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의 눈빛은 그 순간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아직도 아파?”다정한 말에 시윤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안 아파요.”고개를 들어 도준을 보니 그의 눈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핏발이 서 있었고,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민시영한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도준이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던 말...다시 입을 연 순간 시윤의 목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요즘 잘 지내요?”도준은 약 몇 초간 멍해 있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왜? 안 좋아 보여?”분명 전과 다를 것 없는 말투였지만 시윤은 왠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심지어 지금도.예전 같았으면 도준은 이처럼 차분하게 긴 대화를 이어나가지도 않았을 거다. 본인 내키는 대로 시윤을 어깨에 둘러 메고 나가면 모를까.‘이런 변화가 한수진 때문일까?’시윤이 생각하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도준은 시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해원은 언제 돌아가?”“내일쯤?”시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늘 가.”그때 도준은 뜬금없는 말을 내뱉으며 시간을 확인했다.“내가 비행기 알아봐 줄게.”갑작스러운 말에 시윤은 어리둥절했다.‘지금 나 쫓는 건가?’이 순간 어떤 기분인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겨우 해탈한 것 같기도 하면서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깊은숨을 한번 들이쉰 시윤은 입을 열었다.“내일 아침 비행기 타고 가면 되니까,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하지만 도준은 시윤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비행기 하나 알아봐, 오늘 해원으로 갈 수 있는 거로.”전화를 끊은 도준은 시윤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허리를 곧게 세우며 아무렇지 않은 듯 싱긋 웃었다.“오늘 떠나. 한수진 달래려면 꽤 애먹어야 하거든.”한수진...‘한수진이라고...’시윤은 순간 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참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하긴, 1년이란 시간이 지났
도준은 손을 들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피같이 빨간 액체가 마치 좀처럼 진정이 안 되는 도준의 마음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도준의 목울대가 꿀렁이며 반쯤 차있던 액체가 점점 사라졌다.고개를 들어 와인 한잔을 한꺼번에 마시는 도준을 보자, 수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심지어 약효가 더딜까 봐 술 한잔을 더 권했다.“민 사장님,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요.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저는 영원히 민 사장님 곁에 있을 테니까.”도준은 눈을 돌려 수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수진은 도준이 제 말에 감동했다고 생각하고는 또 잔을 들어 올리며 도준의 가슴에 기댔다.하지만 다음 순간, 도준은 뭔가 느꼈는지 표정이 어두워지며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아!”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뜨거운 기름이 몸에 튀자, 수진은 곧장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민 사장님, 왜 그러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좋았으면서..., 아!”잇따라 또 비명이 들리더니 도준은 수진의 팔을 잡으며 잔뜩 내리 깐 목소리로 무섭게 물었다.“나한테 뭘 먹인 거야?”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수진은 어물쩍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오리발을 내밀었다.“무슨 소리에요? 전 그저 술만 따랐는데...”“아! 아파요!”다음 순간, 고통에 찬 비명이 들리더니 수진은 탈골된 팔을 감싸안으며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방금 전 제 아내를 버린 남자를 바라봤다.“전 그저 민 사장님한테 저를 모두 내어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악의는 없었다고요.”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준은 코웃음을 쳤다.“감히 나한테 약을 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창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려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이 순간 실내에 있는 도준의 두 눈보다 어둡지도 무섭지도 않았다....“띠-“민혁은 경적을 울리며 고개를 창밖으로 빼 들고 꽉 막힌 길을 바라봤다.“시윤 씨, 오늘 길이 너무 막혔는데, 내일 가면 안 돼요?”그 말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시윤은 창 밖에서 깜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간 시윤은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에서 찬물 세수를 하고 있는 도준을 발견했다.거울 속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물에 젖어 있었고, 물방울은 날렵한 턱선을 타고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앞머리를 뒤로 넘긴 탓에 공격적인 이목구비가 더 입체적으로 보였으며 마치 한 마리의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검은색 셔츠는 남자의 탄탄한 근육을 막지 못해 남성미와 야생미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그 순간, 시윤은 도준이 당한 약이 제가 생각하는 약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어, 민혁 씨가 찾아요...”왜 돌아왔어?”도준은 시윤에게 한발 한발 다가섰다. 심지어 그녀에게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 힘 있는 팔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떠나라고 경고 했잖아. 그런데 왜 돌아왔어?”놀라울 정도로 낮게 잠긴 도준의 목소리는 마치 모래라도 섞여 있는 듯 시윤의 온 감각을 긁어댔다.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떤 시윤은 저에게 가까워진 상대의 숨결에 몸이 굳어버렸다. 도준은 제 얼굴을 시윤의 얼굴에 꼭 붙인 채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장이라도 시윤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쥐었다.옷을 사이 두고 느껴지는 도준의 몸은 데일 것처럼 따가웠다. 도준의 가슴을 손으로 막으며 거리가 더 가까위지지 않도록 자세를 잡은 시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민혁 씨가 밖에 있어요. 어, 얼른 병원에 가 봐요..., 아!”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도준은 한 손으로 시윤을 안아 세면대 위에 앉혔다.이윽고 제 고개를 시윤에게 파묻고 냄새라도 맡는 듯 숨결을 내뱉었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숨결에 시윤이 괴로워할 때.“여보.”도준은 낮게 중얼거리며 시윤의 쇄골 라인을 따라 꽉 깨물었다.“나 좀 도와줘.”시윤의 두 다리는 세면대에 대롱대롱 들려 있었고, 등은 거울에 꼭 붙어 있어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심지어 뜨거운 열기에 머리라도 어떻게 됐는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제가 어떻게 도와요?”손을 시윤의 옷 안에 넣어 허리를 만져대던 도준은
새벽 2시, 블랙 썬.민혁이 리클라이너에 대자로 누워 휴식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그 인기척에 놀라 벌떡 일어난 민혁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준을 보자 이내 헤실 웃었다.“하하하, 도준 형, 왔어?”“한수진은?”“지하실에 가뒀어. 이 방에 두려고 했는데 너무 소리쳐 대서 아래로 보냈어.”민혁은 도준이 수진에 대한 ‘옛정’을 생각해서 스스로 타당한 변명을 찾았다.하지만 도준은 관심없는 듯 이내 지하실로 내려갔다....“민 사장님!”도준을 보자마자 수진의 눈물샘은 터지고 말았다.“왜 이제야 왔어요? 저 좀 구해줘요. 한민혁이 저 여기에 버려둬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이 지하실은 마침 시윤과 은우가 갇혔던 그 방이다.주위를 빙 둘러보니 전에 살던 곳을 다시 방문한 듯한 재미마저 느껴졌다.의자를 끌어와 앉은 도준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팔을 끌어안고 우는 수진을 바라봤다.“말해, 약 어디서 난 거야?”수진은 겁에 질린 듯, 고민도 없이 원혜정의 이름을 불었다.“혜정 이모예요! 혜정 이모가 저 협박해서 할 수 없이 그런 거예요. 저희 집에 와서 저에게 민 사장님 얘기를 해주었고, 그 계기로 제가 사장님을 좋아하게 되자 저를 이용해 백제그룹에서 진행하는 비즈니스 모두 막으라고 시켰어요. 그래야 남편 다시 살려 민씨 가문에서 발붙이고 살 수 있다면서. 나쁜 일은 모두 혜정 이모가 시킨 거예요, 전 진짜 억울해요!”흥미 가득한 도준의 얼굴은 수진의 고백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두워졌다.‘쯧, 고작 몇 마디 했다고 제 패를 까발리다니.’몇 년 전 시윤을 돌이켜보면 이보다는 훨씬 굳세고 강했었다. 도준에게 은우와 저의 왕래를 들키고서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저를 인질로 내세워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는 이야기까지 지어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니. 그 덕에 도준은 시윤과 끝까지 두고 봤었다.심지어 그 개자식이 시윤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목숨도 살려줬다.‘얼굴만 비슷했지 하나도 안 닮았어.’수
수진은 마지막 발악을 해댔다.“그 여자는 민 사장님 속였지만, 전 속이고 싶지 않아요. 전 민 사장님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뭐든 말한 거라고요!”도준은 그 말에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게 좋아하는 거라고? 이건 멍청한 거야. 내가 이 얘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할지도 모르면서 제 패를 모두 까발리다니.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저는...”수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아, 그리고 네 가족. 설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네가 나를 배신하고, 회사 기밀을 빼돌렸는데, 네 가족은 어떻게 될 것 같아?”도준의 음침한 말투에 수진은 그제야 꿈에서 확 깨어났다. 그녀는 이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다.수진은 상대가 사실을 모두 알았는데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제 고집을 부리던 시윤이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저는 훨씬 총명하다고 자신했고. 하지만 그건 결과도 따지지 않는 순진함이었다.도준은 일전에 은우를 묶어 두었던 의자를 빤히 바라봤다.“만약 이시윤이 너였다면 끝까지 떼거나, 약을 탄 건 그냥 날 사랑해서라며 불쌍한 척 동정을 샀을 거야. 그것도 아니면 조금만 알려주고 원씨 가문을 없애주겠다고 딜을 내걸었거나.”“그런데 넌? 모든 희망을 내가 마음 약해질 거라는 데에 걸었잖아. 내가 너 같은 여자한테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수진은 그제야 모든 걸 알아차린 듯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니까 혜정 이모는 제가 들킨 걸 진작 알고 있었다는 거네요?”도준은 피식 웃었다.“너무 미련한 편은 아니네.”원혜정도 따지고 보면 꽤 머리를 잘 굴린 편이다.뭐든 도준을 속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수진한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목적을 갖고 접근하던 시윤의 모습마저 똑같이 따라 하게 했으니.어찌 보면 효과는 꽤 좋았다.특히 시윤을 떠나보내고 미쳐가고 있었던 그때는.“아니야...”바닥에 주저앉은 수진은 제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 울며 빌기 시작했다.“민 사장님, 저를 이시윤이라고 생각해도 돼요. 전 상관없어
다음날.잠에서 깬 시윤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어제의 기억을 되살렸다.어제 그녀는 도준과 식사를 하다가 내연녀 때문에 떠났고, 도준이 약에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돌아왔다가 이런 일을 당해버렸다.‘이게 다 뭔 일이래...’‘아니지!’시윤은 뭔가 생각난 듯 이불을 들어 올려 제 몸을 확인했다. 개운한 걸 봐서는 도준이 이미 뒤처리를 해준 게 틀림없었다.하지만 문제라면 어제 너무 급한 상황이라 아무 조치도 없는 상태로 화장실에서 관계를 가져 버렸다는 거다.‘지금 관계도 충분히 복잡한데, 이럴 때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겠지?’“깼어?”한참 동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시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아침을 사 들고 들어오는 도준이 눈에 들어왔다.어젯밤 일 때문에 시윤은 이 순간 대체 어떤 태도로 도준을 대해야 할지 막막해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그에 반해 도준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씻고 나와서 밥 먹어.”도준이 밖으로 나간 뒤, 시윤은 제 가슴을 가린 채 침대에서 내려 욕실로 달려갔다.거울에 비친 제 몸의 흔적을 본 순간 시윤은 놀랐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공연이 일주일 뒤라 그사이 옅어질 수 있다는 거였다. 안 그랬으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얼마나 원망했을지 눈에 선했다.지난 1년간 남자와 한 번도 접촉한 적 없는지라 양치질하는 내내 시윤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화면들이 언뜻언뜻 지나갔다.제 몸을 꽉 감싸던 도준의 팔과 그런 그의 허리를 감던 제 다리...‘스탑!’‘어제는 사고였어. 이제 곧 이혼해야 하잖아.’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찬물 세수로 겨우 얼굴의 열기를 내린 그때, 화장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그 순간 시윤은 목욕 타월로 가슴을 가리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다.“왜 들어왔어요?”도준은 아무 마라도 하지 않은 채 훤히 노출된 시윤의 어깨라인을 쓱 훑어보더니 물러서는 그녀에게 점점 다가갔다.마침 이마에 떨어진 욕실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도준의 아이
그 시각 문 안.시윤은 도준의 몇 마디에 얼굴을 붉히며 화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현재의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쫓아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굴었으면서, 왜 자고 일어나니 딴사람이 된 거지?’하지만 그 순간, 어제 수진을 달래려면 꽤 애먹어야 한다던 도준의 말이 떠올라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다.도준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저와 한수진 사이에서 저울질하는데, 저는 도준의 말 몇 마디에 가슴이 두근대는 게 한심했다.이건 시윤이 원하는 상태가 아니었다.감정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경험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조금 진정을 되찾은 자신을 확인한 시윤은 옷을 갈아입고 욕실 문을 나섰다.두 사람이 묵은 방은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밖에 나와보니 테이블 위에는 도준이 준비한 아침이 놓여 있었고, 도준은 옆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저 입맛 없어서 아침은 됐어요. 먼저 돌아갈게요.”어제부터 지금까지 벌써 12시간이 돼가는데, 당장 피임약을 먹어야 했다.하지만 시윤이 지나갈 때, 도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으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어제 나 안 했어.”시윤은 고개를 홱 돌렸다.“알아요, 그래서 지금...”도준은 손에 든 약을 흔들거리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이거 사러 가게?”‘피임’이라고 쓰여 있는 약을 보자 시윤은 묵묵히 대답했다.“도준 씨 곁에 이제 한수진이 있으니 이러는 편이 우리한테 좋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의 목소리는 확 가라앉았다.“하긴, 한수진이 있으니 내 곁에서 떠날 명분이 생겼겠네?”객관적으로 볼 때, 맞는 말이었다.그뿐만 아니라 민도준 옆에 다른 사람이 있기에 예전처럼 그를 피하지 않은 것도 있다. 안 그랬다면 도준이 저를 곁에 묶어둘까 봐 피하기 바빴을 테니까.도준은 시윤의 표정에서 답을 얻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밥 먹어, 밥 다 먹으면 줄게.”도준은 거절하지 말라는 듯 명령조로 말했다.그래도 약을 준다는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말하면 말 할수록 상황이 악화하는 걸 깨달은 민혁은 당장이라도 제 귀싸대기를 세게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말을 잘 조직해 제대로 설명하려고 할 때, 시윤이 차창에 기대면서 중얼거렸다.“사실 잘된 일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도준 씨랑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을 테니까.”만약 인터넷에 떠도는 도준의 스캔들을 미리 접하지 못했다면 경성으로 공연하러 오기 전 시윤은 아마 잔뜩 겁에 질려 저를 강제로 잡아두려는 도준을 피하려고 했을 거다.심지어 대체자를 찾아 무대에 내세우는 한이 있어도 경성에 발을 딛지 않았을 거다. 그러지 않는다면 경성을 떠나지 못해 앞으로의 공연을 할 수 없을 테니까.하지만 시윤은 그런 방법은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도준이 이미 그녀를 놓아주었으니까.이성적으로 진작 마음의 준비를 해왔지만, 감정적인 고통을 면할 수는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넋을 잃은 채 창밖을 바라보던 시윤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출발하지 않은 민혁을 바라봤다.“왜 그래요? 혹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민혁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뻐금거리다가 끝내 말을 삼켰다.“안전벨트 안 했어요.”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안전벨트를 맸다....시윤이 차에서 내리자 민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화번호를 눌렀다.“가을 씨, 있어요? 있어요?”그 시각, 촬영장에서 바삐 촬영하는 와중에 짬을 내 전화를 받은 가을은 민혁의 바보 같은 물음에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바보 아니에요? 민혁 씨가 없어도 난 계속 있을 거거든요.”“에이, 사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화 풀어요.”민혁은 핸드폰을 손으로 가린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게 사실은 한 쌍의 남녀가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어 내가 풀어주려 했거든요. 그런데 풀어주는 순간 오해할 기회조차 없어지고, 안 풀어주면 두 사람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을...”“됐어요. 그만 우물쭈물해요. 민 사장님 일이라고 말하면 되잖아요.”“맞아요. 이건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