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별장.“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임지환은 아마 정 어르신 손에 죽었을 거야. 좋은 말도 할 때 날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정 어르신이 돌아오면 너도 임지환을 따라 저세상에 가야 할 거야.”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재석이 끊임없이 정천곤의 이름을 대며 유란을 협박했다.“용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게다가 내 자매들이 지금쯤 용주님을 지원하러 갔을 거야.”유란은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문가에서 멀리 떨어진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지원? 무려 백 명의 무사들인데 뭔 놈의 지원이야?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게다가 정 어르신이 있는데 너희가 한 연대의 병력을 보내도 정 어르신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할 거야.”한재석은 참지 못하고 유란을 비웃으며 조롱했다.한재석은 정천곤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임지환이 이번에는 절대 정천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한재석, 대낮에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냐?”바로 그때, 문밖에서 야유와 조롱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긴 머리에 잘생긴 얼굴을 갖춘 진운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저택에 들어왔다.“네가 왜 아직도 살아있지? 혹시 정 어르신이 일부러 네 신분을 보고 놔준 거야?”한재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내 생사는 그 영감탱이가 결정할 수 없어.”진운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네가 가장 걱정해야 할 건 바로 네 목숨이야.”“무슨 개소리야?” 한재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넌 진짜 미련한 거야 아니면 미련한 척 연기하고 있는 거냐? 정천곤인가 뭔가 하는 그 영감은 이미 임 선생님이 호되게 조져놨어. 그리고 너희 한씨 가문이 데려온 그 무사들은... 전부 뒈졌어.”진운은 일부러 홀가분한 어조로 말했다.호가호위하는 느낌이 이렇게 통쾌하고 짜릿할 줄은 몰랐다.“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 정 어르신은... 반보 선천의 최강 무사란 말이야!”한재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휠체
남은 시간이 200초도 되지 않은 상황을 보며 유란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용주님, 기껏해야 남은 시간이 200초도 안 돼요. 폭탄이 곧 터질 거예요. 우리 서둘러 여기서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요.”“가, 다들 시름 놓고 얼른 가. 어차피 배씨 가족이 나랑 같이 여기서 죽을 거니까 나도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한재석은 휠체어에 앉아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임지환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임지환도 배씨 가족을 구할 수는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임지환은 냉정한 눈빛으로 앞으로 다가가 배지수의 밧줄을 풀어주고 유란에게 말했다. “지수를 데리고 얼른 나가. 여기 일은 나한테 맡겨.”“용주님, 군자는 이렇게 위태로운 곳에 서지 않아요. 배씨 가족 사람들은 용주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데 왜 그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요?”유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기 오기 전에 유란은 이미 임지환의 배경을 샅샅이 조사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임지환과 배씨 가문 사이의 원한을 알고 있었다. 결론은 단 하나, 구제 불능인 이 가족은 구할 가치가 하나도 없었다.“물 한 방울의 은혜는 샘물로 보답해야 해. 배씨 가족 사람들은 비록 박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결국은 지수의 가족이야. 난 이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어.”임지환은 한숨을 쉬면서도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그만해, 시간이 많지 않아. 얼른 지수를 데리고 나가. 폭탄은 날 어쩌지 못할 거니까.”임지환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마치고 죽어가는 정천곤 앞으로 다가갔다.“배씨 가족은 어디에 갇혀 있어?” 임지환이 강압적인 태도로 정천곤에게 캐물었다.“그들은 이 거실 아래 지하실에 있어. 제발... 날 죽이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날 데리고 나가줘!”정천곤은 양팔을 잃고 임지환이 은침으로 기해혈을 봉인했기 때문에 이미 이전의 늠름하고 자신만만하던 자태를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초라한 노인으로 타락했다.“이 노인네를 데리
고막이 터질 듯한 거대한 소리에 배전무를 비롯한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임... 임지환, 진짜 왔구나?”배전무는 임지환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지금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납시다.”임지환은 깊은 구덩이로 뛰어들어 세 사람을 구출하려고 했다.하지만 배준영은 임지환을 경계하며 배전무를 귀띔했다. “아버지, 저 자식을 믿지 마세요.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임지환과 한씨 가문이 공모한 계략일지도 몰라요.”“맞아요. 경찰이 올 때까지 여기에 머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우리 경찰이나 기다립시다.”유옥진도 화살에 놀란 새처럼 임지환을 두려워하며 구출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임지환이 굳이 좋은 의도로 그들을 구출하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어서 갑시다. 더 이상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요!”임지환은 앞으로 다가서며 손을 휘둘렀다.“뭘 하려고 하는 거야? 경고하는데 함부로 행동하지 마!”배준영은 여전히 경계심을 놓지 않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퍽!퍽!돼지를 잡는 것 같은 모자의 비명 속에서 임지환은 깔끔하게 두 사람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이건...”배전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갑시다!”임지환은 빠른 속도로 배전무의 밧줄을 풀어주고 등을 가볍게 들어 구덩이 밖으로 올려 던졌다.그러자 배전무는 곧 구름을 타는 듯이 하늘을 날아 저택 대문 앞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임지환은 기절한 모자 두 사람을 보며 그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삐삐삐...임지환이 구덩이에서 나올 때 갑자기 시한폭탄에서 긴급한 소리가 들려왔다.마치 죽음을 알리는 듯한 공포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임지환은 전력을 다해 어깨에 메고 있던 두 사람을 던졌다.그러고는 대문 앞에 서 있는 배전무를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두 사람을 데리고 빨리 도망쳐요!”이때, 배전무는 임지환에게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배전무는 안간힘을 다해 두 사람을 끌고 문밖으로 미친 듯이
“넌 어디서 굴러먹다 나타난 쌍년이야? 감히 날 때려? 죽고 싶어 환장했어?”유옥진은 부은 뺨을 서둘러 감싸며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유란을 노려보았다.“당장 꺼져! 더 개소리치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유란은 말을 마치고 주저 없이 부츠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서슬 퍼런 단검을 보며 유옥진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둘러 배준영을 흔들어 깨우고 허겁지겁 이곳을 떠났다.“아가씨, 임지환이 지금 저 안에 있어요. 빨리 소방서에 전화해 봐요. 어쩌면 아직 임지환을 구출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배전무는 고개를 돌려 용기를 내어 유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기절한 배지수를 품에 안고 비틀거리며 유옥진을 따라 떠났다.“배씨 가문 사람들이 이 정도로 배은망덕할 줄 몰랐어. 용주님이 이 사람들의 생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난 벌써 이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개들에게 먹였을 거야.”단검을 든 유란은 멀리 떠나는 배전무 일가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원한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대장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용주님의 생사를 확인하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거예요.”유향과 다른 영사들도 시간을 맞춰 저택으로 속속 돌아왔다.유란은 하늘을 치솟는 거대한 불길을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불길이 이렇게 큰데 용주님이 정말 무사할 수 있을까?”“걱정 마세요. 용주님은 반보 선천의 절정 고수도 이길 수 있는 분이니까요. 이 정도 불길은 용주님에게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못할 거예요.” 유향이 자신만만한 말투로 말했다.“맞아요. 용주님은 의부님도 무척 존경하고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대단한 인물인데 이런 불길 속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요.”“대장님이 그래도 걱정된다면 불길이 조금 사그라들면 우리와 함께 들어가 찾아보죠.”“그리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유란과 영사들이 임지환을 구하러 들어가려고 할 때, 임지환은 마치 마당에서 산책하듯 거대한 불길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임지
정천곤은 자기 목숨이 눈앞의 이 청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잘 인지하고 있었다. 기개라고? 그딴 게 정천곤을 살아남게 해주지는 않는다.“날 풀어만 준다면 혈제 비법을 그대로 네게 전수할게.”정천곤은 임지환이 솔깃할 만한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난 혈제 비법 따위에 관심 없어.”하지만 예상외로 임지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널 잡아 온 이유는 단 하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물어보고 싶어서야.”“뭘 알고 싶은데?” 정천곤은 별로 의심하지 않고 무심코 물었다.“검문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좋아.”임지환은 그윽한 눈빛으로 정천곤을 바라보며 자기 패를 깠다.“그건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간다 해도 검문의 정보는 절대로 누설하지 않을 거야.”정천곤은 뜻밖에도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인간 오뚜기가 뭔지 혹시 알아?”임지환은 갑자기 입가에 오싹한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그건 뭔데?”정천곤은 경각심을 높이며 물었다. 본능적으로 임지환이 말한 것이 별로 좋은 물건은 아니라고 느꼈다.“인간 오뚜기는 사람의 손발을 잘라내고 눈을 파낸 다음, 귀에 구리를 부어 넣고 혀를 잘라낸 뒤 약을 강제로 먹여 성대를 파괴해 소리도 낼 수 없게 하는 일종의 고문이야. 사람을 이렇게 파괴하고 나중에 돼지처럼 기르는 고대의 고문이지. 정천곤, 네가 과연 이 고문을 견딜 수 있을까?”임지환은 한담을 나누듯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지만 이 끔찍한 내용은 정천곤의 몸을 얼음처럼 얼어붙었고 소름이 돋아 심장박동이 빨라지게 했다.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고문이 아니야.인간이 이런 고문을 받게 된다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할 게 뻔했다.“난 검문의 제자이긴 하지만 핵심 인물은 아니야.”정천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아.”“그럼 검문에 있을 때 이마에 번개 흉터가 있는 검수를 본 적이 있어?”임지환이
“왜 널 풀어달라고 빌지 않아?”임지환은 정천곤의 태도를 의아해했다.이 노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았는데 왜 목숨을 포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깨달았어. 난 이제 완전히 쓸모없는 사람이 됐다는 걸 말야.. 살아있어도 죽은 거나 다를 바 없어. 이 바닥에서 뒹굴던 애송이도 결국 나이 들어 별 볼 일 없는 노인이 된다고 하더니, 네 손에 죽는 것도 내 운명이라고 믿어. 나중에 네가 검문에 갈 수 있다면 꼭 날 대신해 영월의 묘에 향 세 개를 올려줘.”말을 마치고 정천곤의 눈빛이 빠른 속도로 흐릿해졌다. 생존 욕구를 철저히 잃은 게 분명해 보였다. 임지환은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정천곤의 백회혈을 내리쳤다.그러자 반보 선천의 고수였던 정천곤은 순식간에 숨이 끊겼다.“내가 검문에 가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할 기회가 생긴다면 네 소원도 함께 이뤄줄게.”임지환은 잠시 정천곤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 영감도 꽤나 기개가 있네요. 비굴하게 살 바엔 깔끔하게 죽는 걸 선택하는 걸 보니.”유란이 옆에서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사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자부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야. 비록 이 노인은 날 곤경에 빠뜨린 적이었지만 시신이 들판에 버려지도록 가만히 둘 수는 없어.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아서 묻어주도록 해.” 임지환은 유란에게 신신당부했다.“네, 용주님!”유란이 대답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홍 시장님이 오셔서 중요한 일이 있으니 용주님과 상의하고 싶다고 하더군요.”“그래? 마침 송씨 가문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는데 잘됐네.”임지환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지하실을 떠났다.홍진은 이미 거실에서 임지환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홍진은 뜨거운 냄비 위의 개미처럼 거실을 서성거리고 있었고 안색도 좋지 않을뿐더러 얼굴색은 매우 어두웠다.“임 대사, 드디어 나오셨군요. 큰일 났어요. 이번에 송씨 가문이 칼을 갈고 우리를 덮칠 모양입니다.”임지환이 나타나자
구르미 빌리지.“지수야, 이건 임지환이 너에게 전해달라고 한 거야.”한수경이 서류 하나를 배지수에게 건네주었다.배지수는 비단 재질의 잠옷을 입고 얼굴이 창백한 채로 소파에 반쯤 누워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동요할 만큼 하얗고 고운 발이 잠옷 밖에 나와 있었다.“지환이 방금 그렇게 큰 소동을 일으켜 우리 가족을 전부 몰살할 뻔했어. 근데 또 갑자기 너에게 영문 모를 서류를 주다니, 왜? 또 우리 배씨 가족을 뭔가 나쁜 일에 끌어들이려는 거야?”배지수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서류를 받아 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무심한 태도로 읽었지만 서류 내용을 확인하면 할수록 배지수의 얼굴에 놀라움이 짙어졌다.마침내 배지수는 맨발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언니, 우리가 돈벼락을 맞게 되었네요!”한수경은 이유를 몰라 어안이 벙벙한 채 물었다.“돈벼락? 설마 임지환이 너에게 돈이 되는 큰 사업을 선물한 거라고 믿는 거야? 그 사람 주제에 무슨 사업을 줄 수 있다고.”“언니, 이건 주문서가 아니야. 이건 주식 양도 계약서야. 내가 서류에 사인하기만 하면 앞으로 난 경성 그룹의 최대 주주가 되는 거야!”배지수는 눈에서 뜨거운 열정이 불처럼 타올랐고 터져 나오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다.“그럴 리가 없어! 이 계약서는 분명 가짜일 거야!” 한수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설마 가짜겠어? 이 서류에는 청월 씨의 친필 사인도 있어.”“임지환이 아무리 대담해도 이런 일로 장난칠 배짱은 없을 거야.” 배지수는 즉시 한수경을 반박했다.그러자 한수경도 할 말을 잃었다.배지수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임지환과 이청월의 관계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하다 해도 임지환이 계약서를 위조할 용기는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설마 이씨 가문이 진짜 경성 그룹을 배씨 가문에게 돌려줄 생각인 건가?“진위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지금 당장 이청월에게 전화해 확인하는 거야. 이청월이 계약서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네가 하늘로
“진 도련님 외에는...”갑자기 예고도 없이 배지수의 머릿속에 임지환의 모습이 떠올랐다.하지만 배지수는 곧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부정했다.임지환은 비록 이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심지어 이청월과 연인 관계일 가능성도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씨 가문에 명령해 경성 그룹을 순순히 배씨 가족에 넘겨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제아무리 이씨 가문이라 해도 돈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건 아니다.“청월 씨가 3일 후의 계약식에 널 초대하지 않았어? 그때 가서 직접 청월 씨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한수경이 배지수에게 중요한 사실을 다시 귀띔했다.“응,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제발 그날에 이 일의 진상이 밝혀지면 좋겠어.”배지수는 손에 들고 있는 계약서를 꽉 쥐었고 밝고 빛나는 눈에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넘실거렸다....3일 후, 힐튼 호텔 입구.명품 차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모여 있고 호텔 밖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검은색 낮은 목선 드레스를 입은 배지수는 하이힐을 신고 한수경의 동행하에 천천히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강한시의 대다수 유명 인사들이 로비에 전부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연예계의 스타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청월 씨는 단순한 계약식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건 계약식치곤 너무 호화로운데.” 배지수는 평소 TV에서만 보던 스타들과 재벌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장소를 잘못 찾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어머, 이건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사촌 언니잖아? 너 같은 보잘것없는 영업 매니저가 어떻게 이런 고급 연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거야? 낯가죽에 철판을 깔았나?”배지수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조롱이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배지수가 돌아보자 연한 녹색의 얇은 드레스를 입고 요염하게 화장한 배영지가 깡패처럼 보이는 청년의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정말 세상 좁네!”배지수는 배영지를 흘깃 쳐다보고 쌀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