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은 우리가 졌지만 아직 섣불리 기뻐하지는 마라. 내가 너를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게 다 끝나.”정천곤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살벌한 살기가 넘쳐 흘렀다.이 순간, 정천곤은 이미 승산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뭔가 특별한 수단을 쓰지 않으면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오호라? 보아하니 아직 비장의 무기가 남아 있나? 숨기지 말고 얼른 꺼내 보지 그래.”임지환은 담담하게 웃으며 약을 올렸다.“혈제!”단 두 글자였지만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린 듯 무거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술법의 이름이 공개된 후 정천곤의 일곱 구멍에서 끔찍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정천곤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변했고 원래 마른 체형은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다.찌지직!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산산조각 난 옷자락은 나비처럼 하늘하늘 공중을 날아다녔다.이 말라비틀어진 정 노인은 무사들의 시선 속에서 무려 2미터 가까운 근육질의 거한으로 변했다.“오늘 여기서 네 목숨을 걸고 덤벼들 생각이야?”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 임지환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진운도 참지 못하고 깊은숨을 들이쉬며 충격을 받은 목소리로 임지환에게 물었다.“저 영감이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길래 한순간에 철탑 같은 거인으로 부풀 수 있는 겁니까?”“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영감은 혈맥을 자극하는 어떤 비법을 사용했을 거예요. 검문의 제자에 어울리는 대단한 실력을 갖췄군요.”임지환은 모든 것을 이해한 듯 정신을 집중해 정천곤을 빤히 쳐다봤다.“네놈을 죽이기 위해 난 단번에 10년의 수명을 소진했어.”정천곤은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내 혈제 비법 공격을 받고 죽을 수 있다면 너도 만족해야 할 거야!”“으르렁!”말을 마치고 정천곤은 야수 같은 외침을 내뱉었다.그의 몸은 마치 중형 탱크처럼 우람졌고 놀라운 기세로 임지환에게 돌진했다.쿵쿵...정천곤이 점점 가까워지자 요란한 소리가 터지면서 진운은 고막이 터질 듯 심한 통증을 느껴 본능적으로
“감히 용주님을 건드리는 자는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거야!”생사를 넘나드는 이 위기의 순간, 수많은 그림자가 숲속에서 튀어나왔다.영사 열다섯 명이 거의 동시에 숲에 도착했다.영사들은 무기를 들고 임지환의 곁에 서서 정천곤의 발걸음을 막았다.불과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여인들은 뿔뿔이 도망간 무사들을 전부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다.여인들의 무기에 묻은 시뻘건 피를 보며 정천곤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저 녀석들이 이 정도로 쓸모가 없을 줄은 몰랐군. 너희 같은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풋내기 계집년 손에 죽는 걸 보니.”“영사를 과소평가하는 자는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거야!”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열다섯 명의 영사는 포위망을 형성하며 주저하지 않고 정천곤을 향해 빠르게 공격을 개시했다.“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계집들아. 그럼 내가 기꺼이 죽여주지.”눈이 시뻘겋게 물든 정천곤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맞서 공격을 개시했다.정천곤은 주먹과 발을 휘두르며 영사들의 단검을 무시하고 맨몸으로 영사들과 맞서 싸웠다.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영사 한 명이 바로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영사들은 조금도 겁에 질려 물러서지 않았다.영사들의 임지환에 대한 충성은 오래전부터 이미 생사를 초월한 것이었다.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불과 3분도 안 되는 사이에 열다섯 명의 영사가 전부 정천곤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지금 정천곤은 맨몸의 힘만으로도 대종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하찮은 개미들을 전부 처리했으니 이제 오늘의 주인공을 모셔봐야겠구나.”정천곤은 거대한 바위 속에 미동도 하지 않고 박혀 있는 임지환을 바라보며 서슬 퍼런 살기를 내뿜었다.“멈춰라!”쓰러진 영사들이 영혼을 끌어모아 울부짖으며 다시 싸우려고 바닥에서 몸부림쳤지만 정천곤의 주먹에 당한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비록 영사들이 화진급의 고수일지라도 당장은 다시 몸을 움직여 전투에 개입할 수 없었다.“거 참
“내 팔...”정천곤은 하늘을 향해 괴성으로 울부짖었다. 목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텅 빈 두 손을 바라보며 정천곤의 눈은 피가 떨어질 듯 붉게 물들었다.혈제 비법의 영향으로 절단된 팔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두 팔을 잃은 충격은 정천곤을 죽이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이봐 영감, 이제 두 팔 다 잃었으니 어디 한 번 더 까불어 봐!”정신을 차린 진운은 통쾌하게 웃으며 약을 올렸다. 조금 전까지 진운은 임지환과 함께 도망치느라 허덕이며 꼴불견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속이 시원했다.“애송이야, 내가 팔이 없다고 사람을 못 죽일 것 같아 보여?”정천곤은 진운을 바라보며 점점 더 짙어지는 살기를 드러냈다.진운은 한마디 더 핀잔을 주려다 그 모습에 겁에 질려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빨 없는 호랑이는 여전히 호랑이지 고양이일 수는 없었다.두 팔을 잃은 정천곤은 여전히 위압적이었고 압도적인 기세를 보였다.“내가 너무 약하게 공격했나 보구나. 이참에 네 다리도 부러뜨려 버릴까?”임지환은 손에 든 절단된 팔을 바닥에 던지고 차가운 표정으로 정천곤에게 다가갔다.“푸른 산을 두고 땔나무를 걱정하랴? 난 절대 여기서 죽을 수 없어!”정천곤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숲속으로 향했다.생사의 갈림길에서 체면과 신분보다 더 허무한 물건은 없었다.펑펑...정천곤의 발은 마치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한 번 뛰어오를 때마다 수십 미터를 튕겨 나갔다.숲속의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고목들을 이용해 정천곤은 숲속에서 계속해서 앞으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숨 몇 번 쉴 새에 정천곤은 이미 임지환과의 거리를 천 미터 이상 벌렸다.“이 임지환이라는 자는 설마 선천 경지에 들어선 건가? 내가 비법을 써서 전력을 다해 맞붙는다 해도 전혀 살아남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구나. 게다가 내 원군들은 저 빌어먹을 계집들에게 모두 사살당했으니 승산이 전혀 있을 수 없어.”정천곤은 도망가면서 마음속으로 눈앞의 사실에 끊임없이 경악했다.방금 정천곤이 빠른 속도로 지나친
푸슉!이 가늘고 기다란 은침은 해일과 같은 거대한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을 듯한 엄청난 위력을 실어 유성처럼 날아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밀림 속으로 사라져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한편, 수천 미터 거리에 떨어진 정천곤은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 눈에 띄는 함정도 없었다.“내가 정말 늙었나 보군. 임지환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이후로 완전히 화살에 놀란 새가 되었네.”정천곤은 스스로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다시 발길을 돌려 도주하려 했다.슉!갑자기 한 줄기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정천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차가운 빛은 정천곤 가슴의 기해혈을 뚫고 들어갔다.곧바로 정천곤은 온몸이 마비되어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지금 정천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든 신세가 되었다고 가슴에 박힌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은침을 바라보더니 문득 모든 것을 깨달은 듯 중얼댔다.“이 은침은... 임지환이 쏜 게 틀림없군. 내가... 결국 그 녀석을 너무 얕봤네!”정천곤은 후회막급하며 모든 것을 돌이키고 싶었다. 임지환과 무턱대고 교전한 게 뼈저리게 후회했다.그러나 세상에 후회 약은 없는 법, 이미 엎지른 물인지라 모든 게 너무 늦었다....“갑시다!”임지환은 손을 툭툭 털며 담담하게 말했다.“정천곤을 정말 이대로 그냥 도망치게 놔둘 겁니까?”진운은 여전히 임지환의 소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 노인은 이미 내 은침에 맞았고 지금쯤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겁니다.”임지환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그 말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진운은 자기 의구심을 그대로 표했다가 갑자기 너무 경솔한 행동임을 깨닫고 민망해하며 헤벌쭉 웃었다. “저 노인이 혹여나 이상한 꾀를 부릴지 몰라서 그렇습니다.”“다들 믿지 못하겠으면 날 따라와서 확인해 봐요.”임지환은 말을 마치고는 숲
청산 별장.“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임지환은 아마 정 어르신 손에 죽었을 거야. 좋은 말도 할 때 날 풀어주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정 어르신이 돌아오면 너도 임지환을 따라 저세상에 가야 할 거야.”창백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재석이 끊임없이 정천곤의 이름을 대며 유란을 협박했다.“용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게다가 내 자매들이 지금쯤 용주님을 지원하러 갔을 거야.”유란은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문가에서 멀리 떨어진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지원? 무려 백 명의 무사들인데 뭔 놈의 지원이야?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게다가 정 어르신이 있는데 너희가 한 연대의 병력을 보내도 정 어르신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할 거야.”한재석은 참지 못하고 유란을 비웃으며 조롱했다.한재석은 정천곤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임지환이 이번에는 절대 정천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한재석, 대낮에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냐?”바로 그때, 문밖에서 야유와 조롱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긴 머리에 잘생긴 얼굴을 갖춘 진운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저택에 들어왔다.“네가 왜 아직도 살아있지? 혹시 정 어르신이 일부러 네 신분을 보고 놔준 거야?”한재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내 생사는 그 영감탱이가 결정할 수 없어.”진운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 네가 가장 걱정해야 할 건 바로 네 목숨이야.”“무슨 개소리야?” 한재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넌 진짜 미련한 거야 아니면 미련한 척 연기하고 있는 거냐? 정천곤인가 뭔가 하는 그 영감은 이미 임 선생님이 호되게 조져놨어. 그리고 너희 한씨 가문이 데려온 그 무사들은... 전부 뒈졌어.”진운은 일부러 홀가분한 어조로 말했다.호가호위하는 느낌이 이렇게 통쾌하고 짜릿할 줄은 몰랐다.“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 정 어르신은... 반보 선천의 최강 무사란 말이야!”한재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휠체
남은 시간이 200초도 되지 않은 상황을 보며 유란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용주님, 기껏해야 남은 시간이 200초도 안 돼요. 폭탄이 곧 터질 거예요. 우리 서둘러 여기서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아요.”“가, 다들 시름 놓고 얼른 가. 어차피 배씨 가족이 나랑 같이 여기서 죽을 거니까 나도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한재석은 휠체어에 앉아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임지환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임지환도 배씨 가족을 구할 수는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임지환은 냉정한 눈빛으로 앞으로 다가가 배지수의 밧줄을 풀어주고 유란에게 말했다. “지수를 데리고 얼른 나가. 여기 일은 나한테 맡겨.”“용주님, 군자는 이렇게 위태로운 곳에 서지 않아요. 배씨 가족 사람들은 용주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데 왜 그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요?”유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기 오기 전에 유란은 이미 임지환의 배경을 샅샅이 조사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임지환과 배씨 가문 사이의 원한을 알고 있었다. 결론은 단 하나, 구제 불능인 이 가족은 구할 가치가 하나도 없었다.“물 한 방울의 은혜는 샘물로 보답해야 해. 배씨 가족 사람들은 비록 박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결국은 지수의 가족이야. 난 이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어.”임지환은 한숨을 쉬면서도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그만해, 시간이 많지 않아. 얼른 지수를 데리고 나가. 폭탄은 날 어쩌지 못할 거니까.”임지환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마치고 죽어가는 정천곤 앞으로 다가갔다.“배씨 가족은 어디에 갇혀 있어?” 임지환이 강압적인 태도로 정천곤에게 캐물었다.“그들은 이 거실 아래 지하실에 있어. 제발... 날 죽이지 말아줘. 부탁이니까 날 데리고 나가줘!”정천곤은 양팔을 잃고 임지환이 은침으로 기해혈을 봉인했기 때문에 이미 이전의 늠름하고 자신만만하던 자태를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초라한 노인으로 타락했다.“이 노인네를 데리
고막이 터질 듯한 거대한 소리에 배전무를 비롯한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임... 임지환, 진짜 왔구나?”배전무는 임지환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지금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납시다.”임지환은 깊은 구덩이로 뛰어들어 세 사람을 구출하려고 했다.하지만 배준영은 임지환을 경계하며 배전무를 귀띔했다. “아버지, 저 자식을 믿지 마세요.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임지환과 한씨 가문이 공모한 계략일지도 몰라요.”“맞아요. 경찰이 올 때까지 여기에 머무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우리 경찰이나 기다립시다.”유옥진도 화살에 놀란 새처럼 임지환을 두려워하며 구출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임지환이 굳이 좋은 의도로 그들을 구출하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어서 갑시다. 더 이상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요!”임지환은 앞으로 다가서며 손을 휘둘렀다.“뭘 하려고 하는 거야? 경고하는데 함부로 행동하지 마!”배준영은 여전히 경계심을 놓지 않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퍽!퍽!돼지를 잡는 것 같은 모자의 비명 속에서 임지환은 깔끔하게 두 사람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이건...”배전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갑시다!”임지환은 빠른 속도로 배전무의 밧줄을 풀어주고 등을 가볍게 들어 구덩이 밖으로 올려 던졌다.그러자 배전무는 곧 구름을 타는 듯이 하늘을 날아 저택 대문 앞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임지환은 기절한 모자 두 사람을 보며 그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삐삐삐...임지환이 구덩이에서 나올 때 갑자기 시한폭탄에서 긴급한 소리가 들려왔다.마치 죽음을 알리는 듯한 공포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임지환은 전력을 다해 어깨에 메고 있던 두 사람을 던졌다.그러고는 대문 앞에 서 있는 배전무를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두 사람을 데리고 빨리 도망쳐요!”이때, 배전무는 임지환에게 아무리 불만이 많더라도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배전무는 안간힘을 다해 두 사람을 끌고 문밖으로 미친 듯이
“넌 어디서 굴러먹다 나타난 쌍년이야? 감히 날 때려? 죽고 싶어 환장했어?”유옥진은 부은 뺨을 서둘러 감싸며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유란을 노려보았다.“당장 꺼져! 더 개소리치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유란은 말을 마치고 주저 없이 부츠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서슬 퍼런 단검을 보며 유옥진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둘러 배준영을 흔들어 깨우고 허겁지겁 이곳을 떠났다.“아가씨, 임지환이 지금 저 안에 있어요. 빨리 소방서에 전화해 봐요. 어쩌면 아직 임지환을 구출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배전무는 고개를 돌려 용기를 내어 유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기절한 배지수를 품에 안고 비틀거리며 유옥진을 따라 떠났다.“배씨 가문 사람들이 이 정도로 배은망덕할 줄 몰랐어. 용주님이 이 사람들의 생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난 벌써 이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개들에게 먹였을 거야.”단검을 든 유란은 멀리 떠나는 배전무 일가를 보며 치밀어 오르는 원한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대장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용주님의 생사를 확인하는 거예요. 저 사람들은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거예요.”유향과 다른 영사들도 시간을 맞춰 저택으로 속속 돌아왔다.유란은 하늘을 치솟는 거대한 불길을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불길이 이렇게 큰데 용주님이 정말 무사할 수 있을까?”“걱정 마세요. 용주님은 반보 선천의 절정 고수도 이길 수 있는 분이니까요. 이 정도 불길은 용주님에게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못할 거예요.” 유향이 자신만만한 말투로 말했다.“맞아요. 용주님은 의부님도 무척 존경하고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대단한 인물인데 이런 불길 속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요.”“대장님이 그래도 걱정된다면 불길이 조금 사그라들면 우리와 함께 들어가 찾아보죠.”“그리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유란과 영사들이 임지환을 구하러 들어가려고 할 때, 임지환은 마치 마당에서 산책하듯 거대한 불길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