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연이 던진 마지막 한 방에 지금껏 병원에 입원했던 기록, 그리고 친자 확인서 등 자료들은 권씨 가문의 마지막 희망까지 모조리 꺼버렸다.하루아침에 권씨 가문은 재벌가에서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는 길가의 쥐새끼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가문 명의로 된 사업들은 모두 가압류되었고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서원 여고 역시 폐쇄되었다.이러한 변화에 골치 아파진 사람은 권씨 집안사람들뿐만 아니라 또 있었다.병원 VIP 병실에서 이 사실을 접한 강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선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젠장! 어쩜 그 애는 도움이 되지를 않아? 권씨 가문이 무너지는 건 상관없다지만 그 집 애를 며느리로 들이려 했던 우리 집은 어떻게 머리를 들고 다니겠어? 그렇게 더러운 집안에서 자랐으니 권하윤도 얼마나 깨끗하겠어? 생각할수록 구역질이 다 나네!”한참 동안 떠들었지만 아들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강수연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아무 말도 없는 민승현을 바라봤다.“승현아, 너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이 흙탕물에서 빠져나와야 할 거 아니니! 얼른 방법을 생각해! 만약 다른 사람이 너도 권씨 가문의 그 더러운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려고 그래?”말하면 말할수록 그녀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안돼. 내가 당장 네 할아버지한테 부탁해서 파혼부터 하자. 그리고 대외로는 오래전에 헤어졌는데 계속 공개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되잖아.”“엄마.”민승현은 눈을 들어 강수연을 바라봤다.“권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이상하다고?”하긴, 그래도 재벌가인데 아무리 사건 사고가 터졌다 하더라도 지금껏 알고 지낸 인맥이 있을 텐데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했다.하지만 강수연은 그게 뭐가 됐든 관심이 없었다.“아마 건드리지 말아야 할 누군가를 건드렸을지도 모르지.”“맞아요. 누군가를 건드려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거예요.”민승현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그런 아들을 보자 강수연은 저도 모르게
권하윤은 숫자 1을 가리킨 시침을 바라봤다.벌써 새벽 1시가 되었으니 오늘은 민도준이 오지 않는 게 거의 확실해졌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안한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이윽고 안전성을 고려해 2시까지 기다린 뒤에야 민도준이 갑자기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정신을 차리려고 세수를 했지만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다크서클이 눈 밑 아래에 걸려 있었지만 정신은 유달리 흥분된 상태였다.그녀는 지금껏 자주 입던 여성스러운 옷 대신 옷장 구석에 처박아 뒀던 캐주얼한 옷을 선택했다.이건 민도준이 예전에 한민역을 시켜 그녀에게 사줬던 옷이다.솔직히 입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거절했지만 그때 한민혁과 점원 모두가 어울린다고 부추기는 바람에 마지못해 받았었다.고작 몇 달만 지났지만 다시 옷을 꺼내보니 왠지 몇 세기가 흘러갔다는 느낌이 들었다.옷을 입고 준비된 가방을 멘 그녀는 끝내 자기를 가두었던 철창 같은 곳을 벗어났다.몸을 찔러대는 듯한 차가운 새벽공기는 낮의 따스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권하윤은 직접 운전하는 대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택시를 타는 걸 선택했다.한밤중에 이런 별장 구역은 택시가 잡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권하윤도 솔직히 2킬로 정도 걸어갈 계획을 세웠지만 웬일인지 마침 앞에서 멈춘 택시에서 손님이 내린 덕에 곧바로 차에 탈 수 있었다.오늘 운이 좋다며 연신 감탄하는 기사 아저씨를 향해 권하윤도 싱긋 웃어 보였다.“확실히 운이 좋네요.”요양원이 교외에 위치한 탓에 권하윤이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가 되었다.그들이 떠나기로 약속한 5시까지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권하윤은 원래 밖에서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밖에서 지켜야 할 경비원이 경비실에서 쿨쿨 자는 걸 보자 소리없이 안으로 숨어들었다.우두머리가 망하면 따르던 사람도 흩어진다고 요양원은 여느 때보다도 더 한산했다.심지어 권하윤은 길에서 경비원을 한 명도
새벽 4시 반.민도준이 걸어온 전화를 보는 순간 권하윤은 등골이 서늘해 났다.‘이런 시간에 왜 갑자기 전화를 하는 거지?’그녀는 이 전화가 자기가 도망치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민도준이 하필 이 시간대에 전화할 이유가 없었다.너무 오래 생각한 탓에 전화 화면이 어느새 꺼지더니 부재중 전화로 바뀌었고 곧바로 짤막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받아.]분명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권하윤은 그 두 글자에서 상대방의 말투를 들은 것만 같았다.그녀의 낯빛이 너무 창백한 탓에 뒤에 있던 양현숙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너 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쉴 새 없이 울리는 진동이 오장육부까지 전달되어 권하윤은 숨을 쉴 수 없었다.“엄마 시영이랑 잠깐만 아무 소리도 내지 마요.”어렵사리 한 마디를 내뱉은 그녀는 심호흡하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비록 상대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게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었지만 저도모르게 떨리는 끝 음은 그녀의 두려움을 그대로 드러냈다.곧이어 전화 건너편에서 귀에 감기는 듯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무슨 나쁜 짓을 하길래 목소리가 그래?”그 한마디에 권하윤의 호흡은 더 흐트러졌다. 하지만 애써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나쁜 짓이라니요.”숨을 살짝 들이쉰 그녀는 상대가 또 이상한 질문을 던질까 봐 곧바로 말을 이었다.“오늘 약혼식 있는 날이잖아요. 바, 바쁜 거 아니었어요?”“바쁘지. 그러니까 하윤 씨가 얼른 와서 나 좀 도와줘.”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에 일순 힘이 들어갔다.“권씨 가문이 시끄러운 일에 휘말려 전 아마도 얼굴 비추면 안 될 것 같아요.”“아참, 하마터면 그걸 잊을 뻔했네.”민도준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가 전화를 타고 권하윤의 귀에 흘러들었다.“전에 권씨 가문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가문에 하윤 씨 혼자만 남았으니 다 하윤 씨가 가지면
양현숙도 권하윤을 막으며 눈물을 보였다.“우리가 도망친 게 발각된 거지?”끝내 숨길 수 없다는 걸 자각한 권하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그러니까 엄마랑 시영이가 먼저 가서 오빠랑 만나세요. 저는 나중에 찾아갈게요.”이제 곧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데 양현숙은 딸이 혼자 모험하게 둘 수 없었다.“안돼. 우리가 도망치려던 게 발각됐다면 돌아간 뒤 네가 고생할 게 뻔하잖아. 시영이만 먼저 보내고 엄마랑 같이 돌아가.”“누가 먼저 가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갈 거면 우리 같이 가요. 그랬다가 다시 잡혀가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되죠!”옆에 있던 이시영도 버럭 소리쳤다.“그건…….”권하윤은 잠시 망설여졌다.물론 이시영은 홧김에 한 소리겠지만 그 말은 왠지 모르게 권하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그 생각에 권하윤은 다시 고용인에게 전화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답변은 제일 늦어 점심 12시까지 기다릴 수 있다는 거였다.“이렇게 해요. 엄마랑 시영이가 먼저 가서 기다려요. 저는 기회를 봐서 빠져나올 테니까. 하지만 제가 12시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먼저 가요. 알았죠?”“싫어. 싫다고.”이시영은 권하윤의 팔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언니가 만약 안 오면 어떡하라고? 우리 지금 가자. 응?”“지금 가면 누구도 떠나지 못해.”민도준이 그녀더러 직접 돌아오라고 했다는 건 다시 그녀를 잡을 자신이 충분히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지금은 그녀더러 혼자 돌아오라고 했지만 만약 시간을 더 끌면 아마 어머니와 동생도 함께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그 생각에 권하윤은 마음을 굳게 먹고 이시영의 손을 뿌리쳤다.“시영아, 언니 말 들어. 오빠가 해외에서 우리 기다리고 있어. 설마 오빠 혼자 의지할 곳 없이 지내게 하고 싶어?”“그건…….”계속 고집을 부리던 이시영의 얼굴에 그제야 조금 막연함이 보였다.그사이 권하윤은 양현숙을 바라봤다.“엄마, 시영이랑 먼저 가 있어요.”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양현
“고객님, 여기 앉으세요.”권하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지만 그 순간까지도 하얗게 질린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반쯤 정신이 딴 데 팔린 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파운데이션이 묻은 브러시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덮어주는 걸 무뚝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조용하던 복도가 갑자기 왁자지껄하기 시작했다.보아하니 하객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다행히 그 누구도 메이크업실에 들어오지 않아 그녀가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는데 충분했다.화장이 끝나자 메이크업 아티슽트는 권하윤의 긴 머리에 웨이브를 넣어주었다.선명한 웨이브가 주는 섹시함이 아닌 보일듯 말듯한 곡선이 그녀의 여성스러움과 매력을 한껏 도드라지게 했다.고대기를 내려놓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참지 못하고 칭찬을 늘어놓았다.“고객님, 너무 예쁘네요.”“고마워요.”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 미소를 지은 권하윤이 대답했다.그녀의 태도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상대가 자기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것 같아 진지한 태도로 말을 보탰다.“정말이에요. 고객님의 머릿결 정말 좋아요. 이렇게 비단결 같은 머리 못 본 지 정말 오래됐거든요.”그녀는 말하면서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머리를 몇 번 만졌다.익숙한 화면에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민도준을 떠올렸다.그 때문에 애써 되찾았던 침착은 다시 금이 가고 말았다.심지어 드레스로 갈아입을 때까지 넋을 놓고 있다가 스스로 한번 거울을 보라는 아티스트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입은 옷은 민도준이 골라줬던 연두색 드레스다.살짝 수선된 허리 라인을 따라 골반 아래로 축 떨어지는 디자인은 너무 과하지 않아 권하윤에게 잘 어울렸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치마 끝자락을 정리해 주다가 일어서더니 또다시 칭찬을 해댔다.“고객님 몸매가 참 좋으시네요.”“…….”하지만 곧 있으면 이 방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웃을 수가 없었다.권씨 가문에 큰 이변이 일어났는데 그녀가 이런 자리
목을 조여오는 힘에 권하윤은 숨을 쉴 수도 더욱이 말할 수도 없었다.“아참, 나 좀 봐. 물어보는 데만 정신이 팔려 이렇게 하면 하윤 씨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몰랐네.”이제야 권하윤이 숨 막혀 한다는 걸 발견하기라도 한 듯 피식 웃은 민도준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 손의 힘은 여전히 풀지 않았다.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권하윤의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했다.“하윤 씨가 나랑 했던 약속 기억해? 얌전히 있겠다고, 함부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을까? 응?”질식감에 권하윤은 본능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폐 안에 흘러드는 공기가 점점 희박했고 시선은 점점 흐려졌다.그렇게 자기가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한바탕 기침을 한 권하윤은 오랫동안 차단되었던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하지만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민도준의 손이 그녀를 거칠게 들어 올렸다.그는 권하윤의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난 빨간 자국을 힐끗 바라보고는 잔인한 웃음을 자아냈다.이윽고 아직 붉은 기가 사라지지 않은 턱을 들어올리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말할 수 있겠지? 자, 어디 말해 봐. 어디 가서 놀다 왔어?”이제 갓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났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정신상의 고통에 빠져버린 권하윤은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처량한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짙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권씨 가문은 여고가 제일 유명한 줄로만 알았지 요양원이 그렇게 매력적인 줄 몰랐어. 그런데 대체 무슨 매력이 있기에 새벽부터 잠도 자지 않고 요양원에 놀러 갔대? 나도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겨우 자기 목소리를 되찾은 권하윤은 곧바로 민도준의 옷깃을 생명줄 잡듯 꽉 움켜잡았다.“도준 씨,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 하라는 거 다 할게요.”“정말?”민도준은 고개를 숙이며
공태준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틈에 메이크업실 구석에 작은 칸막이에 설치된 커튼이 확 닫혔다.그 힘이 얼마나 컸는지 커튼 고리가 하나 빠지기까지 했다.작은 공간에서 권하윤은 자기 어깨를 꽉 끌어안은 채로 심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하지만 다급하게 숨은 탓에 심장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더욱이 공태준이 들어오는 찰나 그녀는 민도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다급한 마음에 그를 물어놓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까지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당장이라도 들킬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자기에게 전혀 안전감을 줄 수 없는 커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이곳은 쇼핑몰에 있는 피팅룸과는 달리 그저 그저 원형 공간이 모두 얇은 커튼으로 막혀 있었다.때문에 만약 누군가 커튼을 열어보기라도 하면 곧바로 그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그 시각, 공태준은 커튼 쪽을 몇 초간 응시하다가 애써 시선을 거두었다.“실례했네요.”민도준은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재밌는 듯 이빨 자국이 깊게 파인 자기 손을 바라봤다. 심지어 피가 살짝 맺혀 있는 걸 보면 얼마나 세게 물었을지 가늠이 간다.‘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잘 먹이고 잘 입혔더니 은혜도 모르고.’하지만 그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툭툭 털더니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공씨 가문 가주가 멀리서 오셨는데 마중도 나가지 못했네요. 앉으세요.”방 안의 유일한 1인용 소파는 민도준이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태준은 주위를 빙 둘러보다가 작은 의자를 발견했음에도 눈살만 찌푸릴 뿐 앉지 않았다.“별말씀을요. 다름이 아니라 선물을 주러 왔습니다.”그는 곧바로 벨벳 상자를 민도준 앞으로 건넸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거의 60캐럿 되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놓여 있었다.티 하나 없이 맑은 색과 반듯한 절단면 덕에 화려하고 눈 부신 빛을 반사하는 핑크 다이아는 보기만 해도 고급스럽고 화려했다.그 때문에 화장대 위에 놓인 보석들은 순간 빛을 잃었다.민도준은 다이아를 본 순간 약
민도준의 말에 커튼 뒤에 숨어 있던 권하윤은 잔뜩 긴장한 채 커튼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그 순간 그녀는 귀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을 열어놓고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권하윤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공태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시각 그의 눈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여성 의류에 떨어졌다.“여기는 여성용 메이크업실인 듯한테 민 사장님의 옷은 아마 여기 없는 듯합니다.”민도준의 눈길은 공태준을 따라 권하윤의 평소 스타일과 확연히 다른 옷에 멈췄다.이윽고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몸을 뒤로 젖히며 오만한 눈빛으로 공태준을 바라봤다.“제가 방금 여기에서 잠시 여유시간을 즐겼거든요. 그러니 옷은 아마 여기 어딘가에 떨어진 듯싶네요. 가주님이 평소 남을 돕기 즐긴다는 건 익히 들었는데, 이런 도움마저 주지 않을 건 아니죠?”공기는 일순 조용해졌다.그 몇초간 권하윤은 마치 끓는 기름에 빠진 듯 오장육부가 타들어 갔다.“알겠습니다. 찾아드리죠.”마지못해 대답한 듯한 한마디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그녀는 조용한 방 안에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벽 끝에 바싹 달라붙었다.‘어쩌지? 어떡하면 이 상황을 모면하지?’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하던 그때, 남자의 발이 그녀 앞에 멈춰 섰다.“둥둥둥-”심장이 요란하게 북을 치기 시작했다.하지만 다행히 공태준은 앞으로 더 다가오지 않았다.그런데 그녀가 기뻐할 새도 없이 민도준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찾자 말아요? 이제 남은 곳이 그곳뿐인데 제 양복이 안에 있는지 한번 봐주세요.”공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쯤 되면 그가 커튼을 열어젖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민도준이 한사코 그더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 “양복”을 꼭 찾으라는 듯 재촉하니 그는 할 수 없이 손을 들어 커튼을 열어젖혔다.커튼 고리가 쇠막대기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민도준은 재밌는 듯 상황을 지켜봤다.하지만 커튼이 열리는 순간.“아!”짤막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