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이 병원을 나왔을 때는 이미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앞뒤로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병원에서 시간을 꽤 오래 끌었던 탓이다.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소은지에게 말했다.“미안해, 많이 기다렸지?”“됐다. 나한테 그런 말하지 마.”소은지는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친구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그녀는 무조건 이 소송을 이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러다가 저 여린 친구의 신변 안전에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됐다.강이한의 주변에는 전부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유영이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안 봐도 눈에 뻔했다.그들은 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조작된 증거 이야기를 들은 순간, 소은지는 유영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날 밤, 유영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였다.한지음의 두 눈이 감염되어 긴박한 치료가 진행 중이었다.의사는 감염까지 온 상태라면 빠른 수술 만이 답이라고 했다.수술을 하려면 시망막이 가장 큰 난관인데 조형욱을 시켜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이렇다 할 답은 오지 않았다.그들이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산 사람에게서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시국에 아무리 돈이 급해도 자신의 시력을 담보로 거래를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다음 날, 진영숙은 빨리 퇴원하겠다며 난동을 부렸다.강이한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간곡히 말했다.“의사가 그러는데 아직 3일 정도 병원에서 지켜보는 게 좋다고 했어요.”“됐어. 내 몸은 내가 알아.”말은 그렇게 해도 환자가 의사보다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할 리가 없었다. 괜한 고집이었다.강이한은 바빠 죽겠는데 여기저기에서 일이 터지자 미쳐버릴 것 같았다.강서희가 물었다.“지음 언니 상황은 어때?”질문은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앞에 진영숙과 강이한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유영을 떠올리자 진영숙은 또 다시 화가 치밀었다.“유영 그 계집애가 이런 악수를 둘 줄 누가 알았겠니? 순하
한편, 못 잔 잠을 보충하고 유영이 느긋하게 침실을 나섰을 때, 소은지는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식탁에는 친구가 남긴 메모가 붙여져 있었다.[아침 준비했으니 데워서 먹어.]용건만 적은 메모임에도 유영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소은지는 여전히 그녀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재벌 사모님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자기도 출근하느라 피곤할 텐데 아침까지 챙겨주다니.그 마음에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아침을 먹고 있는데 외삼촌 정국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네, 외삼촌.”“조민정 씨를 청하에 보냈어. 앞으로는 네가 하려는 일을 도울 거야.”조민정?해외에 3개월 동안 같이 있으며 조민정이 정국진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에게 이 소식은 뜻밖이었다. 이렇게까지 배려해 줄 줄이야.이제는 나가봐야 할 시간이었다.“감사해요, 외삼촌.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고.”“그 인간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지. 내 조카는 놈들이 마구 쥐고 흔들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말이야!”예상치 못했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정국진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과거에는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라서 강이한에게 모든 걸 의지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유영은 꽤 배움이 빠른 사람이었다.취직은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굳이 강이한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스스로 먹고 살 일자리를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강이한의 입장은 달랐다.“내 여자는 생계를 위해 힘들게 일할 필요 없어!”이게 그의 주장이었고 지금은 그 주장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요구였는지 알고 있다.강이한과 결혼한 뒤로 사람들은 그녀가 돈을 보고 그와 결혼했다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그녀를 새장 안에 가둔 사람은 강이한이었다.물론 거기에는 쉽게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유영의 미성숙함도 있었다.진영숙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해 유영을 압박한 것이었다. 유영이 강이한이 쳐준 울타리를 떠나면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한 시간 뒤.유영은 이마에 식은 땀을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전에 강이한 때문에 다쳤던 팔이 결국 또 탈골되었다.“푹 쉬고 조심하셔야 해요. 한번 탈골된 뼈는 재발하기 쉬워요.”의사가 그녀의 팔에 깁스를 해주며 당부했다.유영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강이한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치료가 끝난 뒤, 의사와 간호사는 병실을 나갔다.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유영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강이한이 명령하듯 말했다.“앞으로 운전대 절대 잡지 마.”다행히 경차랑 부딪혀서 최악의 상황을 피했지만 상대 차량이 트럭이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유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대답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그녀가 대답이 없자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내 말 안 들려?”유영은 드디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뭐라?”강이한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모습이 가소로우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그는 숨을 고르고 뭔가 얘기를 꺼내려던 찰나, 조형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말해.”“대표님, 산 사람의 망막을 기증 받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아무리 돈이 궁한 사람이라도 그런 제안을 받을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청하시는 원래 장기 기증이 활성화된 도시가 아닙니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대부분이라 기증 동의를 받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한지음의 망막 이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유영도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됐다.그녀는 조용히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강이한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착잡함, 안타까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유영은 그 배후에 숨은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은 말없이 유영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유심히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이 가물
그는 유영이 모든 것을 꾸몄다고 확신했기에 망막을 되돌려주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핸드폰이 울리며 유영이 상념에서 깨어났다.조민정이었다.“미안해요. 지금 병원이라 오늘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괜찮아요. 이미 알고 있어요.”정유라의 말에 유연이 흠칫 놀랐다. 이렇게 빨리 그쪽까지 소식이 들어갔을 줄이야.역시 괜히 정국진 오른팔이 아니었다. 소식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유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담담한 목소리가 전해졌다.“많이 다쳤어요?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아니에요. 내가 그쪽으로 지금 갈게요.”“그럴 필요는 없어요. 일단 다친 곳 잘 치료하고 이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이제 다 나았어요. 정말 괜찮아요.”유영이 고집스럽게 말했다.정국진까지 나서서 밀어주는데 스스로 더 강해져야 그 도움에 보답할 수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유능한 직원을 보내준 그의 마음에 미안할 지경이었다.파리에서 그토록 잘나가던 조민정을 국내로 불러들였으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가 괜히 시간 낭비하게 할 수 없었다.유영은 고집스럽게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문을 나서는데 마주 오던 강이한과 마주치고 말았다.“어딜 가?”남자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싸늘했다.의사가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외출하겠다는 거지?“나랑 얘기 좀 해.”유영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강이한은 그녀를 압박하여 병실로 다시 들어갔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해.”유영은 병상에 앉고 강이한도 의자를 끌어와서 그녀와 마주하고 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착잡했다.그리고 유영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결국 얘기하려는 건가?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유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수술 말인데….”등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뒤돌아선 그녀의 눈에는 사무치는 증오가 그대로 드러났다.결국 이
그녀에게서 증오를 그도 느꼈다.하지만 이미 결단을 내린 이상 굽힐 수 없었다.“평생 시력을 잃고 살아가게 하지 않을 거야. 일시적인 거야. 한지음 씨는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어. 이번 수술만 무사히 마치면 당신에게 적합한 기증자를 내가 꼭 찾아줄 거야….”짝!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영은 손을 번쩍 들어 남자의 뺨을 때렸다.일시적?어떻게 저런 말을 쉽게 뱉을 수 있을까?유영은 마지막으로 남자를 힐끗 바라보고는 뒤돌아섰다.“난 망막을 기증할 이유 없어. 못 들은 걸로 할게.”말을 마친 그녀는 분노에 치를 떠는 남자를 남겨둔 채, 병실을 나갔다.결국 그에게서 그 말을 듣고 말았다.더 이상 그에게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쓰렸다.10년을 함께해 온 정을 뿌리칠 만큼 그 여자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걸까?아니면 진짜 다른 말 못할 이유가 있었을까?유영은 스스로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강이한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유영은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핸드폰이 울려서 받으니 절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은지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유영아.”“은지야, 너 괜찮은 거지?”강이한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가슴이 철렁했다.강이한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또라이였다. 결국 그 피해가 소은지에게까지 간 걸까?“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넌 집이야?”“나도… 곧 갈 거야.”“가는 길에 장 봐서 갈게. 내가 오늘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기대해.”소은지는 애써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유영의 짐작대로라면 그녀는 아마 로펌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결국… 칼을 빼들었구나!하긴, 그녀에게조차 이렇듯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이 그녀의 주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리는 없었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한참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증오로 가득한 눈동자에 물기가 돌았고 투명하고 광 나던 피부는
단순히 협박에서 끝났다면 이렇게까지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유영은 어떤 말로 지금 기분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삼갔다.강이한을 죽여 버리고 싶을 마큼 증오가 차올랐다. 과거에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던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은지야, 넌 이제 내 일에서 손을 떼.”“바보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너 도와주겠어?”소은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걱정 마. 이미 컨택이 온 로펌이 있어. 곧 새로운 로펌으로 옮길 거야. 소송은 끝까지 내가 책임질게.”소은지에게 유영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친구였다.지금 안 도와주면 강이한 옆에서 또 무슨 꼴을 당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손등에 무언가가 툭툭 떨어졌다.그것은 유영의 눈물이었다.“뭐야? 고작 이런 거로 감동했어? 그 눈물 닦아두고 너 스스로 일어서. 그 인간들에게 우리 유영이가 남자한테만 기대는 못난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풉….”슬픔에 잠겼던 유영은 마치 웃어른처럼 자신을 가르치는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 거봐. 웃으니까 예쁘잖아. 남자 하나 때문에 눈물 흘리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야.”“그럼!”유영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그와의 10년이 아까워서 눈물을 흘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소은정은 유영을 끌고 거실로 가서 앉았다.사실 직접 요리를 할 기분은 아니었기에 배달을 시켰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은지는 깁스를 하고 있는 유영의 팔을 보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별거 아니야.”“빨리 말해!”소은지가 정색하며 말했다.유영은 다가온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강이한 때문이지 뭐. 네가 로펌에서 잘린 것도 그 인간이 한 짓이고.”“그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유영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이미 알고 있었어?”“뻔하잖아. 너랑 소송하기 싫으니까 로펌에 수를 써서 날 내치게 한 거지.”소은지는 이혼
유영은 최근 해외에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소은지에게 얘기해 주었고 소은지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그리고 막장 드라마를 봤을 때나 짓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변호사 일로 바쁜 몸이지만 일이 없을 때 소설을 보는 게 소은지의 취미였다.그리고 유영이 겪은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소설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외삼촌이라고?”“맞아. 해외 언론에 보도된 사진에서 나랑 같이 있었던 분은 내 외삼촌이야.”“강이한은 그걸 모르고 그 난리를 피운 거고?”“알았으면 파리까지 찾아가서 외삼촌한테 달려들지는 않았겠지.”“왜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오해가 이대로 쌓이는 건 너한테도 불리할 텐데?”“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해야 이혼을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만약 이런 오해로 그 사람이 이혼할 결심을 내린다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소은지에게도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믿기지 않았다.유영도 마찬가지였다.지난 생의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하늘이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서 없던 외삼촌을 보내준 걸까?그래도 지난 생처럼 신변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그때는 강이한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를 잃으면 세상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강이한한테 배신을 당해서 안타까워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대단한 외삼촌이 나타났으니 내 도움도 필요 없겠네?”소은지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로열 글로벌, 우리 로펌에서 금융 소송 전담인 진금용 씨라고 있는데 그분 큰아버지가 그 회사에 계시잖아. 연봉만 해도 20억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대단한 회사 회장님이 네 외삼촌이라는 거 아니야?”소은지는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유영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그런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말라고.”“오늘부터 네가 내 여신님이야.”소은지가 정색하며 말했다.그러면서 예전에 불쾌했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너희 시어머니 있잖아. 만
그날의 사고는 유영에게 지우지 못할 악몽이 되었다.“네 말이 맞아. 아이가 없을 때 끝내는 게 깔끔하지.”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세강 오너 일가가 그들의 아이를 원치 않았다.임신한 그녀를 끝까지 몰아세워 유산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빌미로 그녀를 그 집안에서 밀어내려고 했다.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처음 아이를 잃었을 때, 유영은 그 사실을 강이한에게 알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한 결정이었다.그들이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덮은 일이었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유영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소은지가 소송에서 손을 떼게 되면서 유영은 법률대리인을 양승호 변호사로 변경했다. 소은지는 소송에서 손을 떼게 되었기에 원래 로펌으로 출근했다.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 소식은 강이한에게 전해졌다.이날은 유영과 조민정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그들은 조민정이 새로 구한 사무실에서 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이한의 세강바이오 건물 바로 옆 건물이었다.물론 세강바이오는 건물 전체가 세강 소유였고 유영의 사무실은 옆 건물의 한 층만 차지했다.조민정이 유영에게 말했다.“관련 서류는 다 준비되었고 오후에 고객사 미팅이 있어요. 내일에도 있고요.”“알겠어요.”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조민정이 말했다.“일이 조금 많기도 하고 새로 창설된 집단이라 서로 부딪힐 일이 많을 거예요. 그래도 유영 씨한테 돌아가는 일은 제가 특별히 신경 썼으니까 너무 조급할 건 없어요.”“고마워요.”처음부터 미팅이 잡혔다는 게 중요했다.조민정은 참 능력 있는 직원이었다.청하에 도착한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을 따냈다는 게 그 증거였다.아마 해외에 있을 때부터 청하시 상황에 대해 공부했을 것이다.첫 시작은 유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순조로웠다.오후가 되자 유영은 조민정과 함께 고객을 만나러 건물을 나섰다. 건물 대문을 나서는데 하필이면 회사로 돌아오는 강이한의 차와 마주쳤다.남자가 차를
이유영은 처마 밑 긴 의자에 누워 밖에서 스며드는 대나무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었다.빗방울이 대나무잎에 부딪치는 소리, 그 울림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들어가. 춥잖아.”“서주는 지금 어때?”오전에 신지수에게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요즘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대체 누가 그의 것을 박연준에게 넘긴 걸까?신지수의 조사 결과,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의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박연준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강이한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아직도 못 잊는 거야?”박연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억눌린 고통을 삼켰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못 잊는다고? 박연준은 분명 강이한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주는 이유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눈이 보였다면, 박연준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원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는 깊고도 거셌다.“못 잊는다고?”이유영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차가웠다. 한겨울의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미소였다.토끼털로 장식된 옥색 한복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옷을 입은 이유영은 차가웠다.그녀의 평온함은 한때 그의 다정함 속에 묻혀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했던 모습은 언제였던가.강이한에게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그녀는 완벽한 전업주부,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단지 대역일 뿐이었다니.“이유영.”“박연준, 너와 강이한은 한 번이라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독립적인 존재? 그렇다. 이유영은 살아있
그는 덜컥 겁이 났다.더 큰 대가가 두려웠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키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강이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염 선생의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정도였고 문제는 운명, 아니 그 대가가 이유영에게 재앙처럼 닥친 것이다.석 달의 고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만약 이 모든 고난의 대가를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강이한은 기꺼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의 빛을 되찾아주고 이유영에게 고요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우천시.마지막 3일째가 되자 박연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늘 평정심을 지키던 그도 이유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문기원이 돌아왔다.“선생님.”박연준은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남은 3일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 되었다.박연준은 연서의 죽음이 회장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그날부터 그의 밤은 끝없는 불면으로 채워졌다.그와 강이한은 모두 함정에 빠졌고 이제 와서 강이한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걸 볼 수는 없었다.점심 식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박연준은 남은 이틀 동안, 이유영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방울의 약이라도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처럼.“펑!”이유영은 빈 그릇을 세게 내려놓았다.박연준은 텅 비어 있는 그릇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물었다.“다른 느낌은 없어?”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이유영의 말 한마디에 박연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한 그릇 더 마셔야 해?”박연준은 말없이 침묵했고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이미 체념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영은 이미 약이 소용없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이해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거라니?소은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넌 한지음과의 관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거야?”소은지는 강이한의 뻔뻔한 대답에 또다시 놀랐다.이유영을 위해 희생하는 강이한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소은지, 넌 몰라.”“그래, 모르겠어.”소은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고 강이한을 향한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내뱉었다.“한지음을 돌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굳이 곁에 두어서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어?”“...”“강이한, 이유영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네 응보야!”만약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아마 강이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소은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았다.강이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응보라고? 그래, 강이한도 그것이 응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이 한지음을 곁에 둘 거야?”한지음은 이유영 비극의 시작이었다. 소은지는 지금까지도 강이한이 그 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이런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소은지의 물음에 강이한은 눈을 크게 뜨고 깊은 고통이 서린 눈빛으로 답했다.“물론이지.”“...”소은지는 한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강이한의 얼굴에 뿌렸다.예전에 우천시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았을 때, 강이한이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우스웠다.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소은지는 분노에 찬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씁쓸한 고통이 가득했다.후회할까? 물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강이한은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운명은 바꾸려고 한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강이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쓰라린 마음이었던 것이다.“유영이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만나고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사실...”“제가 빚진 거예요.”정국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한이 말을 잘랐다.그는 정국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고 강이한도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결국 이유영의 눈에 다른 사람의 빛이 비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휴...”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은 한 번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깨달음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지금의 강이한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깨달았고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게 된 것이다....소은지는 강이한이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오후에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은지였기 때문이다.“후회해?”소은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이한에게 물었다.“...”한지음 일로 후회하냐는 것이었다. 소은지는 강이한과 한지음의 관계를 가장 혐오했다. 소은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에 수많은 부부의 파탄을 목격하면서 자연히 불륜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그런 소은지가 강이한에게 후회하느냐고 묻자, 강이한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질문, 몇 번이나 해봤어?”“...”소은지의 머릿속에 설선비가 떠올랐다.당시 그 사건은 청하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고 만약 소은지의 변호가 없었다면 설선비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소식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우연히 식당에서 설선비를 만난 소은지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후회하니?”설선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은지 씨,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지금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어떤 절망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절망은 마치 끝없이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혹한 절망은 없었다.조용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강 선생님, 이만 가주세요. 선생님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악몽과 마주할 때 쉽게 맞설 수 없다. 어린 월이도 마찬가지였다.오는 길 내내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월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른 채 망연히 서 있었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결국, 그는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서는 순간, 유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 아가씨, 이제 괜찮아요.”“으흑, 으흑...”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소리에 강이한의 마음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그저 아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아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강이한은 그저 아이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고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아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한 아버지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복도 끝에 정국진이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강이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듯했다.상처 입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정국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이가 아직도 너를 무서워해?”“...”‘무서워한다'는 단어가 강이한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과거의 강이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다 제 잘못이에요.”그는 깊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강이한의 잘못이 확실했다.하지만 마냥 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강이한은 월이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강이한은 아이가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소중히 자라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최고의 스승이셨고 외삼촌 또한 훌륭한 삼촌이었으며 엄마 역시 다정한 어머니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의 삶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한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마치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유씨 할머니, 유씨 할머니?”아이는 강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소중한 바비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 인형은 이유영을 똑 닮아 있었다. 이유영을 볼 수 없는 아이는 온 마음을 그 인형에 의지하고 있었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아는 아이와 달리, 그는 무엇을 지켜냈던가?아이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강이한의 가슴은 다시금 깊은 고통에 잠겼다.아이를 돌보는 유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아가씨.”“나쁜, 나쁜 사람!”유 아주머니도 강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곳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정 선생님과 사모님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정씨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다시 만나게 하는 거냐고, 차라리 바깥 여자의 아이와 함께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유 아주머니는 아이를 꼭 껴안고 강이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고통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장 가까운 딸에게 원수처럼 취급받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월이를 통해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그는 아이에
강이한의 가슴은 칼날에 도려내듯 아려왔다.영원히 기다릴 수 없는 이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둬야 하는 고통을, 이제야 강이한은 깨달았다.한때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자리는 이유영에게는 비극이었다.이유영의 모든 기다림을 강이한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던가!그렇기에 지금, 이유영의 냉담함을 견뎌내는 고통은 그만큼 절망스러웠다.“이제 그만 울어, 응?”“엄마가 보고 싶어요.”작은 아이는 울먹이며 강이한을 바라보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강이한은 눈가에 맺힌 씁쓸함과 고통을 감추려는 듯 눈을 감았다.강이한 역시도 이유영이 보고 싶었다.우천시를 떠난 후, 그는 이유영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3개월은 많은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서주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대부분 마무리되었다.그 일들은 서주와 파리 엔데스 가문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정국진뿐이었고 나머지는 강이한이 미쳤다고 여겼다.강이한은 다시 파리에 오게 되었다.강이한의 방문에 임소미는 여전히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태도와 분위기에서 분명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임소미는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위층에 있어.”임소미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지난번처럼 아이를 보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고맙습니다.”“...”강이한이 다시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고 임소미는 이것이 아이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에 더욱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이유영은 우천시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강이한에게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며칠 동안,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염 선생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며칠이라도 모두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임소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이 여전히 호전되지 않는다면, 오늘 강이한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확실해
강이한은 아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착하게 있어야 해.”“아빠, 엄마 찾으러 가는 거야?”“...”아빠, 엄마...그 두 단어가 온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에 강이한의 가슴은 더욱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는 온유의 아빠였고 이유영은 온유의 마음속에서 엄마였다.월이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어쩌면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까?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과거와 현재의 악연, 그리고 연서까지... 이 모든 것이 쌓인 이상, 이유영이 온유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온유야.”강이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속의 답답함을 억눌렀다.온유는 멍한 눈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아빠?”“엄마는 잊어.”“...”아이의 눈에서 순간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강이한의 눌러 두었던 아픔이 다시 치밀어 올라 목이 메었고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엄마는... 잊어, 응?”이유영은 엄마가 아니었고 이제는 영원히 엄마가 될 수 없었다.강이한은 온유가 가족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었다.“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아요?”“...”“엄마는 동생만 원하는 거죠?”작은 아이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강이한은 알고 있었다.온유는 태어난 이후로 한지음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박연준의 계략 때문이었다.온유에게 엄마는 항상 이유영이었다.박연준의 가장 잔혹한 행동은 온유에게 화살을 돌렸다는 건데, 하지만 강이한은 박연준이 온유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온유를 보았다면 아마도...돌이켜보면 박연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강이한이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작지 않았다.“잊어, 응? “이 아이가 이유영을 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 이상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항상 고통이 뒤따랐다.과거, 한지음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 때문에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강이한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일이 이 지경까지 오자, 늘 강이한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이정과 신시욱 모두 한지음이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지음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면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각막을 기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유영의 각막을 기증하겠다고 말했지만 모두 그가 홧김에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수술실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 기간 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누구도 강이한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특히 강이한이 직접 이유영을 감옥에 보냈을 때, 그들은 한지음이야말로 강이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하지만 이제야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분명해졌다.우천시에서 이유영은 침착하고 태연했으며 한지음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강이한 역시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결심을 굳혔다. 만약 염 선생의 약으로 회복이 되지 않을 경우, 이유영을 위해 본인이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계획을 세웠다.“이유영 씨는...”생각에 잠긴 이정은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 결국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온유 아가씨와 오셨습니다.”“...”온유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정의 가슴은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험난했던 과거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병원에서 이유영이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강이한이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연서의 존재마저도 온유와 월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서는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었다.“들어오라고 해.”강이한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이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눈썹에는 떨쳐낼 수 없는 긴장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