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무실이지만 직원들 간의 소통도 좋았고 업무 분장도 확실해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강이한이나 진영숙의 전화는 전부 끊어버렸다.그런데 이번에는 박 대표의 비서인 문 비서의 연락이었다.“네, 문 비서님.”“동교 신도시 주변 개발 기획안 혹시 필요해요?”“네, 주시면 좋죠.”유영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건축 디자이너에게는 주변 상황도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주변에 뭐가 서는지, 지리적 우세가 어떤 게 있는지 알면 그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그리기도 쉬워진다.“저 지금 아래층에 있어요.”“네?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외투도 챙기지 않고 아래층으로 뛰었다.건물 앞에 한정판 롤스로이스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 임원까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걸 보면 강성건설이 얼마나 강대한지 알 수 있었다.유영이 다가가자 문 비서가 차창을 내리더니 서류 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이미 심사가 통과한 기획안입니다.”“감사합니다.”유영은 공손하게 받아서 보물처럼 서류를 품에 안았다.일반인은 가질 수 없는 고급 정보였기에 그만큼 이 프로젝트에 목숨을 건 유영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다.이런 고급 정보를 가지고도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건 그녀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깔끔히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조심히 가세요. 나중에 시간 되실 때 제가 밥 한끼 사드릴게요.”솔직히 지금 심정이라면 당장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유영에게는 시간이 촉박했다.차가 출발 시동을 걸자 차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박 대표님이?’한편, 건물 밖으로 나오던 강이한은 박연준의 차량과 가까이 서 있는 유영을 보자 순식간에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그는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뒤돌아서던 유영은 마주 오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히고 사과했다.“죄송합니다.”강이한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고개를 든
잡힌 손목이 아파왔지만 유영은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거기에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뭐야?”남자의 동공이 확 수축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잖아. 난 절대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거란 거.”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그 뜻인즉, 알면 순순히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뜻이었다.전에는 강이한이 조금만 강압적으로 나오면 유영은 한발 양보했는데 지금은 전과 달랐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다른 여자 눈 뜨게 해준다고 나한테 망막을 내놓으라는 남자한테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강이한은 숨이 막혔다.그와 한지음의 관계는 지금 시한폭탄과도 같았다.그가 유영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그 관계가 발목을 잡았다.그는 고집스러운 눈빛을 한 여자를 실망스럽게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여론의 평판을 떠올렸다.예전에는 그녀에게 기울었던 우호 여론도 현재는 한지음에게로 기울고 있었다.“그거 알아? 전 청하시가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러다가 당신 이 도시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야.”그의 보호막이 사라진다면 그녀의 처지는 더욱 가시밭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심지어 소은지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유영이 말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청하시에 미련이 남은 건 없으니까.”그녀가 청하시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이유는 강이한 때문이었다.지금 이 도시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도 이혼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만약 그들이 정말로 갈라서게 될 날이 온다면 이 도시는 그녀에게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어딜 가든 이곳보다는 나을 테니까.물론 한지음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그녀의 용기는 가상하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까지 올라가려 하는 건 괘씸했다.강이한이 얘기했던 것처럼 여론은 지금 폭풍의 소용돌이였다.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온 소은지는 문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택배를 보고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지음도 그 말을 듣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예쁨을 추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눈가 피부에 뾰루지가 난 것을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치미는데 잔소리 때문에 더 화가 났다.“대체 둘은 언제 이혼한대?”그녀와 강서희의 역할 분담은 매우 명확했다. 한지음은 병원에서 장님 행세를 하며 강이한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강서희는 여론과 감성팔이를 이용해서 유영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원래 예상대로라면 강이한이 유영에게 실망하고 이혼이 일사천리로 진행해야 맞았다.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방향은 그들의 예상을 초월했다.밖에서 유영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그들 사이에도 심각한 감정의 곬이 생겨버렸지만 여전히 이혼한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계속 장님행세하고 싶지 않으면 유영 그 여자의 눈을 멀게 만들어. 그러면 힘들게 붕대 감고 있지 않아도 되잖아.”유영에게서 망막을 빼앗으라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한지음의 표정이 훨씬 편안해졌다.“알았어.”강이한은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었으니 조금만 더 감정을 자극하면 될 것이다.모든 것이 순조롭다면.병원에만 있다 보니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와서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강서희는 확신에 찬 한지음의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런데 넌 왜 그렇게 이유영을 미워하는 거야? 오빠랑 결혼한 뒤로 그 여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서 둘이 접점이 아예 없었을 텐데?”물론 강서희도 유영을 싫어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대 유영은 강이한의 아내로서 흠잡을 곳 하나 없었고 평소에 적을 만드는 성격도 아니었다.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한지음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 궁금했다.질문을 듣자마자 한지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녀는 증오로 번뜩이는 눈을 하고 대답했다.“그냥 미워. 피를 말려 죽이고 싶을 정도로.”그렇게 말하는 한지음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오싹하고 섬뜩했다.하지만 왜 그렇게 증오하게 되었는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지음에게 있어 강서희는 괜찮은 거래 대상이었을 뿐
그러고 보면 강이한은 스캔들이 나기 전까지는 꽤 모범적인 남편이었던 것 같았다.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지 않은 이상은 꼬박꼬박 집에 돌아왔고 술자리가 있다고 해도 밤 열한 시를 넘기지 않았다.그래서 유영도 그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항상 열한 시 전에는 잠을 잤던 것 같았다.그러다가 갑자기 밤을 새우니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삐걱거렸다.휴식실로 들어온 유영은 담요를 몸에 두르고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조민정이 넌지시 말했다.“소은지 씨네 집에서 빨리 나오는 게 좋겠어요.”“알아요.”조민정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이미 소은지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었고 그녀의 생활에도 엄중한 피해를 끼치게 되었다. 3개월 전에 바로 소은지네로 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저쪽에서 끈질기게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강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남자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어?”“돌아간다고 한 적도 없잖아.”“소은지가 언제까지 당신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혼자서 그 많은 여론과 악플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집으로 들어가!”남자가 협박 조로 말했다.아마 소은지네 집으로 택배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하는 얘기 같았다.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3개월 전에 내가 경찰에 신고해서 그 사람들을 다 잡아넣었더니 그들과 합의를 보고 풀어준 사람이 당신이야. 지금 나랑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 또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우길 거야?”“이유영!”“시끄러워. 소리 그만 질러.”유영도 같이 짜증을 냈다.강이한이 그들을 풀어준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걱정해서 전화했을까?그건 아닐 것이다.“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닌 거 알잖아.”남자가 구슬리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조 비서 그쪽으로 보낼게.”“나 지금 회사에서 야근 중이야.
여직원은 바로 유영을 안으로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끓여 대접했다.“이거라도 마시고 몸 좀 녹여요.”“감사해요.”유영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조민정의 차를 타고 미리 왔는데 임시로 일이 생겨 조민정 먼저 가버리고 그녀만 남아서 기다리게 된 것이다.오래 기다린 건 아닌데 너무 얇게 입고 온 탓인지 추위에 온몸이 떨렸다.강이한과 함께 생활하며 겨울에 바깥 출입이 적어서 밖에 얼마나 추운지 몰라서 생긴 해프닝이었다.유영은 다음에는 꼭 두껍게 입고 나와야겠다며 스스로 다짐했다.“사실 이렇게 일찍 올 필요가 없어요. 대표님은 아홉 시 다 돼서 나오시거든요. 가끔 일정이 틀어지면 더 늦어질 때도 있어요.”“쿨럭!”차를 마시고 있던 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기침했다.“괜찮으세요?”직원이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 괜찮아요.”그녀가 기억하는 기업인들은 아주 일찍 출근했다. 강이한은 매일 아침 여덟 시 전에 집에서 출발하고는 했다.그래서 그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강성건설 대표가 아홉 시가 넘어서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와 결혼한 여자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한 시간 정도 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박연준은 여덟 시 반이 되어 회사로 나왔다. 상사를 마주한 여직원은 바로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대표님, 나오셨어요?”“이유영 씨?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박연준의 뒤를 따르던 문 비서가 그녀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유영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박연준은 서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냉랭한 분위기에 유영은 준비했던 멘트조차 잊어버리고 우물쭈물했다.조금 전까지 그와 결혼한 여자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표정을 보니 생각이 바뀔 것 같았다.너무 진지하고 냉랭해서 평소에도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유영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유영 씨? 이유
잠시 후, 유영은 다시 대표사무실을 찾았다.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전에 강이한이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많이 봤기에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다.물론 박 대표와는 직장 상사와 직원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첫 거래부터 퇴짜를 놓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았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설계 도안을 한페이지씩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유영의 숨결도 같이 거칠어졌다.역시 안 되는 건가?그런데 한참 도면을 뜯어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그려줬네요. 아마 어제 내가 이유영 씨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저… 정말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에서 큰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제 자신이 그에게 남긴 첫인상이 영 별로였다는 얘기로 들렸다.“밤새 고민을 많이 한 티가 나요. 하지만 일부 디테일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하겠네요.”“말씀해 주신대로 수정할게요!”유영은 희망적인 박연준의 답변에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대체적으로 서늘한 분위기를 주는 인상이지만 그 잘생김은 어딜 가지 않았다. 그는 꽤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유영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 그가 지적했던 부분을 메모에 적기 시작했다.너무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오히려 박연준이 지적하기 미안해질 정도였다.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신속히 수정해야 할 부분을 빨간색 펜으로 체크한 뒤, 그녀에게 건넸다.“여기 체크한 부분이 좀 별로네요. 전반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은데 디테일한 부분에서 점수를 깎아먹는 느낌이에요.”유영은 도면을 받아 다시 살폈다.박연준은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녀가 놓쳤던 디테일을 하나하나 지적해냈다.‘역시 큰일을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할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 아니죠?”“네, 그럴 필요까지
아침부터 유영을 강성건설로 보낸 이유도 여기 있었다.디자인에 참여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문제라 유영이 가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저는 회의하고 올 테니까 유영 씨는 좀 쉬고 있어요.”유영은 긴장이 확 풀리자 지친 기색이 확 드러났다.“알겠어요.”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온갖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세강의 디자인 팀은 업계 최고 엘리트들만 모아놨다고 평가 받고 있는데 그런 그들마저 오너의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 구상이 보이지 않았다.이때, 조형욱이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사무실을 찾았다.“사모님은 스튜디오에 취직한 게 아니라 스스로 스튜디오를 창설하셨더라고요.”강이한의 두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그가 너무 아내를 얕잡아보았던 걸까?“그럼 모든 회사에 공개 입장을 보내서 그쪽 스튜디오에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최근 보여준 그녀의 행보를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그의 가족들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집에서 나간 뒤로 그와 완전히 선을 긋겠다는 그 당돌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10년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허무했었나?그는 한 번도 자신과 유영 사이에 이토록 깊은 감정의 곬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회사는 괜찮은데 강성건설 쪽은 그런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 같네요.”조형욱이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표명했다.박연준!강이한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학교 때부터 그의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회사의 오너가 된 시기도 비슷하고 두 회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물밑 경쟁을 치러왔다.동교 신도시 프로젝트의 입찰에 참여한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번에도 사실 상 세강과 강성의 경쟁이었다.그리고 그의 아내인 유영이 박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여론이 또 어떻게 떠들어댈지 훤히 보였다.강이한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그의 주변으로 섬뜩한 살기가 요동치고 있었다.“박연준 쪽은 일단 신경 쓰지 마.
이어지는 이틀 간, 유영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강성건설 근처의 커피숍으로 가서 작업하기로 했다. 조민정은 호기롭게 커피숍 전체를 이틀 간 세내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팀원들에게 조용하고 안정적인 작업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이번 수정만 제대로 끝나면 유영은 최종 도면을 가지고 강성건설을 방문할 예정이었다.만약 또 수정할 부분이 생기면 커피숍이 근처라 바로 돌아와서 수정하기도 편리했다.처음 도면을 가지고 방문했을 때, 유영은 박연준이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정 횟수가 반복되면서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전보다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여기랑 여기도 수정해 주세요.”남자가 설계 도면을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유영은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오늘 밤이 아마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내일 아침까지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지 못한다면 강성과의 계약은 물 건너 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랬기에 더욱 간절했다.강이한이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 일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유영이 커피숍으로 돌아가자 팀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조민정조차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시 수정하라고 하네요.”유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리로 돌아갔다.조민정이 다가와서 말했다.“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새로 생긴 팀이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성장할 수 있어요.”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시작 자체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역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여기부터 수정하죠.”유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는 지금 머리가 지끈거리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상대는 강성건설이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조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회의를 소집하고 함께 수정해야 할 부분을 짚어나갔다.직장 경험이 부족한 유영은 번번이 퇴짜를 맞는 상황이 오자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하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