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운명은 두 사람과 아주 큰 장난을 쓰고 있었다.믿음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세워지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렵게 세워진 믿음은 와르르 무너지기 여간 쉽지 않다.적어도 지금으로서 유시아는 다시 그를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임재욱은 침대 머리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히 초점을 흩트렸다.보고 있는 것은 없으나 마음속은 꽉 채워진 채, 때론 또 엄청 텅텅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유시아가 잠을 설칠까 봐 임재욱은 홈닥터에게 수면제 성분이 들어가 있는 약도 좀 첨부해 달라고 부탁했다.하여 유시아는 밤새 아주 잠을 깊이 잤다.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어느새 8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밤새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것이 컨디션도 제법 좋아진 것만 같았다.고개를 돌려보니 자기를 마주한 채 자는 임재욱이 보였다.아침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임재욱의 얼굴에 비치자, 그의 이목구비는 더더욱 또렷하게 보였고 천금으로 살 수 없는 예술품과 같았다.유시아의 허리를 꼭 안고 있는 그는 마치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떼려고 했으나 결국 인기척에 그가 깨나고 말았다.“자기야...”눈을 천천히 뜨고 잠결에 유시아를 부르며 이마에 뽀뽀까지 했다.“잘 잤어?”‘자기야’라는 호칭에 유시아는 순간 당황했다.순간 유시아는 어젯밤에 있었던 모든 일이 꿈이었으면 했고 가능하다면 기억이 삭제되었으면 했다.그렇게라도 계속 자신을 속여 이 남자의 부드러움에 몸을 푹 잠기고 싶었다.하지만 기억은 생생하고 잊히지 않았다.어젯밤의 기만이 실마리가 되어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불쾌함을 일일이 끄집어냈다.“왜 그래?”임재욱은 말하면서 조금 더 다가가 턱으로 그녀의 이마를 비볐다.“열은 다행히 내렸네. 자기야,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요. 고마워요.”말함과 동시에 유시아는 그의 팔을 허리에서 떼어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수도를 켜자 물이 콸콸 나오기 시작했다.한 손으로 세면대를 짚은 채 정신을 놓
지난번에는 딱 반나절 동안 임재욱의 아내로 지냈었는데, 이번에는 무려 이틀이나 혼인 관계를 유지했다.지난번에 비하면 엄청 운이 좋은 것이다.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이라 사람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이틀... 48시간...유시아에게 있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임재욱의 물건, 돈, 그리고 사람까지 유시아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임재욱에게 멀어져 평생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다.그가 그러한 일을 할 때 그만의 이유가 있듯이 유시아 역시 자기만의 견지가 있는 것이다.길이 다르면 굳이 같이 걸음 맞춰 걸을 필요가 없다.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일 지도 모른다.“이혼...”임재욱은 나지막이 이 두 글자를 곱씹더니 가볍게 씩 웃었다.“유시아, 꿈도 꾸지 마!”임재욱은 유시아의 몸을 돌려 자기와 마주하게 했다.“너도 소현우 어머니 챙겼잖아. 아니, 챙기고 있잖아! 근데 왜 나한테는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건데? 같은 입장이잖아! 내가 너한테 하얀 거짓말을 해서 그게 용서가 안 돼? 응?”“똑같지 않아요.”“어머님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고, 여자잖아요. 하지만 신시연은 다르잖아요. 신서현 여동생이고 닮은 구석도 제법 많고 우울증까지 있어서 재욱 씨 보살핌이 필요하고...”예전에 신시연과 마찰이 생길 때마다 임재욱은 주저 없이 신시연의 편을 들어 주었고 모든 잘못을 유시아에게 돌렸다.신시연이 극도로 어리석은 수단으로 유시아를 모험했을 때도 임재욱은 유시아를 믿지 않았었다.그 이유는 단 하나, 유시아는 유병철의 딸이기 때문이다.신서현을 차로 들이박아 죽여 버린 범죄자의 딸이기 때문에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악몽 같은 그 시절로 돌아가라는 건 유시아를 두 번 죽이니 격이다.이젠 제발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시이다.전에는 신서현을 이길 수가 없었고 지금은 역시 신시연을 이길 리가 없었다.두려워서 항복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선뜻 양보하는 것이다.“유시아!”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필경 그때 신씨 가문에 남은 일가족을 정운시로 데리고 온 건 임재욱 본인이기 때문이다.이 도시에서 임재욱은 그들의 유일의 버팀목이므로 신서현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유시아는 그러한 말들을 듣기 귀찮아졌는데 손을 내밀어 그를 밀쳐내고 홀로 밖에 있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임재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유시아에게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 시간이 좀 필요하고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면서.임재욱은 수도꼭지를 닫고 한바탕 씻고는 옷방으로 다가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난 이만 출근하러 갈게. 집에 가만히 있든 아니면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니든 네가 편한 대로 해. 어디로 가든 집에 꼭 돌아오고. 내가 직접 가서 널 잡아 오게 하지 말고.”말을 마치고 그는 손을 내밀어 테이블 위에서 차키를 가지고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시아는 여전히 전과 같은 자세로 소파에 앉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밖을 내다보며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유시아, 너 진짜 대박이다.’임재욱이 신씨 가문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불만을 안고 심지어 질투까지 했으니 말이다.‘이건 좀 아니야.’살짝 정신을 놓고 있던 그때 집 전화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유시아는 임재욱이 무엇인가 놓고 간 줄 알고 바로 받았다.“여보세요?”“여보세요, 재욱 오빠...”간드러진 여자 목소리였고 유시아는 단번에 신시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어젯밤의 모든 것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고 고개를 들어 2층을 바라보았을 때 신시연이 창가에 서 있던 것도 생각났다.그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기 전에 기고만장하고 활기가 넘쳤던 그 신시연도 생각이 났다.분명히 같은 사람이나 한 사람으로 겹쳐보기 힘들었다.한편, 신시연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오빠, 저 무서워요. 우리 엄마 아빠 호시 이대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에요? 만약 두 분 다 돌아가시면 전 어떡하죠? 오빠, 저녁에 이리로 와서 저랑 좀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때라 술집 안은 북적거렸다.술집을 좋아하는 젊은 남녀들로, 근처에서 출근하는 회사 직원들로, 막히는 도로를 피하고자 잠시 이곳으로 숨은 사람들로....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시끌벅적한 장면을 만들어냈다.잠시 모든 정서를 내려놓은 채 스트레스도 좀 풀 생각으로 찾아온 이들도 많았다.유시아는 가장 구석 자리로 다가가 앉아 와인 한 병이랑 피스타치오를 주문했다.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자리를 떠나자마자 임재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시아야, 너 지금 어디야?”유시아는 순간 멈칫거리다가 바로 대답했다.“화실 근처에 있는 kt 술집에 있어요.”임재욱과 숨바꼭질을 하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만약 이대로 가뭇없이 사라진다면, 임재욱은 백 천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유시아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밖으로 돌아다니게 가만히 놔둔 것으로 봐도 임재욱은 그녀가 제 발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멀리 도망간다고 한들 스스로 돌아와야 하니 말이다.필경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채련이 그의 손에 있다.솔직히 말했어도 임재욱은 여전히 불쾌해했다.“그런 복잡한 곳에는 왜 간 거야?”“택시가 잡히지 않아서요.”유시아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하철역까지는 너무 멀고 힐을 신어서 걷고 싶지도 않아서요.”임재욱은 계속 물었다.“그럼, 나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왜 안 했어?”유시아는 입술을 사리 물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바쁠까 봐, 행여나 방해가 될까 봐.”유시아는 알고 있다.그에게는 짐이 많다는 것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그중에서 자기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 소홀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다.임재욱은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 화실 앞이라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말을 마치고 전화가 끊겼다.임재욱은 차 문을 열
핸들을 잡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보니 신시연의 도우미 김향화였다.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 다소 떨리는 듯한 김향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얼른 TK 대학 병원으로 좀 와보세요. 아가씨께서... 자살 시도를 하셨어요...”순간 임재욱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네? 어떻게 된 겁니까?”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한편, 김향화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아가씨께서 대표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셨다고 자기를 버리셨다고 그러면서 한참 동안 울고 있었어요. 옆에서 계속 타일러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과일을 사달라고 하시면서 저를 밖으로 내보내시고 다시 돌아와 보니 이미...”“알았어요.”“일단 조급해하지 말고 잘 지키고 있어요. 금방 갈게요.”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고 유시아를 바라보았다.“시아야...”“저기 앞에 세워주면 돼요.”유시아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는 듯했다.“마침 외식이나 하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면 돼요.”임재욱은 눈살을 찌푸린 채 양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시연이 자살 시도했다고 그러는 데 가서 위로 좀 해줘야 할 것 같아. 같이 보러 가자. 그러고 나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집에 가자.”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나를 보고 싶지 않아 할 것 같은데요.”이치가 없는 말은 아니다.전에 신시연은 유병철이 신서현을 죽었다는 이유로 내내 유시아에게 시비를 걸었었다.요즘 부모님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유일한 친언니가 한창 그리워질 시기인데, 이때 유시와 마주하게 된다면 그건 좀 억지가 아닌가 싶다.그렇게 생각하면서 임재욱은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두 사람 마주치게 하지도 않을게. 넌 차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유시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임재욱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임재욱은 백미
임청아는 멍하니 걷다가 뒤에서 소리가 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유시아를 보고서 그녀 역시 멈칫거렸지만, 곧 웃으며 입을 열었다.“시아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재욱 씨 따라온 거예요. 옛 친구 병문안을 왔거든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임청아가 손에 쥐고 있는 병원 진단서 같은 것을 보았다.그만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데.“청아 씨는요? 어디 아픈 거예요?”임청아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심적으로 아픈 것이 확실해 보였고 육체적으로 아픈 것보다 몇천 배는 괴로워 보였다.우울증을 앓고 있는 신시연에게 자살과 자해와 같은 경향이 있었기에 임청아 역시 그러한 상황일까 봐 걱정되었다.“별거 아니에요.”임청아는 말하면서 진단서를 몸 뒤로 숨기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참,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듣자 하니 화실을 경영하고 있다면서요?”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요?”“화실에 지낼 만한 곳이 있을까요?”“그건 왜...”더 스케치 화실 안에 작은 휴게실이 있는 건 사실이다.용재휘가 운영하고 있을 때 일부러 쉴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용재휘는 뜨문뜨문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었다.유시아가 화실을 이어받은 뒤로 그녀는 휴게실까지 깨끗하게 청소하였기에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충분한 그런 곳이다.하지만 공주 침대에 길들어져 있는 부잣집 따님이 자기에는 모든 조건이 부실할지도 모른다.“화실 키 저한테 주세요.”임청아는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집에 가고 싶지 않고 호텔에서 자고 싶지도 않아요. 시아 씨한테 마침 지낼만한 곳이 있다고 하니 하룻밤만 신세 좀 질게요.”지금 임청아는 호텔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다.주민 등록증을 호텔 쪽에 건네기만 하면 임태훈은 바로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숙박 조건에 대해 별다른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방이 막혀 있고 길거리에 노숙만 하지 않게 하면 된다.그러한 의미에서 유시아의 화실이 최고의 선택지가 된 것이다.“무슨 일 있어요?”유시아는 키를 꼭
해외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일들까지 더해지면서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임재욱은 아주 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만하고 집에 가자.”말하면서 그는 차 머리를 돌려 병원 밖으로 향했다.늦은 밤, 그린레이크.임재욱은 오늘도 예외 없이 서재로 향했고 유시아는 홀로 침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임청아의 일이 내내 신경 쓰여 유시아는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뭐 하고 있냐며 메시지를 보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임청아는 유시아에게 셀카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 속 임청아는 연한 컬러의 치마 잠옷을 입고 토실이를 안고 있었다.주위 바닥에는 과자 봉지와 먹다 남은 우유가 널려있었고.무척이나 한가로워 보이는 사진이었지만, 임청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몇 분 뒤, 그녀는 또다시 임청아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내왔다.[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시아 씨 화실에서 자살 같은 거 하지 않을 테니. 저 그렇게 격 떨어진 사람 아니에요.]장담하는 듯한 메시지를 보고서 유시아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것만 같았다.목숨만 소중히 여긴다면 모든 것에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이윽고 유시아는 위로의 메시지를 여러 통 보내고 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려고 했다.이제 막 침대에 누웠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임재욱이 밖에서 들어와 예전처럼 침대에 올라와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자기야, 잘 자.”유시아는 대충 대답하고서 바로 눈을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갑자기 병원 안에서 그가 어떻게 신시연을 위로했을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신시연이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다.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만약 우울증이 낫지 않는다면 평생 오늘처럼 돌보고 위로해야 하는 노릇일지도 모른다....이러저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전혀 마음 편히 잘 수가 없었다.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며 침대 가장자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임재욱은 바로 눈치를 채고 팔에 힘을 더했다.“왜 그래?”“너무 꼭 안아서 불편
제대로 속마음을 들킨 유시아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엄청 졸리니 이거 좀 놓죠!”“그래? 나도 졸리는 데, 우리같이 잘까?”임재욱은 말하면서 이불을 확 당겨 불빛을 가려버렸다.“같이 자자.”트럭이 온몸을 짓누르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자기야...”“이제 자도 될까?”귀까지 빨개진 유시아는 그를 향해 그만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놈! 너 진짜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야... 웁...”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재욱이 또다시 덮쳐와 그녀의 턱을 잡고 야한 방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나 욕하지 마.”유시아는 손을 내밀어 입술을 겹겹이 닦았지만 더 이상 감히 그를 욕할 용기가 없었다.이불 속으로 순순히 몸을 숨긴 채 그를 등지고 자려고 했다.임재욱은 전과 마찬가지로 한 줌도 안 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서 가슴에 그녀의 등이 바짝 닿게 하였다.“시아야, 인제 그만 해. 시연이 일은 내가 어떻게든 빨리 해결할게. 절대 우리 사이에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야.”유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조용히 그의 품속에 안긴 채 정말로 잠이 든 것처럼 시늉했다.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새벽 3, 4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밀려왔다.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점심이 다가오고 있었다.임청아가 내내 신경 쓰여 유시아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집에서 음식과 생활 용품을 챙겨서 화실로 향했다.임청아는 화실에서 제법 잘 지내고 있었고 토실이와 친구가 되어 있었다.심지어 배달로 고기까지 배달하여 토실에게 먹여주었는데, 여기저기 고기 부스러기로 가득했다.유시아는 가져온 물건을 휴게실 서랍장 안에 넣고 입을 열었다.“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왜요? 공짜로 먹고 자고 해서 꼴 보기 싫어요?”임청아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겨보며 덧붙였다.“걱정하지 말아요. 나중에 5성급 호텔 비용으로 숙박 비용 지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