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라는 이름이 갑자기 곽도원의 머리에 떠올랐다.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이성희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그저 이성희가 염옥란과 아주 닮았다는 것만 기억했다.그때 곽도원이 나이가 어렸기에 돈으로 사지 않고 옛 방식으로 이성희를 쫓아다녔다.곽도원은 이성희의 얼굴이 점차 빨개지는 모습을 보고 공천하가 없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염옥란을 쫓아다녔고 그녀도 이렇게 반응했을 것으로 생각했다.‘내가 선물을 주면 기뻐하고 날 집중해서 바라봐주고 사랑스럽게 봐주고.’이성희는 곽도원이 염옥란의 대체품으로 찾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정력을 써서 이성희를 쟁취했기 때문에 그녀는 곽도원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후에 이성희가 사실을 알게 되고 난장판을 벌여서 곽도원이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었다.그러나 오랜 시간 공들여서 만든 염옥란의 대체품이었기에 곽도원은 그녀를 정말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했다.그렇게 지내는 것이 좋았는데, 이성희가 염옥란한테서 온 편지를 몰래 없애버렸다.이 사실을 알고 곽도원이 공씨 집에 달려갔을 때, 염옥란이 이미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곽도원이 집에 돌아왔을 때, 이성희가 아직도 떼를 쓰고 있었고 자신이 끼던 브로치가 염옥란의 것인 줄 알고 땅에 던져버린 것이다.이성희가 염옥란이 이미 죽었으니까 아무리 그리워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죽었다고? 네가 그 편지만 안 숨겼어도 염옥란 죽지 않았을 거야.’곽도원이 이성희의 옷에 달고 있던 브로치의 망가진 부분을 보더니 아랫사람을 시켜 그녀의 다리를 끊어버리게 했다.그리고 다른 사람을 시켜 이성희의 얼굴에 흠집을 내게 한 후, 그녀를 농촌에 버렸다.곽도원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미움을 사면 좋은 생활은 할 수 없는 것이 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이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자, 곽도원은 깜짝 놀랐다.‘왜 이 기억이 떠오르지?’수많은 기억 중에서 곽도원은 또 파티에서 피아노를 치던 여자를 떠올렸다.그 여자가 피아노
준호는 슬픔을 억누르고 말했다.“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건 잠지 비밀로 할게요.”“네.”의사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곽도원의 죽음은 곽씨 집안이 곧 하락 선을 긋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해성시의 주력이 바뀐다는 것을 설명한다.준호가 서명하고 곽도원의 위로 하얀 천이 씌워진 사이에 준호는 신옥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준호는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실래요?”준호의 말을 듣고 신옥영 쪽에서 무엇인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30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이런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 없었다.그래서 준호도 결심하고 신옥영에게 결정권을 주려고 물어봤다.한참이 지난 후, 신옥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 장례식 할 때 가면 돼.]“알겠어요.”...곽도원이 갑자기 세상을 뜨니 오늘 밤은 누구도 잠에 들 수 없다.준호는 곽도원의 편이었던 아저씨 몇분과 믿을만한 부하 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곽도원이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부하 직원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어떻게 이런 일이.”준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우리 아버지가 가장 믿던 직원으로서 아버지가 갖고 있던 것 중에 어떤 걸 없애야 할지 잘 알고 있겠죠? 아직 말이 안 새어나갔으니 우리 하나하나 처리합시다.”곽도원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기까지 누구나 들켜서는 안 되는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일단 자리에 사람이 사라지면 그것들은 곽씨 집안을 망치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직원도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열쇠를 준호에게 건네주며 엄숙하게 말했다.“이건 국장님 사무실 금고의 열쇠입니다. 도련님께서 가서 처리해 주세요. 저는 밖에 일을 처리하겠습니다.”“네, 각자 맡은 걸 잘해 냅시다.”준호가 떠나기 전, 은지를 보고 두 직원에게 일렀다.“저 여자 잘 지켜, 병실 밖에 절대 나가게 하지 마.”준호가 새엄마를 가두어 놓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순순히 명령을 받들었다.“네!”사람들이 다 자신이
준호는 목이 메어 뒤에 말을 겨우 뱉었다.“그럼, 넌 우리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니까, 난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은지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이 듣고 있었다.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차 아래 있으니까, 집에 가자!”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닫힌 공간에 두 사람만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에 반사된 은지는 눈을 아래로 깔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은지가 준호 차로 다가갈 때, 준호가 자연스럽게 은지에게 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손잡이를 잡자마자 준호는 눈앞의 이 여자가 곽도원을 죽인 살인범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준호는 은지를 신경 쓰지 않고 차에 탔다.그리고 힘껏 문을 닫아버렸다.그러나 은지는 준호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다른 쪽으로 차에 탔고 안전벨트까지 했다.차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준호가 눈썹을 찌푸렸다.‘이상해, 너무 이상해.’준호가 계속 시동을 걸지 않자, 은지는 준호를 보았다.준호가 어릴 때부터 곽도원의 곁에 붙어 있었고 또 부대에서 여러 해 근무했기에 주위의 환경에 아주 민감했다.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준호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고 느꼈다.이럴 때는 보통 적이다.이런 생각을 하자, 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시동을 걸었다.“누군가 지금 우리를 미행하고 있어. 조금 있다가 무슨 일이 나든 소리 내면 안 돼.”준호는 이 말을 뱉고 나서 쓸모없는 말을 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은지는 원래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시동이 걸리자, 조용하던 주차장에 준호의 차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차가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내가 잘못 느낀 건가?’그러나 준호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경각심을 세웠다.차가 병원에서 나온 뒤, 준호는 평소대로 집을 가지 않고 여러 번 돌아서 가려고 했다차를 몰다 보니 준호는 교외에 와 있었다.차가 점점 적어지자, 준호는 뒤에 따라오던 차 두 대를 발견했다
그 사람들은 시선을 교류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댔다.상대 쪽에 사람이 많았지만, 준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하는 방법을 배웠기에 무섭지 않았다.그러나 상대 쪽에서 전혀 사람을 죽이려 들지 않아, 준호도 총을 거두고 진압하는 쪽으로 움직였다.그러나 싸움할수록 준호는 이 사람들이 자신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못 가게 막는 것 같았다.‘뭔가 잘못됐다.’준호는 앞에 있던 두 사람을 밀치고 차 쪽으로 달려갔다.사람들이 준호를 막으려 했는데, 실패하자 급히 차로 복귀해서 차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차 문이 열리자, 조수석에는 아무도 없었다.거대한 공포가 준호를 감쌌다. 준호가 은지를 큰 소리로 불렀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장애물의 반대편에서 세 번째 차에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무전기에서 찌륵찌륵 소리가 난 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준호가 이미 발견했습니다.”운전석에 있던 남기가 눈썹을 찌푸렸다.“알겠어요.”남기는 한쪽으로 액셀을 밟으며 대답했다.“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나게 빠르네요.”“괜찮아요.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죠.”백미러가 흔들리더니, 은지가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이것은 은지가 마음속으로 수백 번 시물레이션해 봤던 계획이었다.신분을 어떻게 가질지, 곽씨 집안에 어떻게 들어갈지, 곽도원을 죽이고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해서 말이다.어떤 부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총체적으로는 만족했다.현재 마지막 부분이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만이 남았다....장애물을 옆으로 옮기자, 뒤에서 따라오던 부하가 말했다.“도련님, 여기 길을 수리한다는 말이 없었어요. 이건 다 인위적으로 놓아진 것입니다.”‘인위적으로?’준호는 자신이 당한 것을 알고 주먹으로 차를 확 쳤다.“각 출구를 다 막아! 오늘 누구도 나가게 해서는 안 돼! 단 한 명도!”준호는 한숨도 쉬지 않고 은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은지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잡혔으면 좀 소리라도 치던가! 위험하면 살려달라고 소리를 쳐야지!’다른 사
“아!”말이 끝나자마자 형탁이 준호에게 한 대 맞았다.준호는 형탁의 네크라인을 잡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무슨 소리야! 네가 그 말 해서 고은지가 못 돌아오면, 넌 나한테 죽었어!”형탁도 그저 장난친 것뿐인데, 준호가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에 이상해했다.“뭐야, 너 진심이야? 고은지가 옥영 아줌마를 내쫓았는데,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가 뭐야?”“나...?”준호가 말문이 막혀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무전기를 든 경찰이 다가왔다.“고은지 씨를 데려간 차를 찾았습니다. 남화 거리에 있답니다.”준호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형탁의 손에서 차 키를 빼앗아 갔다.형탁이 그 경찰에게 말했다.“그쪽에 연락해서 도움을 구해.”형탁은 급히 준호를 따라갔다.“준호야, 내가 가면 돼. 아저씨 일 때문에 머리 아플 텐데, 너 가서 일 봐.”그러나 준호는 형탁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운전석에 앉아버렸다.형탁은 두 사람을 더 불러 차에 앉았다.형탁이 차에서 무전기로 소통했고 준호는 차를 돌려 은지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준호가 늦게 출발했지만, 형탁 쪽에서 검사하는 지점을 여러 개 만들었기에, 은지가 탄 차가 검사지점을 에돌아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곧이어 두 쪽 사람이 한 다리에서 마주치게 되었다.차가 시야에 들어오자, 굳었던 준호의 몸이 조금 풀렸다.준호는 그 차를 바짝 따라가며 말했다.“다리 위에서 이러면 너무 위험하니까, 꼭 지나가야 하는 곳에 검사 지점을 만들어서 고은지의 안전을 확보해 줘!”무전기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알겠습니다.”조수석에서 형탁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새엄마의 안전을 왜 이렇게 신경 쓰지? 종교를 바꿨나?’상황이 너무 긴박해서 형탁은 준호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잘 지키라고 명령했다.이 다리는 해성시의 낡은 다리와 새 다리를 접목한 다리로서 중간에 두 회전판이 있었다.준호는 그 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두 번째 회전판을 돌 때, 앞에
준호는 눈이 돌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했다.이때 형탁이 준호의 팔을 잡아당겼다.“준호야! 너 미쳤어?”“나 쟤 구할 거야!”“이렇게 높은데, 아래 불도 나는데, 이미 죽었을 거야. 네가 내려가도 소용없어!”“닥쳐!”준호는 형탁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다시 한번만 그런 소리 하면 죽여버릴 거야! 저렇게 자기 목숨 아끼는데 저렇게 죽었을 리 없어!”형탁은 준호가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고 준호가 왜 은지를 그렇게 구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형탁은 할 수 없이 준호를 위로했다.“먼저 좀 진정해. 은지 씨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몰라. 이번 일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우리 먼저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보자. 은지 씨가 안 죽었는데, 너 먼저 죽을 일 있어?”준호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형탁의 말에 동의했다. 준호는 가드레일을 힘껏 치고 대답했다.“가자!”다리에서 돌아서 내려오니 7, 8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어떤 사람들이 차량용 소화기로 차의 불을 좀 껐다. 그러나 차가 세게 부딪치고 불에 휩싸여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준호는 타버린 차를 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 안에 고은지가 있을 리 없어.”“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죽었을 리 없어!”준호가 고개를 확 돌렸다.“기사 어디 갔어? 잡았어?”일이 너무 갑자기 일어나 형탁이 준호를 따라 다리 아래에 내려와서 사람을 구하고 보니 기사가 이미 사라진 뒤였다.준호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은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사람 화 돋우던 장면, 차가운 모습, 집중하던 모습.이때 차를 검사하던 사람이 불에 타버린 금속을 들고 왔다.“차에서 이거 찾았어요.”준호는 찌그러진 팔찌를 보고 귓가에 팔찌를 살 때 들었던 말이 울려 퍼졌다.“남편분께서 아내분을 정말 사랑하시네요. 두 개씩 사시고.”이 팔찌는 준호가 은지에게 선물했던 팔찌다.‘이게 왜 여기에 있지?’형탁은 준호가 눈시울을 붉
곽도원이 별세했다는 소식은 그날 밤에 퍼져나갔다.준호가 예상했던 것처럼 곽씨 집안과 준호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사람들은 이 소식이 정말인지, 곽도원과 거래를 했던 사람들은 곽도원이 별세하기 전에 그 일들을 다 깔끔히 처리했는지 물어봤다.준호는 곽도원의 서재에 앉아 사람들의 질문에 답했다.그렇게 저녁이 되었다.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사가 야식을 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왔다.“도련님, 온종일 아무것도 안 드시지 않으셨어요? 어서 드세요.”“배 안 고파. 형탁 쪽은 소식 있어? 차 안에 있던 사람 고은지 아니지?”준호의 목소리를 쉬어 있었고 눈은 충혈이 돼 있었으며 수염을 깍지 못해 더 성숙해 보였다.집사는 고개를 저었다.“차가 너무 심하게 훼손돼서 시간이 더 걸릴 거 같아요.”준호는 눈을 감고 나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알았어. 나가 봐.”집사가 나가면서 준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큰 일을 당했음에도 준호는 무너지지 않았다. 준호는 오히려 당황하지 않고 흔들리고 있는 집안을 버텨내고 있었다.한순간 집사는 준호에게서 곽도원의 모습을 보았다.그러나 준호는 곽도원과는 달랐다. 준호는 사람과의 정을 더 중요시했다.준호와 은지의 일 때문에 집사는 은지가 실종돼서 오히려 더 기뻤다.아니면 준호가 한평생 은지에게 잡혀 인생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서재에서 준호가 일을 다 처리하고 보니 새벽 세 시가 되어 있었다.그는 서류를 정리하고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곽도원의 장례식은 오늘 오후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장례식장은 이미 다 마련이 돼 있었기에 준호는 가서 한잠 자야 했다.어제 한숨도 못 잤기에 오늘도 안 자면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그러나 준호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낮에 봤던 불이 떠올랐다.너무 오래 휴식을 취하지 않아 환각이 나타났다. 준호는 은지가 창문을 두드리며 구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보였다.그가 손을 휘둘렀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준호가 중얼거렸다.“
곽도원의 장례식이 잘 준비되어 있었지만, 시작되자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사람이 떠나면 차가 식는다. 사람이 죽으니, 상황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곽도원의 죽음을 정말 애도하는 사람들이 왔다 가고 신옥영이 와서 꽃을 놓았다.자신을 30년 동안 묶어 놓은 남자를 보며 별 느낌은 없었지만, 눈을 감았을 때 눈물이 흘러나왔다.눈앞에는 그녀가 곽도원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이 떠올랐다.대학교 때, 잘생기고 아우라가 넘치는 젊은 남자가 귀빈으로서 제일 앞에 서 있었다.그때 신옥영이 옆에 있던 룸메이트와 얘기하느라 지나가다가 부딪혀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다 떨궈버렸다.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봤을 때, 그녀는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책을 줍는 것도 잊어버렸다.곧이어 교장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국장님을 치다니!”“괜찮습니다.”그 남자는 허리를 숙여 책을 주워 주었다. 신옥영의 손보다 훨씬 큰 손이 그녀의 책을 쥐고 먼지를 털어주면서 웃었다.“이 책은 내용이 너무 깊을 텐데?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소설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신옥영은 그때 그저 학생이었기에 곽도원처럼 큰 인물이 물어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귀를 붉히며 책을 건네받았다.그녀는 며칠을 곽도원과 마주했던 장면에 대한 꿈을 꾸었다.신옥영은 이 인연이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인 줄 알았다.그러나 룸메이트와 파티에 참석했을 때, 곽도원을 또 만났다.곽도원은 공식 대표로서 무대에서 유쾌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갔다.그날 신옥영이 그의 이름이 곽도원이라는 것을 알았다.신옥영의 인생도 좋다고, 나쁘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곽도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준호는 자리로 돌아갔다.해성시로 갔다가 곽도원이 힘을 써줘서 높은 자리로 올라올 수 있었다.곽도원이 죽은 뒤, 지위는 변함이 없지만 실권이 없는 자리로 옮겨졌다. 준호는 남한성으로 가겠다고 신청했고 마치 준호를 쫓아내듯 바로 통과됐다.두 쪽에서 준호의 이동에 대해 준비하는 사이에 준호는 휴가를 한 달 냈다.휴가 첫날에 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