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그의 말에 갑자기 경계했다.‘안 온다고?’솔직히 민도준은 지금껏 오거나 안 온다는 걸 그녀에게 미리 말했던 적이 없다.하지만 마음속으로 다른 일을 꾸미고 있어서 그런지 민도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한참 동안 끙끙댔다.그런데 또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자면 모레 약혼이 있으니 내일 바쁜 건 당연했다.더욱이 그녀가 도망칠 때 민도준이 없다면 오히려 더 편리할 뿐이다.‘하지만…….’권하윤은 고개를 돌려 어둠에 가려진 민도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만약 내일 안 오면 오늘이 마지막 밤이겠네.’아마 앞으로 두 사람은 다시는 이처럼 같은 침대에 누워있지 못할 거다.그렇게 한참 멍하니 있을 때, 남자의 팔이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꽉 조였다.“잠이 안 와?”곧 헤어질 때가 와서인지 권하윤은 모처럼 순종적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긴 머리카락은 그의 어깨를 따라 축 흘러내려 침대 위에 흐트러졌다.“네.”짤막한 대답을 한 뒤 권하윤은 민도준이 또 다른 생각을 할까 봐 얼른 말을 보탰다.“내일 성공하지 못할까 봐 겁나서요.”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윤 씨도 겁날 때가 있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가 도준 씨처럼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줄 아세요?”민도준은 그녀의 심술 섞인 한 마디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꼬집었다.이윽고 그녀가 간지럼을 타며 피하려 할 때 다시 품속으로 끌어들였다.“난 하윤 씨가 겁 없는 줄 알았는데.”“아니거든요.”“아니라고?”“겁 없이 행동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예요…….”권하윤은 잠이 밀려왔는지 뒷말을 흐렸다. 오늘 하루 너무 지쳤는지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비몽사몽한 상황에서 그녀의 귓가에는 남자의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다음날, 권하윤이 눈을 떠보니 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놀란 나머지 허둥지둥 준비를 마치고 옷을 입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곧바로 문을
권씨 저택에서 나온 권하윤은 곧바로 여고를 찾아갔다.그렇지 않아도 요즘 매일 찾아오는지라 그녀를 본 권효은은 놀란 기색이 전혀 없었다.“오늘 신입생 심사를 해야 하는데 내가 좀 바빠서 그러니 오늘은 네가 따라가 봐.”“네, 언니.”그녀가 왜 따라갈 수 없는지 알고 있었기에 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대화가 끝났는데도 권하윤이 여전히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권효은은 이내 인내심이 바닥난 듯 입을 열었다.“또 무슨 일 있어?”“전에 저와 가족이 재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나서요…….”권효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네 가족을 요양원에서 빼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이모가 눈치챌까 봐 아무래도 기회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그녀의 대답에 권하윤은 놀랍지도 않았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권효은이나 권미란이나 모두 같은 부류 사람이니까.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약점을 쉽게 놓칠 리가 없었다.다행히 권하윤은 그녀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기에 그저 일부러 잔뜩 서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낮게 중얼거렸다.“언니 말대로 할게요.”“착하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미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꼭 도와줄게. 먼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해야 할 일만 생각해.”“네. 믿을게요. 그런데…… 저 내일 가족 보러 가고 싶은데 언니가 대신 말 좀 잘해줄 수 있어요? 저 정말 가족들 걱정돼요.”이미 한번 거절한 권효은은 작은 요구마저 거절할 수 없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뭐 큰일이라고. 내가 요양원 쪽이 미리 말해둘 테니 네 출입을 막지 않을 거야.”심지어 그녀를 회유하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전화했다.이에 권하윤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야 사무실을 떠났다.-어느덧 오후가 되어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신입생 심사를 하러 간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최설아를 만났다. 하지만 어디에도 임주빈은 없었다.이에 남몰래 그녀에게 어디에 있는지 문자를 보냈더니 [쥐구멍]이라는 답변을 받게 되
이미 안을 이 잡듯 헤집은 장 형사는 권하윤의 말에 이내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그러고는 다시 방 하나하나, 심지어 모든 벽면까지 두드리며 수색하기 시작했다.방마다 일상생활에서 보지 못할 법한 잔인한 도구들이 즐비해 있어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아무런 증거도 잡지 못한다면 결과는 그저 모든 사람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권하윤도 그 사실을 앓았기에 차 안에서 기다리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솔직히 이번 체포에 성공한 건 상대가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기습한 덕분이다. 하지만 점점 시간을 끌면 끌수록 권씨 가문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은 더 많아질 테고 일이 더 복잡해질 거다.게다가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불안해 임주빈에게 한번 또 한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화는 계속 통하지 않았다.한편 장 형사도 권하윤의 재촉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갑자기 클럽 안쪽에서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건물 내부에 있던 경찰들은 두리번거리면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고 그러던 그때 또다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한 형사가 머리 위를 가리키며 다급히 소리쳤다.“팀장님!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 다락방이 있습니다!”시간을 오래 끈 바람에 밖에 정보가 새어 나갈 우려가 있어 형사들은 꼼꼼히 입구를 찾을 겨를이 없었다.이에 장 형사는 결심을 내린 듯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폭파시켜!요란한 폭파 소리는 건물 밖에까지 전해졌다.이런 폭파는 그저 벽을 허물기 위함이기에 적당한 양의 화약만 사용되었지만 권하윤은 그 소리에 학교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을지 걱정했다.그로부터 몇 분 뒤, 형사들에게 들려 밖으로 나오는 임주빈을 보는 순간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임주빈의 검은 머리는 이미 산발이 되어 있었고 흰 원피스는 피에 젖어 원래의 색상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그녀뿐만 아니라 그 뒤에는 또 여러 명의 학생이 함께 들려 나왔다.그녀들의 상태 또한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했지만 잔뜩 경악한 표정으로 차에서 경찰의 제지를 당하며 버둥대는 권효은을 보
권하윤 혼자서 당연히 두 남자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더욱이 품에 임주빈을 안고 있은 탓에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차로 끌려갔다.하지만 차 문이 닫히려는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문을 막아서며 확 열어젖혔다.머리에 검은 마스크를 뒤집어쓴 남자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분노한 듯 고개를 쑥 내밀었다.“대체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아!”이윽고 반쯤 내민 그의 머리는 하마터면 문에 끼여 박살 날 뻔했다.눈 깜짝할 새에 코피를 흘리며 축 늘어진 그는 뼈가 없는 듯 차 문을 통해 주르륵 밖으로 흘러나와 인사불성이 된 채 바닥에 쓰러졌다.민도준은 신발 끝에 묻은 피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남자의 머리에 있는 마스크에 쓱쓱 닦으며 중얼거렸다.“쯧,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아직도 이런 걸 머리에 쓰고 다니는 거야?”이윽고 차 안에서 웬 여자를 안고 있는 권하윤을 본 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이건 또 뭐야?”민도준이 갑자기 찾아왔다는 놀라움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멍하니 있을 때 그가 갑자기 권하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내려와.”그의 동작에 권하윤은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임주빈을 데리고 내려가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리려고 하기 바쁘게 임주빈이 그녀를 끌어당겼다.민도준의 잔인한 모습에 이미 반쯤 넋이 나간 그녀는 권하윤이 내려가는 건 호랑이굴에 직접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위험하니 나가지 마요.”민도준은 그 상황에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며 권하윤을 돌아봤다.“뭐야? 내가 나쁜 사람 취급당하는데 설명도 안 하는 거야?”권하윤은 이내 심호흡하더니 입을 열었다.“이분은 민 사장님이셔.”“!”그러던 그때, 로건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미 상황을 마무리 지은 장 형사가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민 사장님, 고생하셨어요.”민도준은 씩 웃으며 장 형사가 내민 손을 잡았다.“공민으로써 응당 해야 할 일인 걸요.”“아, 네…….”너스레를 떠는 민도준의 대답에 장 형사는 갑갑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써 바
낮에 권효은의 명령이 있은 덕에 권하윤은 아무 어려움 없이 요양원 안으로 들어갔다.그렇게 어머니를 본 순간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라는 부름 소리에도 약간의 콧소리가 담겨 있었다.딸의 목소리를 들은 부녀의 눈에서도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딸.”하지만 흥분된 목소리로 딸을 부르며 고개를 돌린 순간 언제 울었냐는 듯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양현숙은 오랫동안 보지 못한 권하윤의 손을 잡은 채 이리저리 살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여위었네. 왜 이렇게 여위었어?”어머니의 눈길은 언제나 사람의 가장 여린 부분을 건드리곤 한다. 그 때문인지 속전속결로 계획을 말하려던 권하윤도 눈물범벅이 된 채 한참을 울었다.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겨우 진정한 그녀는 찾아온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양현숙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건 너무 위험해. 만약 발각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걱정하지 마요. 지금 권씨 가문은 일을 수습하느라 우리 상관할 겨를 없어요. 게다가 저 이미 보든 준비 마쳤으니까 내일 아침 5시 이 주변의 마을로 이동하면 전용기가 우리를 오빠한테로 데려다 줄 거예요.”“그래도…….”“걱정할 거 없다잖아요.”그때 마침 문 앞에서 듣고 있던 어린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이곳에서 저 하루라도 더 있고 싶지 않다고요.”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포동포동한 얼굴에 입을 삐죽 내민 채로 아이는 불만을 표하는 듯 투덜댔다.“언니는 밖에서 즐겁게 지내서 좋겠지만 난 진짜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으이그.”동생의 푸념에 권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하지만 동생이 늘 제멋대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은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다.오히려 양현숙이 권하윤더러 혼자 가족을 책임지게 했다는 죄책감에 이시영에게 버럭 화를 냈다.“시영, 너 그만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헛소리 하기만 해봐!”하지만 지금껏 부드럽기만 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화를 내자 이시영은 얼굴을 붉히며 끝까지 반항했다.“내가
권희연이 던진 마지막 한 방에 지금껏 병원에 입원했던 기록, 그리고 친자 확인서 등 자료들은 권씨 가문의 마지막 희망까지 모조리 꺼버렸다.하루아침에 권씨 가문은 재벌가에서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는 길가의 쥐새끼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가문 명의로 된 사업들은 모두 가압류되었고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서원 여고 역시 폐쇄되었다.이러한 변화에 골치 아파진 사람은 권씨 집안사람들뿐만 아니라 또 있었다.병원 VIP 병실에서 이 사실을 접한 강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선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젠장! 어쩜 그 애는 도움이 되지를 않아? 권씨 가문이 무너지는 건 상관없다지만 그 집 애를 며느리로 들이려 했던 우리 집은 어떻게 머리를 들고 다니겠어? 그렇게 더러운 집안에서 자랐으니 권하윤도 얼마나 깨끗하겠어? 생각할수록 구역질이 다 나네!”한참 동안 떠들었지만 아들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강수연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아무 말도 없는 민승현을 바라봤다.“승현아, 너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이 흙탕물에서 빠져나와야 할 거 아니니! 얼른 방법을 생각해! 만약 다른 사람이 너도 권씨 가문의 그 더러운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려고 그래?”말하면 말할수록 그녀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안돼. 내가 당장 네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파혼부터 하자. 그리고 대외로는 오래전에 헤어졌는데 계속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되잖아.”“엄마.”민승현은 눈을 들어 강수연을 바라봤다.“권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이상하다고?”하긴, 그래도 재벌가인데 아무리 사건 사고가 터졌다 하더라도 지금껏 알고 지낸 인맥이 있을 텐데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했다.하지만 강수연은 그게 뭐가 됐든 관심이 없었다.“아마 건드리지 말아야 할 누군가를 건드렸을지도 모르지.”“맞아요. 누군가를 건드려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거예요.”민승현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그런 아들을 보자 강수연은 저도 모르게
권하윤은 숫자 1을 가리킨 시침을 바라봤다.벌써 새벽 1시가 되었으니 오늘은 민도준이 오지 않는 게 거의 확실해졌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안한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이윽고 안전성을 고려해 2시까지 기다린 뒤에야 민도준이 갑자기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정신을 차리려고 세수를 했지만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다크서클이 눈 밑 아래에 걸려 있었지만 정신은 유달리 흥분된 상태였다.그녀는 지금껏 자주 입던 여성스러운 옷 대신 옷장 구석에 처박아 뒀던 캐주얼한 옷을 선택했다.이건 민도준이 예전에 한민역을 시켜 그녀에게 사줬던 옷이다.솔직히 입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거절했지만 그때 한민혁과 점원 모두가 어울린다고 부추기는 바람에 마지못해 받았었다.고작 몇 달만 지났지만 다시 옷을 꺼내보니 왠지 몇 세기가 흘러갔다는 느낌이 들었다.옷을 입고 준비된 가방을 멘 그녀는 끝내 자기를 가두었던 철창 같은 곳을 벗어났다.몸을 찔러대는 듯한 차가운 새벽공기는 낮의 따스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권하윤은 직접 운전하는 대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택시를 타는 걸 선택했다.한밤중에 이런 별장 구역은 택시가 잡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권하윤도 솔직히 2킬로 정도 걸어갈 계획을 세웠지만 웬일인지 마침 앞에서 멈춘 택시에서 손님이 내린 덕에 곧바로 차에 탈 수 있었다.오늘 운이 좋다며 연신 감탄하는 기사 아저씨를 향해 권하윤도 싱긋 웃어 보였다.“확실히 운이 좋네요.”요양원이 교외에 위치한 탓에 권하윤이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가 되었다.그들이 떠나기로 약속한 5시까지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권하윤은 원래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밖에서 지켜야 할 경비원이 경비실에서 쿨쿨 자는 걸 보자 소리없이 안으로 숨어들었다.우두머리가 망하면 따르던 사람도 흩어진다고 요양원은 여느 때보다도 더 한산했다.심지어 권하윤은 길에서 경비원을 한 명도
새벽 4시 반.민도준이 걸어온 전화를 보는 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서늘해 났다.‘이런 시간에 왜 갑자기 전화를 하는 거지?’그녀는 이 전화가 자기가 도망치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민도준이 하필 이 시간대에 전화할 이유가 없었다.너무 오래 생각한 탓에 전화 화면이 어느새 꺼지더니 부재중 전화로 바뀌었고 곧바로 짤막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받아.]분명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권하윤은 그 두 글자에서 상대방의 말투를 들은 것만 같았다.그녀의 낯빛이 너무 창백한 탓에 뒤에 있던 양현숙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너 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이 오장육부까지 전달되어 권하윤은 숨을 쉴 수 없었다.“엄마 시영이랑 잠깐만 아무 소리도 내지 마요.”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뱉은 그녀는 심호흡하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비록 상대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게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었지만 저도모르게 떨리는 끝 음은 그녀의 두려움을 그대로 드러냈다.곧이어 전화 건너편에서 귀에 감기는 듯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무슨 나쁜 짓을 하길래 목소리가 그래?”그 한마디에 권하윤의 호흡은 더 흐트러졌다. 하지만 애써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나쁜 짓이라니요.”숨을 살짝 들이쉰 그녀는 상대가 또 이상한 질문을 던질까 봐 곧바로 말을 이었다.“오늘 약혼식 있는 날이잖아요. 바, 바쁜 거 아니었어요?”“바쁘지. 그러니까 하윤 씨가 얼른 와서 나 좀 도와줘.”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권씨 가문이 시끄러운 일에 휘말려 전 아마도 얼굴 비추면 안 될 것 같아요.”“아참, 하마터면 그걸 잊을 뻔했네.”민도준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전화를 타고 권하윤의 귀에 흘러들었다.“전에 권씨 가문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가문에 하윤 씨 혼자만 남았으니 다 하윤 씨가 가지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