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층으로 올라간 유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진영숙은 처음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유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이를 유산하게 된 배후에 시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유영은 강이한에게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때는 바보처럼 자신이 부족해서 시댁 식구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때의 유영은 자신이 노력하면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고 믿었다.부모님과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껴본 적 없었기에 어렵게 이룬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그래서 그들이 뭐라고 하든 참고 인내했지만, 현실은 참혹했다.유영은 침울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강이한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있는 유영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굽혔다.“유영아.”유영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남자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왜 전에는 말 안 했어?”“하!”유영은 싸늘한 비웃음을 터뜨렸다.친동생도 아닌 강서희에게 말 한마디 했다고 전화해서 다짜고짜 따지는 사람에게 네 가족이 우리 아이를 죽였다고 말한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을까?강이한의 그런 애매한 태도 때문에 진영숙의 괴롭힘은 심해져만 갔다. 만약 강이한이 이 일로 엄마를 원망했다면 그가 없을 때 찾아와서 더 심하게 괴롭혔을 것이다.강이한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유영의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상대가 뭐라고 한 건지, 강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말을 마친 강이한은 전화를 끊었다.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한지음이 발견된 것이다.“지음이 찾았대. 나 잠깐 나갔다 올게.”“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강이한을 빤히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강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뒤, 부드러운
집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며칠째 그녀는 언론과 네티즌들로부터 온갖 욕을 먹고 있었다. 세강은 자연스럽게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그래서 안주인을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들조차도 악질 네티즌들이 이렇게 변태적인 행보를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모님, 이걸 어떡할까요?”집사와 고용인들은 연민과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영은 우아하게 수저를 내려놓고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절제된 단아함이 몸에 배긴 손놀림이었다.평소에도 차분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유영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경찰에 신고하죠.”“신고요?”“당연한 거 아닌가요?”유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네티즌들이 보낸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신고까지 한다면….”집사는 말끝을 흐렸지만 아마 경찰이 나서도 악질 네티즌들을 모조리 처벌하기엔 무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인터넷에 숨어 횡포를 가하는 건 명백한 불법 행위예요.”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이들은 한지음이 매수한 심부름꾼들이었다.한지음은 공인도 아니었고 두터운 팬층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납치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다지만 그녀를 위해 세강의 안주인에게 이 정도로 협박을 가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이한은 며칠째 외박 중이었다.상대는 지금쯤 유영의 정신이 온전치 못할 거라고 판단하고 이런 무리수를 강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이번 생의 유영은 전생처럼 나약하지 않았다.아직은 기댈 곳이 남편밖에 없는 전직주부에 불과하지만 유영은 자신의 방식대로 반격해 나갈 것이다.“알겠습니다.”집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경찰에 연락했다.하루 사이에 유영은 택배를 수십 개나 받았다.거실에는 온갖 동물 시체와 면도칼, 혈서 같은 것들이 스산하게 쌓여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그것들을 보고 겁에 질려 며칠 밤을 잠들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이들의 목적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유영은 피아노실에서 빗소리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긴 생머리를 그대로 드리우고 피아노에 심취한 그녀의 모습은 숨막히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은 조용히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리가 멎고 유영이 고개를 돌렸다.“언제 왔어?”“10분 정도 됐나?”남자는 며칠 전 집을 나가기 전 입은 옷 그대로 입고 있었다.집에 안 돌아온 그 시간 동안 병원에서 한지음의 옆을 지킨 모양이었다.그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유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거실에 쌓인 물건들 봤어?”“왜 버리지 않고 그대로 뒀어?”“누가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남자의 눈빛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그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를 비난하던 네티즌들이 이런 미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그가 아는 유영은 겁이 많은 여자였다.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그는 유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최근 며칠 사이 그녀가 보여준 행보는 그가 아는 유영이 아니었다.그래서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영이 기댈 곳은 강이한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유영에게서는 끝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보냈는지 알아?”“몰라.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어.”“신고했어?”강이한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가장 먼저 남편을 찾지 않고 경찰에 신고 하다니!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다.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유영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유영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경찰에서는 뭐래?”“조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야.”“왜 나한테 연락도 하지 않았어?”예전에는 사소한 일 하나로도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하던 여자였다.유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전에는 매끄럽던 피부가 많이 거칠어진 것이 느껴졌다.그녀가 웃으며
강이한의 분노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집사가 문을 노크했다.“도련님, 나서원 씨께서 오셨습니다.”“서재에서 기다리라고 해요.”유영은 나서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강이한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서원은 비밀리에 개인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돈만 충분하면 그가 파내지 못할 증거는 없었다.수많은 재벌 사모님들이 남편의 불륜 증거를 잡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오늘 나서원이 뭘 가지고 왔는지 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그 정황 증거들이 전생에 강이한을 완전히 그녀에게서 등 돌리게 한 발단이 되었다.강이한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더 이상 이혼 얘기 꺼내지 마.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으니까.”말을 마친 그는 홀연히 밖으로 나갔다.유영은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망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유영은 울컥하는 마음에 그를 잡았다.“잠깐만.”“더 하고 싶은 얘기 있어?”“날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남은 신뢰가 있기는 해?”전생의 유영이 가장 궁금했던 문제였다.이미 한번 겪었던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은 그녀에게 두렵고 잔인했다.이 남자가 곧 자신에게 완전히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무섭고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강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유영은, 이 순간을 기억에 새겨 넣으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줄곧 당신을 믿었어. 물론 지금도.”말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유영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문밖을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이대로 멈추고 싶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전생의 극본대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청하 병원 VIP병동.온몸에 붕대를 두른 한지음의 모습은 처참했다.병실에는 강서희가 와 있었다.그녀는 음침한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말했다.“내가 그년을 너무 얕잡아 봤어. 죽더라도 날 물고 늘어질 줄이야.”그들의 처음 계획대로라면 유영은
얇은 A4용지가 피부를 긁고 빨간 상처를 냈다.유영은 절망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본 강이한은 흠칫하며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표정을 바꾸고 실망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에게 정말 실망했어.”유영은 다시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바깥에 내리는 비를 닮은, 그의 실망보다 더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강이한은 갑자기 가슴이 쓰렸다.“왜 그랬어?”그가 물었다.그가 이 질문을 내뱉는 순간 이유영도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그는 절대 모를 것이다.유영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비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정성 들여 가꾼 정원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에 모든 것은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그녀는 줄곧 이곳을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생각하고 아꼈다.이제야 그 생각이 큰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그녀를 믿는다고 했던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정황 증거를 들이밀며 그녀를 추궁하고 있었다.“뭘 말하는 거야?”“이유영!”남자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예전과 같이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그럴수록 그는 혼란스럽고 절망에 빠졌다.“왜 이렇게 변했니?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당신의 그 복수심 때문에 한 여자가 인생을 망쳤어. 한지음이 그렇게 미웠어?”세강의 직원과 협력사 직원들, 세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강이한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이유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표현들보다 그녀는 더욱 잔인하고 냉혹했다.강이한의 실망은 깊어져만 갔다.그가 아는 이유영은 어디로 간 걸까?이렇게 예쁜 얼굴로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 거지?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그에게 물었다.“나라고 확신하나 봐?”“더 할 말 있어?”적어도 강이한은 이 증
유영의 고개가 돌아갔다.입술이 터지며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진영숙은 순간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너 그게 무슨 눈빛이야? 너 때문에 세강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네 주제에 감히 이혼을 얘기해? 버려도 우리가 버려야지!”진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강서희가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엄마, 진정해. 화내면 몸만 망가져.”“얼마면 되니?”진영숙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유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우습고 역겨웠다.유영이 물었다.“얼마를 줄 생각인데요? 우리 결혼해서 3년을 살았어요. 부부 공동재산이라는 게 있는데 어머님 재력으로 감당이 될까요?”“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재산을 분할해? 너 시집와서 한 게 뭐가 있어? 이한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고 놀고 먹었으면서!”“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제가 집에서 내조를 열심히 했으니까 그 사람이 밖에서 회사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너….”진영숙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처음부터 순진한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속은 엉큼해 가지고! 내가 그렇게 말렸건만 믿지를 않더니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구나!”유영은 진영숙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그와 서로 사랑할 때는 뭔가를 바란 적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어차피 사랑을 잃었으니 챙겨야 할 건 다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본모습이라니요? 그 사람한테 갖다 바친 제 10년은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더 손해 아닌가요?”“네 청춘이 얼마나 한다고!”“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신 아들이 좋아서 한 결혼이에요!”진영숙과 강서희는 할 말을 잃었다.두 사람은 서로 멍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폈다.이곳에 오기 전에는 강이한이 그녀에게 실망한 기회를 틈타 돈으로 유영을 쫓아버릴 생각이었다.여론에 그만큼 시달렸으니
며칠 외박할 줄 알았던 강이한은 저녁 열 시가 되어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욕실에서 씻고 나온 유영은 나갔을 때랑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강이한을 보자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술 냄새 때문에라도 도저히 그와 한방을 쓰고 싶지 않았다.“거기 서!”문고리를 잡는데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전생에 저런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었는데 지금의 유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강이한은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이혼부터 꺼내는 그녀가 낯설기만 했다.예전의 유영은 삐져 있다가도 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면 다가와서 그의 화를 먼저 달래주었다. “더 할 얘기 있어?”고개를 돌린 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정말 나한테 할 말 없어?”유영은 고개를 저었다.“없어.”등 뒤에서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영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온 강이한이 팔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익숙한 그의 향기와 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하자 유영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어 그의 귀뺨을 쳤다.“더러우니까 저리 꺼져.”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남자는 실망과 분노가 뒤섞인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유영은 힘껏 그를 밀쳤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에 혐오의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생에 한지음이 찾아와서 임신했다고 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매번 그와 마주할 때면 그때 의기양양하게 지껄이던 한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내가 잘해줬잖아.”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어떤 걸 말하는 거야?”“꼭 그렇게 해야 했어?”남자가 재차 그녀를 다그쳤다.지금 강이한은 납치 사건의 범인이 유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10년을 함께한 아내가 한지음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두 눈을
유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강이한은 계속 해서 말했다.“당장 이혼 소송 철회해.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세강의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야.”아침부터 저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해댄 이유가 고작 이혼 소송을 철회하라는 말을 하려고?게다가 솔직히 그가 내건 조건은 꽤 유혹적이었다. 한지음은 어떻게 하려고 저런 조건을 제시한 걸까?유영은 그들 사이에 남은 게 돈밖에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결국 여기까지 왔구나….그녀는 애써 느긋하게 손을 뻗어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초췌한 얼굴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절세의 외모라도 숙취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마치 선심 쓰듯이 말하는 그 태도가 좀 우습네.”두 사람 사이에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강이한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불쾌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그 증거들 다 봤어?”나서원이 가져온 출입금 기록을 말하는 것 같았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며 물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고작 그것들로 협박하는 건가?강이한은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그녀가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드디어 받아들였다.그들은 고등학교 때 만나 사랑을 싹틔웠고 줄곧 결혼까지 함께했다. 수많은 장애물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놓아주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내가 아는 유영이는 현명한 여자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 거야.”그는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녀가 이혼 소송을 제기한 날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금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방치해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그가 뿌린 서류에 스쳐 얼굴에 상처까지 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내가 끝까지 이혼을 고집하면 나를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말로 들리네. 맞아?”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그녀는 조용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사실, 네가 날 보내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날 노린 건 강이한만이 아니었어...”당시 강이한은 여러 번 소은지의 사업을 방해했다. 이유영은 그가 더 강한 수단을 쓸까 두려워 결국 소은지를 파리로 보냈다.그런데 만약 소은지의 말대로라면 당시 엔데스 명우까지 그녀의 사업을 건드리며 괴롭혀 온 셈이다. 그렇다면 이유영은 소은지를 더 위험한 곳으로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너랑 엔데스 명우 사이는...”말을 잇다 멈춘 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속 답답함을 눌렀다.“나랑 그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더 얘기한들 달라질 건 없으니까.이유영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사실 이 문제에 대해 이유영과 소은지는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은지에게는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그리고 이유영은 이 문제를 대하는 소은지의 태도가 자신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특히 소은지가 현우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유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이 세상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소은지밖에 없을 것이다.그건 완전히 엔데스 명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엔데스 명우가 그녀를 짓밟으려 할수록 소은지는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소은지는 파리로 돌아갔다.그리고 이유영은 여전히 우천시에 남아 있었다. 세상은 서주와 파리를 중심으로 혼란 속에 빠져 있었지만 이유영의 곁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그날, 낮잠에서 깨어난 이유영에게 신지수의 전화가 걸려 왔다.전화기 너머로 신지수가 말했다.“요즘 강이한, 뭔가 이상해요.”“어떤 점이요?”“그냥... 모든 걸 놓아버린 사람 같아요.”“...”모든 걸 놓아버린 사람 같다고?아마 신지수의 착각일 것이다. 강이한 같은 사람이 모든 걸 놓아버릴 리 없었다. 그는 항상 더 많이 가지려 했고 더 높은 곳을 원했다.“유영 씨.”“네?”“요즘 강이한이 신탁 관리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수혜자가 전부 유영
소은지가 처한 상황을 생각할수록 이유영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하지만 소은지는 언제나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고 일 처리 방식도 정확하고 단호했다.이유영은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얽힌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말로도 엔데스 명우가 그 자리에 오르는 걸 막으려는 소은지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결국 소은지가 파리로 돌아가려는 건 단순히 현우 때문이 아니라 엔데스 명우 때문이었다.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유영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 그 때문에 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은지야, 엔데스 명우는 정말 위험한 사람이야. 완전히 미친놈이라고!”과거, 설선비 사건 때는 소은지의 목숨을 위협했고 이후 설유나 사건으로 인해 둘은 완전히 원수가 되었다.그렇기에 이유영은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자, 소은지의 눈빛이 깊고 어두워졌다.소은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 차분히 말했다.“유영아, 어떤 미움은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어떤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거야.”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을 넘어선 사람마저 용서한다면 그다음엔 무엇이 남을까? 소은지는 그 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복수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은지야.”“엔데스 명우는 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은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렷이 내뱉었다.소은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건 사실이었다.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 설유나 사건 모두 소은지에게 덮어씌웠고 한 번도 소은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처음 설선비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소은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운명이란 걸.그 남자는 절대 소은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소은지 또한 그가 원하는 자리에 앉는 걸 막을 것이다.“하지만 현우가 이긴다고 해도, 너와 엔데스 명우의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아.”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면 소은지가 어디에 있든 어떻게든 찾아낼
“난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소은지는 이 질문에 유독 집착하고 있었다.이유영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이 집착의 근원을 깨닫고는 조용히 답했다.“그 사람과는 일로만 만났을 뿐이야. 다른 건 잘 몰라.”“...”이유영의 대답을 듣고 소은지는 어쩐지 안도했다.단순한 업무 관계.그렇다면, 더 이상 깊이 알지는 못한다는 뜻이겠지?이유영은 소은지의 미묘한 안도감을 놓치지 않았다.이유영이 가만히 지은 미소 속엔 지울 수 없는 무력감이 스며 있었다.“은지야, 이번 한 번만이야.”이유영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애정과 함께 은근한 꾸짖음도 섞여 있었다.소은지는 순간 멍해졌고 이내 어색한 미소와 미안함이 섞인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나...”“예전에 넌 이런 감정을 드러난 적이 없었는데.”예전? 그때의 소은지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오던 소은지에게 지금과 같은 예민한 감정 표현은 있을 리 없었다.예전 일들을 떠올리자 이유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엔데스 가문이 어떤 곳인지 너도 잘 알잖아. 파리에서는 특히 더 복잡한 가문이고.”“응.”엔데스 가문이 어떤 곳인지 소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떠난 뒤, 가문이 숨겨왔던 복잡한 문제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났고 혼란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이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은지는 단 한 가지 확신했다. 엔데스 명우가 원하는 대로 두지는 않겠다고.엔데스 명우가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았으니까.만약 그가 가문의 우두머리가 된다면 해외로 도망가더라도 편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그가 소은지에게 했던 일들까지 생각하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윙윙윙.”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소은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발신지는 파리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에 소은지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소은지는 복잡
소은지는 이유영의 눈가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복잡한 감정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넌 분명 괜찮아질 거야...”이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소은지의 복잡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 복잡한 감정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이유영은 소은지의 손을 붙잡고 뭔가 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은 결국 삼켜졌다.“은지야.”“응?”“너와 현우...”말을 하다가 이유영은 문득 망설였다.이유영은 소은지가 이렇게 복잡한 감정을 보이는 이유를 현우 때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현우...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소은지는 반사적으로 이유영의 손을 뿌리쳤다.“...”손에서 빠져나간 온기가 낯설었다. 이유영은 소은지의 감정 변화를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소은지가 현우에게 보이는 감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소은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소은지는 언제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감정 때문에 흔들리거나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지금, 소은지의 모든 믿음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은지야.”소은지를 부르는 이유영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유영아, 현우 씨... 어떻게 생각해?”이유영을 바라보는 소은지의 눈빛에는 깊은 탐색의 기색이 가득했다.“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야?”“네 곁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이잖아.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어떤 사람?’이유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소은지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녀는 이유영의 얼굴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작은 표정 변화조차 놓치지 않으려 했다.그리고 이유영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소은지의 불안도 점점 커졌다. 단호하고 거침없는 성격 덕분에 소은지는 언제나 여유로웠고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는 소은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소은지가 감당하고 있는 감정의 크기가 어떠할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잠시 후, 이유영은 소은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은지야, 너... 현우 씨 좋아하는구나.”
“수술하고 나서 두 사람은 평생 만날 수 없게 될 거예요!”“...”소은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이제야 알았다.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과거 강이한이 한지음을 위해 했던 모든 일은 진정한 보답이었다. 보답 외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강이한이 이유영에게 각막을 언급했던 것도, 어쩌면 그저 이유영을 겁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화가 나서 한 말일 뿐, 강이한은 절대 이유영의 각막으로 한지음의 시력을 회복시킬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이유영과 한지음이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강이한의 첫 번째 선택은 염 선생이었지만 최악의 경우, 자신이 평생 어둠 속에서 살더라도 이유영의 시력을 되찾아주려 한 거였다.이 남자의 마음은 너무 깊어서 감정이라는 부분에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그건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에게 속은 것이다.강이한의 분노에 휩싸인 모습에 속았다.한참 뒤, 소은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강이한 씨는 박연준에게 양보했던 거예요?”“이제 와서 누굴 믿겠어요?”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강이한이든 박연준이든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유영의 삶에 진심으로 다가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소은지는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들의 거래 내용은 강이한이 이유영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고 박연준이 이유영의 남은 인생을 함께하는 것이었다.“이유영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다른 건 이유영 마음대로 해도 돼요. 하지만 이 일은 이유영이 결정할 수 없어요.”박연준의 목소리가 깊어졌다.소은지는 침묵했다. 이유영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니...소은지의 머릿속에는 이유영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 이유영은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지만 박연준과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지금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가 되었고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모두 정씨 가문의 배경을 노리고 있을 뿐이었다.박연준과 강이한은 그런 모습을 원하지
그 후로, 소은지는 이유영이 약을 마실 때마다 곁을 지켰다.“어제도 아무런 느낌 없었어?”“...”이유영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소은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너 왜 박연준처럼 그래?”“...”박연준?박연준은 이유영이 약을 다 마시고 나서 매번 이 질문을 했었다.박연준이 돌아왔다.소은지는 박연준과 함께 서재로 향했다. 연서에 대해 알게 된 후로, 소은지는 박연준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박연준은 소은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소은지 씨, 무슨 일이세요?”“강이한 씨와 무슨 거래를 한 거예요?”소은지도 두 사람 사이에 거래가 오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계산과 거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봤어요?”박연준의 목소리는 깊고도 차가웠다.“이유영은 강이한 씨에게 이런 식으로 빚지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이유영이 강이한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만약 이유영이 알게 된다면, 절대 강이한의 각막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차라리 평생 눈이 멀더라도 말이다.“...”빚?“은지 씨가 잘못 생각했어요. 빚진 사람은 우리예요!”박연준은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박연준의 말이 맞았다.빚진 사람은 이유영이 아니였다. 만약 강이한이 이유영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박연준이 강이한을 이용하지만 않았다면, 이유영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사랑을 받으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밝은 미래는 박연준과 강이한에 의해 깨졌다.언제부터였을까? 계산을 일삼던 박연준도 그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결국 사람은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 자신까지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그래도 이유영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소은지는 이유영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박연준의 말처럼 그들이 이유영에게 빚을 졌지만, 강이한이 각막을 제공하고 나서 그 모든 것이 ‘빚 청산’으로 간단히 끝날 수 있을까?
오늘 저녁, 박연준과 이유영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소은지는 과감하게 도망치듯 외출했다.“그러면 안 돼요?”“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조심해야 해요.”“...”이유영을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누가 말 안 해도 조심할 거였다.하지만 현우가 그런 말을 하니, 소은지는 마음이 답답해 났다.현우가 소은지에게 손을 내밀었다.“뭐 하는 거예요?”“같이 가요. 오늘 여기서 자지 말고.”“무슨 뜻이에요?”또 이유영에게 보여주려는 건가?“제가 말했잖아요, 굳이...”“읍!”말을 마치기도 전에 현우는 소은지를 끌어안았고 소은지는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을 받으며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현우의 차에 태워졌다.그리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호텔이었다.화려한 스위트룸을 보고도 소은지는 어리둥절했다.“설마, 본가에서 사람 시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반산월에 있을 때부터 소은지와 현우는 한방을 썼다. 하지만 여긴 우천시다.현우가 소은지의 가는 허리를 감싸안았다.소은지는 현우에게서 느껴지는 무거운 기운을 감지했고 저항하던 몸짓도 멈췄다.“요즘 많이 힘들었죠?”회장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엔데스 가문은 난리가 났다.여섯째 도련님뿐만 아니라 다섯째 도련님, 넷째 도련님, 셋째 도련님, 그리고 큰 도련님까지 모두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엔데스 가문은 파리에서 100년 된 명문가인 만큼 모두가 파리로 모이고 있었다.가문은 잔인한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현우는 아무 말 없이 조명을 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밤을 보냈다.그날 밤, 두 사람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고 결국 소은지는 깊은 잠에 빠졌다.눈을 떴을 때, 현우는 방에 없었다. 그리고 어젯밤...소은지는 침대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소은지와 현우는 부부 관계지만, 그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파트너일 뿐이었다.소은지는 현우와 그렇게까지 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들은 다른 소용돌이에 빠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선 이유영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소은지는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틀림없이 이유영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강이한에 대한 결론이 나 있었다.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강이한에게 있어 이유영은 절대 한지음보다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파리에서.현우와 송연정의 일은 점점 더 커졌고 소은지는 처음에는 그저 지켜보았지만, 며칠 후부터는 아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볼수록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그날 저녁.소은지는 우천시의 야경을 보러 갔다. 정말 멋졌다. 청하시에 있을 때는, 우천시의 야경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이곳만의 특징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밤 직접 보고 나서 그 말이 정말 사실임을 알았다.돌아왔을 때, 마당 앞에 서 있는 차갑고 외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현우였다!현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파리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 그런 데다 그와 송연정의 관계까지 점점 더 심각해지는 마당에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이유영 때문일까?혹시 이유영이 걱정돼서...그런 생각을 하자, 며칠 동안 겨우 진정되었던 소은지의 마음은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불안한 기분이었다.소은지는 현우의 뒤에 서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박연준이 계속 이유영 곁에 지키고 있어요.”현우가 예전에 말했듯이 박연준과 강이한은 지금 이유영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강이한이 지금 여기에 없더라도 박연준이 이유영 곁에 있으니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이유영 곁은 가장 평화로운 곳일 거였다.소은지의 목소리를 들은 현우가 뒤로 돌아섰다. 현우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현우가 많이 야윈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소은지가 반응하기도 전에, 현우는 소은지의 목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으...”아팠다!곧이어 현우의 키스가 쏟아졌다.마치 폭풍처럼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렸다.현우의 감정이 소은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겁고 마치 갇힌 짐승처럼 세
강이한이......소은지는 어떻게 이유영 앞에 나타났는지 몰랐다. 이유영은 은은한 달빛처럼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우아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유영아, 네가 이런 드레스를 입은 건 처음 보네!"소은지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과거 강이한 곁에 있던 이유영은 경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강씨 가문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지만, 강이한은 경제적으로 이유영에게 아낌없이 후했다.이유영이 입고 쓰는 대부분은 명품이었고 그녀는 체구가 작아 강이한은 원피스를 입히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런 전통적인 드레스는 거의 입지 않았다."우지 씨가 사준 건데, 예쁘지?""응, 우지 씨 눈썰미가 정말 좋네."키가 작은 사람이라 해서 전통 드레스를 못 입을 리가 없다. 이유영은 마른 체형이었지만, 전통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렸다. 그 드레스를 입은 이유영은 더욱 빛났고 정말 예뻤다.소은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다 이유영 옆에 앉고는 이유영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유영아.""응?""최근 신씨 가문이랑 강이한이 엄청 얽히던데... 정말 네가 한 거야?""맞아."이유영은 덤덤하게 인정했다."..."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의 갈등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있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에게까지 손을 댄 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이온유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월이가 강이한의 딸인 걸 몰랐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됐다.월이는 이유영의 딸이었다. 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이미 많은 상처를 주고도 아이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하지만 소은지는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고 경악했다.예전에 이유영과 소은지는 강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한지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유영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한지음도 오랫동안 시력을 잃었지만 강이한은 자신의 각막을 한지음에게 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유영한테는 달랐다.“왜 그래?”이유영은 소은지가 말이 없자 눈살을 찌푸렸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