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익숙한 하이힐 소리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한지음!강이한의 첫사랑이자 그녀의 망막을 가져간 여자.유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고용인 부를 필요 없어. 내가 이미 불렀으니까.”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말투.“여긴 왜 왔어?”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모든 걸 잃은 그녀에게 또 뭘 바라고 온 것일까?한지음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전해줄 말이 있어서 왔어.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들을래?”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너 임신했더라.”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한지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이한 씨는 이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임신했거든.”쿵!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유영의 얼굴에 금이 갔다.‘강이한, 이런 거였어?’혈색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여자는 자랑하러 온 것이다. 이미 모든 걸 잃었는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내고 싶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어제 그 사람한테 내가 이혼하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그 말을 들은 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유영도 그녀의 기분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망막까지 빼앗아 가고 임신까지 했는데 그래서 뭐? 그이는 네가 이 집의 안주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나 봐.”강이한을 좋아해서 한지음을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에게 더 이상 짓밟히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다.강이한과는 이미 끝내기로 했지만 집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도발하는 여자에게 가만히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하, 그래서 이한 씨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악!”유영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피부에서 아직도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남자의 거친 손이 다가와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꿈꿨어? 조금만 더 자자.”유영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이한의 준수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유영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앞이 보여? 이게 어떻게 된 거지?’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창문이 보였다.천장, 커튼, 그리고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설마?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보니 화재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회귀… 한 건가?강이한은 뒤척이는 소리에 불만스럽게 눈을 떴다.“아침부터 왜 이래?”그러거나 말거나 유영은 핸드폰에 찍힌 날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납치하기 전 날로 돌아와 있었다.“당신 왜 그래?”그녀의 이상한 반응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유영은 남자를 내버려두고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화상 자국이 있어야 할 팔뚝도 말끔했다.아직도 불길이 자신을 덮친 그날의 느낌이 생생한데 그녀는 그 사고가 있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유영은 바닥에 앉아 양팔로 자신을 껴안고 중얼거렸다.“유영아, 하늘이 널 불쌍히 여겨 기회를 준 거야.”욕실을 나선 유영은 침대로 다가가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우리 이혼해.”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에 강이한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지금 뭐라고 했어?”“은지한테 부탁해서 이혼 서류 준비시킬 거야. 못 믿겠으면 당신도 변호사 불러.”“대체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야?”강이한은 이 상황이
잠시 후, 소은지가 팩스로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이유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사인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이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은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바로 외출했다고 답했다.이유영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팩스로 그의 회사에 이혼 서류를 보냈다. 서류를 확인한 비서가 다급히 그녀에게 연락했다.“사… 사모님, 대표님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만….”“그 사람 도착하면 바로 사인하고 법원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강이한의 비서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영은 전화를 끊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거울 속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누라가 예쁘다고 남자가 한눈을 팔지 않는 건 아니었다.아무리 예쁜 외모라도 질릴 때가 있는 법, 그때가 되면 남자들은 바깥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이유영은 바로 차를 타고 법원 앞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강이한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바로 강이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영상 속 배경을 보니 회의 중인 듯했다.이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 법원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 대체 협의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나타나는 거야?”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쏠렸다.대표님이 이혼? 게다가 재산분할?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잠깐의 통화만으로도 대표가 곧 이혼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30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지.”남자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가는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지금 이혼을 제기하신 거 맞지?”“그렇게 온화한 분도 폭발할 때가 있구나.”“그럼 한 비서는 어떻
이유영은 홧김에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강이한은 그제야 이유영이 단지 기분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줄곧 온화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얌전한 현모양처였다. 정말 화가 나는 순간이 와도 그녀는 혼자 삭히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줄 줄 아는 여자였다.이유영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곧 있으면 법원 직원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야. 일단 서류부터 제출하고 다시 얘기하자.”“이유영!”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강이한은 운전 기사에게 곧장 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어차피 기분이 엉망이라 돌아가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도 무리였다.돌아가는 길, 운전기사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집에 도착한 뒤, 이유영과 강이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이제 얘기해 봐.”“더 얘기할 것도 없어. 말하긴 뭘 말해?”반년 사이 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온 청하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이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이유영, 세강 일가에게 이혼이란 존재할 수 없어. 사별이면 몰라도.”이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착잡한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래서 지난 생에 나를 불에 태워 죽인 거니?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첫 이혼이면 되겠네. 아니면 나가서 죽거나.”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왕의 기질을 타고난 이 남자는 화가 날 때면 항상 이
고용인이 점심식사를 식탁에 올렸다.강이한은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아 수저를 들지도 않았다.반면 이유영은 우아하게 꼭꼭 씹어서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이혼하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여자가 이러고 있으니 강이한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전화를 끊은 그가 말했다.“오후에 남영에 출장 가야 해. 3일 정도 있을 거야.”그는 며칠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며칠 사이에 기분을 정리하고 다시는 이 불쾌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를 바랐다.조용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이유영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은 지금도 미치게 아름다웠다.강이한의 동공이 확 수축하고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결혼하고 3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저런 모습은 여전히 그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이유영은 그제야 과거에도 이날 강이한이 출장 갔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물론 한지음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랴부랴 돌아왔지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그렇게 해. 마침 오후에 은지 만나서 그 한지음 씨를 찾아가 봐야겠어. 법률적으로 얘기할 것도 있고.”절대 강이한을 출장 가게 둘 수 없었다. 무조건 오늘은 그와 같이 있어야 한다.강이한의 참고 있던 분노가 그 순간에 폭발했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야? 당신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내 예전 모습 정말 기억해? 난 당신이 예전에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당신은 기억나?”뻔뻔하게 과거를 말하다니!강이한은 그제야 반년 동안 침묵만 지키고 있던 그녀가 쌓았던 불만을 한 번에 터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을 믿어줄 거라 생각했기에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잘 참고 있다가 갑자기 이혼이라니!“결국 그 일 때문이구나.”그들 사이에 신뢰는 굳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착각이었다니!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와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우린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강이한과 한지음이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과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재촉하던 그의 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7년의 달콤했던 연애와 3년간의 결혼 생활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었다.어제 오후, 그녀는 이혼 협의서를 필적 감정 센터로 보냈다. 아침에 깨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해서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녀는 소은지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소은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정한 오피스룩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유영이 기억하는 모습과 똑같았다. 이유영도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강이한과 결혼한 뒤에는 한 번도 저런 옷을 입지 않았다.매번 소은지를 만날 때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녀가 부러웠다.“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왜 기다리고 있어?”“고귀하신 우리 세강 사모님이 워낙 비싼 곳을 예약해서 말이지. 회원 아니면 못 들어가잖아.”그 말에 유영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친구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몰랐어.”“장난이야.”소은지는 침울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강이한과 함께한 뒤로 이유영은 점차 그의 세상에 완벽히 적응해 갔다.간단히 먹는 아침도 일반 직장인의 한달 월급을 육박했다.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두고 강이한의 돈 보고 결혼했다고 비난했다.“어쩌다가 생각을 바꾼 거야?”소은지가 커피잔을 들며 느긋하게 물었다.유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런 생각이 떠올랐어.”반년 전, 소은지가 이혼을 처음 권유했을 때, 유영은 홧김에 3개월이나 그녀와 연락을 끊은 적 있었다.유영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은지야, 전에는 미안했어. 사실 너한테 화낼 게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냥 두려웠었어.”그녀는 외부에 전해지는 소문이 진짜일까 봐 두려웠다.10년이나 사랑한 사람을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데 두려운 게 어쩌면 당연했다.소은지는 대수
“유영아, 나 때문에 저런 인간들이랑 싸울 필요 없어. 난 전혀 신경 안 써.”밖으로 나온 뒤, 소은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시댁에서 친구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다.유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야. 곧 이혼할 건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강이한을 위해 시댁에서 아무리 자신을 무시하고 괴롭혀도 유영은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들도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시댁의 횡포는 더 심해져만 갔다.핸드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강이한의 연락이었다.“이거 봐. 그새를 못 참고.”유영은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서희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강서희한테 다 들었을 거면서 왜 물어봐? 한지음이랑 둘이 같이 있던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래?”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대답도 듣지 않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소은지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둘이 언제 이 정도로 사이가 나빠진 거야?”전화를 끊고 일분도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영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은지야, 일하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없을 것 같아. 나 먼저 갈게.”그녀는 친구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비록 그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을지라도.소은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유영은 차로 돌아가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불쾌한 목소리가 전해졌다.“지금 당장 본가로 와.”“싫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뒤,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 뒤로 휴대폰 화면이 여러 번 깜빡였지만 그녀는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저택으로 돌아오자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살갑게
오후가 되자 강이한이 돌아왔다.그는 오자마자 서재에 틀어박혀 한참이나 어딘가로 통화하다가 나왔다. 유영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애착 인형을 품에 안은 뒤, 소파에서 TV를 시청했다.남자가 다가와서 그녀의 품에서 인형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유영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한지음이 납치당했다고 지금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가?“왜 이래?”“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그럼 그냥 말하면 되지 인형은 왜 던지고 그래?”강이한도 짜증이 치밀었다. 남편이 얘기 좀 하자는데 그까짓 인형 좀 던졌다고 성질을 낼 일인가?그녀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도 그를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그는 씩씩거리며 소파에 다가가서 앉았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고는 인형을 다시 품에 안았다.“내가 말을 말아야지.”그녀의 이런 행동은 남자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오늘 지음이 만났다고 들었어.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지?”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그래, 전생에도 이런 말투였었지.전생에 한지음이 납치당했을 때도 그는 출장 중에 부랴부랴 돌아와서 지금처럼 범인을 심문하는 태도로 그녀에게 따진 적 있었다.그때 그녀는 어떻게 다른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억울함을 토로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건 나한테 질문할 게 아니라 당신 여동생한테 가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그건 또 무슨 소리야?”유영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당신이 나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뭐야? 우리 아직 부부 아니야? 지금 바깥 여자 때문에 날 추궁하는 거야?”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내를 보자 강이한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외부인이 납치를 당했다고 10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추궁하는 꼴이라니!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유영아, 한지음이 납치당했어.”“그래서?”“당신은 오늘 한지음을 만났었고.”“그래서?”계속해
모이산의 코코넛 주스는 유명해서 파리 수도에서도 판매될 정도였다. 임소미도 피부에 좋다며 코코넛 주스를 즐겨 마셨다.“정말 신선하고 은은한 맛이네!”“원액 그대로라서 그래. 원래 이런 맛이야.”이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정말 맛있어.”코코넛 주스의 맛은 확실히 좋았다. 적어도 이제는 익숙해진 맛이었다.예전에는 하얀 색감과 끈적한 질감이 부담스러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이곳의 코코넛 주스는 맑고 달콤했다. 마치 자연 그대로의 신선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멀리서 강이한과 박연준이 광장 한가운데 펼쳐진 캠프파이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제 가야 해?”강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난 먼저 갈게.”박연준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듯했다.“안 가봐?”강이한이 물었다.“여진우가 곁에 있으니까. 이유영은 내가 안 가는 걸 더 좋아할 거야.”박연준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강이한은 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실 박연준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박연준을 마주할 때마다 냉정했고 그의 접근을 극도로 거부하는 태도는 박연준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다행히도 유영이의 곁에는 정씨 가문이 있어.”강이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박연준도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정씨 가문이 있었다.강이한은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이유영은 어둠 속에서 혼자 남겨졌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용감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가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면서도 이유영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다.한 번 넘은 선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듯,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단한 갑옷을 두른 채 자신을 지켜냈다.강이한은 돌아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 만약 나와 유영이 사이에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그럼에도 박연준은 이해했다.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강이한은 온 힘을 다해 이유영을 붙잡았을
“나랑 이유영이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미래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포기할게.”강이한은 여진우의 품에 안긴 이유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온전히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박연준의 가슴은 답답하게 조여오고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저녁노을은 붉은빛을 띠며 마치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아름다웠다. 강이한은 저 붉게 물든 노을처럼 이유영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마음 깊이 새겼다.“내가 왜 수술을 내일로 잡았는지 알아?”“...”“나는 해 뜨는 아침의 유영이를 보고 싶었어. 희망 속에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아침 해는 희망을 상징한다.그는 이유영이 희망 속에서 빛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네 곁에 그렇게 오래 있을 동안 그런 모습 한 번도 보지 못했어?”“유영이에겐 절망의 순간들이 너무 많았어.”강이한의 말에 박연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강이한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지난 시간 동안, 이유영은 강이한 곁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고 그 절망은 결국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그 어떤 상황도 그 절망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내일 수술이 끝나면, 그녀의 미래는 희망으로 채워질 것이며 비로소 진정한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강이한은 떠났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우지와 우현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유영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여진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했고 이유영은 모닥불이 뿜어내는 따스한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다.“입 벌려.”옆에서 여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할 수 있어!”“입 벌려!”여진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결국 이유영은 조용히 입을 벌렸고 여진우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구운 고기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고
여진우의 품에 안기자 이유영은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정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부터 이유영은 이런 안정적인 가족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위로를 받고 있었다.“수술은 언제로 잡혔어?”“내일.”“그러면 여기서 같이 있어 줄게.”“좋아.”여진우가 곁에 있어 준다는 말에 이유영의 불안은 잦아들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더욱 꽉 껴안았다.그는 이유영이 겪은 진짜 어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수술이 성공해도 그 고통은 평생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맞은편 건물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은 나란히 서서 여진우 품에 안긴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이한의 눈에는 슬픔과 씁쓸함이 서렸고 목소리는 이미 쉰 듯했다.“나는 유영이의 세상에 나만 있다고 생각했어.”“그래서 평생 너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유영은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믿어왔다.하지만 결국, 강이한의 생각은 틀렸다.이유영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강이한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그녀 곁에 가족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상 용서는 거의 불가능했다.“내일 이후로...”박연준은 말을 멈추었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내일 이후로 어떻게 될까?내일 이후, 그는 이유영이 견뎌온 그 숨 막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내일 이후... 박연준, 유영이 곁에는 이제 네가 유일해!”강이한은 진심으로 결심했다.이유영을 떠나 박연준을 우천시로 보냈을 때부터 그는 이미 완전히 결심했다.이유영의 곁에서 떠나기로.“너 정말...”박연준은 불안한 마음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예전부터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 말해왔다.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있었던 걸까?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그는 한때, 이유영과의 관계가 이렇게 변할 거
1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그 10년 동안 그녀와 강이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이유영만이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수많은 달콤한 순간들은 오히려 더 깊은 아픔이 되어 되돌아왔다.“7년의 장기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그런 경우는 드물었다.그녀와 강이한은 그 7년 동안 정말 달콤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고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굳이 말하자면 그 7년 동안 그녀가 겪었던 불쾌한 일은 오직 강씨 가문뿐이었다.하지만 결혼 전 그들의 추억이 모두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결혼하고 나서 많은 것들 이 변했다.“우리가 결혼하게 된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이었다는 걸, 난 상상도 못 했어...”그런데 어떻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인생에서 청춘은 고작 십 년에 불과하다.자기의 모든 청춘을 강이한에게 바쳤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당연히 견딜 수 없었다.여진우가 물었다.“연서 말하는 거야?”“그래, 연서!”요즘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심지어 밤의 악몽에서까지 존재했던 이름이었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10년 동안, 나는 그 사람 그림자에 불과했어!”태양처럼 빛나던 소중한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었다.여진우는 위로하려던 말을 다시 한번 억눌렸다. 지금 이유영에게 어떠한 말도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결코 박연준과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이한은 그녀에게 가장 빛나는 청춘을 주었고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구원자처럼 나타났다.결국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소중하게 여겼던 청춘은 결국 타인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박연준은 그녀의 청춘을 무너뜨린 뒤 지옥으로 끌어냈다.“처음부터 나 혼자 견뎌냈어...”이유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그녀가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는 사실이었
이유영은 침묵했다.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 이유영의 모습에 여진우조차도 그녀의 마음속 생각을 알 수 없었다.여진우는 등나무 의자를 끌어 그녀 옆에 앉았다.“파리는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그래서?”“이번에 돌아갈 때, 지난번처럼 그렇지 않을 거야.”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관심이 섞여 있었다.“...”이유영은 지난번을 떠올렸다.그건 엔데스 명우의 사건과 얽힌 일이었다. 사실 그 일은 정씨 가문에서 걱정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엔데스 가문은 정국진이 절대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는 가문이었고 그래서 이유영이 그 일에 휘말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은 현재 박연준과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것이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었다.“알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어.”잠시 후, 이유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알아줘서 다행이야. 아버지는 항상 너를 걱정하고 있어. 모두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그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 씁쓸함이 번져갔다.그녀는 결국 가족들에게 가장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런 일은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이런 현실을 깨닫고 이유영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내가 모두를 실망하게 했어!”이 말을 하며 이유영의 가슴은 더욱 괴로웠다.“너는 잘못한 것이 없어.”잘못한 것이 없다고?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로 인해 세 사람의 얽힘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일까?모든 것을 계산한 박연준이 잘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사람의 마음과 감정은 계산할 수 없다.강이한의 잘못이 더 클까?그도 당연히 잘못이 있었다.“유영아.”“응?”“오빠 말 들어. 그만 놓아줘!”여진우는 고독해 보이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관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증오일까?물론 증오했다!강이한이나 박연준이 그녀에서
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를 곤란에서 구해주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다 연서 때문이잖아!”‘연서’라는 두 글자에서 이유영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박연준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그렇지 않았다.하지만 이유영의 분석 속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진 사실처럼 여겨졌다.지금 이유영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고 그와 강이한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모두 연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녀에게 쏟는 모든 마음도 연서에게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박연준, 기억해! 나는 이유영이야!”“...”“내가 받는 너의 호의는 연서에게 전달되지 않아!”이유영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알아, 나도 다 알고 있어!”박연준은 씁쓸한 목소리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언제부터 알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이미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네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네가 모르길 바랄 뿐이야!”박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고 있더라도 이유영은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게 지금의 이유영이다.“아직 할 이야기 더 남았어?”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며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조금 전에 박연준이 이야기하자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유영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지금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마음속에는 더욱 깊고 섬세한 아픔이 퍼져갔다.이유영의 웃음 속에 비꼬는 의미가 더욱 강해졌다.박연준은 이유영의 그런 웃음을 보며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그들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숲속 길에 한 인물이 나타났다. 여진우였다. 그가 왜 여기에 오게 된 걸까?여진우를 보자 박연준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여진우는 이미 테라스로 올라갔다.이유영은 발소리를 듣고 미
박연준은 이유영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과거에 강이한과 이유영의 삶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했든, 그는 강이한을 변호하고 싶었다.“유영아, 사실은...”“내가 너희들이 연서 때문에 내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유영아!”“텅 비었어!”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격렬한 감정이 이유영의 마음을 휩쓸었고 이유영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상황으로 오게 된 것일까?이유영은 믿을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7년 동안, 그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아?”이유영은 증오가 아닌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하지만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었을까?지금 생각해 보니, 있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이러니했다.이유영은 비웃으며 말했다.“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한지음이 나타났을 때, 그래서 한지음이 우리의 관계를 건드렸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랐지.”7년 동안, 강이한은 이유영을 얼마나 사랑했을까?강이한이 이유영의 세상에 나타난 순간부터, 마치 이유영을 수렁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보였다.그는 이유영의 세상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그 존재가 얼마나 두려운지 아무도 몰랐다.“유영아.”박연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박연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영은 계속해서 말했다.“그는 매일 나와 함께 저녁을 먹었어. 매일 나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었지. 명절에도 그는 집에 가지 않았어. 그는 내 곁에 있었고 가족이 없었던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어.”그 당시 이유영은 아무것도 없었고 강이한은 강인한 모습으로 이유영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박연준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그는 강이한이 이유영의 세상에서 그런 존재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나를 여행에 데려갔어. 내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가 주었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이름만
하지만 이유영은 공기 중의 기운을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우지는 얼굴이 굳어졌다.이유영의 후각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예민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냄새에는 매우 민감했다.우지는 이유영을 위해 옷을 조심스럽게 골라주었다.“아가씨, 다 느끼셨죠?”그렇다. 이유영은 이미 알고 있었고 눈살을 찌푸렸다.우지는 이유영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옷 갈아입혀 줘요.”이유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우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 이유영의 기분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강이한이 왔었고 방에는 그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유영은 그 냄새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왜 온 걸까?아침 식사 자리에서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음식을 정성스럽게 덜어주었다.“수술은 내일이야. 오늘은 맛있게 먹어. 내일은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니까.”수술 전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수술 후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식욕이 없을 것이다.이유영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조용히 식사했고 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말을 멈췄다.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햇살이 좋으니, 햇볕을 좀 쬐자.”박연준은 이유영을 테라스로 데려갔고 따뜻한 햇살이 이유영에게 내리쬐자 이유영의 마음도 좋아졌다.“유영아.”“응.”“얘기 좀 할까?”박연준은 고민하다 이유영에게 말했다.“우리 사이에 할 얘기 없어.”항상 그랬다.박연준이 말을 하려고 하면 이유영은 항상 지친 모습을 보였다.박연준은 많은 말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내일은 수술 날이었고 박연준은 마음속에 억눌렀던 말들을 터트렸다.“너와 강이한 사이는 정말 이대로 끝인 거야?”더 이상 기회는 없는 걸까?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을 듣자, 이유영은 손을 꽉 쥐었고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박연준은 이유영의 반응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의 관계는 명확했다.“그 사람, 어젯밤에 왔어?”“응.”“박연준, 너희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과거의 기억은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팠다.그래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 모두 직면하기 힘들다. 아름다움과 함께 불행이 동반되기 때문이다.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의 과거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무거웠고 그 무게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사실 나는...”“연준아!”“...”‘연준아’라는 한 마디가 그의 모든 원망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던가?과거 서주에서 그들은 어떤 존재였던가?만약 그들이 연서 때문에 갈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주는 이렇게 되었을까?그들의 연합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고 누구도 그들로부터 비열한 이익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잘 돌봐줘.”강이한은 오랜 시간 담배를 깊이 들이켠 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렀다.박연준이 이유영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강이한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심하고 이유영을 박연준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그와 이유영 사이에는...사람은 너무 진실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진실하게 생각하다 보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받아들일 용기도 잃게 된다.그는 이유영이 자신에게 가진 혐오감을 보았고 그로 인해 얽히고 싶다는 용기조차 잃었다.만약 이유영이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그는 그녀의 눈 속에서 자신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뚜렷이 볼 수 있을 것이다.그것들은 그가 그녀의 세계에서 저지른 악행의 증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것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그녀의 눈 속에 있는 혐오감은 그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을 또다시 불편하게 할 수 없었다.“그리고, 유영이를 존중해줘!”강이한은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박연준이 이유영의 마음속에 들어가길 바랐다. 현재 이유영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 누구도 진심으로 그녀를 대할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정씨 가문도 마찬가지고 그와의 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녀 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