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시윤은 흠칫 놀라 동작을 멈췄다. 심지어 거의 동시에 뭔가를 알아차렸다.그때 수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신화요?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아시아권 남자였는데 본인 이름을 한 번도 말한 적 없어요. 그래서 그 남자를 만나는 상대는 꼭 지옥을 간다고 해서 우리끼리 데몬이라고 불렀거든요.”가이드의 말에 단원들은 웃음이 터졌다. 수아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에이,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그 말에 가이드는 연신 손을 저었다.“더 대단한 것도 있는데 놀랄까 봐 말 안 했어요.”어느덧 밤이 깊어 부랑자들과 업소 여인들이 길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하자 은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우리도 돌아가자.”겁에 질린 단원들은 더 이상 앞으로 가볼 엄두도 내지 않고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네, 얼른 가요.”...하지만 단원들이 떠나고 난 뒤, 시윤이 또다시 가이드 쪽으로 되돌아왔다.“혹시 그 피어섬이라는 곳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그로부터 얼마 뒤, 시윤은 피어섬 입구에 도착했다.다른 불법 복싱장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간판도 없이 허름한 문에 검은색 커튼을 쳐두었다.그때 가이드가 이곳은 방금 전 복싱장과 배경이 달라 되도록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당부했다.암막 커튼은 전 복싱장과 다를 게 없었지만 규모가 전의 7,8 배 정도 돼 보였다.이제 막 경기가 끝났는지 고객들은 다음 경기에 배팅하고 있었다.그때 주위를 둘러보던 시윤의 눈에 벽에 빽빽이 붙어 있는 포스터가 들어왔다.“이게 뭐죠?”“선수들 정보예요. 배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렇게 적어 두는데, 이건 몇 년 전 거예요, 새건 저쪽에 있어요.”가이드는 사람들이 에워 싸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하지만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미 누렇게 변한 포스터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링 위에서 삐딱하게 서있는 짧은 머리의 남자.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근육이 빽빽이 잡혀 있는 남자는 눈썹을 치켜 올린 채로
지난 날을 회상하던 시윤은 시영의 말을 부정했다.시윤은 이제 도준을 미워하지 않는다.시영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윤이 도준을 만나지 않으려 하는 게 당연히 미워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에 시영은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미워하지 않으면 오빠랑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어요?”시윤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내가 도준 씨를 미워하지 않는 건 나라도 그 상황이면 똑 같은 선택을 할 거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요. 나 이씨 집안 사람이잖아요.”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시윤은 도준을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이씨 집안 딸로서 도준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사실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 같았다. 서로 각자의 생활을 하며 점점 잊어가는 것도.시윤의 뜻을 이해한 시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 이상 도준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다시 시시콜콜 수다를 떨었다.그러다 우연히 시윤이 내일 경성 예술학교에서 공연을 한다는 말을 들은 시용은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내일도 볼 일이 있다면 더 이상 시간 빼앗지 않을 게요.”...다음 날.극단 단원들은 경성 예술학교에 도착했다. 이렇게 학교에 초대될 때는 일반적으로 강좌 교류 형식으로 진행되기에 다들 평상복을 입고 스크린으로 무용극을 감상했다.그러다 시윤이 연속으로 점프하는 구간이 나오자 학생들은 너도나도 핸드폰을 꺼내 들고 영상을 찍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그러다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다들 각자의 관심사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때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손을 번쩍 들었다.“시윤 선배, 혹시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춤 관련 질문을 하는 시간에 이런 질문은 너무 뜬금없었다.하지만 시윤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수아의 마이크를 건네 받으며 대답했다.“그건 사람들마다 다르죠. 나한테 결혼이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앞으로의 갈 길에서 서로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그러자 여자애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그럼 배우자가 다른 사람
시윤의 충고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도준과 이혼할 텐데, 직접 찾아와 도발하기보다 때를 기다렸다가 도준이 이혼하면 그때 당당하게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이렇게 급하게 도발하면 오히려 사람들 눈에 남의 가정 파탄 낸 상간녀로 낙인 찍히고, 도준까지 한꺼번에 바람 피운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하지만 여자애는 오히려 시윤의 진심 어린 충고를 안 좋게 받아들였다. 저를 자극한다고 생각해 거슬리기까지 했다.심지어 시윤의 말을 무시한 채 사진을 빼앗더니 도발하는 표정을 지었다.“관심 고마워요.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면 다른 사람이 눈독 드려요. 차라리 빨리 손에 넣는 게 낫지.”말을 마친 여자애는 화가 난 듯 떠나버렸다.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진은 여자애를 몇 번 더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저 여자...”“왜? 예뻐?”“선배보다는 못하죠! 그런데 왠지 선배랑 닮은 것 같아요. 아니, 아주 닮았어요.”시윤은 옆에 있는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어쩐지 익숙하다 했네.’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수아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선배, 저런 사람은 무시해 버려요. 대역인 주제에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시윤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대체 당한 사람도 대단한 건 아니지. 사람은 누구다 변하는데, 대역은 언제나 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갖고 있을 거잖아.”“하, 대역이든 아니든 간에 상대가 직접 찾아와서 도발하는데, 왜 한바탕 싸우지 않아요?”소은도 화가 난 듯 끼어들었다.“맞아요. 아까 그런 질문 한 것부터 너무했잖아요.”대신 열을 내는 두 사람과 달리, 시윤은 오히려 무덤덤하게 시간을 확인했다.“됐어. 이제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준비해야지. 여기 교장 선생님이 우리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거든, 너희들도 얼른 준비해.”수아는 더 말하고 싶었지만 소은이 팔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윤영미가 수강료를 전혀 받지 않겠다고 하여 고마음울 표현하기 위해 경성 예술학교 교
정신을 차린 시윤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극단 식구들과 같이 왔어요. 저 먼저 가볼게요.”민혁은 시윤이 수진을 봤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설명했다.“저기, 한수진은...”“민혁 씨.”그때 시윤이 민혁의 말을 자르며 싱긋 웃었다.“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요. 다 아니까. 극단 식구들이 기다려서 저 먼저 가볼게요.”시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자 민혁은 이마를 탁 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망했네.’...룸으로 다시 돌아온 시윤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직접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왔다.그건 도준이 수진의 요구를 들어주고 마음대로 하도록 방임하는 것보다, ‘블랙선에서 기다려라’고 하던 민혁의 말 때문이었다.그 한마디로 두 사람의 관계가 한동안 지속됐고, 심지어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선배, 안색이 안 좋은데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음료라도 좀 마셔요.”우진은 말하는 동시에 시윤 앞에 놓인 컵에 주스를 따랐다.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주스를 두 모금 정도 마이니, 차가운 액체가 달아오르는 술기운을 어느 정도 눌러주었다.‘됐어, 그만 생각해. 도준 씨 같은 사람 곁에 여자가 부족할 리 없잖아. 한수진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었을 거야. 내일 해원에 돌아가면 앞으로 다시 경성에 올 일도 없을 텐데.’‘아니구나, 이혼할 때 한 번쯤은 오겠네.’모임이 끝나자 교장은 극단 식구들이 바로 휴식할 수 있게 호텔에 방을 잡아주었다.적당히 마신 제자들과 달리 윤영미는 꽤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아픈지 자꾸만 관자놀이를 눌러댔다.시윤은 우진에게 윤영미를 맡기고 곧바로 숙취해소제를 사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위를 한참 동안 돌다가 겨우 약방을 찾은 시윤은 술을 많이 마신 선배들 것도 몇 병 챙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그제야 룸 번호를 물어보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20층에 있는 건 기억 나는데.’우진에게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던 찰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입맞춤이 또다시 쏟어져 내렸다.시윤은 아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휘몰아치는 도준의 입맞춤을 견뎌야 했다.진작 도준의 입맛대로 길들여진 시윤의 몸은 도준의 동작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그러다가 도준의 모에서 나는 술기운에 취하기라도 한 듯 몸부림이 점점 줄었다.하지만 도준이 시윤의 허리를 끌어안으려 할 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삐-자물쇠가 열리더니 거실에서 수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민 사장님?”“어? 아까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그 시각, 방 안에서 수진의 목소리를 들은 시윤은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을 번적 차리더니 있는 힘껏 도준을 밀어 버렸다.이윽고 침대에서 내려 바닥에 널린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갔다.마침 침실로 들어가려던 수진은 도준의 방에서 나오는 시윤을 보자 놀란 듯 멈춰 섰다.그러다 흐트러진 시윤의 옷과 붉게 부은 입술을 보고는 약 2초간 멍해 있더니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버걱 소리쳤다.“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이제 막 떠나려던 시윤은 수진의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이봐요. 한수진 씨, 지금 무슨 입장으로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죠?”수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마터면 눈 앞에 있는 시윤이야 말로 도준의 명목상의 부인이라는 걸 잊을 뻔했다.본인이 도준을 알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헤어진 상태였기에, 수진은 그동안 저를 여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쉽게 물러날 수진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이 방은 오늘 밤 우리가 같이 쓸 방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숙취해소제를 사러 간 사이에 마음대로 들어왔으니 도둑과 다를 게 뭐 있어요?”그 말에 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그동안 많이 성숙해졌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머리 꼭대기에 밟고 올라오는 걸 눈감아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이봐, 내가 이혼하기 전에 우리의 모든 건 부부 공동 자산에 속해. 이 방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누가 누구더러 도둑
1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도준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아니, 더 매력적으로 변했다. 전에 시윤과 함께 있을 때는 날카로운 모습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지금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니 또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찌나 포악하고 오만한지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정도였다.그 눈빛 한 번에 시윤을 대신해 나서 주려던 수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한편, 시윤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줄은 몰랐던 수진은 잔뜩 날 선 눈으로 시윤을 노려봤지만, 도준이 옆에 있는 바람에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민 대표님, 저 방에 물건을 두고 왔는데 같이 가지러 가줄래요?”수진의 말에 수아는 얼굴을 팍 구겼다.그 말은 두 사람이 어젯밤 같이 잤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이렇게 버젓이 말하다니, 진짜 개 같네!’도준은 비난의 눈빛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두고 나왔으면 다시 사.”말을 마친 도준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널찍하던 엘리베이터는 도준이 들어오자마자 이내 빼곡해졌다.수진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지만 도준이 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것을 보고는 울상이 되어 따라 들어갔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도준은 시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계속 시윤의 눈치를 살피던 우진은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무슨 말이라도 꺼냈다가 분위기가 더 어색해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주위에는 무거운 적막만 흘렀다.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한수진이었다. 그녀는 도준을 올려다보며 뜬금없이 애교를 부렸다.“벌써 9시가 다 돼가네요, 여기 랍스터 죽은 한정 판매라 일찍 내려가야 먹을 수 있다던데, 아직 있는지 모르겠네요.”시윤이 서 있는 각도에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준이 살짝 보였다.“그러면 주방장더러 다시 하라고 하면 되지.”도준의 말에 신이 난 수진은 뒤를 흘끔거렸다.“아하, 호텔 지배인한테 말하면 되네. 일반인들이랑 줄 서서 대기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뒤에 있던 일반인 수아는 그 말에 화가 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마침 아침 식사
방금 전 해프닝 때문에 시윤은 입맛이 없어져서 조금 먹다가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난 짐 정리하러 올라갈게, 오후에 해원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수아는 젓가락을 물고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요? 해원 투어가 일주일 남았는데, 우리는 경성에서 더 놀 생각인데.”소은이 팔꿈치로 수아를 한 번 툭 치고는 입을 열었다.“일찍 돌아가는 것도 좋지. 경성은 아직 추운데, 해원은 꽃도 폈을걸?”“그렇네, 해원에 꽃이 피었겠네.”시윤은 눈을 내리깔고 살짝 웃었다.이윽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우진이 따라 일어났다.“선배, 저도 배불러요. 같이 올라가요.”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우진은 시윤을 계속 힐끔힐끔 훔쳐봤다.“선배, 몇 시 비행기로 예약했어요? 저도 일찍 돌아가고 싶어요. 말해주면 같은 비행기로 예약할게요.”“아직 정하지 않았어. 오후로 예약하려고.”우진이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오후 1시랑 3시에 있는데, 선배는 평소 어떤 항공사를 애용해요?”그 말에 시윤은 얼른 고개를 돌려 우진의 핸드폰을 바라봤다.뒤에서 보면 그 모습은 마치, 우진의 어깨에 기댄 것처럼 보인다.우진도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가왔다. 젊은 남자와 예쁜 여자가 꼭 붙어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했다.하지만 시윤이 열심히 항공편을 고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팔을 낚아채는 바람에,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방금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선배!”“선배한테서 떨어져요!”우진이 다가가려 했지만, 남자의 바이 그대로 배를 걷어차는 바람에 괴로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시윤은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도준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뭐 하는 거예요!”시윤이 얼른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우진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도준이 한발 먼저 엘리베이터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는 마구 흔들리더니 이내 작동을 멈췄다.그 충격에 놀라 비틀거리던 시윤은
“윽!”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덜미의 손이 갑자기 조여오기 시작하더니 시윤은 고통스러워하자 이내 힘을 풀었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조임에 시윤은 멈추지 못하게 했다. 예전에 도준이 시윤을 이렇게 위협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진짜로 죽일 듯이 힘을 쓴 적은 없다.심지어 시윤이 기침을 할 때에도 그저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시윤이 몸을 곧게 펴고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시윤은 지금의 도준이 이전보다 더 변덕스럽다고 느껴졌다. 물론 예전에도 제멋대로 행동했지만 그때는 그저 남을 무시하는 것에 가까웠다.하지만 지금은 인간이라기 보다 구속받지 않은 짐승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시윤을 포함한 누구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이런 도준에게 반항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시윤은 알고 있었다.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힌 후 냉정하게 말했다.“이혼은 도준 씨와 한수진 씨를 위해서 제안한 거예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말을 마친 시윤은 도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누르더니 가장 가까운 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도준은 그런 시윤을 막지 않았지만, 시윤은 멀리 떠나서야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아까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도준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여전히 시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달려들어 그녀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시윤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20층.시윤은 방 안에서 고통을 참는 우진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럴 줄 몰랐어. 괜찮아?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괜찮아요. 선배 탓 아니에요.”우진이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민도준이 선배 다치게 한 건 아니죠?”시윤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진이 시윤의 목에 찍힌 손가락 자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선배! 이거 민도준이 그런 거예요?”그 말에 시윤이 목을 쓰다듬었다. 숨 막히는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