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임지환이 담담한 말투로 지시했다.유란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방금 자기가 임지환의 허락도 없이 배지수를 일부러 난처한 곤경으로 밀어 넣은 것을 임지환이 혹시 질책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진태양과 대결할 때는 적당히 끝내도록 해. 진지하게 싸우면 네가 이기기 힘들 거야.”임지환은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임 선생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유란도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유란은 말을 마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려를 드러냈다.“전에 임 선생님께서 제게 선생님이 이기는 쪽에 돈을 걸라고 하셨는데 이번에 지면 손해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괜찮아, 거미줄 조직 킬러들 현상금만으로도 이번 손해는 충분히 보상할 수 있어. 그리고 이번에 난 손해만 본 게 아니야.”임지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지환이 용두 지팡이에서 얻은 그 작은 보물 지도가 조 단위의 가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른 일이 없으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미리 준비해 둔 인조 가면입니다. 필요하시면 제가 직접 씌워드릴까요?” 유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임지환은 유란에게서 인조 가면을 받아서 들며 차분히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넌 가서 볼일 봐. 시간이 지나다 보면 강진수 같은 늙은 여우가 의심할지도 몰라.”“알겠습니다!”유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화장실을 나갔다.유란이 떠난 뒤, 임지환은 화장실 밖 거울 앞에 서서 인조 가면을 썼다. 그러자 순식간에 임지환은 밝고 잘생긴 청년으로 변신했다.거울 속 자신을 보며 임지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댔다. “그물은 충분히 펼쳤으니 이제 회수할 때가 됐군!”...유람선의 최상층 커플 스위트룸.외국에서 온 화교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고 그들 옆에는 다양한 총기가 줄지어 있었다.“유레카, 이번 작전 목표가 드디어 나타났어. 탐랑과 약속한 시간까지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짧고 둔탁한 총성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총알은 하나도 빠짐없이 접시에 명중했다.“너희 킬러들은 정말 신중하구나. 내가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으면 벌써 벌집이 됐겠지?”임지환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연기를 하며 두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서로 같은 처지야. 중요한 일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지.”유레카가 총을 내려놓고 눈앞의 낯선 소년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탐랑은 항상 우리랑 단독으로 연락하던데 왜 갑자기 사람을 보낸 거지?”“이번엔 여기 유람선에 사람이 너무 많아. 한 사람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까. 너희 둘 말고도 이번 작전에 참여한 사람 중 탐랑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임지환은 자연스럽게 대답을 이어갔다.브루스는 그 말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그렇지. 우리 부부는 탐랑과 오랜 파트너니까 말이야.”“그 임 대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광대랑 킹콩도 그놈에게 당했다고 들었어. 본부에서는 이번에 아예 배에 폭탄 열 개를 설치하라고 지시했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 목숨도 위험할 거야.”유레카의 얼굴엔 심각한 표정이 스쳤다.“폭탄? 너희도 나랑 같은 생각을 했구나. 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폭탄을 설치했어. 너희가 설치한 곳을 알려줘야 계획이 완벽해질 수 있어.”임지환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폭탄의 위치를 캐내려 했다.“정말 바보가 따로 없구나.”브루스는 임지환을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탐랑이 내 ‘폭탄 전문가'라는 별명을 너한테 안 알려줬나 보네? 다행히 내가 미리 표시해 두고 지도를 그려놨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브루스는 말을 마치고 곧 가방에서 손수 그린 지도를 꺼내려 했다.삐빅...바로 그때, 유레카의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계획 변경. 내 지시를 기다려라. 탐랑으로부터]그 문자를 보자마자 유레카의 표정은 순식간에 급격하게 어두워졌다.그녀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총을 들어 임지환을 겨누며 차갑게 물었다.“넌 대체 누구야?”“유레카, 갑자기
띠리리리...바로 그때, 유레카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임지환은 곧바로 전화를 집어 들고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탐랑아, 안녕?”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폭소를 터트렸다.“임 대사,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했군. 네가 무술 실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머리도 참 잘 돌아가네. 대역을 써서 우리 주의를 그쪽에 돌리고는 뒤에서 몰래 이렇게 움직이다니, 꽤나 똑똑한 작전이야.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야. 이제부터가 진짜 게임의 시작이지!”휴대폰 건너편에서는 차가운 전자 음성이 들려왔다.정체가 드러나는 걸 피하려고 탐랑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모양이었다.“이건 게임이 아니야.”임지환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탐랑, 네 팀원들은 이미 죽었어. 이런 상황에서 뭘 믿고 반격하려고 하지?”“팀원들? 웃기고 자빠졌네. 네가 내 정체를 눈치챈 이상 킬러는 감정이 없다는 것도 잘 알게 아니야. 그 자식들은 그저 내가 이용하기 쉽고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도구일 뿐이야.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지금은 내가 불리해 보일지 몰라도 네가 그 배씨 모녀와 만나서 얘기했을 때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어.”탐랑의 목소리는 전자 합성음이었지만 그의 말 속에 담긴 흘러넘치는 자신감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무슨 뜻이야?”그 말에 임지환의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고 목소리도 서서히 차가워졌다.“대충 짐작이 가잖아. 굳이 내가 더 까놓고 말할 필요가 있나?”탐랑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 배씨 모녀는 지금 내 손안에 있어. 네가 두 사람을 구하고 싶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거야.”“그 두 사람에게 손이라도 대 봐?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갈기갈기 찢어주지.”임지환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며 그 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하하... 조금 전까지는 단순한 추측이었는데.”탐랑은 임지환의 반응에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 말로 확신할 수 있게 됐어. 그녀들이 바로 네 약점이라는 걸 말이야. 두 여
“알고 보니 네 진짜 목표는 강진수였구나. 내가 거미줄 조직 킬러들의 배짱을 너무 얕잡아봤네. 감히 천문 둘째 문주의 목숨을 노리다니, 겁도 없네.”천하의 임지환도 강진수의 진짜 속내를 듣고는 놀라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아무리 탐랑의 야망을 높게 평가했어도 이 녀석이 겨눈 최종 목표가 천문 가주일 줄은 몰랐다.“솔직히 네게 다 털어놔도 상관없어. 강진수는 우리 거미줄 조직의 사냥 목록에 올라와 있는 인물이야. 그놈 목숨값이 무려 20억 달러에 달하지. 그놈을 죽이기만 하면 나도 손을 깨끗이 씻고 이 바닥을 뜰 거야. 남은 생은 편히 쉴 수 있을 거겠지. 이 거래, 어떻게 봐도 모든 걸 걸고 한판 거하게 벌여볼 만하지 않겠어?”탐랑은 주절주절 자기 계획을 널어놓다가 갑자기 화제를 급히 돌려서 말을 이었다.“그놈과 짜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생각은 접어. 네게 단 30분 줄 테니 그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면 그녀들 시신이나 챙기러 와!”말을 끝내자마자 탐랑은 전화를 와락 끊어버렸다.임지환이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상대방의 휴대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는 안내음만 들렸다.“평소의 나답지 않게 이번엔 내가 방심했군.”임지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도와 휴대폰을 손에 들고 브루스 부부의 방을 나섰다.방을 나선 임지환은 급히 폭탄을 해체하지 않고 1층에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이때, 임지환의 모습으로 변장한 유란은 강진수와 강한시 거물급 인물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임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임지환이 갑자기 나타나자 유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임 대사님, 이분은 누구...”유란이 임지환을 ‘임 선생님'이라 부르자 강진수는 어리둥절해졌다.“계획이 바뀌었어.”임지환은 조용히 말하며 얼굴에 붙였던 인조 가면을 떼어냈다.순간,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내 눈이 잘못된 건가? 어떻게 임 대사님이 두 명이지?”“대체 누가 진짜야? 강 문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주위 사
“이건... 불가능해! 이 지도는 분명 가짜야!”폭탄 설치 위치가 표기된 지도를 본 강진수의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지도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으면 임의로 부하를 하나 보내서 직접 확인해 봐. 난 분명 너에게 경고했어. 나중에 대응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날 원망하지 마라.”임지환은 어깨를 으쓱이며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날 겁주려는 거냐?”강진수는 임지환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내뱉었다.“강 문주님, 임 선생님이 굳이 폭탄이 위치한 지도로 당신을 겁줄 이유가 있겠습니까?” 유란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신 말했다.“남자들이 말하는데 여자는 작작 끼어들어!”강진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를 내려고 했다.쉭!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란이 강력한 발차기를 날리며 공기를 사납게 가르는 소리를 냈다.그녀의 길고 날씬한 다리가 이 순간만큼은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이 계집이 나를 만만하게 본 모양이군.”강진수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유란의 다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손톱에서 강철이 스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강 문주님이 이 발차기를 손으로 받으면 이 미인의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부서질 거야.”주변에서 유란의 미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속으로 안타까워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말을 함부로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우리 천문의 위엄은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니야.”강진수가 데려온 경호원들은 다들 오만한 표정으로 유란의 패배를 확신하고 있었다.“그만둬,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순식간에 임지환이 나서서 강진수의 바위도 꿰뚫을 수 있는 공격을 튕겨냈고 다른 한 손으로 유란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임지환, 말 한마디 내뱉으면 끝날 것 같아? 네가 그 계집을 잠시 보호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보호할 순 없어!”임지환이 개입하며 전력을 다한 공격을 쉽게 막아내자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강진수는 저도 몰래 거친 말투로 임지환을 위협
강진수의 부하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할 뿐, 누구도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산전수전을 겪은 강진수의 마음속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강진수는 부하들의 답답한 모습에 화나 큰소리로 호통쳤고 그 호통에 부하들은 흠칫 놀랐다.“문주님, 그... 임 대사님이 하신 말씀은 사실입니다. 저희가 지도를 따라 수색한 결과, 실제로 설치된 폭탄을 발견했습니다.”한 부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쾅!강진수는 들고 있던 용두 지팡이를 사나운 기세로 바닥에 내리치며 호통쳤다.“너희들 눈은 다 장식이냐? 놈들이 폭탄을 설치하는 동안 아무도 눈치 못 챘단 말이냐?”“유람선의 보안 업무는 송씨 가문이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부하들은 강진수의 분노에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진수는 그 말을 듣자 끝내 분노가 폭발했다. “송진국 그 쓰레기 같은 놈, 내 목숨을 날려버릴 뻔했구나.”“아이고, 강 문주님, 남 험담하는 건 신사답지 않네요. 나 송진국은 우리 송씨 가문 명예를 걸고 보장할 수 있어요. 이 유람선은 무조건 안전하다고요.”이때 송진국이 부하들과 함께 휴게실로 들어섰다.“네놈 명예 따위, 내게는 아무 가치도 없어! 임 대사가 아니었다면 난 내가 어떻게 죽는지도 몰랐을 거야.”강진수는 송진국을 비웃으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임지환에게 몸을 돌려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말했다. “임 대사님, 조금 전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임 대사님 말씀을 귀담아듣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흥, 천문 사람들이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았더니 그냥 상황 봐가며 아부나 하는 족속이었구먼.”송진국 뒤에 있던 헐렁한 옷을 입고 머리에 띠를 두른 젊은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나섰다.두 팔을 교차시키고 서 있는 남자는 말쑥한 얼굴에 정성스럽게 다듬은 팔자 콧수염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한국어 발음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송 가주, 네 부하들 알아서 관리해. 내 기분이 지금 엄청
“그 사람은 세계 무술 랭킹에서 10위를 기록한 무술 강자야!”“한중오 검술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검술이잖아. 그 살상력이 어마어마하지.”“내가 듣기론 한중오가 유명해진 이후로 그의 칼 아래에서 죽은 무사가 백 명은 된다고 하더라.”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중년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자 다들 경외감을 감추지 못했다.다들 비록 무사는 아니었지만 한중오의 명성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한중오는 젊었을 때 검도의 진리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고 혼자서 당시 한국의 젊은 세대를 휩쓸어버렸다.이 일은 한국인들에게 전례 없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하지만 실력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그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수십 년이 지났지만 한중오의 명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역시 한국 놈들은 입만 살았지, 실력은 형편없구먼!”전시후는 임지환이 입을 열지 않자 계속해서 도발했다.임지환은 고개도 들지 않고 웃으며 대응했다.“길거리에서 떠도는 들개가 몇 번 짖는다고 내가 그걸 다 받아쳐야 하나?”“어디서 감히 들개를 들먹여? 죽음이란 두 글자를 모르나 보구나.”전시후는 임지환의 대응에 분노하며 본능적으로 허리에 찬 장검을 빼려 했다.“흥분하지 마라. 우리는 이번에 단순히 구경하러 온 거야. 더구나 저 사람은 무술 대가야. 네가 상대해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한중오는 전시후의 어깨를 잡고 눈짓으로 임지환을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임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당신이 진 대사와 대결한 후에 저와 공정하게 결투할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습니다.”“난 그럴 시간이 없어. 게다가 너 같은 아마추어와 싸울 흥미도 전혀 없네.”임지환은 웃으며 단칼에 거절했다.“임 선생님,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한중오는 예상치 못한 임지환의 단호한 거절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검도 대사로서 어디를 가든 존경받고 칭송받는 존재인데
임지환은 몸을 돌린 후, 손가락으로 검을 가볍게 튕겨냈다.딱!그러자 용이 울부짖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검에서 울려 퍼졌다.전시후는 손에 잡은 검에서 전해지는 강력한 충격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결국 꽉 잡았던 검은 손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날아갔다.“검도 제대로 못 잡는 주제에 나대긴 뭘 나대? 니혼으로 돌아가 몇 년 더 연습이나 해!”임지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전시후는 자기가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후 처음으로 검을 뽑은 상황이 이렇게 비참하고 굴욕적인 결말을 맞이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굴이 붉어진 전시후는 굴욕감이 가득 차올라 불만스럽게 소리쳤다.“방금은 내가 방심했을 뿐이야. 검술로는 내가 분명히 네 위에 있어!”전시후가 다시 공격하려 하자 한중오는 한숨을 쉬며 말렸다.“시후야, 그만해. 넌 임 선생님의 상대가 안 돼.”전시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스승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반드시 이 굴욕을 씻어내겠습니다!”“시후 씨, 물러나세요.”그때, 사람들 뒤에서 약간 애티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검은 공주 드레스를 입고 아담한 체형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그 소녀는 은빛 머리를 늘어뜨리고 인형 같은 섬세한 얼굴에 크고 맑은 눈을 가졌는데 나이에 비해 매우 매혹적인 모습이었다.“네, 유리 씨!”소유리의 한마디에 전시후는 뜻밖에도 사나운 기세를 거두고 고분고분 물러났다.“임 대사님이 아껴둔 힘을 이따가 있을 결전에서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한 뒤에 우리 탓으로 돌릴 건 아닐지 걱정이에요.”소유리는 애티 나지만 당돌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그러고는 천천히 진태양에 시선을 돌렸다.“진 대사님, 저희 오빠가 저에게 작월검을 챙겨서 대사님에게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진 대사님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우미야, 검을 전해드려!”소유리의 지시에 따라 날씬한 체형에 긴 머리를 찰랑이며 니혼 전통 복장을 한 여성이 검집이
자리에 앉은 후, 양쪽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쳤다.“민수 씨, 보아하니 이 지역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임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물었다.육민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적시고 말했다.“저는 백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 내려온 건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입니다.”“여행이라고요?”임지환은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육민수를 보며 살짝 놀란 듯 물었다.“맞습니다, 이번이 산에서 처음 내려오는 겁니다.”육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스승님께서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으니 나머지는 여행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그래요? 그렇다면 민수 씨는 은둔한 검수란 말이군요. 근데 민수 씨 등에 멘 그 상자 속에는 대체 어떤 절세 명검이 숨겨져 있는 겁니까?”임지환은 차를 든 채로 무심하게 말했다.윙!임지환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육민수의 표정이 돌연 엄숙해졌다.육민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지환을 노려보며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왜 그러죠?”임지환이 담담하게 되물었다.“어떻게 내 상자 속에 검이 들어 있는 걸 알았습니까? 설마 날 계속 미행해 온 겁니까?”육민수는 칼집에서 칼날이 뽑혀 나온 듯한 기세를 뿜어내며 사람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발산했다.“진정해요, 난 당신에게 악의는 없어요.”임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왜 내가 상자 속에 있는 게 명검이란 걸 아는지 궁금한가요? 내가 그냥 추측한 거라면 믿을 수 있나요?”“믿습니다.”몇 초 동안 고민하던 육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임지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민수 씨,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군요.”육민수는 임지환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도 생각보다 훨씬 더 속이 깊은 사람이군요.”“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임지환은 육민수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세속의 일반인들은 그렇게 쉽게 검수의 존재를 알아채지
“넌 누구야? 이 녀석을 감싸려는 거야? 내 신발은 200만 원짜리 신발이야. 네 몸에 걸친 그 싼 구제 옷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장해수는 임지환을 힐끔 보며 코웃음을 쳤다.비록 임지환은 육민수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사람 같아 보였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걸 다 합쳐도 10만 원이 넘지 않을 것 같았다.장해수는 이런 사람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겨우 200만 원 갖고 이렇게 화내? 큰돈도 아니잖아.”이때 이청월이 뒤따라와 말했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샤넬 가방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바로 옆 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청월의 행동은 아주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헉...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장해수는 임지환이 가리고 있던 시야에서 벗어난 이청월을 보자마자 시선을 이청월 몸에서 뗄 수 없었다.식당 안에 있던 다른 남자 손님들도 이청월의 뛰어난 외모를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이렇게 아무런 성형 수술 흔적도 없이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여성은 요즘 시대에 참 보기 드물었다.사람들의 시선은 곧 임지환의 저렴한 옷차림으로 옮겨졌고 속으로는 질투가 활활 타올라 임지환을 모욕하기 시작했다.“또 여자 등쳐먹는 기생오라비야? 저렇게 예쁜 여자가 왜 저런 녀석이랑...”“아가씨 체면을 봐서 이 돈은 받아둘게. 근데 이건 만 원이 안 되잖아.”장해수는 순식간에 돈을 세어보곤 다시 빈정거렸다.그 돈뭉치는 60만이었고 장해수가 요구한 금액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네가 신은 신발이 진품이라 해도 최대 40만 원 정도일 거야. 더군다나 너 그거 짝퉁이잖아.”이청월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60만 원이면 충분하고도 남아.”“밥은 아무렇게나 먹어도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돼. 무슨 증거라도 있어? 내가 신은 신발이 짝퉁이라는 걸 입증할 증거 말이야.”장해수는 이청월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고 내심 당황했다.사실 이 신발은 장해수가 8만 원 주고 산 고퀄리티 짝퉁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손대지 마!”남자가 황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하얀 머리 청년은 손으로 검은 천을 살짝 벗겨냈다.윙!임지환은 갑자기 오싹한 냉기가 식당을 감도는 기묘한 기운을 느꼈다.다시 집중해서 감지하자 그건 다름 아닌 예리한 검기였다.남자는 하얀 머리 청년의 손목을 꽉 잡았고 아까와 달리 부드럽던 눈빛이 확 차갑고 날카로워졌다.“내 물건에 손대지 마. 안 그러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고 하얀 머리 청년의 손을 밀어내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검은 천을 덮으며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정성스럽게 접었다.그 과정을 마친 후, 남자의 차가웠던 눈빛은 다시 온화하고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조그마한 살기도 없는 사람처럼 무난해 보였다.“겨우 너덜너덜한 상자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유난이야?”하얀 머리 청년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날 이렇게 툭 쳐놓았으면 적어도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어떻게 사과하면 되겠어?”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 이 신발은 한정판이야. 200만 원이 넘는다고. 근데 네가 이렇게 더럽게 만들었으니 내가 어떻게 신고 다니겠냐고?”하얀 머리 청년은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남자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기가 잘못한 게 맞다고 인정하는 듯했다.하얀 머리 청년 장해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남자를 내려다봤다. 이 남자가 마을에서 처음으로 시내로 올라온 촌스럽고 순진한 사람이라 살짝 겁주기만 하면 쩔쩔맨다는 걸 알아차렸다.“간단하지. 신발값 물어내.”장해수는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아 다리를 꼬았다.“난... 돈 없어.”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이제야 남자는 돈이 없으면 영웅도 꼼짝 못 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것 같았다.“돈 없다고? 돈도 없으면서 음식점에 들어와? 난 네가 진짜 돈이 있든, 없든 하나도 상관없어. 오늘 신발값 물어내지 않으면 경찰 불러서 널 잡아넣을 거야.”장해수는 계속 몰아붙였다.“이 사람
“안 돼, 꼭 한 입 먹어봐. 안 그러면 내가 직접 먹여줄 거야.”이청월은 고귀한 신분을 자랑하는 여왕처럼 임지환에게 명령하듯 말했다.“그럼... 알았어.”이청월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며 임지환은 마지못해 한 입 떼어먹었다.“어때? 너무 맛있지?”이청월은 기대에 가득 차서 물었다.“괜찮네...”임지환은 대충 웃어넘기고는 이내 물었다.“얼마나 더 걸을 거야?”“왜? 벌써 지친 거야?”이청월은 앞을 내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저 앞에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있는데 저기서 저녁 먹고 호텔로 가는 게 어때?”“그러자!”임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꿇는 것까지 견뎠는데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함께 운우 골목에 위치한 “천향 식당”에 들어갔다.식당 내부는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값비싼 홍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최고급 백단향이 타오르고 있었다.아마도 이 과시적인 분위기에 관광객들이 약간 눌린 것인지 레스토랑 내부는 손님이 많지 않아 비교적 조용했다.임지환과 이청월은 2층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한 이청월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임지환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시선을 한 사람에게 고정했다.임지환의 시선을 잡은 사람은 식당 입구에 서 있던 한 남자였다.임지환이 특별한 취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남자가 너무 독특했기 때문이었다.남자는 우람진 체형에 날카로운 눈매와 눈동자를 가졌고 온몸에서 강렬한 고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하지만 그 남자는 딱 봐도 특이한 헝겊으로 된 긴 상의와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발에는 헝겊신을 신고 있었다.남자의 등에는 길쭉한 상자를 검은 천으로 싸서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 기묘한 차림 덕분에 임지환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당연히 한 몸에 받았다.하지만 남자는 부끄러운 듯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식당 안쪽을 향해 바라
“나더러 제자를 받으라고?”임지환의 표정이 묘해졌다.전에 소태진이 제자 타령하더니 이번엔 이민재가 이러네...임지환은 이 노인들이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는 건지 궁금해졌다.“안 받아!”임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이민재는 임지환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 잠시 멍해졌다.이래 봬도 명의라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한 자기가 어디를 가든 분명 환영받고 존중받을 정도인데 임지환에게 이토록 매정하게 거절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거절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이민재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넌 너무 늙었고 못생겼잖아. 내가 원하는 건 미인이란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관심이 생기겠어?”임지환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네?”이민재는 입이 떡 벌어져 말을 잇지 못했다.설마 자기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이유가 늙고 못생긴 데다 미인이 아니기 때문일 줄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이청월이 옆에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영감, 내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까?”“무슨 방법인데요?”이민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외국에 가서 성전환 수술하고 얼굴 리프팅까지 하고 오면 돼. 그러면 내가 임지환에게 널 제자 삼으라고 말해볼게.”이청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허청열과 화도윤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체면을 생각해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당신들... 이건 너무하잖아요! 제자를 안 받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모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이민재는 눈을 부라리며 씩씩댔고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평생 힘들게 쌓아온 명성이 오늘 하루 만에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널 제자로 안 받는 이유는 네가 미인이 아니거나 늙어서도 아니야.”임지환은 조금 모자란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그럼 도대체 왜 안 받는 겁니까?”이민재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임 대사, 정말 고맙습니다. 도윤아, 날 대신해서 임 대사를 정성껏 대접해라!”화연평은 그제야 임지환의 말을 따라 침대에 편안하게 누우며 화도윤에게 조용히 당부했다.임지환과 이청월도 더 이상 화연평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임 선생님, 제가 자인 호텔에 방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화도윤이 싱글벙글 웃으며 얼른 쫓아 나와 임지환에게 말했다.“필요 없어. 우리가 직접 거기로 갈 테니 넌 여기서 화 장군님을 잘 돌봐.”임지환은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임지환, 우리가 간만에 금릉에 왔잖아. 제대로 한 번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자.”이청월은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임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잠깐! 두 분, 멈춰주세요!”두 사람이 막 떠나려 할 때 이민재가 허겁지겁 뒤쫓아왔다.“이 침왕, 아직도 볼 일이 남았나요?”화도윤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까 이민재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아버지가 자칫 죽을 뻔했으니 화도윤의 마음속엔 여전히 이민재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이민재가 의술로 유명하지 않았다면 이미 저택에서 쫓아냈을 것이다.“임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이민재는 아까와는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존댓말까지 써가며 말했다.“부디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뭘 묻고 싶은 거야?”임지환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화 장군님 체내의 사악한 기운을 도대체 어떻게 제거하셨는지 궁금합니다.”이민재는 진심으로 지식에 굶주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제가 침을 놓을 때 장군님 체내의 생기를 운용해 분명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는데 왜 결국엔...”“내가 왜 너에게 말해줘야 하지?”임지환이 이민재의 말을 끊었다.“그건...”이민재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임지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굳이 자기에게 말해줄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민재는 알고 있었다.“저는 의사로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
“아악!”비명이 또 방에서 들려왔고 이번엔 더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했다.“날 들여보내 주세요!”화도윤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화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그럴 순 없습니다.”허청열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화도윤을 막아섰다.“허 교관! 넌 정말 이대로 우리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건가?”화도윤의 눈은 핏발이 서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것 같은 야수 같았다.“저도 물론 장군님이 돌아가시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임 선생님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임 선생님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들어가게 놔둘 순 없습니다.”허청열은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이청월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이대로 가다간 나조차도 장군님의 생명을 지탱하기 어려울 겁니다.”이민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 생각엔 먼저...”“끄악!”다시 한번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방 안은 곧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화도윤과 허청열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할 말을 잃었다.“어휴... 이젠 무슨 말을 해도 늦었습니다.. 당신들, 사람을 잘못 믿은 겁니다.” 이민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끼익...”바로 그때, 임지환이 문을 열고 나와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방금 뭐가 늦었다고 했어?”“넌 실력도 부족하면서 괜히 잘난 척하다가 화 장군님을 네 손으로 죽인 거야. 이제 어떻게 수습할지 지켜보겠어.”이민재는 냉랭하게 비웃으며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임 선생님...”허청열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와 조급한 얼굴로 물었다.“걱정 마, 장군님 체내의 사악한 기운은 내가 이미 완전히 제거했어. 이제 장군님 생명에는 더 이상 지장이 없을 거야.”임지환은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정말입니까?”“임 선생님, 그 말씀, 정말입니까?”화도윤과 허청열은
“만약은 절대 없습니다!”화도윤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지며 은은하게 살기가 서렸다.“이 영감탱이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네. 말을 왜 이 따위로 해? 네가 실력이 바닥을 친다고 해서 임지환 실력도 바닥을 친다는 도리는 없잖아!”이청월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임지환을 깎아내리는 말이라 곧바로 받아쳤다.“이 버릇없는 계집, 닥치지 못해? 난 아직 네 죗값도 묻지 않았어!”이민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이 침왕, 자중하십시오.”둘을 지켜보던 허청열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청월 앞을 막아섰다.허청열의 몸에서 칼날이 칼집에서 막 빠져나오기 직전인 듯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아요, 저 녀석이 진짜 화 장군님을 살려낸다면 이 부러진 손은 그냥 넘어가 주겠습니다. 하지만 살려내지 못한다면 화 선생은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길 바랍니다.”이민재는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이민재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허청열과 싸워봤자 손쉽게 당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콜록콜록...”방 안에서 갑자기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그 기침 속에는 피를 토하는 소리까지 섞여 있는 듯했다.화도윤의 얼굴이 굳어지며 안으로 뛰어들 듯이 몸을 움찔했다.그러나 허청열이 화도윤을 막아섰고 고개를 저으며 냉정하게 말했다.“화 회장님, 임 선생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알겠네.”화도윤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화도윤은 임지환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한편, 방 안에서 오랜 시간 거친 숨을 몰아쉬던 화연평이 마침내 힘겹게 피곤이 가득한 눈을 떴다.화연평은 희미하게 보이는 임지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 임 대사, 고... 고맙습니다.”“화 장군님, 아직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 꾹 참고 견뎌주시길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의사로서 수십 년간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의학계에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왔어. 오늘 너 같은 풋내기에게 내 명예를 더럽히게 둘 수는 없어!”이민재는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로 눈이 뒤집혀 거의 쌍욕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이 영감탱이가 어쩜 이렇게 말이 안 통하지? 환자가 너 때문에 병이 더 악화했는데도 뭐라 하지 말라는 거야?”이청월은 눈을 부릅뜨고 이민재에게 쏘아붙였다.이민재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랜 명성을 자랑하는 침술의 대가일지 몰라도 이청월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임지환을 건드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이민재는 이청월을 가리키며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지금 화 장군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넌 환자를 살릴 방법을 찾기보다 네 명성 걱정부터 앞서는구나. 내 생각엔 넌 그냥 명예에만 집착하는 돌팔이야!”이청월의 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민재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어디서 나타난 계집이 감히 어르신에게 말대꾸를 해? 오늘 내가 네 부모를 대신해 제대로 교육해 주마!”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민재는 더 이상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이청월을 때리려 했다.하지만 이민재의 손이 이청월에게 닿기도 전에 임지환이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딱!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민재의 팔이 임지환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부러지는 소리였다.“아악!”이민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팔을 부여잡았고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붉게 달아올랐다.허청열과 화도윤은 이 광경에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얼굴이 창백해졌다.임지환의 행동은 너무나 대담했다. 침술의 왕이라 불리는 이민재의 팔을 부러뜨리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 일이 의학계에 널리 퍼지기라도 하면 임지환은 의학계 전체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허 교관, 지금부터 난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