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태준은 예전에도 하윤에게 제 마음을 표현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태준을 마주하고 있자니 하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고, 공태준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솔직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가니까.태준도 그러하다. 예전에는 늘 마음을 억누르며 볼 수 있는 것에만 만족했는데, 처음으로 이렇게 하윤에게 가까이 다가갔으니.공은채의 말 때문에 태준은 더 이상 마음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눈빛은 오랫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꿰뚫었고 긴 손가락을 앞으로 뻗으며 하윤의 손을 잡았다. 심지어 손을 뿌리치려는 하윤을 무시한 채 다시한번 되물었다.“저한테 기대요. 네?”제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도준의 눈빛에 하윤은 한참을 버둥대며 겨우 손을 뒤로 뺐다.“공태준,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여러 번 거정당해서인지 태준은 이제 이런 거절도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매번 가슴에 난 흉터에 계속 새 상처가 덧 새겨져 아픈 건 여전했다. 심지어 내리깐 눈아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민 사장 때문이에요? 민 사장은 지금 은채랑 같이 있는데 아직도 못 잊었어요?”하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도준 씨와는 상관없어.”태준은 그런 하윤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봤다.“민도준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곧 알 거예요.”이윽고 이 말만 남긴 채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하지만 하윤은 왠지 마음이 불안해져 당장이라도 도준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아마 공은채와 함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내 포기했다.……하윤의 생각대로 공은채와 도준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공은채는 도준을 꼬시기는커녕 오히려 자주 넋이 나간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종업원이 카페를 올렸을 때 거절하기까지 했다.“아니에요.”심장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런 자극적인 것은 손에 대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도준은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여유롭게 말했다.“그건 나중에 다시 예기해.”그 순간 제 건강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공은채는 기분이 언짢았다.“왜요? 결혼하더니 이젠 어머님 심장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가 봐요?”“그 심장이 아니었다면 네가 살아서 여기 앉아 있었다고 생각해?”도준이 그래도 저를 완전히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하윤은 가볍게 웃었다.“그럼 귀찮더라도 오후에 저랑 같이 병원 좀 가줘요. 심장 잘 보관하려면 제가 건강해야 하잖아요.”……공은채는 이번에 더 정밀한 검사를 진행했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공은채의 검사 결과를 놓고 세미나까지 열었다.그 결과 약으로 보름 정도 안정을 취한 뒤 상황에 따라 수술하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전문 용어로 토론하는 의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공은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수술 혹시 위험한가요? 성공 확률은 얼마나 되나요?”그 말에 채 교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이론적으로 말하면 수술은 모두 위험성이 따릅니다. 개개인의 체질 혹은 유전자에 따라 수술 중 혹은 수술 후 반응도 모두 다릅니다.”“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은채 환자분 같은 경우는 예전에 병원에서 치료하던 기록이 있기도 하니 저희가 수술 준비는 충분히 할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지내면서 수시로 건강 상태를 확인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거든요.”“입원이요?”공은채는 망설여져 도준을 바라봤다.이제 막 도준과 감정을 회복했는데, 이 타이밍에 입원하여 도준이 다시 하윤을 찾으면 곤란하니까.하지만 한참 동안 고민하던 끝에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오늘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내일부터 입원할게요.”이 병원은 원래부터 도준의 것이기에 의사들은 당연히 아무 의견도 없었다. 한참 뒤, 병원을 떠나기 전, 공은채는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다.그러다 밖으로 나오면서 창가에 기대 있는 도준을 본 순간,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오늘 저녁 우리 극단이 파티에 초대받아 자선 공연을 하게 됐는데, 다른 선배들은 연습해야 하니 네가 후배들 데리고 참석하는 게 어때?”“자선 공연이요?”대선배 서윤화의 말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극단이 언제부터 이런 공연도 참석했어요?”“공연이라기보다는 협찬을 끌어들이려고 참석하는 거야. 안 그러면 극단 유지비는 어디서 나겠어?”하긴, 이런 고전 예술은 케이팝처럼 대중성을 띤 게 아니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게다가 매번 공연할 때마다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해야 하지만, 무대는 항상 4분의 1 정도만 채워진다.극단을 알리려면 공연을 해야 하는데, 공연을 하면 자금이 드니 그동안 이런 활동에 참석하여 협찬을 받아냈던 거다.극단 상황을 들은 하윤은 왠지 마음이 아파 얼른 의견을 냈다.“선배, 저한테 돈이 좀 있는데, 아니면…….”“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서윤화는 피식 웃으며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투자 받는 건 당연한 거야. 드라마나 영화도 똑 같잖아. 됐어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너는 춤만 열심히 추면 나머지는 윤 쌤과 내가 알아서 할게.”서윤화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바람에 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이 춤추겠다는 약속을 했다.하지만 하윤이 떠나기 전, 서윤화는 여전히 걱정이 됐는지 신신 당부했다.“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상황은 드문데 그래도 조심해.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만약 누가 투자 건으로 얘기 나누고 싶다면 몇 마디 소개하는 건 괜찮은데 절대 술은 마시지 마. 투자를 받지 못한대도 상관없으니까, 알았지?”서윤화의 걱정에 하윤은 마음이 따뜻해났다.예전에 윤영미 아래에서 춤을 배울 때에도 서윤화는 하윤을 늘 챙겼는데, 이제 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 동생 챙기듯 챙기는 마음이 고맙고 감동스러웠다.이에 하윤은 얼른 서윤화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알았어요, 저 총명한 거 잊었어요?”그 말에 서윤화는 피식 웃었다.“하긴, 윤 쌤이 너
무대 위에서 도준을 본 하윤 역시 넋이 나갔다. 하지만 하윤의 시선은 이내 그의 옆에 앉은 공은채와 마주쳤다.어두운 무대 아래,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어울렸다. 하지만 하윤은 그저 그들 흥을 돋우는 댄서에 불과하다니…….“선배.”무대 앞으로 나가던 수아가 그 자리에 굳어 있는 하윤을 보자 낮게 불렀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오늘은 극단을 대표해 나왔으니 절대 추태를 부려서는 안 돼.’얼른 제 위치에 선 하윤은 무대를 등진 채 시작 포즈를 취했다.환한 불빛 아래, 여자의 가는 허리와 팔은 요염하게 움직이며 무대의 서막을 열었다.하윤은 확실히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분명 정식적인 무대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단아하고 우아하며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그 순간, 무대 아래의 대화 소리도 점점 작아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서서히 무대 위로 집중되었다.사람들은 저마다 감탄을 늘어 놓으며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지만, 유독 한 곳만은 무거운 암류가 흐르는 듯했다.도준은 이내 옆에 있던 공은채를 바라봤다.“네 짓이야?”제 속내를 들킨 공은채는 당황하기는커녕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시윤이 매일 밤 도준 씨 생각으로 잠도 못 이룬다고 하길래 도와준 것뿐이었어요.”그 사이, 하윤이 마무리 도작을 하며 무대는 끝이 났다.그때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 극단에 대해 소개했다.“방금 보신 무용수들이 선보인 무대는 이제 곧 투어를 앞둔 새로운 무극입니다. 이 무대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다면 여기 계신 무용수들한테 연락하시면 됩니다.”사회자가 사회를 보는 사이, 하윤은 후배들을 데리고 그 뒤에 서있었다.하지만 무대 아래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모두 하윤에게 몰려 들었다. 기타 후배들도 귀엽고 활기차긴 했지만 남자의 욕망을 자극할 정도로 여물지는 못했지만, 하윤은 오히려 빨갛게 여물어 바로 따고 싶은 앵두 같았으니까.도준도 나자로써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제는 저 버린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요?”“내가 너 버렸대도 아직은 내 마누라야. 그렇게 속살 훤히 드러내는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춰? 죽고 싶어?”도준의 차가운 말과 굳은 표정에 하윤의 눈시울은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지금 이거 진심인 건가? 정말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공은채랑 붙어먹을 때는 왜 결혼한 상태라는 거 망각했어요? 제가 옷 벗고 춤을 추든 그게 도준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하윤은 너무 화가 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점점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공은채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앞서 하윤이 극단에 돌아간 일로 싸웠다가 무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도준이 당연히 화를 낼 거라는 걸 공은채는 알고 있었다.게다가 하윤도 저와 도준이 꼭 붙어 있는 모습을 봤으니 좋은 말을 할 리 없고, 그러다 보면 두 사람 관계는 점점 파국에 치달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 공은채의 생각대로 도준은 이내 인내심을 잃은 채 소파 의자에 기대 앉았다.“나랑 상관없다고? 그럼 여긴 왜 앉아 있어? 당장 가서 웃음 팔며 후원 끌어들이러 가지 않고?”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하윤은 울적한 심정으로 홱 돌아 떠나버렸다.하지만 다시 무대 뒤로 떠나려던 순간, 누군가 갑자기 하윤을 막아섰다.“예쁜이도 극단 사람 맞지? 지금 투자 필요한 거고? 이리 와 봐, 나랑 얘기 좀 해.”하윤에게 말을 건 사람은 해원에서 플레이보이로 유명한 재벌2세 양동준인데, 평소 이런 투자 자리에 자주 얼굴을 비추며 투자를 빌미로 여자를 고르는 게 취미일 정도로 쓰레기다.사실 오늘도 유명한 연예인들이 온다는 소식에 이 자리에 참석했지만, 방금 전 춤을 추는 하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심지어 하윤은 보는 순간 마음이 간질거려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눌러 참았다.하윤은 양동준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쾌해 이내 제 손을 뒤로 뺐다.“이게 저희 극단 팸플릿입니다. 위에 극단
하지만 공교롭게도 대기실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걸 본 양동준은 이내 상대방에게 명령했다.“당장 꺼져!”“여긴 내 대기실이거든? 당신이 누군데 나가라 말라야?”귀찮은 듯 욕설을 퍼부으며 고개를 돌린 진가을은 마침 남자에게 끌려 들어온 하윤과 눈이 마주쳤다.‘그 빨강 머리 남자 와이프잖아?’‘헐, 바람 상대가 너무 빨리 바뀌는 거 아닌가?’하지만 하윤의 손을 꽉 움켜쥔 남자의 동작에서 가을은 이내 수상함을 감지했다.‘뭐야? 이거 혹시 강제로 끌려온 거였어?’가을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훤한 대낮에 어디서……, 아니지, 훤한 불빛 아래에 어디서 감히 유부녀를 겁탈하려 해? 당장 꺼져. 안 그러면 신고할 거니까.”“씨X, 딴따라 주제에 어디서 감히 눈을 크게 뜨고 덤벼? 나 양동준이야!”양동준이라는 이름을 가을은 들어본 적이 있다. 늘 영화나 드라마에 투자하면서 여자 연예인한테 손대는 거로 유명하다고 매니저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하지만 하윤이 강제로 모욕을 당하고 있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었기에 진가을은 이내 허리에 손을 짚고 버럭 소리쳤다.“당신이 누군지 알 게 뭐야? 대통령 아들이라도 사람 함부로 대하면 안 되지. 당장 나가지 않으면 진짜 소리 지를 거야!”“소리 지른다고? 어디 질러 봐!”가을은 양동준의 도발에 고민도 없이 바로 소리 질렀다.“사람 살려요!”하지만 그런 가을이 한심하다는 듯 양동준은 피식 웃었다.“거 봐, 내 일 망치는 사람은 없다니까……, 아!”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그 소리에 놀라 비틀대는 하윤을 진가을은 이내 부축했다.그리고 때마침 하윤을 놓쳐 찾고 있던 한민혁이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방금 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하윤이 없어져 민혁은 모든 대기실을 이 잡듯 뒤졌다. 그러다 마침 진가을의 소리를 듣고 달려온 거고.그리고 이제야 양동준의 얼굴을 확인한 민혁은 버럭 화를 냈다.“이 자식이 감히! 상대를 봐 가
한편, 하윤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7,8 정도 되는 경비원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무사한 하윤을 보고 한숨을 돌렸다.“괜찮으세요?”하윤은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 대충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그럼 차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그렇게 차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한민혁은 겨우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이내 의자를 뒤로 당겼다.뜬금없는 민혁의 행동에 하윤은 어리둥절했다.“왜 그래요?”“자리 좀 내느라고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민혁은 의자와 핸들 사이 공간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하윤을 쳐다봤다.“하윤 씨는 대인배니까 저 용서해 줄 거죠? 아까 있었던 일 절대 도준 형한테 말하지 마요, 안 그러면 저 진짜 죽어요.”“…….”사실 민혁은 아까 내내 하윤을 몰래 따라다녔었다. 하지만 양동준이 하윤에게 치근덕대는 사이 마침 화장실에 다녀와 하윤을 놓쳐 버렸고, 상황을 듣고 난 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이내 경비원을 불러 모아 사람을 찾기 시작한 거다.도준이 저를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울적하던 하윤의 기분은 조금 풀렸다.“괜찮아요, 갑자기 벌어진 일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요? 말 안 할게요.”“그런데 양동근이라는 사람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도 마음대로 하는 걸 보면 평소에도 분명 제멋대로 굴겠죠?”의자 위치를 다시 원래대로 조절하던 민혁은 하윤의 말에 이내 대답했다.“맞아요. 집에서 엔터 회사를 운영하거든요. 그래서 평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설치고 다니지 못할 걸요.”도준의 성격으로 비추어 보면 양동준은 죽지 않는 대도 분명 불구가 될 게 뻔하다. 이에 하윤은 덜컥 겁이 났다.“혹시 이러다가 들키는 거 아니에요?”“걱정 마세요. 공은채가 내일 병원에 입원하거든요. 앞으로 밖에 일에 관여하지 못할 거예요.”“병원이요?”“네, 도준 형이 겨우겨우 공은채를 입원시켰거든요. 내일이면 두 사람 더 이상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어쩐지
도준은 양동준을 향해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왜 그러냐고?”길게 늘어뜨리는 말꼬리가 텅 빈 방안에서 울려 퍼져 유난히 음산하게 들렸다.하지만 양동준이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도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뭐 별 일은 아니고. 당신 해원 사람 맞지?”도준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리 없는 양동준은 입술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네…….”가득이나 두 팔을 뒤로 묶은 채 바닥에 앉아 있는데, 키 큰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위압감이 몰려왔다.게다가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도준의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 움찔거리는 찰나, 도준이 움직이는 그의 다리를 그대로 밟아버렸다.“아!”양동준의 비명 소리에 도준의 입가에는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내가 이번에 해원에 재미 좀 보려고 왔는데 해원 사람이니 소개 좀 해주는 게 어때?”양동준은 너무 큰 고통에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눈 앞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없이 고통을 참으며 대답했다.“저희 집에 수영장도 있고 골프장도 있으니 저 집에 보내주시면 제가 민 사장님 잘 모시라고 아랫사람들에게 일러 두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고마워하실 거고요!”“골프장? 재밌을 것 같네.”곧이어 도준이 턱을 까딱이자 민혁이 눈치 빠르게 야구 방망이를 건넸다.그 순간 양동준은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지, 지금 뭐 하려는 겁니까?” 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골프는 오랜만이라 양동준 씨가 나랑 몸 좀 풀어줘야겠어.”말이 끝나자마자 야구 방망이가 바람을 가르며 양동준의 팔을 가격했다.“아!”곧이어 양동준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사람 살려! 나 양동준이야! 다짜고짜 이렇게 나를 때린 걸 우리 아빠가 알면 절대 당신들 가만두지…… 아!”잇따른 가격은 모두 양동준의 오장육부를 터뜨릴 것처럼 힘이 실려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빈 공간에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만 울려 퍼졌다.그렇게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난 도준의 턱에는 이미 피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