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려고요.”도준이 대신 대답했다.“그런데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죠.”도준의 말이 떨어지자 석지환뿐만 아니라 하윤마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석지환은 천천히 대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은 하윤은 도준에게 따져 물었다.“성공할지 말지 모른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도준은 담배를 눌러 끄더니 하윤의 머리를 문질렀다.“심장 바꾸는 게 뭐 리모컨 배터리 바꾸는 것처럼 간단한 줄 알아? 게다가 두번째 수술이라면 살 확률은 낮아.”“그러면 살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죠?”머뭇거리며 묻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피식 웃었다.“공은채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살까 봐 걱정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수술이 성공해도 새 심장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새 심장이요?”하윤은 그제야 뭔가 눈치챈 듯 물었다.“그러니까 진……, 아니 어머님 심장을 넣어둘 사람을 찾았다는 거예요?”“응.”공은채한테 정성을 쏟아부었던 것처럼 똑 같은 일이 또 반복될까 봐 하윤은 이내 되물었다.“상대가 누군데요?”“아주 귀여운 사람.”‘귀엽다고?’하윤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벌써부터 귀엽네 뭐네 사람을 칭찬한다고?’곧바로 머리속에는 도준이 심장 이식을 받은 귀여운 여자를 매일같이 간호하다가 눈이 맞아 저를 버리는 모습이 그려졌다.‘진짜 너무하네!’도준의 말에 잔뜩 토라진 하윤은 혼자 씩씩대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또 왜 그래? 말 몇 마디에 또 토라졌어?”하윤은 도준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의 말을 무시했다.“참, 여기 사진도 있는데, 볼래?”‘뭐? 사진? 상대 사진까지 저장했어?’하윤은 끝내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하! 이젠 사진도 저장했어요? 어디 봐요, 얼마나 귀여운지!”화가 잔뜩 나서 도준의 핸드폰을 빼앗은 하윤은 이내 할 마을 잃었다‘정말…… 귀엽네요.”약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는 이미 낡아 다 헌 인형을 품
“오늘 영미 쌤이 연습 어떻게 했는지 검사하겠다고 했단 말이예요. 그런데 지금까지 잤으니…… 아!”윤영미의 싸늘한 얼굴을 생각하자 하윤은 등골이 오싹해 얼른 옷을 주어 입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내달렸다. 심지어 외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야 입기 시작했다.도준은 꽁꽁 싸맨 하윤을 보고 피식 웃더니 제 곁으로 끌어왔다.“누가 보면 러시아 인형인 줄 알겠어. 이리 와 봐.”하윤은 고분고분 제 손을 내밀더니 도준이 저를 도와 옷을 정리해 주자 헤실 웃으며 발꿈치를 들고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여보, 고마워요.”“고작 이걸로 퉁 치려고?”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묻는 도준에게 하윤은 이내 고개를 숙이라는 듯 손짓했다.이윽고 고분고분 제 말을 따르는 도준의 목에 손을 둘렀다.하지만 이제 막 입술이 부딪히려고 하던 찰나,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다른 사람 앞에서 그 모습이 딱 들켜버리고 만 하윤은 얼른 도준을 밀어 버렸다.그때 마침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진가을은 두 사람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고, 하윤은 그런 진가을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좋은 아침이에요.”진가을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빨강 머리 아내가 바라 피는 건가?’곁눈질로 존재감 있는 남자를 한 번 훑어본 진가을은 이내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연예계에서조차 보기 드문 미남을 보자 자연스레 한민혁이 떠올랐다.‘뭐, 이것도 인지상정이네.’그 시각, 도준이 제 내연남으로 낙인 찍힌 줄도 모르는 하윤은 낮은 소리로 도준에게 말을 걸었다.“이따가 저 혼자 갈게요. 만약 다른 사람이 보면 그간 한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잖아요.”하윤의 말은 당연히 공은채와 공태준이 저와 도준이 다시 화해한 걸 보면 안 된다는 뜻이었지만, 진가을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진가을의 인상 속에 한민혁은 좋은 사람은 아니어도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다. 지난 번에 눈을 그렇게 만들었는데 몇 마디 투덜거리기만 하고 따지지도 않았으니까.게다가 진가을이 연예인이라는 걸
권하윤이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다른 후배들의 테스트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심지어 불합격을 맞은 두 후배가 구석에서 벌을 서고 있었다.때문에 하윤이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윤영미의 꾸중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이제 60을 앞둔 윤영미였지만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었다.“지금이 몇 시인데 이제야 와? 차라리 집에서 잠이나 잘 것이지!”하윤은 고개를 푹 숙였다.“죄송해요, 늦잠 잤어요.”윤영미는 하윤을 째려보았다.“멍하니 서서 뭐해? 당장 가서 옷 갈아입지 않고. 오늘 테스트 넘지 못하면 저녁에 돌아갈 생각 하지 마. 여기서 밤새 연습해!”“넵!”흠칫 떨며 대답한 하윤은 쌩하고 탈의실로 달려갔다. 한참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윤영미는 자세를 잡는 막대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다행히 그동안의 지옥 훈련을 거쳐 쌓아둔 실력이 있는 데다, 원래의 실력을 잘 발휘하기도 했고 예전에 몸에 배겨 있던 기초도 있어 테스트는 순조롭게 끝났다. 심지어 마지막 턴을 마치고 제 자리에 서는 순간, 벌을 서고 있던 두 후배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윤영미도 마음에 들었는지 습관처럼 칭찬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또 버럭 화를 냈다.“흥. 아무리 원래 감각 되찾았다 해도 무대 서려면 아직도 멀었어. 정신 똑바로 차려, 알겠어?”“알았겠어요.”하윤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겨우 테스트에 통과했다는 안도감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때, 옆에 있던 후배가 헤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선배, 남자친구 있죠?”하윤은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했다.“왜 그건 물어?”후배는 얼굴을 붉히며 하윤의 가슴 위에 난 자국을 가리켰다.그 자국을 보는 순간 하윤은 눈앞에 아찔해 났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았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아 쪽팔려.’……맑게 개인 하늘에서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병원의 검사실 안, 공은채는 제 검사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공은채 씨, 예전에 심장 이식수술을 한 적 있죠
공태준은 싱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하윤의 앞으로 내밀었다.“물건만 경비실에 맡겨두고 가려고 했는데 점심 먹고 있다고 해서 들렀어요.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야.”하윤이 고개를 젓자 태준은 이내 하윤의 후배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여기 앉아도 돼요?”태준이 들어온 순간부터 눈을 반짝이던 정수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평소 볼 일도 드문데, 거기다 매너까지 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네, 아무데나 앉아요.”수아의 말에 하윤도 뭐라 할 수 없어 태준이 의견을 묻는 듯 눈빛을 보내올 때 할 수 없이 고래를 끄덕였다.평소 고급 레스토랑 음식만 입에 댈 것 같은 공태준이 가정음식을 앞에 놓고 앉아 있으니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예쁘게 포장된 디저트를 음식 옆에 놓으니 그런 감각은 더 심해졌다.그때 태준을 훑어보던 수아가 뭔가 알 것 같다는 눈빛을 하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선배, 이 분이 선배 남자친구예요?”하윤이 부인하려던 순간, 수아는 윙크까지 날리며 싱긋 웃었다.“오늘 아침 늦게 온 것도 형부가 놔주지 않아서 그랬죠?”말이 끝나자마자 태준은 하윤에게 따져 묻기라도 하듯 빤히 바라봤다.이에 하윤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쫄깃해 났다. 태준이 뭔가 눈치챌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수아가 더 말하다간 도준이 어젯밤 저를 찾아왔었다는 걸 태준에게 들킬까 봐 불안했다.하지만 이내 진정한 하윤은 수아를 향해 싱긋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네가 남자친구 사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뭐든 남자친구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 보니?”“아니거든요, 이게 다…….”부끄러웠는지 이내 부인하려는 수아를 보자 하윤은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며 귀띔했다.“이제 곧 1시 다 돼가. 쌤이 너 연습실에서 연습하라고 하지 않았어? 안 보이면 또 뭐라 하겠어.”하윤의 말에 수아는 깜짝 놀란 듯 소리치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 후다닥 일어났다.“선배, 저 먼저 가볼게요. 쌤한테 저 밥 먹으러 나왔다는 거
공태준은 예전에도 하윤에게 제 마음을 표현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태준을 마주하고 있자니 하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고, 공태준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솔직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가니까.태준도 그러하다. 예전에는 늘 마음을 억누르며 볼 수 있는 것에만 만족했는데, 처음으로 이렇게 하윤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니.공은채의 말 때문에 태준은 더 이상 마음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눈빛은 오랫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꿰뚫었고 긴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하윤의 손을 잡았다. 심지어 손을 뿌리치려는 하윤을 무시한 채 다시한번 되물었다.“저한테 기대요. 네?”제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도준의 눈빛에 하윤은 한참을 버둥대며 겨우 손을 뒤로 뺐다.“공태준,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여러 번 거정당해서인지 태준은 이제 이런 거절도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매번 가슴에 난 흉터에 계속 새 상처가 덧 새겨져 아픈 건 여전했다. 심지어 내리깐 눈아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민 사장 때문이에요? 민 사장은 지금 은채랑 같이 있는데 아직도 못 잊었어요?”하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도준 씨와는 상관없어.”태준은 그런 하윤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봤다.“민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곧 알 거예요.”이윽고 이 말만 남긴 채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하지만 하윤은 왠지 마음이 불안해져 당장이라도 도준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아마 공은채와 함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내 포기했다.……하윤의 생각대로 공은채와 도준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공은채는 도준을 꼬시기는커녕 오히려 자주 넋이 나간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종업원이 카페를 올렸을 때 거절하기까지 했다.“아니에요.”심장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런 자극적인 것은 손에 대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도준은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여유롭게 말했다.“그건 나중에 다시 예기해.”그 순간 제 건강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공은채는 기분이 언짢았다.“왜요? 결혼하더니 이젠 어머님 심장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가 봐요?”“그 심장이 아니었다면 네가 살아서 여기 앉아 있었다고 생각해?”도준이 그래도 저를 완전히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하윤은 가볍게 웃었다.“그럼 귀찮더라도 오후에 저랑 같이 병원 좀 가줘요. 심장 잘 보관하려면 제가 건강해야 하잖아요.”……공은채는 이번에 더 정밀한 검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공은채의 검사 결과를 놓고 세미나까지 열었다.그 결과 약으로 보름 정도 안정을 취한 뒤 상황에 따라 수술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전문 용어로 토론하는 의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공은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수술 혹시 위험한가요?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되나요?”그 말에 채 교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이론적으로 말하면 수술은 모두 위험성이 따릅니다. 개개인의 체질 혹은 유전자에 따라 수술 중 혹은 수술 후 반응도 모두 다릅니다.”“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은채 환자분 같은 경우는 예전에 병원에서 치료하던 기록이 있기도 하니 저희가 수술 준비는 충분히 할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지내면서 수시로 건강 상태를 확인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거든요.”“입원이요?”공은채는 망설여져 도준을 바라봤다.이제 막 도준과 감정을 회복했는데, 이 타이밍에 입원하여 도준이 다시 하윤을 찾으면 곤란하니까.하지만 한참 동안 고민하던 끝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오늘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내일부터 입원할게요.”이 병원은 원래부터 도준의 것이기에 의사들은 당연히 아무 의견도 없었다. 한참 뒤, 병원을 떠나기 전, 공은채는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다.그러다 밖으로 나오면서 창가에 기대 있는 도준을 본 순간,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오늘 저녁 우리 극단이 파티에 초대받아 자선 공연을 하게 됐는데, 다른 선배들은 연습해야 하니 네가 후배들 데리고 참석하는 게 어때?”“자선 공연이요?”대선배 서윤화의 말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극단이 언제부터 이런 공연도 참석했어요?”“공연이라기보다는 협찬을 끌어들이려고 참석하는 거야. 안 그러면 극단 유지비는 어디서 나겠어?”하긴, 이런 고전 예술은 케이팝처럼 대중성을 띤 게 아니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게다가 매번 공연할 때마다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해야 하지만, 무대는 항상 4분의 1 정도만 채워진다.극단을 알리려면 공연을 해야 하는데, 공연을 하면 자금이 드니 그동안 이런 활동에 참석하여 협찬을 받아냈던 거다.극단 상황을 들은 하윤은 왠지 마음이 아파 얼른 의견을 냈다.“선배, 저한테 돈이 좀 있는데, 아니면…….”“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서윤화는 피식 웃으며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투자 받는 건 당연한 거야. 드라마나 영화도 똑 같잖아. 됐어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너는 춤만 열심히 추면 나머지는 윤 쌤과 내가 알아서 할게.”서윤화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바람에 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이 춤추겠다는 약속을 했다.하지만 하윤이 떠나기 전, 서윤화는 여전히 걱정이 됐는지 신신 당부했다.“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상황은 드문데 그래도 조심해.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만약 누가 투자 건으로 얘기 나누고 싶다면 몇 마디 소개하는 건 괜찮은데 절대 술은 마시지 마. 투자를 받지 못한대도 상관없으니까, 알았지?”서윤화의 걱정에 하윤은 마음이 따뜻해났다.예전에 윤영미 아래에서 춤을 배울 때에도 서윤화는 하윤을 늘 챙겼는데, 이제 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 동생 챙기듯 챙기는 마음이 고맙고 감동스러웠다.이에 하윤은 얼른 서윤화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알았어요, 저 총명한 거 잊었어요?”그 말에 서윤화는 피식 웃었다.“하긴, 윤 쌤이 너
무대 위에서 도준을 본 하윤 역시 넋이 나갔다. 하지만 하윤의 시선은 이내 그의 옆에 앉은 공은채와 마주쳤다.어두운 무대 아래,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어울렸다. 하지만 하윤은 그저 그들 흥을 돋우는 댄서에 불과하다니…….“선배.”무대 앞으로 나가던 수아가 그 자리에 굳어 있는 하윤을 보자 낮게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오늘은 극단을 대표해 나왔으니 절대 추태를 부려서는 안 돼.’얼른 제 위치에 선 하윤은 무대를 등진 채 시작 포즈를 취했다.환한 불빛 아래, 여자의 가는 허리와 팔은 요염하게 움직이며 무대의 서막을 열었다.하윤은 확실히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분명 정식적인 무대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단아하고 우아하며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그 순간, 무대 아래의 대화 소리도 점점 작아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서서히 무대 위로 집중되었다.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을 늘어 놓으며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지만, 유독 한 곳만은 무거운 암류가 흐르는 듯했다.도준은 이내 옆에 있던 공은채를 바라봤다.“네 짓이야?”제 속내를 들킨 공은채는 당황하기는커녕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시윤이 매일 밤 도준 씨 생각으로 잠도 못 이룬다고 하길래 도와준 것뿐이었어요.”그 사이, 하윤이 마무리 도작을 하며 무대는 끝이 났다.그때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 극단에 대해 소개했다.“방금 보신 무용수들이 선보인 무대는 이제 곧 투어를 앞둔 새로운 무극입니다. 이 무대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다면 여기 계신 무용수들한테 연락하시면 됩니다.”사회자가 사회를 보는 사이, 하윤은 후배들을 데리고 그 뒤에 서있었다.하지만 무대 아래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모두 하윤에게 몰려 들었다. 기타 후배들도 귀엽고 활기차긴 했지만 남자의 욕망을 자극할 정도로 여물지는 못했지만, 하윤은 오히려 빨갛게 여물어 바로 따고 싶은 앵두 같았으니까.도준도 나자로써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