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일들까지 더해지면서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임재욱은 아주 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만하고 집에 가자.”말하면서 그는 차 머리를 돌려 병원 밖으로 향했다.늦은 밤, 그린레이크.임재욱은 오늘도 예외 없이 서재로 향했고 유시아는 홀로 침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임청아의 일이 내내 신경 쓰여 유시아는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뭐 하고 있냐며 메시지를 보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임청아는 유시아에게 셀카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 속 임청아는 연한 컬러의 치마 잠옷을 입고 토실이를 안고 있었다.주위 바닥에는 과자 봉지와 먹다 남은 우유가 널려있었고.무척이나 한가로워 보이는 사진이었지만, 임청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몇 분 뒤, 그녀는 또다시 임청아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내왔다.[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시아 씨 화실에서 자살 같은 거 하지 않을 테니. 저 그렇게 격 떨어진 사람 아니에요.]장담하는 듯한 메시지를 보고서 유시아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 것만 같았다.목숨만 소중히 여긴다면 모든 것에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이윽고 유시아는 위로의 메시지를 여러 통 보내고 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려고 했다.이제 막 침대에 누웠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임재욱이 밖에서 들어와 예전처럼 침대에 올라와 긴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자기야, 잘 자.”유시아는 대충 대답하고서 바로 눈을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갑자기 병원 안에서 그가 어떻게 신시연을 위로했을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신시연이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다.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만약 우울증이 낫지 않는다면 평생 오늘처럼 돌보고 위로해야 하는 노릇일지도 모른다....이러저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전혀 마음 편히 잘 수가 없었다.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며 침대 가장자리 쪽으로 몸을 옮겼다.임재욱은 바로 눈치를 채고 팔에 힘을 더했다.“왜 그래?”“너무 꼭 안아서 불편
제대로 속마음을 들킨 유시아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엄청 졸리니 이거 좀 놓죠!”“그래? 나도 졸리는 데, 우리같이 잘까?”임재욱은 말하면서 이불을 확 당겨 불빛을 가려버렸다.“같이 자자.”트럭이 온몸을 짓누르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자기야...”“이제 자도 될까?”귀까지 빨개진 유시아는 그를 향해 그만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놈! 너 진짜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야... 웁...”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재욱이 또다시 덮쳐와 그녀의 턱을 잡고 야한 방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나 욕하지 마.”유시아는 손을 내밀어 입술을 겹겹이 닦았지만 더 이상 감히 그를 욕할 용기가 없었다.이불 속으로 순순히 몸을 숨긴 채 그를 등지고 자려고 했다.임재욱은 전과 마찬가지로 한 줌도 안 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서 가슴에 그녀의 등이 바짝 닿게 하였다.“시아야, 인제 그만 해. 시연이 일은 내가 어떻게든 빨리 해결할게. 절대 우리 사이에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야.”유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조용히 그의 품속에 안긴 채 정말로 잠이 든 것처럼 시늉했다.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새벽 3, 4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밀려왔다.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점심이 다가오고 있었다.임청아가 내내 신경 쓰여 유시아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씻고 집에서 음식과 생활 용품을 챙겨서 화실로 향했다.임청아는 화실에서 제법 잘 지내고 있었고 토실이와 친구가 되어 있었다.심지어 배달로 고기까지 배달하여 토실에게 먹여주었는데, 여기저기 고기 부스러기로 가득했다.유시아는 가져온 물건을 휴게실 서랍장 안에 넣고 입을 열었다.“멀쩡한 집을 놔두고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왜요? 공짜로 먹고 자고 해서 꼴 보기 싫어요?”임청아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흘겨보며 덧붙였다.“걱정하지 말아요. 나중에 5성급 호텔 비용으로 숙박 비용 지
다만 두 사람 사이에 벌써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그 여자, 서준이랑 죽마고우예요. 어릴 적부터 해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함께 그 모든 세월을 함께했다고 그래요.”임청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서준이 부모님이 뵈러 갔을 때 그 여자 만난 적 있어요. 그때 서준이를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이미 눈치도 챘었어요. 근데 서준이가 그러더라고요, 두 사람 사이는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라면서... 그래서 그 말을 믿었어요.”“...”“근데 그 사진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서준이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우리 두 사람 갈라놓으시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면서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진심으로 축복해 준 적이 없다면서 그러더군요. 그리고 할아버지는 서준이가 날 속이고 있다면서 나를 집에 가둔 채 서준이를 만나지 못하게 했어요...”임청아는 목소리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과 불안함이 깃들여 있었다.“두 사람 모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동안 내내 천진난만하게 그들 또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모두 나를 위해서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설 법도 한데, 두 사람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시야 씨, 내가 어느 쪽을 믿어야 할까요? 어릴 적부터 나를 예뻐해 주신 할아버지를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내 생애 첫 남자 친구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서준이를 믿어야 할 까요?”그녀의 말을 들은 유시아 역시 머릿속이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실은 마음속의 저울이 임태훈을 향해 기울어 있기는 했다.할아버지로서 임청아에 대한 임태훈의 사랑은 모두가 봐 온 것이 있다.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두 사람이므로 임태훈은 적어도 무조건 임청아를 위해 모든 행동을 했을 것이다.그리고 한서준에 대해서 그의 인품 단 하나만으로 감히 뭐라고 판단할 수가 없었다.결국 외부인이니 두 사람을 뭐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이때 유시아는 또 다른 일이 생각났다.“어젯밤, 병원에서...”
유시아는 임재욱이 한숨 쉬는 것을 듣고 말머리를 돌렸다.“이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만나게 된다면, 혹은 임청아가 너한테 있다면 나한테 당장 말해. 절대 날 속이려고 하지 말고.”임재욱은 말하다가 경고하는 듯한 어투로 강조했다.“한서준이랑 임청아 사이에 많은 것들이 엮여 있어. 너랑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야. 행여나 말려 들어갔다가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알았어?”엄숙하고 진지한 그의 말에 유시아도 겁을 먹은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았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유시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맞은 편, 임청아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토실이를 품에 안고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청아 씨, 잘 생각했어요? 어떻게 할래요?”임청아는 고개를 들어 유시아를 흘겨보며 물었다.“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 지금 나 쫓아내려고 그러는 거예요?”유시아는 한참을 침묵했다.“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있어요. 임씨 가문의 일은 늘 복잡했고 한서준 씨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말려들어 가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도 지금 청아 씨 홀몸이 아니잖아요.”임청아의 순수하면서도 알 듯 말 듯한 두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임산부는 잘 먹고 잘 쉬고 좋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거든요.”임청아는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할아버지와 서준이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거 맞죠?”“언젠가는 해야 할 선택이고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잖아요. 배 속의 아이까지 있고.”임청아는 망성리다가 평탄한 자기 아랫배를 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아이... 낳을래요.”한서준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일을 했었든 임청아가 사랑했었던 사람이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아이를 어떻게든 품에 안고 싶었다.만약 임태훈이 뒤에서 수작을 부려 한서준을 구렁이에 빠뜨린 것이라면 그들 세 가족은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만약 한서준이 임태훈의 말대로 다른 의도
오후쯤, 유시아가 한창 수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임재욱이 차를 몰고 찾아왔다.한동안 신씨 가문의 일로 야근하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일찍 찾아온 그를 보고 유시아는 가슴이 덜컹거렸다.낮에 전화까지 와서 임청아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었는데, 이렇게 일찍 퇴근하자마자 온 것을 보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유시아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펜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재욱 씨,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에요?”“회사에 마침 일도 없고 해서 일찍 데리러 왔지.”임재욱은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했는데, 오늘 저녁 시간은 온전히 우리 둘만 보내자.”유시아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일단 내려가서 좀 기다리고 있어요. 수업 끝나는 대로 퇴근하면 돼요.”강의실로 돌아온 유시아는 수업을 이어갔고 그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임재욱과 함께 화실을 떠났다.오랜만에 보내는 둘만의 시간이라 임재욱은 특별히 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룸으로 예약하여 만찬을 즐기려고 했다.주문을 다 하고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한서준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유시아는 화면에 떠오른 ‘한서준’ 석 자를 보고서 바로 임청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온 전화라며 알아차렸다.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전화를 받았는데.“여보세요.”“여보세요, 유시아.”한서준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청아 요즘 너한테 연락한 적 있어?”“없는데요.”유시아는 모른 척하며 물었다.“왜 그래요? 싸웠어요?”한서준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청아할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모두 연락해 보았는데, 다들 없다고 그랬어. 유시아, 청아 지금 홀몸이 아니야, 그만큼 중요한 상황이니 청아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꼭 알려줘.”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전화를 마치고 나서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임재욱이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기를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그 눈빛에 유시아는 순간 도적이
임재욱의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그제야 알았다.두 가문 사이에 예로부터 깊은 원한이 있었다는 것을.왠지 모르게 막장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가 펼쳐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임재욱은 유시아가 먹기 좋도록 스테이크를 잘라주며 계속 말했다.“할아버지께서 꽤 흥미진진하게 말씀하셨는데, 듣고 싶지 않아서 그냥 대충 흘려들었어. 청아 아빠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자를 건드렸고 20년 뒤에 그에 마땅한 대가도 치르게 되었다는 것. 이 정도만 알고 있어.”임청아와 임재욱은 엄마가 다른 의붓남매이다.임재욱은 매번 아빠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늘 ‘청아 아빠’라고 표현하며 자기 아빠라고 하지 않는다.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쓸쓸하다.‘청아 아빠’의 원나잇으로 임재욱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외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빠라는 소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임재욱이다.유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에 힘을 살짝 주며 물었다.“청아 씨는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청아 씨한테도 얘기해준 적이 있나요?”“그건 나도 모르겠어. 나 또한 할아버지한테서 겨우 이 정도밖에 알아내지 못했거든.”이에 관해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임재욱은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한 손으로 유시아에게 주스를 따라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암튼 넌 절대 끼어들지 마.”유시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고서 대답했다.“알았어요.”식사를 마치고 임재욱은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유시아를 데리고 갔다.마침 여름 시즌이라 예쁜 원피스들이 매장을 가득 채웠고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정도였다.기분이 제법 좋아 보이는 임재욱은 유시아의 손을 잡고서 이 매장 저 매장 돌아다니며 자기 취향대로 원피스를 고르기도 했다.피팅룸으로 들어가 입어 보라고 하며 밀어 넣기까지 했다.하지만 유시아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쇼핑을 함부로 하는 습관이 없어 바로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그만해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매일 다른 원피스를 입는다고 해도 내년까지 입어야 할
무척이나 가여워 보이는 유시아의 모습을 보고서 임재욱은 끝끝내 항복하고 말았다.“알았어.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치고 그는 물건을 내려놓고 아래층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유시아는 휴게존 소파에 앉아 조금 전에 새로 산 원피스를 꺼내어 여기저기 훑어보며 임재욱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사 온 옷들을 모조리 꺼내어 세심하게 훑어보았지만, 임재욱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망연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피던 유시아의 두 눈에 어느새 두렵고 당황한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늘 이러했다. 가장 행복할 때, 가장 기쁠 때, 가장 기대하고 있을 때 뼈저린 아픔이 다가온다는 것.미지의 불안함을 느끼며 유시아는 물건을 챙겨 들고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바로 이때 연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정유라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야나 나타나더니 두말하지 않고 바로 유시아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앉는 것이었다.그녀는 웃은 듯 마는 듯한 모습을 입을 열었다.“시아 씨, 여기서 다 보네요.”유시아는 덤덤하게 웃으며 인사치레를 건넸다.“그러게요. 여기서 다 보네요.”비록 이러한 우연이 무척이나 언짢은 유시아이지만 기본 예절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유라는 다리를 꼬고 앉아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머릿결과 맞춤형 메이크업은 정유라의 미모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해주었다.“재욱 씨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혹시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거예요?”“그만 기다려요. 재욱 씨, 오늘 밤 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가능하다면 이 모든 게 정유라의 이간질 수법이라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지난번 임청아 약혼식에서도 이러한 말을 했었고 그 말이 사실임을 이미 입증까지 끝냈다.그 말인즉슨, 정유라의 말에 믿음성이 있다는 것이다.임재욱에 관해 유시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정유라는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신서현 씨 부모님께서 위독하시거든요. 그 소
유시아의 얼굴엔 생기란 전혀 없고, 표정은 멍하게 얼이 빠져 있었다.멍하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정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정유라가 마냥 원망스럽기만 했다.예쁜 얼굴로 아픈 말만 골라서 하는 정유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굳이 확인 사실을 해주지 않아도 유시아는 잘 알고 있다. 5년 전에 임재욱의 손을 거쳐 감옥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말이다.임재욱이 사랑하는 여자는 신서현이라는 것을.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자라는 것을.그녀를 위해서라면 온 세상과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여기저기 상처가 나 성한 데 하나 없더라도 사랑하는 그녀만큼은 어떻게든 꼭 지키는 임재욱이라는 것을.이와 같은 처참한 대비로 유시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똑똑히 각인하고 있었다.신서현은 죽었지만, 영원히 임재욱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리라는 것을.신서현의 아름다운 모든 건 그녀가 떠나는 순간부터 임재욱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를 박아 결코 박제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유시아에 대한 임재욱의 마음은 사랑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선택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신서현을 잃고 난 뒤, 꿩 대신 닭을 선택한 격.“그러게요.”유시아는 정유라를 바라보며 문득 깨닫는 모습으로 웃었다.“유라 씨 말이 맞아요. 저는 신서현 씨를 따라갈 수 없어요. 재욱 씨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여자라도 신서현 씨만큼 소중하지 않을 거예요. 그 누구도 신서현 씨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거고요.”정유라는 입술을 사리물고 계속 물었다.“알고 있으면서 왜 계속 재욱 씨 옆에 있는 거죠?”“사랑해서요...”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정유라를 바라보며 웃었다.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애처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사랑해서... 아쉬워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유시아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임재욱에 대한 사랑은 마치 블랙홀처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 그녀 역시 속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