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 민혁은 도준을 배웅하러 공항으로 향했다.최근 민씨 집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민시영 혼자서는 놈들을 상대하지 못해 도준이 직접 나서야 했다.그때 민혁이 도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저기, 도준 형, 걱정하지 마. 내가 하윤 씨 주위에 수컷은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잘 감시할게. 모기라도 수놈이면 바로 죽여버릴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의 핸드폰이 반짝이더니, 위에 [하윤 씨]라는 세 글자가 떴다.그것도 이렇게 늦은 야밤에 말이다.도준은 그 순간 민혁을 빤히 바라봤다.“모기라도 수놈이면 어쩌겠다고?”민혁은 몸을 흠칫 떨며 울상을 지었다.‘하윤 씨, 전화를 해도 왜 하필 지금 하세요?’그러다가 속으로 울부짖으며 전화를 받았다.“네, 하윤 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시간을 확인하니 밤 9시가 넘었다. 그제야 하윤은 미안한 듯 말을 꺼냈다.“혹시 지금 예기하기 어렵나요? 그럼 내일 다시 얘기해요.”“아니요. 지금 말하셔도 돼요.”이 상황에 확실히 얘기하지 않으면 민혁은 오늘부로 가을과 연인 관계를 쫑내게 될지도 몰랐다.하지만 민혁의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하윤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혹시 내일 만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제가 찾아 갈게요.”민혁은 순간 식은땀이 흘러 감히 옆으로 시선을 도리지도 못했다.“저... 저는 무슨 일로...”“도준 씨 물건 돌려주고 싶은데, 대신 부탁하려고요.”그 말에 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일 때문에 전화한 거였구나. 놀랐잖아요.”민혁의 말에서 하윤은 곧바로 뭔가 눈치챘다.“혹시 지금 같이 있어요?”“어, 네. 지금 옆에 있는데...”민혁이 우물쭈물 말하는 사이, 도준이 어느새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왔다.“선물이니까 마음에 안 들면 갖다 버려.”“...”전화를 끊은 하윤은 짜증 나는 듯 핸드폰을 내팽개 치고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됐어,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떠날 건데 뭐.’...일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다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이 끼어들었다.“저희도 갈 곳이 있거든요. 그 뭐야, 사업 때문에.”그러니까 앞으로 4시간 동안 도준과 함께 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사업 때문이라고? 누가 속을 줄 알고.’하윤은 속으로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지만 통로를 막고 있을 수 없었기에 얼른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자리에 앉은 순간 수아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어? 선배, 어쩐지 극단 식구들이랑 같이 앉지 않는다 했더니, 이미 약속한 사람이 있었네요.”앞뒤 좌석에 모두 극단 식구들인데, 수아가 높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하나 둘 고개를 빼 들고 하윤 쪽을 돌아왔다.심지어 소은도 헤실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아하, 형부였네요. 선배, 벌건 대낮부터 형부랑 애정표현 하면 나 같은 솔로는 어쩌라고 그래요?”그때 뒤에 앉은 후배도 고개를 쑥 내밀었다.“선배 남편 어디 있는데? 앞에서 다 봤으면 들어가, 우리도 좀 보게.”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자 하윤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고 심지어 부끄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옆에 앉은 도준은 여전히 여유롭게 행동하며 ‘배려 깊게’ 하윤의 안전벨트까지 매주기 시작했다.도준의 커다란 손은 하윤의 허리를 느긋하게 쓸더니, 가까워진 탓에 긴장하여 움푹 파인 하윤의 쇄골로 시선을 옮겼다.“여보, 안전에 주의해야지.”하윤은 이런 다정함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은 탓에 반항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그렇게 하윤을 놀리고 있을 때, 도준의 시선은 한 곳에 멈췄다.약 20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두 사람 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흥분한 듯 말을 거는 다른 후배들과 달리, 그 남자애는 오히려 약간 허탈해 보였다.민혁도 마침 임우진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지난번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오늘 보니 확실하네!’그런데 민혁이 발을 뻗어 우진을 넘어뜨리려고 할 때 도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그렇게 예뻐요?”도준의 날카로운 눈빛은 우진의 가면을 사정없이 찢어버렸다. 순간
창가 쪽 자리에 앉은 탓에 하윤은 제 쪽으로 바싹 다가오는 도준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그러다 고개만 살짝 숙이면 입술이 닿을 위치까지 가까워지자 무의식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그 순간 위쪽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여기 밖인데, 키스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눈 떠.”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당했다는 걸 눈치채고 버럭 소리쳤다.“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1년 동안 안 볼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나 갖고 장난 친 거예요?”하윤이 조금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이자 도준은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에 하윤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면서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자기가 이번에 해외로 가면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데, 배웅해 주는 것도 허락 안 할 거야?”곧이어 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코를 꼭 집었다.“몇 시간도 안 돼? 왜 이렇게 인색해졌어?”점점 쌓여가던 하윤의 분노는 도준의 몇 마디에 모두 꺼져버렸다. 심지어 솜을 내리친 것처럼 허무하기까지 했다.제 인생을 통제하고, 부속물처럼 생각하던 도준이 지금은 오히려 모든 걸 맞춰주며 기회만 엿보고 있으니.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만 하는 도준에게 익숙해진 하윤은 처음 겪는 도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랐다.한참 동안 말이 없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피식 웃으며 어르고 달랬다.“지금까지 자기만 조건 내걸었잖아. 이번엔 내가 부탁해도 돼?”그 말에 하윤은 순간 경계했다.“뭔데요?”“간단해.”도준은 하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돌돌 말며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계속 지금처럼 본인을 가두고 있어, 담장 밖으로 나갈 생각 하지 말고.”하윤은 잠깐 멍해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무슨 헛소리예요?”이제 막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도준은 하윤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리더니 엄지 손가락으로 하윤의 입가를 문질렀다.“바람 피우지 마. 그랬다간 상대를 죽여버릴 지도 모르니까.”도준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그때 잠깐 생각하던 하윤이 입을 열었다.“지금 임우진을 말
항구 도시에 도착하자 공항에는 이국적인 얼굴도 많이 눈에 띄었다.커다란 공간 속 누군가는 재회하고 누군가는 헤어지고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이별을 앞둔 커플이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모녀가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었다.게다가 일부 사람은 스케치를 손에 들고 마구 흔들어 대는가 하면 배웅을 해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런 환경이라 그런지 이별의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하윤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그 때문에 냉정한 모습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이 오히려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하윤은 겨우 입을 열었다.“나 이제 가야 해요.”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 비행으로 다소 창백해진 하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품에 끌어안았다.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제 손에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빨간 루비는 투명하고 깨끗했으며 반짝반짝 빛나 유독 아름다웠다.서로 가장 뜨겁게 사랑할 때 받은 그 반지는 두 사람의 이별과 만남의 증거와도 같다.‘이것도 주인한테 돌려줘야겠네...’하윤은 반지를 빼 도준의 옷주머니 속에 넣었다.그러고는 도준이 반지를 꺼내려고 하자 손목을 잡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하윤의 눈은 무척이나 평온했다.“도준 씨, 나 놔줘서 고마워요.”“...”지난번에도 하윤은 이렇게 집을 떠났었다. 하지만 그때의 하윤은 적어도 눈에 미련과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태연함과 감사함만 남았다.‘놔줘서 고맙다고?’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지금 그 인사를 받고 영영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뜻이야?”하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동의하든 하지 않든, 도준 씨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려 한다면 내가 무슨 수로 저항하겠어요?”지난번과 이번만 해도 그렇다. 아무일 없다는 듯 나타나 하윤의 마음을 어질러 놓고 아직 저 때문에 잠 못 이룬다는 걸 굳이 확인했으니.어찌보면 도준은 하윤을 달래는 거겠지만, 하윤한테는 이 모든 게 상처고 고통
1년 후.경성 예술학교.“너 그 소문 들었어? 시윤 선배가 우리 학교에 공연하러 온대.”“당연히 들었지. 나 사인받으려고 공연복을 몇 벌이나 준비했는지 몰라.”“뭐? 왜 하필 공연복에 사인받는데? 난 ‘지젤’공연 때 찍은 사진 준비했는데.”“바보야. 사진에 사인해서 뭐해? 당연히 공연복에 사인받아 기운을 물려 받아야지. 나 이미 다 생각도 해뒀어. 옷 안쪽에 싸인 받아 고이 모셔뒀다가 시험 볼 때 입으려고.”“역시 이런 머리는 널 못 따라간다니까. 난 유성펜으로 사인해달라고 해야지.”...반년 동안 갈고 닦으며 연습한 결과, ‘지젤’ 공연은 첫번째 공연부터 업계 최고의 평판을 얻었다.하지만 일반 대중들한테까지 널리 알려진 건 정작 여주인공의 고스트 댄스다.지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자살한 뒤, 똑같이 배신으로 죽은 여자들은 유령 앨리스로 변하는데, 여자를 배신한 남자들은 무덤에서 억지로 춤을 추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영상 속 유령들은 흰 베일을 머리 위에 덮고 스산한 분위기가 흐르는 묘지에서 춤을 추며 기회하고 낭만적인 모습을 그려냈다.그걸 본 많은 네티즌들은 사랑에 눈이 먼 본인의 친구를 [앨리스]라고 부르기도 했다.짧은 영상이 퍼지면서 한동안 붐이 일어나 그 뒤로 ‘지젤’공연은 매번마다 만석을 기록했고, 발레 열풍까지 불러 일으켰다.심지어 각 대학의 무용단에서도 윤영미의 극단을 섭외하느라 경쟁이 일어났다. 예전부터 발레 문화를 전도하던 윤영미는 이번 기회에 전도 사업을 더 열심히 진행했고, 지난 반년간, 공연이 끝나면 항상 대학에서 강연을 해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3월의 경성은 겨울과 봄 사이 어딘가에 있어 햇살은 따뜻하지만 기온은 여전히 싸늘했다.다시 이 땅을 밟자 시윤은 왠지 한 세기를 지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난 1년간 도준은 약속한 대로 소식을 끊었고, 심지어 민혁마저 하윤의 생활에서 사라졌다.밤낮으로 춤연습에만 매진한 지난날 시윤은 점차 과거에서 벗어났고, 정해진 인생대로 걸어
사실 지난 반년 동안, 시윤에게 이렇게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끔은 도준과 싸운 것인지 묻는가 하면... 이혼했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처음 이런 질문을 받은 건 첫번째 스캔들이 터졌을 때였다. 첫번째 스캔들 상대인 재벌녀가 자기 인스타 계정에서 도준에게 공개적으로 구애를 하면서 소문이 퍼졌다.하지만 공은채와 스캔들이 터졌을 때처럼 도준이 공개적으로 결혼했다고 밝히지 않아 소문은 점점 더 부풀었다.극단에 있는 후배들은 그 소식에 하나같이 펄쩍 뛰며 화를 냈고 심지어는 [결혼한 유부남한테 공개적으로 구애하다니. 어쩜 이렇게 뻔뻔해!]라는 댓글을 달기까지 했다.하지만 재벌녀는 오히려 도준도 불편하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참견이라며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수아는 돌아온 댓글에 미친 듯이 화를 냈지만, 오히려 당사자인 시윤은 그저 웃어 넘기며 연습이나 하자고 재촉했다.사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고, 이러기를 바랐었다.적어도 이번 한 번만 상처받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그래서인지 몇 달 만에 우진한테서 똑 같은 질문을 받은 하윤은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인 듯 그저 싱긋 미소 지었다.“너도 수아한테 옮았어? 왜 갑자기 가십거리에 관심이 생겼어?”그때 뒤에서 엿듣고 있던 수아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끼어들었다.“내가 언제요? 억울해요!”그러자 은정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아닌척 하기는. 지난번에 영미 쌤이 교장과 대화하는 걸 보고 와서는 쌤이 만나는 사람 있다고 소문 내는 바람에 벌로 화장실 청소했던 거 기억 안 나?”그제야 수아는 이내 차분해지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 영감이 영미 쌤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그 말에 수아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지면서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하윤도 분위기에 맞춰 미소를 지었지만, 우진의 눈에는 그 미소가 왠지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알 수 없
“윤이 씨 너무 예뻐요.”민시영이 시윤에게 꽃을 건네며 박수를 보냈다.그런 시영을 보자 시윤도 놀랐는지 무의식적으로 옆을 둘러봤다.이에 시영은 윙크를 날리며 농담조로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요. 도준 오빠 싫어하는 거 알고 나 혼자 왔으니까.”꽃 선물을 하러 온 관객들이 사라지자 시영은 바깥을 손으로 가리켰다.“무대 뒤에서 기다릴게요.”...공연이 끝난 뒤, 시윤은 윤영미와 함께 인터뷰를 하고 그제야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영을 찾아갔다.“오래 기다렸어요?”시영은 손을 저으며 싱긋 웃었다.“윤이 씨 이제 수석 타이틀도 다 달았는데, 당연히 기다려야죠.”시윤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유머 감각이 여전하네요.”“나 진지한데? 요즘 친구들이 맨날 윤이 씨 동영상 찾아보고 있더라고요. 친구들을 이기려고 이렇게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왔는데, 어떻게 그 영광을 줄 수 있나요?”역시나 말주변이 뛰어난 시영 덕에 민씨 집안 식구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던 시윤도 결국은 거절하지 못했다.“저 화장 지우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텐데요.”“괜찮아요. 차에서 기다릴게요.”...시윤이 극장을 나올 때 시간은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막 몇 걸음 뗐을 때, 뒤에서 우진이 쫓아왔다.“선배, 목도리 두고 갔어요.”“고마워.”목도리를 건네받으며 인사하는 시윤을 보자 우진은 뭐라도 더 말을 섞고 있었으나, 차에서 내리는 시영을 보더니 이내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그럼 일 봐요.”“응.”우진이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시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우진을 가리켰다.“따라다니는 연하도 있고, 능력 좋네요.”“아니에요, 극단 후배예요.”“귀엽게 생겼네.”두 사람은 수다를 떨며 차에 올라탔다.그때 운전석에 운전하는 케빈이 눈에 들어오자 시윤은 시영을 흘끗 바라봤다.하지만 시영은 케빈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계속 시시콜콜한 얘기만 해댔다.시윤은 한때 케빈 씨가 감옥에서 나오면 시영과 잘될 줄 알았다. 그런
소예리드는 낭만과 폭력을 동시에 수용하는 도시다.이곳에는 세상에서 규모가 가장 큰 콘서트홀이 있고, 역사가 유구한 골든 홀이 있으며 조약돌을 깔아 만든 밤거리에서 색소폰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다.하지만 그 배후에는 야만과 폭력이 차고 넘친다.그곳에 있는 동안 윤영미는 제자들에게 절대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젊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다.하루는 남자 단원들이 도박장을 구경하고 싶다면서 다른 단원들을 꼬셨다. 사실 시윤은 함께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려는 곳이 불법 권투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도준이 떠올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곳의 치안도 국내 못지 않아 안전을 위해 단원들은 당지 가이드를 따라다녔다.그렇게 불법 권투장에 도착하자 가이드는 경비와 대화를 몇 마디 나누더니 팁을 내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두꺼운 커튼을 여는 순간 귀에 거슬리는 비명소리가 확 덮쳐왔다.시윤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겨울에 접어들었지만 권투장 안은 마치 열대림처럼 후텁지근했다.뜨거운 열기 속에 땀냄새, 담배냄새, 술냄새까지 더해져 역겹기까지 했다. 그곳은 시윤이 한 번도 본적 없는 세상이었다.서로 다른 인종의 남녀가 링 주위를 둘러 싸고 있었으며, 양쪽에서 쉴 새 없이 함성이 흘러나왔다.“You stupid jerk!”“Kill him!!!”사람들의 충혈된 눈에는 승리에 대한 갈망과 돈을 따겠다는 갈망이 넘쳐났다.이곳의 배당률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하루만에 전재산을 탕진할 수도, 새로운 재벌이 태어날 수도 있었다.무대 아래의 광기 섞인 함성이 무대 위에서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링 위에 있는 흑인 남성의 왼쪽 눈은 이미 피가 고여 흰자위도 보이지 않았고, 맞은편 상대는 얼굴이 울긋불긋 멍이 들고 덕지덕지 피가 붙어 있었다. 심지어 바닥을 향해 침을 뱉는 순간 이빨도 따라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이곳에는 아무런 보호대도 룰도 없었다.대머리 남자가 상대의 손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