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진영숙은 아니었다.이번 일로 화가 나는데 풀 곳이 없어서 너무 갑갑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는 25일 날 경원이 귀국할 거야. 이유영 그 계집애랑은 빨리 이혼하고 쟤도 빠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진영숙이 아무리 이유영이 싫어도 지금 시점에서 시력까지 잃은 한지음을 며느리로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물론 최근 이유영이 보인 행보가 괘씸해서 단칼에 내쳐버릴 생각이었다.유경원의 귀국 소식을 들은 강이한과 강서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예전이었다면 신랄하게 반박했겠지만 그래도 진영숙의 건강을 고려해서 그는 담담히 말했다.“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좀 쉬세요.”“이한아!”말을 마치고 뒤돌아서는데 뒤에서 진영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유영 걔도 마음에 안 들지만 다른 여자 만나고 싶었으면 적어도 이유영보다 더 나은 애를 만났어야지. 넌 어째 여자 보는 눈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냐!”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에 성격까지 좋은 이유영도 마음에 안 드는데 한지음을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진영숙은 아들의 철없는 행동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걸음을 멈춘 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병실을 나갔다.강서희는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달래주었다.“엄마, 의사가 화를 내면 안 좋다고 했잖아.”“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쟤 하는 꼬라지 좀 봐!”“엄마도 그만해. 이유영 때문에 그 소란이 났는데 오빠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유영 얘기가 나오자 진영숙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아비 뻘 되는 남자랑 바람이 난 년을 뭐가 아쉬워서 잡고 있는 거야?”진영숙이 가장 화가 난 부분은 이혼 얘기를 이유영이 먼저 꺼냈다는 점이었다.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도 정작 이혼이 진행되지 않으니 점점 아들도 미워지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놔주지 않으면서 더 보잘것없는 한지음까지 챙기니 그게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비록 이유영이 세강의 안주인으로서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들의 이런 행보도 그녀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
한지음은 고개를 숙이며 표독스러운 표정을 감췄다. 대신 입에서는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도 대표님 어머님이시잖아요. 문안을 가는 건 후배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불편하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해요.”“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강이한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매번 한지음이 약해진 모습을 보일 때면 마음이 흔들렸다.과거 유영도 이렇듯 약하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이유인지 지금은 여기저기 공격 당하는 상황에서도 한 번도 그에게 굽히고 들지 않았다.경찰에 도움을 요청할지언정 그에게 지켜달라고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한지음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머님이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런 모습이 된 건 제가 원한 게 아니잖아요. 저도 피해자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요.”갑자기 한지음이 말끝을 흐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강이한은 그녀에게 증거 관련해서 추궁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전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걱정 마. 다시 앞을 보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내가 만들 거야.”단호한 그의 결심이 담긴 한마디였다.한지음은 그럼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제가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죠. 의사가 그랬어요. 지금 당장 적합한 망막을 이식 받지 못하면 평생 앞을 못 보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요.”강이한은 숨이 막혀왔다.의사한테 이미 들은 내용이었고 그래서 최근 열심히 적합한 기증자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시망막 이식 수술 과정이 워낙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쉽지 않았다. 살아 있는 기증자는 당연히 적을 수 밖에 없었고 뇌사 환자들을 찾아봤는데도 쉽지 않았다.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그분이 부러워요.”강이한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지음이 애통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현재 모든
그 모습을 본 유영은 가슴이 철렁해서 다급히 소은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손을 뻗어 친구의 손에서 칼을 빼앗은 뒤, 강아지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고 말했다.“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어.”“하지만 유영아….”“내가 응대할 게.”강이한이 왜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영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소은지와 그의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소은지는 씩씩거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듣고 강아지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손으로 안 되니 발로 걷어차는 소리까지 들려왔다.문밖에서 남자의 성난 고함도 같이 들려왔다.“이유영, 나와!”밤잠을 방해받은 이웃들이 문을 열고 욕설을 퍼부었다.“뭘 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워!”“요즘 젊은 것들이란….”하지만 곧 그 소리는 잠잠해졌고 다급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의 섬뜩한 눈빛에 겁을 먹은 탓이었다.유영은 안 보고도 돌아가는 상황이 뻔히 보였다.그녀는 천천히 다가가서 현관문을 열었다.남자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눈빛과는 결이 다른 눈빛이었다.마치 자식에게 실망한 부모마냥, 마음은 아프지만 어떻게든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보였다.유영도 기죽지 않고 따졌다.“미친 거 아니야? 병원 예약해 줘?”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목에서 강한 힘이 전해지더니 그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다친 팔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끌려가다 보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대로 무릎을 시멘트 바닥에 박아버렸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남자는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는 그녀를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유영은 거꾸로 매달린 채, 그의 등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이거 놔, 이 미친 놈아!”하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주차장까지 간 남자는 유영을 차에 억지로 밀어넣었다.그 과정에서 유영이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덜미를 단단히 잡고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얌전히 있어,
고개가 돌아가고 얼굴에서 얼얼한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차량 내부에는 삭막한 정적이 잠시 감돌았다.강이한도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한참이 지난 뒤, 고개를 돌린 유영은 남자를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지금 그 여자 때문에 나를 친 거야?”머리가 웅웅거리고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강이한이 불륜녀를 위해 자신에게 폭력까지 서슴지 않았다.예전에 그에게 실망하고 슬펐던 마음뿐이었다면 이 순간에는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져 버렸다.내려놓는 건 한순간이라고 했던가.마음이 완전히 돌아서는 것도 한순간이었다.더 이상 강이한이라는 남자에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강이한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뻘겋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유영아.”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나한테 손대지 마!”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차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그녀는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열어!”“내 말 좀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우리 사이에 더 얘기할 게 남았어?”이성을 상실한 유영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세강 대표로서의 품위는 지켜. 앞으로 무슨 일이든 변호사 통해서 얘기해. 내가 그 여자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경찰에 신고해. 내가 도와줘?”말을 마친 유영은 핸드폰을 꺼내 112 신고버튼을 눌렀다.강이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빼앗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당신 미쳤어?”그가 울부짖었다.이 여자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유영은 그런 남자를 비웃듯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떳떳하다는데 당신은 뭐가 두려운 거야?”그랬다. 왜 두려운 거지?증거를 받았을 때 강이한은 경찰에 바로 제출하는 대신, 증거를 들이밀며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협박했다.무슨 상황이 와도 가장 먼저 떠오른 반응은 절대 이혼하기 싫다는 것이었다.반면 유영은 어땠을까?증거 앞에서도
그는 손을 뻗어 그 가녀린 목을 움켜잡았다.이대로 숨통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컥….”유영이 고통에 신음했다.“죽고 싶어?”분노한 강이한이 으르렁거렸다.둘이 함께한 세월 동안 유영은 항상 그의 그늘 아래 살았다. 적어도 강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자신이 오랜 세월 지켜준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세강 일가는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다는 얘기, 내가 안 했었나?”유영이 말이 없자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명백한 경고였다.“나도 말했잖아. 당신이 그 시작이 되거나 나가서 죽어버리라고. 지금 나한테 당신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협소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럼 내가 살아 있단 걸 느끼게 해줘야겠군.”“꺼져!”남자의 손이 옷섶을 비집고 들어오자 유영은 뺨을 날려버릴 기세로 손을 번쩍 들었다.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남자가 가녀린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전에는 항상 부드럽게 그녀를 대하던 강이한이었다.갑자기 왜 이렇게 파렴치하고 우악스럽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영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내 몸에 손대지 마!”“우린 아직 공식적으로 부부야.”“부부라는 자각이 있기나 해?”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면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부라고 주장하고 있었다.“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당신 같은 남편을 뒀는지 모르겠네! 가장 힘들 때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도움이나 받고 말이야.”그 말은 참고 있던 강이한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게 만들었다.분노한 두 사람은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한편, 청하병원.한지음은 두 눈을 가리던 붕대를 풀어 헤쳤다. 유경원이 입국한다는 소식에 안 그래도 기분이 상했던 강서희는 그 모습을 보고 부루퉁한 말투로 말했다.“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병원 관계자는 내가
긴 싸움 끝에 유영은 다시 오피스텔로 올라갔다.엉망이 된 얼굴로 돌아온 친구를 본 소은지의 분노가 폭발했다.“그 인간이 너 때렸어?”소은지가 부르르 떨며 물었다.유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불도저 같이 달려들던 강이한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의 귀뺨을 때리던 강이한의 모습을 떠올렸다.지금도 얼굴이 얼얼하고 숨통을 옥죄던 느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소은지는 다가와서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고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일단 병원부터 가자.”“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유영은 친구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소은지가 차분하게 말했다.“이 정도면 가정폭력으로 신고가 가능해. 우리 이혼소송에도 도움이 될 거야.”유영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곧이어 그녀는 소은지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정폭력!전에는 한 번도 가정폭력과 강이한을 연관 짓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그가 보인 행보를 보면 이건 가정폭력이 분명했다.과거에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믿고 이 세상에 강이한 말고 기댈 사람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그에게 모든 걸 의지했다. 그리고 강이한 주변 사람들도 그들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바라봤다.유영은 회귀하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소은지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백지장이 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렇게까지 몰아가는 건 싫어?”유영이 말했다.“그게 아니라 좀 믿기지 않아서.”강이한에게 귀뺨을 맞고 목까지 졸렸지만 아직도 이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그가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걸 알았을 때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가정폭력까지 언급되다니.“그 사람은 너랑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야. 아마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거야.”소은지가 말했다.마치 모든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말투였다.유영은 온몸을 바짝 긴장했다.“그건 알아….”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전생에 그가 보인 행보를 보면 더 심한 건 아직 시작
“넌 재능이 있으니까 강이한의 그늘을 벗어나더라도 잘살 수 있어. 여자는 남편에게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맞아.”유영도 그 말에 공감했다.소은지가 살아온 행보를 보면 혼자 외롭긴 해도 자유를 억압받는 적은 없었다. 유영이 그녀를 부러워하는 이유였다.시댁과의 복잡한 관계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애는 언제 갖냐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소은지의 유일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하고 의뢰인의 권익을 보호하는가에 있었다.휴가가 나면 해외로 보드 타러 가고 바닷가에 가서 자연을 감상했다.모든 여자가 꿈꾸지만 감히 실천할 용기가 없었던 삶을 소은지는 살고 있었다.한지음과 진영숙이 청하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걸 몰랐기에 소은지는 근처의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그들은 들어가자마자 의사에게 가정폭력 전치 진단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고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의사는 신속히 상처를 확인하고 진단서를 상세하게 끊어주었다.진단서를 건네 의사가 유영에게 말했다.“모든 게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감사합니다.”진단서를 챙긴 유영이 뒤돌아서려는데 의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자주 아픈 편은 아니라 병원에 다닌 적은 별로 없어요. 비슷하게 생긴 사람과 착각하신 것 같네요.”유영은 대답을 던져주고 재빨리 의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의사가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최근 외삼촌과의 스캔들과 한지음과의 대립에서 신문에 자주 올라왔으니 가십거리를 즐겨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사진도 봤을 것이다.밖에서 기다리던 소은지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떻게 됐어?”“진단서 끊었으니까 가자.”“이리 줘.”소은지는 그녀의 이혼 소송 변호사로서 증거를 요구했다.유영은 말없이 진단서를 그녀에게 건넸고 소은지는 그것을 잘 챙겨 핸드백에 넣었다.그러는데 뒤에서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어쩐 일이지?”소리가 난 곳을 따라 고
유영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아까 소은지랑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조금 믿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한지음이란 여자를 위해 자신에게 손찌검을 했단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러는지부터 설명해 줘.”유영이 말했다.“뭐라고?”“한지음이란 여자를 위해 나한테 폭력을 휘두를 때 당신 마음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고.”그 말을 들은 남자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올랐다.그는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내가 단지 그것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해?”“아니야?”남자가 침묵했다.하지만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에서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유영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서로간의 신뢰가 이 정도로 무너진 걸까?언젠가 그와 대립하게 될 줄 알았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봐야겠어.”남자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영의 가슴은 차갑게 식었다. 이미 그를 완전히 내려놓기로 한 시점에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도 혐오스러웠다.“말을 안 하면 내가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아?”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이것으로 부족해?”당연히 부족했다.“조 비서!”“예, 대표님.”“가서 확인해 봐.”뭘 확인하라는지는 당연히 물을 필요도 없었다.유영은 점점 머리가 울렁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조형욱은 강이한 신변에서 수년간 일을 처리해 온 엘리트답게 순식간에 답을 알아냈다.물론, 유영이 출국하는 걸 못 잡은 건 그의 실수였다.잠시 후, 되돌아온 조형욱은 뭔가 달라진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았다.“대표님.”“말해.”조형욱의 불안한 시선이 유영에게 닿았다. 그럴수록 강이한에게서 풍기는 압박감은 더해져만 갔다.조형욱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전치 진단을 끊어줬다고 의사가 그러더군요.”강이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유영을 노려보았다.
배준석이 돌아왔다.용성시에서 돌아온 뒤로 배준석은 이유영 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한때 배준석은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둘러싸고 이유영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검진을 마친 뒤, 배준석이 말했다.“회복은 잘 되고 있지만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시력을 수술로 되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배준석의 말에는 단순한 의학적 조언을 넘어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듯한 씁쓸함이 배어 있었고 이유영은 그 속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배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연히 잘 관리해야죠.”이유영이 담담하게 말했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번 생에 겪었던 고통은 특히 더 절망적이었는데 전생의 수천 배는 될 터였다.아이가 없을 때에 비해 아이가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커가는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힘겹게 되찾은 시력인 만큼 더 소중히 여기며 관리해야 했다.“이유영 씨.”“네?”“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 관심도 없는 거예요?”배준석은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배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배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이유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제가 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그 말투에는 단호함보다 차가움이 앞섰다.강이한의 이름만 나와도 이유영의 말투는 도저히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진다.배준석은 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음에 놀라며 물었다.“서주에서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알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관심을 가져요?”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차가운 말이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배준석은 순간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서재에서 나오자 여진우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그의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분명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러나 이유영을 보는 순간,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우고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여진우의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언제 돌아왔어?”여진우가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방금.”“그 사람, 만났어?”“누구?”그 말을 뱉고 여진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엔데스 신우 때문에 돌아왔음을 직감했다.더블루 리버스에서 마주한 엔데스 신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바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파리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여진우가 돌아온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 가고 싶지 않았어...”떠나기 전부터 이미 엔데스 셋째 도련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이런 간교한 방법으로 이유영을 끌어들인 걸 봐서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넌 먼저 월이한테 가 봐.”여진우는 짧게 말하고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때,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고 여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왜?”“우리... 파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정씨 가문과 로열 글로벌 그룹 전체를 의미했다.말이 끝나자 복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엔데스 신우를 만나고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은 후, 이유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엔데스 가문의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정씨 가문도 결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떠나고 싶었다.파리는 이제 너무 위험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이었고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겉으로는 조용했던 정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셋째 도련님을 만난 후, 이유영은 그 아래에 도사린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돌아온 이유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요즘은 스튜디오에 가지 마. 집에 조용히 있어.”“네.”지금은 정국진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유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셋째 도련님이 준 거야?”그 이름을 듣자 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머니가 언급했던 전화도 아마 셋째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의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두껍지는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쾅!”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순간 정국진은 서류를 힘껏 책상 위에 내리쳤다.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기마저 흔들 듯 강렬했다.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임소미와 이유영 앞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셋째 도련님의 변화에 신경이 쏠려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의 정국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가져온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려 하자 정국진이 손을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보지 마.”“아빠.”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고 정국진의 반응에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외부에 바보로 알려진 세월이 길었던 만큼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정국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너 먼저 나가 있어.”이유영은 그를
그리고 그 남자는 단지 눈빛만 깊은 게 아니라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오랫동안 바보라 여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엔데스 가문은 지난 세월 동안 격동의 시간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 바보 같은 연기마저 이 순간 이유영의 눈에는 마치 하나의 능력처럼 보였다.엔데스 신우는 갑자기 조용히 서류봉투를 내밀었다.“가져가서 아버지께 드리세요.”이유영은 멍하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게 뭐죠?”“아버지께 보여드리고 박연준과 이혼할지 말지 결정하세요.”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결혼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이 남자는 무서운 존재감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이유영은 단단한 눈빛으로 엔데스 신우를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바보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과연 엔데스 가문의 다른 이들은 알고 있었을까?“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실지 먼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동시에 감춰질 수 없는 위험을 느낄 수 있었다.이유영은 어떻게 더블루 리버스를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의 가슴은 점점 더 죄어왔다.혼란스러웠다.파리는 원래도 복잡한 곳이었지만 특히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이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는 여전히 독자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모든 일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하지만 오늘,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을 만난 이후 이유영은 확신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거라 믿어서는 안 된다.“바로 집으로 가요.”지혁이 차를 스튜디오 쪽으로 돌리려 하자 이유영이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엔데스 신우를 만난 후, 그녀는 더 이상 회사에 갈 마음이 없어졌고 머릿속을 정
결국 이유영은 엔데스 신우와 마주 앉았고 정적 속에 무언의 압박이 흐르고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며 이유영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셋째 도련님께서는 원하시는 게 뭔가요?”계속해서 현금으로만 결제를 요구했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파리로 돌아오기 전 그녀가 접한 소식으로 봤을 때, 파리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심지어 박연준과의 결혼도 결국 파리와 얽혀 있었다.하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아가씨는 영리하니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겠죠?”“셋째 도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정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 역시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맞은편 남자가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차갑고 위험한 미소였다.심장은 이미 터질 듯 뛰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아가씨와 박연준의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무슨 의미든 간에, 저는 그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긴장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그 말을 듣고 엔데스 신우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의 조롱이 섞인 웃음소리에 이미 굳어 있던 이유영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정씨 가문이 왜 이토록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과 어떤 협력도, 관계도 맺지 않았는지 알고 있나요?”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파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녀의 아버지 정국진은 언제나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는 사실뿐이었다.솔직히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정국진이 엔데스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피해 왔고 엔데스 가문은 그동안 언제나 중립을 유지해 왔다.엔데스 신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지닌 듯, 이유영을 강하게 짓눌렀다.숨을 깊이 들이마셨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을 지울 수 없
이유영이 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호적에 적힌 이름은 ‘정유영’으로 바뀌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유영’ 혹은 ‘유영’이라 불렀다.집사가 단호하게 ‘정씨 가문 아가씨’라고 부르는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뒤에 거대한 정씨 가문이 버티고 있음을 실감했다.가족이 있다는 건 곧 얽매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이유영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그래도 안에 누가 기다리는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집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씨 가문 아가씨께서 직접 오셨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셔서요.”그는 집주인이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않았고 이유영의 마음속 의심은 점점 커졌다.그날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은 틀림없이 엔데스 가문의 전설적인 셋째 도련님, 엔데스 신우였다.소문에는 ‘바보’로 불렸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낮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요.”“아가씨.”“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사람들 저한테 감히 어쩌지 못할 거예요.”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엔데스 가문의 누구도 지금 그녀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지혁은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밖에서 볼 때도 건물의 웅장함이 느껴졌지만 내부는 더 압도적이었다. 곳곳에 스며든 고급스러운 디테일과 섬세한 감각이 주인의 까다로운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대형 홀을 지나 집사는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그제야 이유영은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길고 긴 테이블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맑고 고고한 분위기는 첫눈에 보아도 비범한 존재감이었다.그런 아우라는 절대 ‘바보’라 불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셋째 도련님, 정씨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 없었던 이유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어디 한 번 도망쳐 봐.”비서는 순간 움찔했다.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영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은 로열 글로벌의 것이었고 그녀는 로열 글로벌의 전 대표님이었기에 서주에서 살아남으려면 감히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두 시간 후, 비서와 지혁이 돈을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오자 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거기 경비원들이 바로 내쫓았어요.”말이 끝나자 이유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길래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유영은 혼란스러웠다.“윙!”그때 마침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기절할 뻔했다.[내일까지 안 오면 변호사가 찾아갈 거야.]‘협박인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차 수리비는 물론이고 직접 사과까지 하라는 건가?’이유영은 숨이 턱 막혔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이런 일일수록 더 읽히고 싶지 않았던 이유영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아직 더블루 리버스에 계세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빨리 사과하고 이 일을 끝내고만 싶었다.통화하다가 부딪혔으니 명백한 본인 불찰로 생긴 사고였고 CCTV에도 찍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곧 답장이 왔다.[네.]아직 그곳에 있다면 된 것이다. 이유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지혁 씨.”“네, 아가씨.”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지혁이 이유영 앞으로 다가갔다.“저랑 같이 가요.”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지혁과 함께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유영은 코트를 걸치며 돈을 지혁에게 건넸고 돈을 건네받은 지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오늘 일정으로 바쁜 하루였지만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해결해야 했다....30분 후에 더블루 리버스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경비원들이 막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그들이 온다는
“바래다줬어?”“네.”“서재욱은 아직도 거기 살아?”“네.”말이 떨어지자 박연준은 온몸에 위압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그의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기원의 심장은 긴장감에 조여들었다.박연준이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문기원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지금 나온 기사는 다 찌라시잖아요.”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에서 나온 말이었고 그곳에서 나온 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박연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문기원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재욱이 잠옷 차림으로 문을 여는 모습 한 장면만이 가득했다.“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가는 게 어떻습니까?”문기원은 신중하게 조언했다.오늘 이유영이 서재욱을 만난 것만으로도 찌라시가 퍼졌다.이건 누군가가 분명 뒤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게 누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지 못했다.혹시 엔데스 가문과 관련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재욱을 끌어들이려는 걸까?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박연준은 그저 단호하게 문기원에게 말했다.“너 먼저 들어가.”그 순간 그가 얼마나 큰 힘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문기원은 알 수 있었다.문기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랜 시간 박연준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상, 지금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면 오늘 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그날 밤, 이유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원래라면 내일 서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모든 계획을 미뤘다.아침 식탁.“월이야, 빨리 먹어.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갈 거야. 어제 엄마가 말했지, 늦으면 안 된다고.”이유영은 시간을 확인하며 월이에게 말했다.정국진과 여진우가 집에 없는 관계로 이유영이 월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이유영은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문기원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방금 차 안에서 오간 대화를 그는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고 이것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이유영이 박연준에게 가하는 복수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예전에 서주에서 큰 파장을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박연준에게도 되풀이되고 있었다.이유영은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생님과 서재욱 씨의 관계가 특별하신 만큼 신중하게 결정하시길 바랍니다.”문기원의 말은 분명 어떤 일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박연준과 서재욱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일으켜 이유영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이유영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문기원 씨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서재욱은 이유영이 지금 박연준과 어떤 관계인지 알면서도 망설임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러니 이유영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문기원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잠시 말을 잃고 미간을 찌푸렸다.“사실, 박 선생님도 불쌍한 사람이에요. 굳이 그렇게 행동하실 것까진 없잖아요.”적어도 문기원의 눈에는 박연준도 상처받은 사람이었다.“불쌍하다고요? 문기원 씨, 농담하시는 거죠?”그가 불쌍하다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문기원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사실 연서 씨는 이유영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생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문기원 씨!”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렸다. 그녀는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10년 동안 자신을 속여 오며 연서의 대역으로 삼았단 말인가?결국 가장 가치 없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연서가 중요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었다. 적어도 박연준과 강이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문기원은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어떤 말도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에게 이 문제는 너무 무거운 과거였다. 너무 깊은 상처를 남긴 탓에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