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뭘 들은 거지?너무 화가 나서 환각이 들린 게 틀림없었다.그는 유영의 삶을 풍족하게 해주면서 만족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니었다고 말한다.“젠장! 정말 미쳤네!”잘 달래서 홍문동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아무리 생각해도 한지음 일 때문에 그녀가 성질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예전처럼 생각할 시간만 주면 알아서 다가와줄 줄 알았다.이제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망막 기증에 관한 얘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건물을 나오자 조민정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객을 만나러 가는 길, 잠시 고민하던 유영이 말했다.“지금 하고 있는 일도 그 인간이 방해를 놓지 않을까요?”청하시에서 강이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유영이 가장 잘 알았다.로펌의 최고 에이스인 소은지마저 퇴사를 시킬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지금도 그들의 싸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이러다가 새로 생긴 사무실마저 영향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조민정이 말했다.“회장님도 그 부분을 걱정하셔서 유영 씨에게 주는 의뢰는 전부 회장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들로만 선별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그분들도 저와 외삼촌의 관계에 대해 안다는 얘기예요?”“그건 아니고 회장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잘 부탁한다고 미리 말씀하셨을 거예요.”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최근 그녀와 정국진의 스캔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상황에서 그런 연락을 받고 의뢰인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기업과 기업 사이에 얽힌 것도 많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이한의 귀까지 들어간다고 봐야 했다.그렇게 된다면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고객 미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들은 그녀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기로 했다.그런데 다음 날 만나기로 예정된 고객은 만만치 않았다.청하시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가 세강타워라는 강이한의
“들어보니 그렇네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사무실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큰 계약이니 만큼, 그녀는 신뢰를 보여줘야 했다.그녀는 속으로 예상 질문을 복기하며 어떻게 대화를 끌어나갈지 집중해서 생각했다.엘리베이터를 나선 유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강이한의 회사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만큼 큰 회사라는 것이 느껴졌다.“긴장 풀어요.”“네.”유영은 여전히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을 본 비서실 직원이 공손히 인사했다.“일단은 손님 접대실로 가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은 지금 회의 들어가셨습니다.”“네.”두 사람은 함께 직원을 따라 접대실로 갔다.비서가 차를 내왔다. 그러는 모습조차 평소에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대기업 출근 경험이 없는 유영이었지만 강이한의 회사에서 직원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었다.어제 만났던 고객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위기와 품위가 느껴졌다.잠시 후, 접대실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을 착용하고 머리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서늘하면서도 차분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문 비서님, 안녕하세요. 저는 로열 글로벌의 조민정입니다.”“대표님께서는 사무실로 가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네.”자리에서 일어선 유영은 문 비서라는 사람을 따라 안으로 이동했다.남자의 걸음걸이는 차분하고 흔들림 없었다.저런 사람을 부하 직원으로 부린다는 건 대표의 취향도 깐깐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의미했다.조금 풀렸던 긴장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문 비서가 가볍게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목소리가 참 매력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이게 박 대표에게 느낀 유영의 첫인상이었다.조민정이 말했다.“들어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 비서가 불러세웠다.“이유영 씨만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당황한
유영은 길게 심호흡하고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정중하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 스튜디오의 이유영이라고 합니다. 예약하고 대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그녀가 신분을 밝히자 남자의 깐깐한 시성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유영이 바짝 긴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대… 대표님?”“아는 얼굴이군요.”유영은 뜻을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시군요.”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로 서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앉으시죠.”“네, 그래요.”유영이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소파로 다가가서 앉았다.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190은 넘을 것 같은 훤칠한 신장에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게 됐다.소파로 다가온 남자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유영은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남자에게 건넸다.“이건 전에 제가 그렸던 디자인 초안인데 한번 보시겠어요?”“내려놔요.”존대는 하고 있지만 뭔가 명령 어투가 담긴 말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됐다.유영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았다.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준비한 멘트는 떠오르지 않고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에게서 풍기는 강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느낌이었다.그녀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남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에 유영이 흠칫했다.남자가 입을 열었다.“기한은 3일입니다.”“네?”“15일에 동교 신도시 개발 입찰이 있습니다. 오늘은 11일이니까 늦어도 14일 전에는 디자인을 끝내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유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기회를 주겠다는 건가?비록 일정이 빠듯했지만 이 남자에게서 디자인 업무를 따냈다는 것 자체가 좋아할만한 일이었다.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3일이면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3일 안에 멋진 디자인으로 이 회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한테 3일 준다고 했어요. 14일 퇴근하기 전까지 설계도를 마무리하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의뢰를 우리한테만 준 것 같지는 않았어요.”“그건 당연하겠죠. 동교 신도시 프로젝트면 청하 시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라고요. 우리만 믿고 일을 추진할 이유는 없어요.”오늘 미팅을 오기 전에 조민정은 이미 강성건설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진행했고 대략 어떤 의뢰를 맡게 될지 예측한 바가 있었다.하지만 느닷없이 동교 프로젝트를 내어줄 줄은 몰랐다.“많이 바빠질 것 같네요.”“네. 그래서 일단은 현장을 한번 가보고 싶어요.”유영이 말했다.어쨌든 건설 현장을 가봐야 대략적인 방향이 잡힐 것 같았다.동교로 이동하는 중에 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진영숙,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본가의 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였다.“받아봐요.”조민정이 말했다.“계속 이런 식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고객들의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유영은 그제야 자신은 이미 전직 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이제 그녀는 업무 상으로도 연락을 많이 주고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어제 두 명의 고객을 만나본 뒤로 그쪽에서 세부 사항을 조율해야 한다며 벌써 네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진 여사님께서 어쩐 일이시죠?”“뭐라? 진 여사?”새로운 호칭에 당황한 건 진영숙이었다.“아직 이혼도 하기 전인데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싫다는 거야, 뭐야? 그 아비 뻘 되는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유영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는 싸늘한 말투로 대꾸했다.“세강과는 상관없는 일이죠. 바라던 바 아닌가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이혼한다고 하더라도 내 아들이 널 버린 게 되어야 해. 넌 먼저 이혼을 말할 자격이 없어.”“어쨌든 제가 먼저 이혼을 얘기했고 여사님께서 그게 불만이시라면 당장 소송을 철회할게요. 아드님한테 다시 소송을 제기하라고 설득해 보시겠어요?
그쪽에서 감정을 앞세워 그녀를 가해자로 몰고 간다면 그녀는 있는 사실을 토대로 반격할 것이다.“알겠어요. 제게 맡겨요.”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정국진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유영이 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걱정스러웠는데 지금 보니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유영은 외부의 비난과 선동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조민정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폭력의 가해자, 세강의 안주인, 사과 거부. 권력자들의 갑질은 어디까지….’왜 진영숙이 유영을 본가로 불렀는지 기사를 보고 알 것 같았다.“정말 시끄럽게 떠들어대네.”유영이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제대로 반격하지 않으면 그들의 횡포는 점점 선을 넘을 것이다.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정국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쯤 파리면 잠자는 시간일 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유영아.”“죄송해요. 주무시는데 깨웠죠?”유영이 미안한 어투로 말했다.비록 모든 걸 무시로 일관하기로 했지만 기사에 한번씩 오르락내리락할 때면 가슴이 옥죄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괜찮으니까 어서 말해봐.”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할 일도 없다는 걸 알기에 정국진은 여전히 자상한 목소리로 달래주듯 말했다.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강이한이 악플러들과 합의해 줬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지음쪽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한지음 납치범들을 빨리 찾고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요.”이 사건은 길게 끌수록 유영에게 불리했다.강이한이 이렇게 그녀를 공격하는 이유도 한지음이 두 다리와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몰아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사랑에 눈이 멀었단 걸까?하지만 진짜 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절대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래, 알았어. 내가 알아보마.”정국진이 말했다.그가 나서기로 한 이상 이 일은 별 차질 없이 마무리될
한지음이 강이한을 좋아한다는 건 뉴스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랬다면 강이한을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진영숙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나간 거야?”“이유영이 사과를 거부하고 있으니까.”강서희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다시 뒷목을 잡았다.그녀는 당장이라도 유영이 앞에 있었으면 머리카락이라도 쥐여뜯고 싶었다.“그런 악랄한 짓을 해놓고 망막을 기증해 줘도 모자랄 판에 사과를 거부해?”진영식이 다시 콧김을 내뿜으며 욕설을 뱉었다.대체 피해자가 용서해 준다는데 사과를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강서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계속 저렇게 나오면 한지음도 증거를 경찰에 넘기겠다고 했어.”“이런 망할 년!”진영숙이 발을 동동 굴렀다.이미 온갖 기사와 억측이 난무하는 상황에 세강의 이미지는 날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유영이 감옥에라도 간다면 세강에게도 큰 타격이 될 것이다.생각할수록 분했다.결국 진영숙은 다시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본가로 와.”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유영이 사과하고 이 사건을 무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시어머니라면 자다가도 벌벌 떨던 유영이 차갑게 대꾸했다.“바빠요.”“네가 바쁠 게 뭐가 있어? 너 우리 집에 시집온 뒤로 놀고 먹기만 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어디서 거짓말이야?”하지만 전화는 끊어졌고 시끄러운 알림음만 들려올 뿐이었다.진영숙은 부잣집 사모님의 품위는 이미 포기했는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정말 날이 갈수록 건방져지는구나!”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더 부추겼다.“오빠도 문제야. 이혼하지 않을 거면 마누라 관리는 똑바로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오빠가 데리고 가서 사과하면 다 끝날 일을 왜 여태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끄는 거야?”물론 강서희는 유영이 끝까지 사과는 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 유영과 강이한의 유대감을 끊어버리려는
그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파헤쳐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따위는 없었다.“이미 주요 언론사에 언질을 주었습니다.”그의 일 처리 스타일을 알기에 조형욱은 뉴스를 보자마자 바로 언론사에 연락했다.핸드폰 진동음이 울리고 확인해 보니 본가의 전화번호였다.강이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각 회사에 연락해서 이유영에게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 어기는 회사는 우리와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고.”그녀가 이런 식으로 그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면 그에게도 방법이 있었다.일을 해서 스스로 생활비를 벌겠다고?그렇다면 그 희망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조형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았다.사모님을 업계에서 매장시킬 의도란 말인가? 벌써부터 그들이 싸우는 장면이 떠올랐다.강이한이 보기에 유영은 확실히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평소에도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시간을 두고 냉각기를 거치면 오히려 다가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민 쪽은 항상 유영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여론에서 떠드는 그와 한지음의 관계를 그대로 믿어서인지 여자는 점점 더 도를 넘고 있었다.그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자신을 떠나면 독립할 기회도 없다는 현실을 그녀에게 깨우쳐주고 싶었다.해외에서 그녀와 바람을 피운 그 남자를 해결하는 건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될 일이고 그가 원하는 건 유영의 복귀였다.본가에서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왔기에 강이한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요?”불쾌감이 잔뜩 드러나는 말투였다.진영숙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유영이 고년 때문에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어!”강이한이 말이 없자 진영숙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당장 유영이 시켜서 한지음한테 사과하라고 해.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게 다 네가 걔를 너무 오냐오냐 해서 그래!”“대체 얼마나 오
계약 해지를 통보하더라도 디자인 도면을 보고 불만족한 상황에 해지해야 맞다. 하지만 아직 디자인 초안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해지를 통보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담당자가 말했다.“죄송해요, 이유영 씨. 계약 당시에는 유영 씨가 세강의 사모님인 줄 모르고 계약했어요. 그렇게 높으신 분인 줄 알았으면 저희도 안 썼죠.”“일단 그쪽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상대 측에서 그렇게까지 말을 했다는 건 강이한 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처음부터 그녀가 일하는 것을 반대하더니 이제는 그녀와 함께 일하려는 회사까지 찾아가서 훼방을 놓았다.전화를 끊고 유영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조민정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요. 우리한테는 의뢰가 넘쳐나니까요.”자신감 넘치는 말에 유영은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강이한이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나선다면 앞으로 고난이 예상될 텐데도 조민정은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그렇기 때문에 강성건설과의 계약은 무조건 따내야 했다. 그나마 강성건설은 세강과 세력이 비등비등하기에 그쪽의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규모가 작은 회사라면 강이한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지만 오늘 만난 박 대표란 사람은 그런 장난에 휘둘릴 사람 같지 않았다.“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유영이 말이 없자 조민정이 물었다.“박 대표님은 누구 눈치 보면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겠죠?”그녀는 우려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조민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몰랐어요?”“뭐를요?”“박 대표님과 세강은 원래부터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번 의뢰는 우리 실력만 보고 판단할 거예요.”예전에 강이한과 박 대표가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그건 다행이네요.”상황이 확실해지자 유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남은 건 더 열심히 해서 전에 배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박 대표의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는 일만 남았다.강성과 거래를 트게 된다면 다른 건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
“...”“뭐, 그래도 괜찮아.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까.”“넌 정말 잔인한 여자야!”명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분노로 차 있었다.이것이 바로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은지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잔인한 여자였다. 과거엔 설선비에게, 그리고 지금은 설유나에게...“그래, 나 잔인해.”소은지가 담담히 인정했다.그렇다면 엔데스 명우는 어떤가? 엔터스 가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자랐고 가문의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 건지 알 리가 없었다.그가 망쳐버린 건 단순히 누군가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은지가 잃어버린 건 자신이 온 마음을 쏟아 쟁취해낸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알겠어?”소은지가 가볍게 경고했다.“꺼져!”“...”소은지는 차분한 표정으로 명우를 바라보더니 옷을 단정히 여미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내리기 직전,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돌아보며 말했다.“설유나를 잘 숨겨.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엔데스 명우의 눈빛은 폭풍이 일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좁은 차 안에 차가운 기운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은지... 좋아.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소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배천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소은지는 옷의 주름을 정리하며 배천명에게 위태로운 미소를 던졌다.그리고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은 마치 불태우려는 듯 강렬했다.차 안.배천명은 잠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섯째 도련님.”“설유나는 어때?”엔데스 명우는 설유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소은지의 말처럼 엔데스 명우는 어쩔 수 없이 설유나를 파리 밖으로 내보내 숨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사람이 바
이번 일로 인해 엔터스 회장님이 엔데스 명우를 혐오하게 되더라도 소은지 또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얻어낸 기회마저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이 남자의 차가운 위협에도 소은지는 여전히 태연하고 당당했다. 소은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전혀 상관없어!”“...”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가는지 알아? 잘살아 보겠다고? 우스운 소리 하지 마.”그랬다.‘잘살아 본다’는 말은 소은지의 세계에서는 그저 우스운 농담일 뿐이었다.소은지는 느릿하게 손톱을 살피며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예전에 말하지 않은 건 내 실수였어.”“...”“엔데스 명우, 넌 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망가뜨렸어! 네 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네가 있는 한, 난 한순간도 평온할 수 없어. 내가 죽는다 해도 네 가죽 한 겹은 벗기고 갈 거야!”소은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명우의 눈빛은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다.남자의 손아귀는 점점 강해졌고 소은지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소은지는 목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당장 날 죽여봐. 장담하건대, 내일이면 넌 파리에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지금은 엔터스 가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파리를 떠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고 눈빛은 더욱 잔혹해졌다.소은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도발적인 웃음이 가득했고 그 도발은 처음 조은지를 곁에 둔 순간부터 계속되어 왔다.무엇이 소은지를 이렇게 끈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를 길들이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어떤 방법을 써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은지가 질식으로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 명우는 소은지를 세게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