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차가운 목소리가 유영의 잡념을 깨웠다.그녀는 차 앞으로 다가가서 썼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벌써 며칠 째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아직도 포기 못하겠어?”이 남자는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했다.유영의 실력이 마냥 형편없었더라면 컨택을 받지도 못했을 텐데도 그는 당연히 그녀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숨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했다.“난 쉽게 포기란 거 안 해. 물론 포기하면 다시 뒤돌아보는 법도 없지.”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요즘 여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와 강이한의 상황을 다루었다.옛날에는 그에 관한 기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여론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착실히 하고 싶었다.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외부 평가가 아닌, 강성건설과의 계약 체결이었다.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타.”“나 오늘 많이 바빠.”“아직도 모르겠어? 박연준은 처음부터 당신이 설계한 그 쓰레기를 채택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유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싸늘함이 담긴 눈빛이었다.그와 오랜 시간 함께 보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그녀를 폄하한 건 처음이었다.변한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강이한 역시 변했다.“당신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박 대표님은 수정할 기회라도 주셨어.”그랬다.중요한 건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강이한은 예전에도 그녀에게 출근하지 말라고만 했지 한 번도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준 적도,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준 적도 없었다.디자이너로서 까다로운 업계의 평가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맹목적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유영은 서서히 굳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내 디자인 실력이 쓰레기 수준이라는 걸 일부러 알려주려고 온 거라면 이
유영에게 거절당한 강이한은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전문 디자이너들이 설계한 방안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조 비서.”“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조형욱이 물었다.커피숍을 떠난 뒤, 그는 목적 없이 시내를 돌고 있었다.매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강이한의 저기압도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운전기사나 조형욱은 빨리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퇴근하고 싶었다.계속 이러다가 주변 사람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병원으로 가지.”한참이 지난 뒤에야 남자가 말을 꺼냈다.하지만 조형욱이나 운전기사의 얼굴 표정은 예상했던 것처럼 편하지 않았다.매번 병원에 다녀온 뒤로 강이한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하자 조형욱은 강이한을 따라 병실로 올라갔다.한지음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과 넋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은 보는 사람의 보호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왔어요?”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강이한을 불렀다.누구와는 다르게 듣고 있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였다.강이한이 잠깐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자 한지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는 제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서 주제넘은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본인이 끝까지 사과를 거부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요.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유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강이한 입장에서는 과분한 요구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사과를 받고 싶다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유영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꼴이라니!잘못을 했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떠나려는 모습에 강이한도 화가 많이 났었다.그런데 한지음이 사과는 됐다고 하니 오히려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죄책감이 더 커졌다.“지음아.”강이한이 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불렀다.전보다는 다정한 목소리에 한지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흰 붕대가 눈을 가리고 있어 눈빛을 볼 수
그녀는 거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듯이 한참 숨을 고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대표님을 봐서 참고 넘어갈게요.”이대로 용서한다고?오히려 당황한 건 강이한이었다.“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강이한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강이한을 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강 대표님, 한지음 씨는 안정을 취해야 해서 이제 그만 나가주셔야 합니다.”“그러죠.”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말했다.“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회복에만 집중해.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게.”지켜준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한지음은 예쁜 미소로 그에게 회답했다. 보고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미소였다.강이한은 의료진을 따라 밖으로 나오고 조형욱이 그 뒤를 따랐다.강이한이 물었다.“염증 때문에 고생한다고 들었는데 후유증은 없겠죠?”“위험한 수준입니다. 사실 지금은 수술이 시급해요.”의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이한은 또다시 막막함을 느꼈다.두 번이나 응급수술을 받으면서 이미 한지음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안 좋아져 있었다.매번 의사를 만나면 이식 수술이 시급하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매번 재촉하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시력을 회복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지금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 광명을 되찾기 힘들지도 모릅니다.”강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물론 수술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기엔 나이가 아깝잖아요.”“알겠습니다.”강이한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듣고 있던 조형욱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기증자를 찾는 일은 그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지 조형욱 역시 알고 있었다.하지만 무조건 산 사람의 망막을 이식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리 돈이 중해도 누가 선뜻 자신의 망막을 내놓을 수 있을까
강이한의 뒤를 따르던 조형욱도 그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혀왔다.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옷에 묻었던 커피가 그녀의 하얀 원피스에 그대로 뚝뚝 떨어졌다.유영이 버럭 짜증을 냈다.“강이한, 당신 미쳤어?”“흡….”여자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는 그대로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강압적인 키스였다.그의 돌발행동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유영은 입술에서 피비린내가 확 느껴졌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밀어냈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강이한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유영아, 그만 고집을 피워. 응?”매번 그녀가 화를 낼 때면 시간을 두었다가 다가와서 좋은 말로 달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그리고 그녀 역시 이런 방식을 좋아했다.매번 그가 이렇게 목소리를 깔고 다정하게 말해줄 때면 그녀는 서운한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었다.그의 가족들의 냉대와 무시에도 강이한만 자신을 사랑해 주면 모든 걸 참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유영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말해. 또 뭐 때문에 온 거야?”화해?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론이 이끄는 대로 한지음의 말만 믿고 그녀를 몰아세웠는데 화해가 가능할 리 없었다.어차피 지금 그가 원하는 건 그녀의 타협이었다.“일단 나가자.”강이한이 그녀의 손을 잡고 커피숍을 나갔다.유영은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어쩌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차에 타고 있었다.그들을 태운 차는 청하 병원으로 와서 멈췄다.유영의 마음도 차갑게 식었다.아직도 포기를 못한 건가?“강이한, 대체 날 뭐로 생각한 거야?”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또 억지로 여기까지 끌고 온다고?예전에는 그녀가 싫다고 한 일을 이렇게까지 강요한 적 없었다.유영은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일단 나랑 들어가자.”강이한도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
그런데 유영이 그 난리를 쳐대는데도 강이한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강서희가 인내심을 잃어버렸다.한지음이 말했다.“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너랑 네 엄마 쪽에서 압력을 넣는 것만으로 부족한 것 같은데?”“그게 무슨 뜻이야?”“그냥 그렇다고.”한지음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강서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음, 네 위치를 잘 기억했으면 해. 이번 일 끝나면 넌 해외로 떠나는 거야. 주기로 한 돈은 섭섭지 않게 챙겨줄 거야. 하지만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협박의 의미가 다분한 말이었다.한지음의 얼굴색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녀는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유영을 제거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그건 네 알 바 아니고.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어.”말을 마친 강서희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핸드폰을 내려놓은 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빛났다.네가 그렇게 잘났어?세강의 양녀 주제에 어차피 유영과 그녀가 다 사라져도 강서희와 강이한 사이는 불가능했다.진영숙이 유영과 한지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듯이, 콧대 높은 재벌 집안은 양녀와 아들의 결합을 두고두고 반대할 것이다.“내가 돈이나 받자고 이 난리를 부리는 줄 알아? 잘난 척하긴!”한지음은 생각할수록 강서희가 가소롭고 괘씸했다.그녀는 욕실 가운을 내팽개친 뒤,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의사가 말한 것처럼 심각한 상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청순하고 요물 같은 얼굴이 거울에 비춰지고 있었다.한편, 엘리베이터를 나온 유영은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고 안으로 끌었다.유영이 말했다.“이렇게 억지로 끌고 오면 내가 사과할 줄 알았어? 꿈 깨!”“일단 한지음 상태를 보고 다시 얘기해!”강이한은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대신, 말을 바꿨다.한지음이 병원에 실려온 뒤로 유영은 한 번도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본 적 없었다.그래서 그는 그녀가 상대의 지금 상황을 보
그녀는 이 남자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하필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혼 얘기를 또 꺼낼 줄은 몰랐다.유영은 그에게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이미 그에 대한 기대나 마음은 접은지 오래지만 남자의 선택이 궁금해졌다.“사과할게. 당신이 이혼만 해준다면.”이혼과 사과,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뜻이었다.강이한은 한참이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친 사람처럼 실소를 터뜨렸다.유영이 물었다.“웃겨?”“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는 거구나. 내가 그렇게 싫어?”“당신과 한지음이 붙어먹은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했어야지. 대체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집착?그녀에게는 이게 단순히 집착으로 보였던 걸까?보내기 싫은 그의 마음을 그녀는 집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강이한은 숨을 가다듬고 유영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사과해.”유영의 마음도 차갑게 식어갔다.이미 그에게 실망한지 오래지만 이런 모습을 직접 마주하자 여전히 지옥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래.”한참이 지난 뒤에야 유영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서 한지음의 병실을 향해 다가갔다.강이한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전에는 그렇게 사과하래도 끝까지 안 한다며 버티다가 요구를 들어준다니까 저리도 쉽게 걸음을 내딛는 그녀가 야속했다.병실 문이 열리고 유영이 들어갔다.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 한지음을 보자 걸음을 멈추고 강이한이 있는 쪽을 살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유영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한지음의 눈동자와 마주했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전혀 시력을 잃은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유영은 숨이 꽉 막혔다.유영을 본 한지음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새벽 시간이라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유영이 연락도 없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그녀의 두 눈에 증오가 용솟음치더니 유영이 보는 앞에서 붕대를 가져다가 두 눈을 가
전에도 한지음을 의심하긴 했지만 진실을 마주한 순간 온몸이 오싹하고 떨려왔다.추측과 직접 진실을 마주한 느낌은 달랐다.그녀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은 그녀가 미동도 없자 싸늘하게 식은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이유영!”이를 갈며 깊은 분노를 드러낸 목소리에 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당신은 눈이 멀었구나.”그랬다.지난 생에도 남자가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같은 상황을 겪고 있으니 더 진절머리가 났다.반면 강이한은 그녀가 반응이 없자 한지음을 안은 채, 밖으로 달려갔다.“잠깐만.”유영이 나가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옷섶을 꽉 움켜쥔 한지음의 모습에 유영은 치가 떨렸다.강이한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영은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빛에 그 역시 흠칫하며 착잡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사모님 오셨어요? 대표님, 빨리 사모님한테 가봐요. 저는 괜찮아요.”한지음은 그의 옷섶을 꽉 그러쥔 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유영은 구역질이 치밀었다.“약 좀 가지고 올게.”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강이한의 시선은 유영을 향해 있었다.한지음이 고집스럽게 말했다.“저 정말 괜찮아요.”고개를 돌린 그녀의 입가에 비릿하게 지어진 그 미소를 유영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승자의 미소였다.유영은 손을 뻗어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붕대를 벗겨내려 했지만 강이한은 뒤돌아서 그 손길을 떨쳐냈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남자가 분노한 고함을 질렀다.회귀한 뒤로 모든 걸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유영마저 한지음의 이런 기행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거대한 충격에 그녀는 이성을 잃었고 강이한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저 여자 연기하는 거야! 두 눈이 멀쩡하다고!”분노와 절규가 섞인 목소리였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모든 게 전부 다 가짜라는 생각만 꽉 들어차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그랬으면서 지난 생에는 왜
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강이한과 그의 품에 안긴 한지음을 바라보았다. 한지음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품에 깊숙이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강이한도 당황했는지 자신의 손과 유영을 번갈아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유영이 실망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몇 번째야?”남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점점 막나가는구나.”“하!”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내를 막대하던 그의 아버지가 떠올랐다.강씨 가문에서 여자의 지위란 가장 하찮은 것이었다.남자 앞에서 여자는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강이한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둘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강이한도 가장 권위적인 위치에서 모든 걸 그녀의 탓으로 돌렸다.”강이한, 당신 정말 역겨워.”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이게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남자가 한지음 때문에 그녀에게 손찌검한 횟수.실망?아마 이 관계에서 가장 큰 실망감을 느낀 사람은 유영 본인이었다.“거기 서!”강이한이 뒤에서 그녀를 부르며 쫓아가려고 할 때, 한지음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유영은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찬 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얇은 옷깃을 파고들었다.뼛속까지 시린 이 느낌보다 마음이 더 추웠다.추위는 그에게 느낀 배신감과 실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은지야.”언제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핸드폰은 소은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유영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어디야?”“나 지금 병원.”“다쳤어?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갈게!”말을 마친 소은지는 어디 병원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전화가 끊어진 순간 유영은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억지로 참았다.하늘도 그녀의 조우에 슬픔을 느낀 건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병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