지 당신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혼자서 그 많은 여론과 악플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집으로 들어가!”남자가 협박 조로 말했다.아마 소은지네 집으로 택배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하는 얘기 같았다.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3개월 전에 내가 경찰에 신고해서 그 사람들을 다 잡아넣었더니 그들과 합의를 보고 풀어준 사람이 당신이야. 지금 나랑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 또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우길 거야?”“이유영!”“시끄러워. 소리 그만 질러.”유영도 같이 짜증을 냈다.강이한이 그들을 풀어준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걱정해서 전화했을까?그건 아닐 것이다.“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닌 거 알잖아.”남자가 구슬리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조 비서 그쪽으로 보낼게.”“나 지금 회사에서 야근 중이야.
여직원은 바로 유영을 안으로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끓여 대접했다.“이거라도 마시고 몸 좀 녹여요.”“감사해요.”유영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조민정의 차를 타고 미리 왔는데 임시로 일이 생겨 조민정 먼저 가버리고 그녀만 남아서 기다리게 된 것이다.오래 기다린 건 아닌데 너무 얇게 입고 온 탓인지 추위에 온몸이 떨렸다.강이한과 함께 생활하며 겨울에 바깥 출입이 적어서 밖에 얼마나 추운지 몰라서 생긴 해프닝이었다.유영은 다음에는 꼭 두껍게 입고 나와야겠다며 스스로 다짐했다.“사실 이렇게 일찍 올 필요가 없어요. 대표님은 아홉 시 다 돼서 나오시거든요. 가끔 일정이 틀어지면 더 늦어질 때도 있어요.”“쿨럭!”차를 마시고 있던 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기침했다.“괜찮으세요?”직원이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 괜찮아요.”그녀가 기억하는 기업인들은 아주 일찍 출근했다. 강이한은 매일 아침 여덟 시 전에 집에서 출발하고는 했다.그래서 그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강성건설 대표가 아홉 시가 넘어서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와 결혼한 여자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한 시간 정도 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박연준은 여덟 시 반이 되어 회사로 나왔다. 상사를 마주한 여직원은 바로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대표님, 나오셨어요?”“이유영 씨?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박연준의 뒤를 따르던 문 비서가 그녀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유영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박연준은 서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냉랭한 분위기에 유영은 준비했던 멘트조차 잊어버리고 우물쭈물했다.조금 전까지 그와 결혼한 여자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표정을 보니 생각이 바뀔 것 같았다.너무 진지하고 냉랭해서 평소에도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유영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유영 씨? 이유
잠시 후, 유영은 다시 대표사무실을 찾았다.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전에 강이한이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많이 봤기에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다.물론 박 대표와는 직장 상사와 직원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첫 거래부터 퇴짜를 놓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았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설계 도안을 한페이지씩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유영의 숨결도 같이 거칠어졌다.역시 안 되는 건가?그런데 한참 도면을 뜯어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그려줬네요. 아마 어제 내가 이유영 씨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저… 정말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에서 큰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제 자신이 그에게 남긴 첫인상이 영 별로였다는 얘기로 들렸다.“밤새 고민을 많이 한 티가 나요. 하지만 일부 디테일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하겠네요.”“말씀해 주신대로 수정할게요!”유영은 희망적인 박연준의 답변에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대체적으로 서늘한 분위기를 주는 인상이지만 그 잘생김은 어딜 가지 않았다. 그는 꽤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유영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 그가 지적했던 부분을 메모에 적기 시작했다.너무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오히려 박연준이 지적하기 미안해질 정도였다.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신속히 수정해야 할 부분을 빨간색 펜으로 체크한 뒤, 그녀에게 건넸다.“여기 체크한 부분이 좀 별로네요. 전반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은데 디테일한 부분에서 점수를 깎아먹는 느낌이에요.”유영은 도면을 받아 다시 살폈다.박연준은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녀가 놓쳤던 디테일을 하나하나 지적해냈다.‘역시 큰일을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할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 아니죠?”“네, 그럴 필요까지
아침부터 유영을 강성건설로 보낸 이유도 여기 있었다.디자인에 참여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문제라 유영이 가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저는 회의하고 올 테니까 유영 씨는 좀 쉬고 있어요.”유영은 긴장이 확 풀리자 지친 기색이 확 드러났다.“알겠어요.”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온갖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세강의 디자인 팀은 업계 최고 엘리트들만 모아놨다고 평가 받고 있는데 그런 그들마저 오너의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 구상이 보이지 않았다.이때, 조형욱이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사무실을 찾았다.“사모님은 스튜디오에 취직한 게 아니라 스스로 스튜디오를 창설하셨더라고요.”강이한의 두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그가 너무 아내를 얕잡아보았던 걸까?“그럼 모든 회사에 공개 입장을 보내서 그쪽 스튜디오에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최근 보여준 그녀의 행보를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그의 가족들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집에서 나간 뒤로 그와 완전히 선을 긋겠다는 그 당돌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10년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허무했었나?그는 한 번도 자신과 유영 사이에 이토록 깊은 감정의 곬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회사는 괜찮은데 강성건설 쪽은 그런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 같네요.”조형욱이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표명했다.박연준!강이한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학교 때부터 그의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회사의 오너가 된 시기도 비슷하고 두 회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물밑 경쟁을 치러왔다.동교 신도시 프로젝트의 입찰에 참여한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번에도 사실 상 세강과 강성의 경쟁이었다.그리고 그의 아내인 유영이 박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여론이 또 어떻게 떠들어댈지 훤히 보였다.강이한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그의 주변으로 섬뜩한 살기가 요동치고 있었다.“박연준 쪽은 일단 신경 쓰지 마.
이어지는 이틀 간, 유영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강성건설 근처의 커피숍으로 가서 작업하기로 했다. 조민정은 호기롭게 커피숍 전체를 이틀 간 세내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팀원들에게 조용하고 안정적인 작업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이번 수정만 제대로 끝나면 유영은 최종 도면을 가지고 강성건설을 방문할 예정이었다.만약 또 수정할 부분이 생기면 커피숍이 근처라 바로 돌아와서 수정하기도 편리했다.처음 도면을 가지고 방문했을 때, 유영은 박연준이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정 횟수가 반복되면서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전보다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여기랑 여기도 수정해 주세요.”남자가 설계 도면을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유영은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오늘 밤이 아마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내일 아침까지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지 못한다면 강성과의 계약은 물 건너 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랬기에 더욱 간절했다.강이한이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 일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유영이 커피숍으로 돌아가자 팀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조민정조차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시 수정하라고 하네요.”유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리로 돌아갔다.조민정이 다가와서 말했다.“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새로 생긴 팀이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성장할 수 있어요.”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시작 자체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역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여기부터 수정하죠.”유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는 지금 머리가 지끈거리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상대는 강성건설이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조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회의를 소집하고 함께 수정해야 할 부분을 짚어나갔다.직장 경험이 부족한 유영은 번번이 퇴짜를 맞는 상황이 오자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하
“타.”차가운 목소리가 유영의 잡념을 깨웠다.그녀는 차 앞으로 다가가서 썼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벌써 며칠 째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아직도 포기 못하겠어?”이 남자는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했다.유영의 실력이 마냥 형편없었더라면 컨택을 받지도 못했을 텐데도 그는 당연히 그녀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숨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했다.“난 쉽게 포기란 거 안 해. 물론 포기하면 다시 뒤돌아보는 법도 없지.”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요즘 여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와 강이한의 상황을 다루었다.옛날에는 그에 관한 기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여론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착실히 하고 싶었다.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외부 평가가 아닌, 강성건설과의 계약 체결이었다.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타.”“나 오늘 많이 바빠.”“아직도 모르겠어? 박연준은 처음부터 당신이 설계한 그 쓰레기를 채택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유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싸늘함이 담긴 눈빛이었다.그와 오랜 시간 함께 보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그녀를 폄하한 건 처음이었다.변한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강이한 역시 변했다.“당신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박 대표님은 수정할 기회라도 주셨어.”그랬다.중요한 건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강이한은 예전에도 그녀에게 출근하지 말라고만 했지 한 번도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준 적도,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준 적도 없었다.디자이너로서 까다로운 업계의 평가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맹목적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유영은 서서히 굳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내 디자인 실력이 쓰레기 수준이라는 걸 일부러 알려주려고 온 거라면 이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겉으로는 조용했던 정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셋째 도련님을 만난 후, 이유영은 그 아래에 도사린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돌아온 이유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요즘은 스튜디오에 가지 마. 집에 조용히 있어.”“네.”지금은 정국진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유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셋째 도련님이 준 거야?”그 이름을 듣자 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머니가 언급했던 전화도 아마 셋째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의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두껍지는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쾅!”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순간 정국진은 서류를 힘껏 책상 위에 내리쳤다.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기마저 흔들 듯 강렬했다.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임소미와 이유영 앞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셋째 도련님의 변화에 신경이 쏠려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의 정국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가져온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려 하자 정국진이 손을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보지 마.”“아빠.”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고 정국진의 반응에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외부에 바보로 알려진 세월이 길었던 만큼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정국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너 먼저 나가 있어.”이유영은 그를
그리고 그 남자는 단지 눈빛만 깊은 게 아니라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오랫동안 바보라 여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엔데스 가문은 지난 세월 동안 격동의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 바보 같은 연기마저 이 순간 이유영의 눈에는 마치 하나의 능력처럼 보였다.엔데스 신우는 갑자기 조용히 서류봉투를 내밀었다.“가져가서 아버지께 드리세요.”이유영은 멍하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게 뭐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박연준과 이혼할지 말지 결정하세요.”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결혼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이 남자는 무서운 존재감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이유영은 단단한 눈빛으로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바보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과연 엔데스 가문의 다른 이들은 알고 있었을까?“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실지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동시에 감춰질 수 없는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은 어떻게 더블루 리버스를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슴은 점점 더 죄어왔다.혼란스러웠다.파리는 원래도 복잡한 곳이었지만 특히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이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는 여전히 독자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모든 일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하지만 오늘,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을 만난 이후 이유영은 확신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거라 믿어서는 안 된다.“바로 집으로 가요.”지혁이 차를 스튜디오 쪽으로 돌리려 하자 이유영이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엔데스 신우를 만난 후, 그녀는 더 이상 회사에 갈 마음이 없어졌고 머릿속을 정
결국 이유영은 엔데스 신우와 마주 앉았고 정적 속에 무언의 압박이 흐르고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며 이유영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셋째 도련님께서는 원하시는 게 뭔가요?”계속해서 현금으로만 결제를 요구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파리로 돌아오기 전 그녀가 접한 소식으로 봤을 때, 파리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심지어 박연준과의 결혼도 결국 파리와 얽혀 있었다.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는 영리하니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죠?”“셋째 도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 역시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 남자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차갑고 위험한 미소였다.심장은 이미 터질 듯 뛰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아가씨와 박연준의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무슨 의미든 간에, 저는 그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긴장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그 말을 듣고 엔데스 신우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의 조롱이 섞인 웃음소리에 이미 굳어 있던 이유영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정씨 가문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과 어떤 협력도, 관계도 맺지 않았는지 알고 있나요?”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의 아버지 정국진은 언제나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는 사실뿐이었다.솔직히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정국진이 엔데스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피해 왔고 엔데스 가문은 그동안 언제나 중립을 유지해 왔다.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지닌 듯, 이유영을 강하게 짓눌렀다.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을 지울 수 없
이유영이 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호적에 적힌 이름은 ‘정유영’으로 바뀌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유영’ 혹은 ‘유영’이라 불렀다.집사가 단호하게 ‘정씨 가문 아가씨’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뒤에 거대한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음을 실감했다.가족이 있다는 건 곧 얽매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이유영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그래도 안에 누가 기다리는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집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씨 가문 아가씨께서 직접 오셨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셔서요.”그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고 이유영의 마음속 의심은 점점 커졌다.그날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은 틀림없이 엔데스 가문의 전설적인 셋째 도련님, 엔데스 신우였다.소문에는 ‘바보’로 불렸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낮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요.”“아가씨.”“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사람들 저한테 감히 어쩌지 못할 거예요.”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엔데스 가문의 누구도 지금 그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지혁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밖에서 볼 때도 건물의 웅장함이 느껴졌지만 내부는 더 압도적이었다. 곳곳에 스며든 고급스러운 디테일과 섬세한 감각이 주인의 까다로운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대형 홀을 지나 집사는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그제야 이유영은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길고 긴 테이블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맑고 고고한 분위기는 첫눈에 보아도 비범한 존재감이었다.그런 아우라는 절대 ‘바보’라 불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셋째 도련님, 정씨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었던 이유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한 번 도망쳐 봐.”비서는 순간 움찔했다.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은 로열 글로벌의 것이었고 그녀는 로열 글로벌의 전 대표님이었기에 서주에서 살아남으려면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두 시간 후, 비서와 지혁이 돈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오자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거기 경비원들이 바로 내쫓았어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유영은 혼란스러웠다.“윙!”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내일까지 안 오면 변호사가 찾아갈 거야.]‘협박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차 수리비는 물론이고 직접 사과까지 하라는 건가?’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런 일일수록 더 읽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아직 더블루 리버스에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빨리 사과하고 이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통화하다가 부딪혔으니 명백한 본인 불찰로 생긴 사고였고 CCTV에도 찍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곧 답장이 왔다.[네.]아직 그곳에 있다면 된 것이다. 이유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지혁 씨.”“네, 아가씨.”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지혁이 이유영 앞으로 다가갔다.“저랑 같이 가요.”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지혁과 함께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유영은 코트를 걸치며 돈을 지혁에게 건넸고 돈을 건네받은 지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오늘 일정으로 바쁜 하루였지만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30분 후에 더블루 리버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경비원들이 막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들이 온다는
“바래다줬어?”“네.”“서재욱은 아직도 거기 살아?”“네.”말이 떨어지자 박연준은 온몸에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그의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기원의 심장은 긴장감에 조여들었다.박연준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문기원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지금 나온 기사는 다 찌라시잖아요.”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박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문기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재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모습 한 장면만이 가득했다.“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는 게 어떻습니까?”문기원은 신중하게 조언했다.오늘 이유영이 서재욱을 만난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퍼졌다.이건 누군가가 분명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게 누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혹시 엔데스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재욱을 끌어들이려는 걸까?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연준은 그저 단호하게 문기원에게 말했다.“너 먼저 들어가.”그 순간 그가 얼마나 큰 힘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문기원은 알 수 있었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시간 박연준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상, 지금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면 오늘 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그날 밤, 이유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래라면 내일 서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미뤘다.아침 식탁.“월이야, 빨리 먹어.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어제 엄마가 말했지, 늦으면 안 된다고.”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월이에게 말했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집에 없는 관계로 이유영이 월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은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
마음이 이 정도로 깊지 않았다면 감정을 이렇게까지 억누를 수 있었을까?박연준은 아마도 과거 연서에게조차 이렇게까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을 것이다.강이한이 마지막 순간 이유영을 놓아주면서도 박연준과 그녀 사이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 이유였을 것이다.지금 보니, 박연준은 언제나 진심이었다.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였기에 오늘 밤 벌어진 모든 일이 이토록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내일 가도 되잖아.”박연준은 돌아서며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는 동안 감정을 철저히 억눌렀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끝없는 아픔뿐이었다.“그 여자는?”진영숙을 말하는 것이었다.박연준은 순간 미세하게 움찔했고 그 반응을 본 이유영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띠었다.“흥!”진영숙과 이유영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너와 그 여자가 또 어떤 거래를 했을지 누가 알아.”그녀는 한 발 다가가며 비꼬듯 물었다. 강이한의 어머니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묘하게 신경 쓰였다.진영숙을 대하던 태도가 나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며 박연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박연준은 잠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딱 하루만이야.”“넌 내가 그 여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이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과거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강이한을 위해 모든 건 참아내면서조차 강씨 집안에 머문 적은 없었다.신분과 지위가 아무리 다르고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이유영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돼.”“뭐라고?”이건 어제부터 박연준이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지 이유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과거의 일들이 떠오르자 이유영은 다시 진영숙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박연준의 말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남자의 시선이 이유영에게 고정되었다.이 지경이
그런 말은 원래 박연준의 입에서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그가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자라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이가 침범하는 것을 참지 못할 테니까.“강이한과 한지음은 불륜이었어. 재욱 씨는 연우 씨에게 분명히 이야기할 거야. 어떻게 같아?”강이한은 한지음과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키면서도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고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서재욱과 이유영 사이에는 애초에 그런 감정이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박연준의 말은 아무런 책임감 없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박연준은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평생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순간은 보통 강이한에게서 많이 봤었다. 강이한은 박연준의 공격과 복수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분노하곤 했다.그리고 지금, 이유영은 그 모든 것을 박연준에게 되돌려주고 있었다.“너...”박연준은 이유영의 무심한 태도를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그 사람 만나지 마. 유영아, 내가 억지로 조치 취하게 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무겁고도 위험했다.박연준의 말 속에 담긴 위협을 이유영은 단번에 알아채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 그러면 어쩔 건데?”아무도 박연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유영은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그가 다시 이유영을 바라볼 때, 그의 눈빛에는 끝없는 위험이 서려 있었다.“내가 뭘 할 것 같아?”10년 동안 한 사람을 계략적으로 속일 수 있었던 남자였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날 협박하는 거야?”“난 그럴 생각이 없어.”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파리에 돌아온 이후, 이유영의 행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