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소은지가 팩스로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이유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사인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이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은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바로 외출했다고 답했다.이유영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팩스로 그의 회사에 이혼 서류를 보냈다. 서류를 확인한 비서가 다급히 그녀에게 연락했다.“사… 사모님, 대표님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만….”“그 사람 도착하면 바로 사인하고 법원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강이한의 비서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영은 전화를 끊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거울 속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누라가 예쁘다고 남자가 한눈을 팔지 않는 건 아니었다.아무리 예쁜 외모라도 질릴 때가 있는 법, 그때가 되면 남자들은 바깥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이유영은 바로 차를 타고 법원 앞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강이한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바로 강이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영상 속 배경을 보니 회의 중인 듯했다.이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 법원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 대체 협의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나타나는 거야?”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쏠렸다.대표님이 이혼? 게다가 재산분할?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잠깐의 통화만으로도 대표가 곧 이혼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30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지.”남자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가는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지금 이혼을 제기하신 거 맞지?”“그렇게 온화한 분도 폭발할 때가 있구나.”“그럼 한 비서는 어떻
이유영은 홧김에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강이한은 그제야 이유영이 단지 기분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줄곧 온화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얌전한 현모양처였다. 정말 화가 나는 순간이 와도 그녀는 혼자 삭히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줄 줄 아는 여자였다.이유영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곧 있으면 법원 직원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야. 일단 서류부터 제출하고 다시 얘기하자.”“이유영!”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강이한은 운전 기사에게 곧장 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어차피 기분이 엉망이라 돌아가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도 무리였다.돌아가는 길, 운전기사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집에 도착한 뒤, 이유영과 강이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이제 얘기해 봐.”“더 얘기할 것도 없어. 말하긴 뭘 말해?”반년 사이 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온 청하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이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이유영, 세강 일가에게 이혼이란 존재할 수 없어. 사별이면 몰라도.”이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착잡한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래서 지난 생에 나를 불에 태워 죽인 거니?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첫 이혼이면 되겠네. 아니면 나가서 죽거나.”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왕의 기질을 타고난 이 남자는 화가 날 때면 항상 이
고용인이 점심식사를 식탁에 올렸다.강이한은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수저를 들지도 않았다.반면 이유영은 우아하게 꼭꼭 씹어서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강이한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오후에 남영에 출장 가야 해. 3일 정도 있을 거야.”그는 며칠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며칠 사이에 기분을 정리하고 다시는 이 불쾌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조용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이유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은 지금도 미치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의 동공이 확 수축하고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저런 모습은 여전히 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이유영은 그제야 과거에도 이날 강이한이 출장 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물론 한지음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돌아왔지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그렇게 해. 마침 오후에 은지 만나서 그 한지음 씨를 찾아가 봐야겠어. 법률적으로 얘기할 것도 있고.”절대 강이한을 출장 가게 둘 수 없었다. 무조건 오늘은 그와 같이 있어야 한다.강이한의 참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에 폭발했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당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내 예전 모습 정말 기억해? 난 당신이 예전에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은 기억나?”뻔뻔하게 과거를 말하다니!강이한은 그제야 반년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녀가 쌓았던 불만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기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잘 참고 있다가 갑자기 이혼이라니!“결국 그 일 때문이구나.”그들 사이에 신뢰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착각이었다니!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와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우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강이한과 한지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과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재촉하던 그의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7년의 달콤했던 연애와 3년간의 결혼 생활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었다.어제 오후, 그녀는 이혼 협의서를 필적 감정 센터로 보냈다. 아침에 깨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해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녀는 소은지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소은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오피스룩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유영이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유영도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강이한과 결혼한 뒤에는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지 않았다.매번 소은지를 만날 때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녀가 부러웠다.“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왜 기다리고 있어?”“고귀하신 우리 세강 사모님이 워낙 비싼 곳을 예약해서 말이지. 회원 아니면 못 들어가잖아.”그 말에 유영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친구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몰랐어.”“장난이야.”소은지는 침울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이한과 함께한 뒤로 이유영은 점차 그의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 갔다.간단히 먹는 아침도 일반 직장인의 한달 월급을 육박했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두고 강이한의 돈 보고 결혼했다고 비난했다.“어쩌다가 생각을 바꾼 거야?”소은지가 커피잔을 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반년 전, 소은지가 이혼을 처음 권유했을 때, 유영은 홧김에 3개월이나 그녀와 연락을 끊은 적 있었다.유영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은지야, 전에는 미안했어. 사실 너한테 화낼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냥 두려웠었어.”그녀는 외부에 전해지는 소문이 진짜일까 봐 두려웠다.10년이나 사랑한 사람을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데 두려운 게 어쩌면 당연했다.소은지는 대수
“유영아, 나 때문에 저런 인간들이랑 싸울 필요 없어. 난 전혀 신경 안 써.”밖으로 나온 뒤, 소은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시댁에서 친구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다.유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야. 곧 이혼할 건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강이한을 위해 시댁에서 아무리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혀도 유영은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시댁의 횡포는 더 심해져만 갔다.핸드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강이한의 연락이었다.“이거 봐. 그새를 못 참고.”유영은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서희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강서희한테 다 들었을 거면서 왜 물어봐? 한지음이랑 둘이 같이 있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래?”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소은지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둘이 언제 이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거야?”전화를 끊고 일분도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영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은지야, 일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없을 것 같아. 나 먼저 갈게.”그녀는 친구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비록 그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을지라도.소은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유영은 차로 돌아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불쾌한 목소리가 전해졌다.“지금 당장 본가로 와.”“싫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뒤,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 뒤로 휴대폰 화면이 여러 번 깜빡였지만 그녀는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살갑게
오후가 되자 강이한이 돌아왔다.그는 오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 한참이나 어딘가로 통화하다가 나왔다. 유영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애착 인형을 품에 안은 뒤, 소파에서 TV를 시청했다.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품에서 인형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유영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한지음이 납치당했다고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가?“왜 이래?”“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그럼 그냥 말하면 되지 인형은 왜 던지고 그래?”강이한도 짜증이 치밀었다. 남편이 얘기 좀 하자는데 그까짓 인형 좀 던졌다고 성질을 낼 일인가?그녀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그를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그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다가가서 앉았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고는 인형을 다시 품에 안았다.“내가 말을 말아야지.”그녀의 이런 행동은 남자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오늘 지음이 만났다고 들었어.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지?”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그래, 전생에도 이런 말투였었지.전생에 한지음이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출장 중에 부랴부랴 돌아와서 지금처럼 범인을 심문하는 태도로 그녀에게 따진 적 있었다.그때 그녀는 어떻게 다른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억울함을 토로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건 나한테 질문할 게 아니라 당신 여동생한테 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그건 또 무슨 소리야?”유영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뭐야? 우리 아직 부부 아니야? 지금 바깥 여자 때문에 날 추궁하는 거야?”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내를 보자 강이한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외부인이 납치를 당했다고 10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추궁하는 꼴이라니!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영아, 한지음이 납치당했어.”“그래서?”“당신은 오늘 한지음을 만났었고.”“그래서?”계속해
“이한 씨한테는 어제 이혼하자고 말했어요. 그러니 회사가 망하든 말든 그건 이제 제 알 바가 아니에요.”시어머니의 맹비난에도 이유영은 느긋하게 대처했다.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지금 뭐라고 했니?”“우리 이혼할 거라고요.”주변 공기마저 싸늘해졌다.며느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시어머니도 그 말을 듣고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어쩐지 아침에 연락했을 때도 태도가 시큰둥하더니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어?반면 이유영은 더 이상 시댁 식구들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강서희에게도 그랬고 시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니 그렇게 속 편할 수가 없었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이 집에서 고용인들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 그들의 구박 때문에 아이도 잃었다.재벌가에서 아이를 임신하면 대우가 좋아진다는 말은 세강 일가에게 통하지 않았다.그들이 한 역겨운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얘기해? 네가 뭔데?”이성을 상실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유영은 듣고 있을 가치조차 안 느껴져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예전의 나약하고 온순하던 이유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더 이상 시댁 식구들의 횡포를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여론은 예상보다 더 빨리 이상한 방향으로 퍼졌다.형사가 저택으로 찾아왔다. 강이한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형사의 뒤를 따라온 강이한을 발견한 순간, 이유영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가 형사에게 뭐라고 했는지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한지음 씨 납치 사건 때문에 참고인 조사가 필요하니 저희랑 같이 가주시죠.”젊은 형사가 그녀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강이한을 쏘아보았다.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더니 말했다.“유영아, 나도 이 사건과 당신이 관련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야.”유영은 냉소를 머금었다.그런 사람이 형사를 집까지 데려와?“10년이야.
조사가 끝나 경찰서를 나오자 밖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강이한과 소은지가 보였다. 강이한은 유영을 발견하자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유영은 그를 무시하고 소은지에게 다가갔다.뒤쫓아 온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데리러 왔어. 집에 가자.”“집?”유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거긴 이제 내 집이 아니잖아.”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분하게 말했다.죽음을 겪고 돌아온 뒤로 어떤 일에도 흥분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전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시의 그녀는 넋이 나간 상태로 경찰서에 불려 와서 3일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소은지가 보석금을 낸 뒤에야 그녀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유영아!”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담담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날카로운 눈매와 높이 솟은 콧대, 그리고 강인한 턱선, 모든 게 그녀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이 정도 외모와 재력을 갖춘 남자라면 결혼을 했더라도 들러붙는 여자가 많은 게 당연했다.처음 그와 시작할 때 그녀도 그의 매력에 푹 빠졌으니까.지금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 잘난 면상에 뜨거운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놔.”아무런 온도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강이한은 그녀가 아직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다.유영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소은지를 향해 다가갔다.강이한은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껴안아 주고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저렇게 작고 나약한데 그들 사이에 무언가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차에 오른 유영의 얼굴은 약간 초췌해 보였다.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더 가늘어져 있었다.소은지는 따뜻한 음료수를 그녀에게 건넸다.“뭐라도 좀 마셔.”“고마워.”유영은 음료수를 받아 힘껏 뚜껑을 비틀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리 줘. 내가 해줄게.”유영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열 수 있어.”어떻
파리는 이유영과 엔데스 신우 사이의 일로 들썩였다. 그리고 지금 서재욱은 이유영의 아이까지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거기에 박연준까지 얽혀 있는 이 상황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파티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서재욱이 물었다.“이 정도면 연우가 나타날 만하지 않겠어요?”오늘 저녁 내내 서재욱과 함께하며 두 사람은 보기에도 제법 잘 어울렸고 주변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이유영은 의심스러웠다.‘정말 이런다고 해서 연우 씨가 모습을 드러낼까?’서재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오늘 고마웠어요.”“연우 씨가 돌아온다면 저도 오늘 할 일 한 거예요.”이유영은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았다. 목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이미 온몸이 더럽혀졌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명예 따위엔 별로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상황에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윙윙윙.”서재욱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리자 그는 이유영에게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화를 받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무의식적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이유영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설마 또 나와 관련된 일인가?’요즘 파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같이 그녀와 관련되어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벅찬데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면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서재욱은 전화를 끊고 급히 다가왔다.“연우 소식이에요. 저기...”“어서 가봐요. 전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김연우가 나타난 걸 봐서 서재욱은 김연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잘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이유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서재욱은 미안한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눈빛이 한층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영 씨,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이제 파리를 떠날 건가요?”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서재욱의 말에 이유영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정말 내가 부정적으로만 생각
‘본인도 연우 씨에 대해 잘 몰랐던 것 아닌가?’이유영은 눈을 피하며 말했다.“연우 씨가 돌아오면 잘 좀 얘기해줘요. 전 남의 남자 뺏는 그런 여우 같은 여자 아니니까.”김연우가 오해할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무서웠다.서재욱은 웃음을 터뜨렸다.“확실해요? 괜히 유영 씨 감싸려다 오히려 불똥만 더 튀는 거 아닐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유영은 눈을 부릅떴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저 두 사람이 장난치는 줄로만 여겼다. 서재욱의 미소는 여유가 있었고 여느 때처럼 매혹적이었다.“애초에 이런 자리에 함께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이유영은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자리에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김연우가 자신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에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그저 출산 전까지는 서재욱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두 사람의 춤은 보기 좋게 어우러졌다.이유영의 작은 체구는 오히려 춤을 출 때 더한 매력을 발했고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다.그때 서재욱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오늘... 셋째 도련님 만났어요?”“어떻게 알았어요?”이유영은 당황했다. 오후 내내 백산 별장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서재욱의 갑작스러운 말은 그녀 안의 무언가를 터질 듯 흔들어놓았다.“몰랐어요?”서재욱이 되물었다.“뭘 말하는 거예요?”‘도대체 뭘 알아야 한다는 거야?’파리는 현재 어느 때보다 불안정했고 예측 불가능한 소문들이 만무했기에 굳이 새삼스럽게 소문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알 필요도 없었다.“지금 떠도는 소문으로 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과 혼인을 추진 중이래요. 상대는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고요.”“소문이 그렇게 퍼졌다고요?”이유영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진 걸까?’셋째 도련님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지혁조차 집 안으로 들이려 하지 않았다.‘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소문이 퍼진 거지?’“셋째 도련님이 회복을 선언했대요
두 사람은 밖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은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반산월조차 절대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었다.간신히 정리한 일인데 벌써 또 시작되고 있었다....지금의 엔데스 가문은 평온한 날이 없었다. 그것이 정국진이 무슨 일이 있어도 엔데스 가문과 얽히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한편 백산 별장에서 임소미는 이유영의 저녁으로 싱거운 음식들을 정성껏 준비해 두었다.그런데 저녁 무렵, 이유영은 밥도 먹지 않고 외출하기로 한 것이다.“어디 가는데?”“친구가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해서요.”“아, 그래?”임소미는 이유영이 밖에서 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삶에 큰 변화를 겪었던 이유영이기에 이럴 때일수록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계속 자책하며 혼자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정국진은 2층에서 조용히 내려왔다.여진우는 오후에 들렀다가 금세 나가야 했기에 저녁 식사는 하지 않을 듯했다.정국진과 임소미, 두 사람은 함께 식탁으로 향했다.“강이한 일, 아는 사람 별로 없죠?”임소미가 조심스레 물었다.“걱정 말아요. 파리 쪽엔 아는 사람 없어요.”강이한이 각막을 이식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그는 임소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절대 알면 안 될 진실을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정국진은 조용히 브로콜리를 임소미의 접시에 덜어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니까.”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결국 어느 순간엔가 드러나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그래도 걱정돼요.”임소미는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곳을 여러 번 찾아왔을 때, 아이를 바라보던 그의 쓸쓸한 눈빛을 떠올리면 마음이 저려왔다.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유영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유영이가 이 사실을 평생 몰랐으면 좋겠어요.”임소미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아이가 상처받을
그동안 가장 유력한 후보는 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였다.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바보로 지내던 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갑자기 회복을 선언하면서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결코 단순한 바보 연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눈빛은 전보다 깊고 낯설었다.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코트를 받아서 들었다.“엔데스 명우는 지금 어디 있어요?”소은지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엔데스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다 알고 있었어요?”“네.”모를 수가 없는 행보였다.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였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지의 마음은 내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은지 씨.”“네.”현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그 조용한 틈 속에 퍼지는 묘한 기운이 오히려 소은지의 마음을 더 흔들었다.“왜 그래요?”현우가 물었다.“셋째 형님이 지금 이 타이밍에 갑자기 회복을 선언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소은지는 짧게 대답했다.“처음부터 바보가 아니었겠죠.”지금 엔데스 가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현우가 피식 웃었고 그 웃음에 소은지는 괜스레 심장이 내려앉았다.“왜 웃어요?”“은지 씨 말이 맞아요. 애초에 바보가 아니었어요.”“그럼 지금 이 상황은...”소은지는 말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 한켠에서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만약 엔데스 신우가 처음부터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은 근본부터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누구도 섣불리 단정 내릴 수 없는 국면이었다.“이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네?”현우는 소은지의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대신 그녀를 바라보며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눈빛을 건넸다.그 시선에 소은지의 마음은 잠시 흔들렸지만 곧 평정을 되
배준석이 떠나기 전, 그는 이유영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남겼다.“그 사람이 유영 씨를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이유영은 배준석의 질문에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 사람과 저 사이에 이제 용서하고 말고는 없어요. 그저 남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죠.”그 말을 내뱉은 후, 이유영은 어둑한 방 안에 앉아 쓴웃음을 흘렸다.“흥!”‘나를 위해 뭘 했는데?’‘강이한이 나를 위해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강이한이 해왔던 모든 일은 결국 연서와 관련된 것뿐이었고 그렇게 연서라는 존재는 이유영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들 사이에 쌓인 모든 순간은 언제나 다른 여자인 연서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이유영을 위해서라면 강이한이 무슨 짓이든 할 거라던 배준석의 말을 되새기며 입가에 다시 한 번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유영을 위해 했다는 강이한의 모든 행동은 그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그날 오후, 이유영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그 사이 바깥세상은 요란하게 술렁였다. 이유영이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과 만났다는 소식이 퍼져 나간 것이다.상류 사회는 단숨에 떠들썩해졌고 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과 혼인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쏟아졌다.하지만 그 결혼 상대는 예상밖의 인물이었고 함께 전해진 소식으로는 엔데스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완전히 회복이라니, 그는 애초부터 바보였던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그 시각, 풍산 그룹의 서재에서 박연준이 분노에 찬 손으로 휴대폰을 책상에 내리쳤다.“쾅!”남자의 눈빛은 한겨울 밤처럼 짙고 어두웠다.문기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그 셋째 도련님이 설마...”말끝을 흐린 채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았다.박연준은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렸다.“흥!”박연준의 기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그 안엔 억눌린 분노가 또렷이 맴돌았다.
배준석은 이유영이 어떤 밤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 사람이 말한 거예요?”“이유영 씨!”“그 사람이 배준석 씨한테 아이를 없애 달라고 했어요?”배준석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아이 문제는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서 가장 깊고 아픈 상처였기에 그 이야기가 나오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아팠다.“유영 씨.”배준석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하다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배준석은 이미 알 것도 같았다.한때 온화하기만 했던 이 여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변해버렸는지를.“그런데도 제가 그 사람을 계속 궁금해해야 하고 관심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이유영은 강이한과 관련된 것들이라면 그녀의 인생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강이한은 서주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많은 이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유영은 속이 후련했다.강이한이 사라지고 나서 비로소 이유영의 인생이 안정된 것만 같았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도...”“준석 씨, 설마 그 사람이 저를 사랑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이유영은 그의 말을 무정하게 잘라 버렸고 배준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유영이 말한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 차갑고 아프게 들려왔다.“연서, 알고 있죠?”배준석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이유영은 그 침묵에서 알 수 있었다.연서가 강이한에게 어떤 존재인지, 사실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고 심지어 한지음보다도 더 중요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결국 그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속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도 그 사람이 저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사랑이라는 말은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서 참 무거운 단어였다.그렇게 숱한 일을 겪고서 이제야 이유영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어둠 속에서 살게 된 강이한을 떠올리며 배준석은 문득 이유영이 너무 무정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강이한은 서주에서 사라졌고 그가 어딨는지 아무
배준석이 돌아왔다.용성시에서 돌아온 뒤로 배준석은 이유영 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한때 배준석은 마음에 품은 여인을 둘러싸고 이유영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검진을 마친 뒤, 배준석이 말했다.“회복은 잘 되고 있지만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시력을 수술로 되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배준석의 말에는 단순한 의학적 조언을 넘어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듯한 씁쓸함이 배어 있었고 이유영은 그 속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배준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연히 잘 관리해야죠.”이유영이 담담하게 말했다.전생이든 이번 생이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번 생에 겪었던 고통은 특히 더 절망적이었는데 전생의 수천 배는 될 터였다.아이가 없을 때에 비해 아이가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커가는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힘겹게 되찾은 시력인 만큼 더 소중히 여기며 관리해야 했다.“이유영 씨.”“네?”“그 사람한테 이제 아무 관심도 없는 거예요?”배준석은 깊은 눈빛으로 이유영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이유영은 고개를 돌렸다.배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배준석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이유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제가 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그 말투에는 단호함보다 차가움이 앞섰다.강이한의 이름만 나와도 이유영의 말투는 도저히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진다.배준석은 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음에 놀라며 물었다.“서주에서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알고 싶지도 않은데 어떻게 관심을 가져요?”배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의 차가운 말이 그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배준석은 순간 말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서재에서 나오자 여진우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그의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분명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러나 이유영을 보는 순간, 그는 차가운 표정을 지우고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여진우의 이상함을 알 수 있었다.“언제 돌아왔어?”여진우가 손목시계를 보며 물었다.“방금.”“그 사람, 만났어?”“누구?”그 말을 뱉고 여진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엔데스 신우 때문에 돌아왔음을 직감했다.더블루 리버스에서 마주한 엔데스 신우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바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그 순간, 이유영은 파리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 여진우가 돌아온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온 것이 분명했다.이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 가고 싶지 않았어...”떠나기 전부터 이미 엔데스 셋째 도련님일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처럼 이런 간교한 방법으로 이유영을 끌어들인 걸 봐서 그녀가 찾아가지 않았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넌 먼저 월이한테 가 봐.”여진우는 짧게 말하고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그때, 이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고 여진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왜?”“우리... 파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정씨 가문과 로열 글로벌 그룹 전체를 의미했다.말이 끝나자 복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오늘 엔데스 신우를 만나고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깊은 연관성을 깨달은 후, 이유영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엔데스 가문의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정씨 가문도 결코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떠나고 싶었다.파리는 이제 너무 위험했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이었고 이유영은 정씨 가문의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얽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겉으로는 조용했던 정씨 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셋째 도련님을 만난 후, 이유영은 그 아래에 도사린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돌아온 이유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요즘은 스튜디오에 가지 마. 집에 조용히 있어.”“네.”지금은 정국진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유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손에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고 정국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셋째 도련님이 준 거야?”그 이름을 듣자 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어머니가 언급했던 전화도 아마 셋째 도련님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정국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안의 서류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두껍지는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쾅!”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순간 정국진은 서류를 힘껏 책상 위에 내리쳤다.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기마저 흔들 듯 강렬했다. 평소 어떤 일이 있어도 임소미와 이유영 앞에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은 셋째 도련님의 변화에 신경이 쏠려 서류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의 정국진의 반응을 보며 그녀가 가져온 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이유영이 앞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려 하자 정국진이 손을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보지 마.”“아빠.”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오는 길에 미리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됐고 정국진의 반응에 더욱 보고 싶어졌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엔데스 셋째 도련님이 외부에 바보로 알려진 세월이 길었던 만큼 결코 단순한 사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정국진은 단호하게 말했다.“너 먼저 나가 있어.”이유영은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