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뭘 들은 거지?너무 화가 나서 환각이 들린 게 틀림없었다.그는 유영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면서 만족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젠장! 정말 미쳤네!”잘 달래서 홍문동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아무리 생각해도 한지음 일 때문에 그녀가 성질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예전처럼 생각할 시간만 주면 알아서 다가와줄 줄 알았다.이제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망막 기증에 관한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건물을 나오자 조민정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객을 만나러 가는 길, 잠시 고민하던 유영이 말했다.“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 인간이 방해를 놓지 않을까요?”청하시에서 강이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유영이 가장 잘 알았다.로펌의 최고 에이스인 소은지마저 퇴사를 시킬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지금도 그들의 싸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러다가 새로 생긴 사무실마저 영향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조민정이 말했다.“회장님도 그 부분을 걱정하셔서 유영 씨에게 주는 의뢰는 전부 회장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들로만 선별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그분들도 저와 외삼촌의 관계에 대해 안다는 얘기예요?”“그건 아니고 회장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잘 부탁한다고 미리 말씀하셨을 거예요.”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최근 그녀와 정국진의 스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상황에서 그런 연락을 받고 의뢰인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기업과 기업 사이에 얽힌 것도 많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한의 귀까지 들어간다고 봐야 했다.그렇게 된다면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고객 미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들은 그녀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기로 했다.그런데 다음 날 만나기로 예정된 고객은 만만치 않았다.청하시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가 세강타워라는 강이한의
“들어보니 그렇네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사무실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큰 계약이니 만큼, 그녀는 신뢰를 보여줘야 했다.그녀는 속으로 예상 질문을 복기하며 어떻게 대화를 끌어나갈지 집중해서 생각했다.엘리베이터를 나선 유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만큼 큰 회사라는 것이 느껴졌다.“긴장 풀어요.”“네.”유영은 여전히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을 본 비서실 직원이 공손히 인사했다.“일단은 손님 접대실로 가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은 지금 회의 들어가셨습니다.”“네.”두 사람은 함께 직원을 따라 접대실로 갔다.비서가 차를 내왔다. 그러는 모습조차 평소에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대기업 출근 경험이 없는 유영이었지만 강이한의 회사에서 직원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었다.어제 만났던 고객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위기와 품위가 느껴졌다.잠시 후, 접대실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을 착용하고 머리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서늘하면서도 차분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문 비서님, 안녕하세요. 저는 로열 글로벌의 조민정입니다.”“대표님께서는 사무실로 가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네.”자리에서 일어선 유영은 문 비서라는 사람을 따라 안으로 이동했다.남자의 걸음걸이는 차분하고 흔들림 없었다.저런 사람을 부하 직원으로 부린다는 건 대표의 취향도 깐깐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조금 풀렸던 긴장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문 비서가 가볍게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목소리가 참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이게 박 대표에게 느낀 유영의 첫인상이었다.조민정이 말했다.“들어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 비서가 불러세웠다.“이유영 씨만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당황한
유영은 길게 심호흡하고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정중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 스튜디오의 이유영이라고 합니다. 예약하고 대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그녀가 신분을 밝히자 남자의 깐깐한 시성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유영이 바짝 긴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대… 대표님?”“아는 얼굴이군요.”유영은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시군요.”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로 서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앉으시죠.”“네, 그래요.”유영이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소파로 다가가서 앉았다.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190은 넘을 것 같은 훤칠한 신장에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게 됐다.소파로 다가온 남자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유영은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남자에게 건넸다.“이건 전에 제가 그렸던 디자인 초안인데 한번 보시겠어요?”“내려놔요.”존대는 하고 있지만 뭔가 명령 어투가 담긴 말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됐다.유영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았다.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준비한 멘트는 떠오르지 않고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에게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느낌이었다.그녀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남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에 유영이 흠칫했다.남자가 입을 열었다.“기한은 3일입니다.”“네?”“15일에 동교 신도시 개발 입찰이 있습니다. 오늘은 11일이니까 늦어도 14일 전에는 디자인을 끝내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유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기회를 주겠다는 건가?비록 일정이 빠듯했지만 이 남자에게서 디자인 업무를 따냈다는 것 자체가 좋아할만한 일이었다.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3일이면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3일 안에 멋진 디자인으로 이 회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한테 3일 준다고 했어요. 14일 퇴근하기 전까지 설계도를 마무리하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의뢰를 우리한테만 준 것 같지는 않았어요.”“그건 당연하겠죠. 동교 신도시 프로젝트면 청하 시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라고요. 우리만 믿고 일을 추진할 이유는 없어요.”오늘 미팅을 오기 전에 조민정은 이미 강성건설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진행했고 대략 어떤 의뢰를 맡게 될지 예측한 바가 있었다.하지만 느닷없이 동교 프로젝트를 내어줄 줄은 몰랐다.“많이 바빠질 것 같네요.”“네. 그래서 일단은 현장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유영이 말했다.어쨌든 건설 현장을 가봐야 대략적인 방향이 잡힐 것 같았다.동교로 이동하는 중에 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진영숙,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본가의 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였다.“받아봐요.”조민정이 말했다.“계속 이런 식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고객들의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유영은 그제야 자신은 이미 전직 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이제 그녀는 업무 상으로도 연락을 많이 주고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어제 두 명의 고객을 만나본 뒤로 그쪽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해야 한다며 벌써 네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진 여사님께서 어쩐 일이시죠?”“뭐라? 진 여사?”새로운 호칭에 당황한 건 진영숙이었다.“아직 이혼도 하기 전인데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싫다는 거야, 뭐야? 그 아비 뻘 되는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유영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세강과는 상관없는 일이죠. 바라던 바 아닌가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이혼한다고 하더라도 내 아들이 널 버린 게 되어야 해. 넌 먼저 이혼을 말할 자격이 없어.”“어쨌든 제가 먼저 이혼을 얘기했고 여사님께서 그게 불만이시라면 당장 소송을 철회할게요. 아드님한테 다시 소송을 제기하라고 설득해 보시겠어요?
그쪽에서 감정을 앞세워 그녀를 가해자로 몰고 간다면 그녀는 있는 사실을 토대로 반격할 것이다.“알겠어요. 제게 맡겨요.”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정국진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유영이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걱정스러웠는데 지금 보니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유영은 외부의 비난과 선동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조민정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폭력의 가해자, 세강의 안주인, 사과 거부. 권력자들의 갑질은 어디까지….’왜 진영숙이 유영을 본가로 불렀는지 기사를 보고 알 것 같았다.“정말 시끄럽게 떠들어대네.”유영이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제대로 반격하지 않으면 그들의 횡포는 점점 선을 넘을 것이다.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쯤 파리면 잠자는 시간일 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유영아.”“죄송해요. 주무시는데 깨웠죠?”유영이 미안한 어투로 말했다.비록 모든 걸 무시로 일관하기로 했지만 기사에 한번씩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가슴이 옥죄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괜찮으니까 어서 말해봐.”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할 일도 없다는 걸 알기에 정국진은 여전히 자상한 목소리로 달래주듯 말했다.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강이한이 악플러들과 합의해 줬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지음쪽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한지음 납치범들을 빨리 찾고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요.”이 사건은 길게 끌수록 유영에게 불리했다.강이한이 이렇게 그녀를 공격하는 이유도 한지음이 두 다리와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몰아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랑에 눈이 멀었단 걸까?하지만 진짜 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절대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래, 알았어. 내가 알아보마.”정국진이 말했다.그가 나서기로 한 이상 이 일은 별 차질 없이 마무리될
한지음이 강이한을 좋아한다는 건 뉴스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랬다면 강이한을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진영숙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나간 거야?”“이유영이 사과를 거부하고 있으니까.”강서희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다시 뒷목을 잡았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유영이 앞에 있었으면 머리카락이라도 쥐여뜯고 싶었다.“그런 악랄한 짓을 해놓고 망막을 기증해 줘도 모자랄 판에 사과를 거부해?”진영식이 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욕설을 뱉었다.대체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는데 사과를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강서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계속 저렇게 나오면 한지음도 증거를 경찰에 넘기겠다고 했어.”“이런 망할 년!”진영숙이 발을 동동 굴렀다.이미 온갖 기사와 억측이 난무하는 상황에 세강의 이미지는 날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유영이 감옥에라도 간다면 세강에게도 큰 타격이 될 것이다.생각할수록 분했다.결국 진영숙은 다시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본가로 와.”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유영이 사과하고 이 사건을 무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시어머니라면 자다가도 벌벌 떨던 유영이 차갑게 대꾸했다.“바빠요.”“네가 바쁠 게 뭐가 있어? 너 우리 집에 시집온 뒤로 놀고 먹기만 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어디서 거짓말이야?”하지만 전화는 끊어졌고 시끄러운 알림음만 들려올 뿐이었다.진영숙은 부잣집 사모님의 품위는 이미 포기했는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정말 날이 갈수록 건방져지는구나!”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더 부추겼다.“오빠도 문제야. 이혼하지 않을 거면 마누라 관리는 똑바로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오빠가 데리고 가서 사과하면 다 끝날 일을 왜 여태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거야?”물론 강서희는 유영이 끝까지 사과는 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 유영과 강이한의 유대감을 끊어버리려는
그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파헤쳐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는 없었다.“이미 주요 언론사에 언질을 주었습니다.”그의 일 처리 스타일을 알기에 조형욱은 뉴스를 보자마자 바로 언론사에 연락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고 확인해 보니 본가의 전화번호였다.강이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각 회사에 연락해서 이유영에게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 어기는 회사는 우리와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그녀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면 그에게도 방법이 있었다.일을 해서 스스로 생활비를 벌겠다고?그렇다면 그 희망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조형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았다.사모님을 업계에서 매장시킬 의도란 말인가? 벌써부터 그들이 싸우는 장면이 떠올랐다.강이한이 보기에 유영은 확실히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평소에도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시간을 두고 냉각기를 거치면 오히려 다가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민 쪽은 항상 유영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여론에서 떠드는 그와 한지음의 관계를 그대로 믿어서인지 여자는 점점 더 도를 넘고 있었다.그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자신을 떠나면 독립할 기회도 없다는 현실을 그녀에게 깨우쳐주고 싶었다.해외에서 그녀와 바람을 피운 그 남자를 해결하는 건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될 일이고 그가 원하는 건 유영의 복귀였다.본가에서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왔기에 강이한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요?”불쾌감이 잔뜩 드러나는 말투였다.진영숙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유영이 고년 때문에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어!”강이한이 말이 없자 진영숙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당장 유영이 시켜서 한지음한테 사과하라고 해.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게 다 네가 걔를 너무 오냐오냐 해서 그래!”“대체 얼마나 오
계약 해지를 통보하더라도 디자인 도면을 보고 불만족한 상황에 해지해야 맞다. 하지만 아직 디자인 초안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해지를 통보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말했다.“죄송해요, 이유영 씨. 계약 당시에는 유영 씨가 세강의 사모님인 줄 모르고 계약했어요. 그렇게 높으신 분인 줄 알았으면 저희도 안 썼죠.”“일단 그쪽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상대 측에서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는 건 강이한 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일하는 것을 반대하더니 이제는 그녀와 함께 일하려는 회사까지 찾아가서 훼방을 놓았다.전화를 끊고 유영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조민정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요. 우리한테는 의뢰가 넘쳐나니까요.”자신감 넘치는 말에 유영은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강이한이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나선다면 앞으로 고난이 예상될 텐데도 조민정은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그렇기 때문에 강성건설과의 계약은 무조건 따내야 했다. 그나마 강성건설은 세강과 세력이 비등비등하기에 그쪽의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규모가 작은 회사라면 강이한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지만 오늘 만난 박 대표란 사람은 그런 장난에 휘둘릴 사람 같지 않았다.“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유영이 말이 없자 조민정이 물었다.“박 대표님은 누구 눈치 보면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겠죠?”그녀는 우려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조민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몰랐어요?”“뭐를요?”“박 대표님과 세강은 원래부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번 의뢰는 우리 실력만 보고 판단할 거예요.”예전에 강이한과 박 대표가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건 다행이네요.”상황이 확실해지자 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남은 건 더 열심히 해서 전에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박 대표의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는 일만 남았다.강성과 거래를 트게 된다면 다른 건
결국 이유영은 엔데스 신우와 마주 앉았고 정적 속에 무언의 압박이 흐르고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며 이유영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셋째 도련님께서는 원하시는 게 뭔가요?”계속해서 현금으로만 결제를 요구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파리로 돌아오기 전 그녀가 접한 소식으로 봤을 때, 파리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심지어 박연준과의 결혼도 결국 파리와 얽혀 있었다.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는 영리하니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죠?”“셋째 도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 역시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 남자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차갑고 위험한 미소였다.심장은 이미 터질 듯 뛰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아가씨와 박연준의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무슨 의미든 간에, 저는 그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긴장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그 말을 듣고 엔데스 신우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의 조롱이 섞인 웃음소리에 이미 굳어 있던 이유영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정씨 가문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과 어떤 협력도, 관계도 맺지 않았는지 알고 있나요?”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의 아버지 정국진은 언제나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는 사실뿐이었다.솔직히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정국진이 엔데스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피해 왔고 엔데스 가문은 그동안 언제나 중립을 유지해 왔다.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지닌 듯, 이유영을 강하게 짓눌렀다.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을 지울 수 없
이유영이 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호적에 적힌 이름은 ‘정유영’으로 바뀌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유영’ 혹은 ‘유영’이라 불렀다.집사가 단호하게 ‘정씨 가문 아가씨’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뒤에 거대한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음을 실감했다.가족이 있다는 건 곧 얽매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이유영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그래도 안에 누가 기다리는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집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씨 가문 아가씨께서 직접 오셨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셔서요.”그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고 이유영의 마음속 의심은 점점 커졌다.그날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은 틀림없이 엔데스 가문의 전설적인 셋째 도련님, 엔데스 신우였다.소문에는 ‘바보’로 불렸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낮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요.”“아가씨.”“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사람들 저한테 감히 어쩌지 못할 거예요.”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엔데스 가문의 누구도 지금 그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지혁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밖에서 볼 때도 건물의 웅장함이 느껴졌지만 내부는 더 압도적이었다. 곳곳에 스며든 고급스러운 디테일과 섬세한 감각이 주인의 까다로운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대형 홀을 지나 집사는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그제야 이유영은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길고 긴 테이블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맑고 고고한 분위기는 첫눈에 보아도 비범한 존재감이었다.그런 아우라는 절대 ‘바보’라 불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셋째 도련님, 정씨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었던 이유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한 번 도망쳐 봐.”비서는 순간 움찔했다.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은 로열 글로벌의 것이었고 그녀는 로열 글로벌의 전 대표님이었기에 서주에서 살아남으려면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두 시간 후, 비서와 지혁이 돈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오자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거기 경비원들이 바로 내쫓았어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유영은 혼란스러웠다.“윙!”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내일까지 안 오면 변호사가 찾아갈 거야.]‘협박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차 수리비는 물론이고 직접 사과까지 하라는 건가?’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런 일일수록 더 읽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아직 더블루 리버스에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빨리 사과하고 이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통화하다가 부딪혔으니 명백한 본인 불찰로 생긴 사고였고 CCTV에도 찍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곧 답장이 왔다.[네.]아직 그곳에 있다면 된 것이다. 이유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지혁 씨.”“네, 아가씨.”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지혁이 이유영 앞으로 다가갔다.“저랑 같이 가요.”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지혁과 함께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유영은 코트를 걸치며 돈을 지혁에게 건넸고 돈을 건네받은 지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오늘 일정으로 바쁜 하루였지만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30분 후에 더블루 리버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경비원들이 막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들이 온다는
“바래다줬어?”“네.”“서재욱은 아직도 거기 살아?”“네.”말이 떨어지자 박연준은 온몸에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그의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기원의 심장은 긴장감에 조여들었다.박연준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문기원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지금 나온 기사는 다 찌라시잖아요.”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박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문기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재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모습 한 장면만이 가득했다.“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는 게 어떻습니까?”문기원은 신중하게 조언했다.오늘 이유영이 서재욱을 만난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퍼졌다.이건 누군가가 분명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게 누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혹시 엔데스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재욱을 끌어들이려는 걸까?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연준은 그저 단호하게 문기원에게 말했다.“너 먼저 들어가.”그 순간 그가 얼마나 큰 힘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문기원은 알 수 있었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시간 박연준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상, 지금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면 오늘 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그날 밤, 이유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래라면 내일 서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미뤘다.아침 식탁.“월이야, 빨리 먹어.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어제 엄마가 말했지, 늦으면 안 된다고.”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월이에게 말했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집에 없는 관계로 이유영이 월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은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
마음이 이 정도로 깊지 않았다면 감정을 이렇게까지 억누를 수 있었을까?박연준은 아마도 과거 연서에게조차 이렇게까지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을 것이다.강이한이 마지막 순간 이유영을 놓아주면서도 박연준과 그녀 사이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이 이유였을 것이다.지금 보니, 박연준은 언제나 진심이었다.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였기에 오늘 밤 벌어진 모든 일이 이토록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내일 가도 되잖아.”박연준은 돌아서며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는 동안 감정을 철저히 억눌렀지만 결국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끝없는 아픔뿐이었다.“그 여자는?”진영숙을 말하는 것이었다.박연준은 순간 미세하게 움찔했고 그 반응을 본 이유영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띠었다.“흥!”진영숙과 이유영이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너와 그 여자가 또 어떤 거래를 했을지 누가 알아.”그녀는 한 발 다가가며 비꼬듯 물었다. 강이한의 어머니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묘하게 신경 쓰였다.진영숙을 대하던 태도가 나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며 박연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박연준은 잠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딱 하루만이야.”“넌 내가 그 여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이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과거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강이한을 위해 모든 건 참아내면서조차 강씨 집안에 머문 적은 없었다.신분과 지위가 아무리 다르고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이유영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돼.”“뭐라고?”이건 어제부터 박연준이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지 이유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과거의 일들이 떠오르자 이유영은 다시 진영숙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박연준의 말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남자의 시선이 이유영에게 고정되었다.이 지경이
그런 말은 원래 박연준의 입에서 나올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그가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자라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이가 침범하는 것을 참지 못할 테니까.“강이한과 한지음은 불륜이었어. 재욱 씨는 연우 씨에게 분명히 이야기할 거야. 어떻게 같아?”강이한은 한지음과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키면서도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프고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서재욱과 이유영 사이에는 애초에 그런 감정이 없었기에 그녀는 더욱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박연준의 말은 아무런 책임감 없는 터무니없는 말이었다.박연준은 숨이 막힐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평생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순간은 보통 강이한에게서 많이 봤었다. 강이한은 박연준의 공격과 복수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분노하곤 했다.그리고 지금, 이유영은 그 모든 것을 박연준에게 되돌려주고 있었다.“너...”박연준은 이유영의 무심한 태도를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생각한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그 사람 만나지 마. 유영아, 내가 억지로 조치 취하게 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무겁고도 위험했다.박연준의 말 속에 담긴 위협을 이유영은 단번에 알아채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 그러면 어쩔 건데?”아무도 박연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 이유영은 그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그가 다시 이유영을 바라볼 때, 그의 눈빛에는 끝없는 위험이 서려 있었다.“내가 뭘 할 것 같아?”10년 동안 한 사람을 계략적으로 속일 수 있었던 남자였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날 협박하는 거야?”“난 그럴 생각이 없어.”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파리에 돌아온 이후, 이유영의 행동은
그때의 박연준은 결코 이런 상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서재욱이야?”박연준은 분노를 억누르며 쏘아붙였다.“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서재욱은 좋은 사람이잖아.”좋은 사람? 그녀의 태도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었다.그녀의 말에 박연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좋은 사람은 서재욱을 두고 하는 말인가? 정말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그 사람을 믿는 거야?”마치 이빨 사이로 힘겹게 짜내듯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거칠었다.이유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너희들보다 훨씬 믿음직한 사람이야.”이유영의 눈에는 서재욱이 박연준이나 강이한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적어도 10년 동안이나 한 사람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런 말을 주저 없이 내뱉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이것이 바로 강이한이 말한, 그들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는 진짜 의미였을까? 그렇다면 그에게 미래란 존재하는 걸까? 그녀는 정말 단 한 조각의 마음도 남기지 않은 걸까?“서재욱 비서가 임신한 건 알아? 그의 아이라고!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예전 같았으면 박연준의 입에서 절대 나올 리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쓰레기라고? 단지 서재욱에게서 이유영을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건가?“알아.”“뭐?”“그 애를 지우고 나에게 좋은 미래를 약속했어. 안 될 이유라도 있어?”박연준이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충격을 주려는 거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 판은 이유영이 이겼다.박연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유영은 오랜만에 묘한 통쾌함을 맛보았다.사람들은 말한다. 감정이란 더 많이 신경 쓰는 쪽이 지는 거라고. 예전에 강이한 앞에서 언제나 졌던 것처럼.하지만 지금의 이유영은 이런 일에 진심을 다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꼭 서재욱과 함께해야겠다는 거지?”박연준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는 항상
이유영은 몽롱한 상태로 박연준에게 이끌려 파리 타워를 나섰다.차에 오르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과 날 선 분위기가 온몸을 감쌌고 운전석에는 문기원이 앉아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직접 운전했다면 차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속도로 내달렸을 것이다.문기원조차도 그의 음산한 기류를 감지한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왜 하필 그 사람과 함께 있었어?”한참을 침묵하던 박연준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고 이유영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왜, 안 돼?”“이유영!”그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음산한 기운이 차 안을 더욱 짙게 뒤덮었고 문기원의 손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며 핸들이 살짝 틀어져 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이유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비웃듯 물었다.“설마 우리 진짜 결혼한 사이로 생각했던 거야?”박연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어두웠던 눈빛이 한층 더 깊은 먹구름으로 가려졌다.“어이가 없군.”이유영은 냉소를 띠며 웃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이유영의 태도에 좁은 차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성냥이 켜졌다.“치익.”박연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거칠게 몇 모금 빨아들였다.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담배 연기로 짙어졌고 살짝 내려진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와 연기를 천천히 흩어놓았다.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에게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고 이 이야기만 나오면 박연준은 언제나 격렬하게 반응했다.서재욱이 파자마 차림으로 문을 열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에 어떤 격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의 모든 이성이 무너져 내렸었다.차가 풍산 그룹에 거의 다다를 즈음, 박연준이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이유영,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목소리에는 한계에 다다른 감정이 묻어 있었다.“왜?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못 참겠어?”그렇다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