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69화

작가: 은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유시아는 임재욱이 한숨 쉬는 것을 듣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만나게 된다면, 혹은 임청아가 너한테 있다면 나한테 당장 말해. 절대 날 속이려고 하지 말고.”

임재욱은 말하다가 경고하는 듯한 어투로 강조했다.

“한서준이랑 임청아 사이에 많은 것들이 엮여 있어. 너랑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야. 행여나 말려 들어갔다가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알았어?”

엄숙하고 진지한 그의 말에 유시아도 겁을 먹은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유시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 편, 임청아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토실이를 품에 안고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청아 씨, 잘 생각했어요? 어떻게 할래요?”

임청아는 고개를 들어 유시아를 흘겨보며 물었다.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봐 지금 나 쫓아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유시아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있어요. 임씨 가문의 일은 늘 복잡했고 한서준 씨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말려들어 가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도 지금 청아 씨 홀몸이 아니잖아요.”

임청아의 순수하면서도 알 듯 말 듯한 두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임산부는 잘 먹고 잘 쉬고 좋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거든요.”

임청아는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지금 할아버지와 서준이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거 맞죠?”

“언젠가는 해야 할 선택이고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잖아요. 배 속의 아이까지 있고.”

임청아는 망성리다가 평탄한 자기 아랫배를 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 낳을래요.”

한서준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일을 했었든 임청아가 사랑했었던 사람이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아이를 어떻게든 품에 안고 싶었다.

만약 임태훈이 뒤에서 수작을 부려 한서준을 구렁이에 빠뜨린 것이라면 그들 세 가족은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한서준이 임태훈의 말대로 다른 의도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0화

    오후쯤, 유시아가 한창 수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임재욱이 차를 몰고 찾아왔다.한동안 신씨 가문의 일로 야근하는 것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일찍 찾아온 그를 보고 유시아는 가슴이 덜컹거렸다.낮에 전화까지 와서 임청아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었는데, 이렇게 일찍 퇴근하자마자 온 것을 보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유시아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펜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재욱 씨,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에요?”“회사에 마침 일도 없고 해서 일찍 데리러 왔지.”임재욱은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했는데, 오늘 저녁 시간은 온전히 우리 둘만 보내자.”유시아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일단 내려가서 좀 기다리고 있어요. 수업 끝나는 대로 퇴근하면 돼요.”강의실로 돌아온 유시아는 수업을 이어갔고 그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임재욱과 함께 화실을 떠났다.오랜만에 보내는 둘만의 시간이라 임재욱은 특별히 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룸으로 예약하여 만찬을 즐기려고 했다.주문을 다 하고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한서준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유시아는 화면에 떠오른 ‘한서준’ 석 자를 보고서 바로 임청아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온 전화라며 알아차렸다.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전화를 받았는데.“여보세요.”“여보세요, 유시아.”한서준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청아 요즘 너한테 연락한 적 있어?”“없는데요.”유시아는 모른 척하며 물었다.“왜 그래요? 싸웠어요?”한서준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청아할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모두 연락해 보았는데, 다들 없다고 그랬어. 유시아, 청아 지금 홀몸이 아니야, 그만큼 중요한 상황이니 청아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면 꼭 알려줘.”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전화를 마치고 나서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임재욱이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기를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그 눈빛에 유시아는 순간 도적이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1화

    임재욱의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그제야 알았다.두 가문 사이에 예로부터 깊은 원한이 있었다는 것을.왠지 모르게 막장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가 펼쳐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임재욱은 유시아가 먹기 좋도록 스테이크를 잘라주며 계속 말했다.“할아버지께서 꽤 흥미진진하게 말씀하셨는데, 듣고 싶지 않아서 그냥 대충 흘려들었어. 청아 아빠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자를 건드렸고 20년 뒤에 그에 마땅한 대가도 치르게 되었다는 것. 이 정도만 알고 있어.”임청아와 임재욱은 엄마가 다른 의붓남매이다.임재욱은 매번 아빠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늘 ‘청아 아빠’라고 표현하며 자기 아빠라고 하지 않는다.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쓸쓸하다.‘청아 아빠’의 원나잇으로 임재욱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외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빠라는 소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임재욱이다.유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에 힘을 살짝 주며 물었다.“청아 씨는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청아 씨한테도 얘기해준 적이 있나요?”“그건 나도 모르겠어. 나 또한 할아버지한테서 겨우 이 정도밖에 알아내지 못했거든.”이에 관해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임재욱은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한 손으로 유시아에게 주스를 따라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암튼 넌 절대 끼어들지 마.”유시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고서 대답했다.“알았어요.”식사를 마치고 임재욱은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유시아를 데리고 갔다.마침 여름 시즌이라 예쁜 원피스들이 매장을 가득 채웠고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정도였다.기분이 제법 좋아 보이는 임재욱은 유시아의 손을 잡고서 이 매장 저 매장 돌아다니며 자기 취향대로 원피스를 고르기도 했다.피팅룸으로 들어가 입어 보라고 하며 밀어 넣기까지 했다.하지만 유시아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쇼핑을 함부로 하는 습관이 없어 바로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그만해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매일 다른 원피스를 입는다고 해도 내년까지 입어야 할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2화

    무척이나 가여워 보이는 유시아의 모습을 보고서 임재욱은 끝끝내 항복하고 말았다.“알았어.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치고 그는 물건을 내려놓고 아래층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유시아는 휴게존 소파에 앉아 조금 전에 새로 산 원피스를 꺼내어 여기저기 훑어보며 임재욱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사 온 옷들을 모조리 꺼내어 세심하게 훑어보았지만, 임재욱은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망연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피던 유시아의 두 눈에 어느새 두렵고 당황한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늘 이러했다. 가장 행복할 때, 가장 기쁠 때, 가장 기대하고 있을 때 뼈저린 아픔이 다가온다는 것.미지의 불안함을 느끼며 유시아는 물건을 챙겨 들고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바로 이때 연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정유라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야나 나타나더니 두말하지 않고 바로 유시아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앉는 것이었다.그녀는 웃은 듯 마는 듯한 모습을 입을 열었다.“시아 씨, 여기서 다 보네요.”유시아는 덤덤하게 웃으며 인사치레를 건넸다.“그러게요. 여기서 다 보네요.”비록 이러한 우연이 무척이나 언짢은 유시아이지만 기본 예절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유라는 다리를 꼬고 앉아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머릿결과 맞춤형 메이크업은 정유라의 미모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해주었다.“재욱 씨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혹시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거예요?”“그만 기다려요. 재욱 씨, 오늘 밤 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가능하다면 이 모든 게 정유라의 이간질 수법이라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지난번 임청아 약혼식에서도 이러한 말을 했었고 그 말이 사실임을 이미 입증까지 끝냈다.그 말인즉슨, 정유라의 말에 믿음성이 있다는 것이다.임재욱에 관해 유시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정유라는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신서현 씨 부모님께서 위독하시거든요. 그 소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3화

    유시아의 얼굴엔 생기란 전혀 없고, 표정은 멍하게 얼이 빠져 있었다.멍하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정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정유라가 마냥 원망스럽기만 했다.예쁜 얼굴로 아픈 말만 골라서 하는 정유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굳이 확인 사실을 해주지 않아도 유시아는 잘 알고 있다. 5년 전에 임재욱의 손을 거쳐 감옥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말이다.임재욱이 사랑하는 여자는 신서현이라는 것을.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자라는 것을.그녀를 위해서라면 온 세상과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여기저기 상처가 나 성한 데 하나 없더라도 사랑하는 그녀만큼은 어떻게든 꼭 지키는 임재욱이라는 것을.이와 같은 처참한 대비로 유시아는 이미 마음속으로 똑똑히 각인하고 있었다.신서현은 죽었지만, 영원히 임재욱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리라는 것을.신서현의 아름다운 모든 건 그녀가 떠나는 순간부터 임재욱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를 박아 결코 박제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유시아에 대한 임재욱의 마음은 사랑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선택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신서현을 잃고 난 뒤, 꿩 대신 닭을 선택한 격.“그러게요.”유시아는 정유라를 바라보며 문득 깨닫는 모습으로 웃었다.“유라 씨 말이 맞아요. 저는 신서현 씨를 따라갈 수 없어요. 재욱 씨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여자라도 신서현 씨만큼 소중하지 않을 거예요. 그 누구도 신서현 씨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거고요.”정유라는 입술을 사리물고 계속 물었다.“알고 있으면서 왜 계속 재욱 씨 옆에 있는 거죠?”“사랑해서요...”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정유라를 바라보며 웃었다.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애처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사랑해서... 아쉬워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유시아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임재욱에 대한 사랑은 마치 블랙홀처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 그녀 역시 속수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4화

    신서현 부모님은 본래 아늑한 마을에서 두 딸을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아온 분들이다.신서현이 연예계로 데뷔하고서도 그녀는 줄곧 집으로 돈을 보내며 생활에 보탬이 되었었다.그러던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임재욱은 그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면서 남은 가족들을 정운시로 데리고 온 것이다.안락한 삶을 그려주기 위해 데려온 것인데, 이처럼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임재욱의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사색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재욱 씨 탓이 아니에요. 인생의 순리이고 좌우지할 수 없는 게 사람 운명이잖아요.”임재욱은 나지막이 대답을 했지만 별다른 소리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이때 유시아는 자기 손을 도로 빼며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아침 먹으러 가야겠어요. 재욱 씨는 좀 더 쉬고 있어요.”말을 마치고 바로 부엌으로 향해 걸어갔다.가냘픈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임재욱은 마음이 순간 복잡해졌다.허씨 아주머니한테서 들은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어젯밤 아주 늦게 집으로 돌아왔고 백화점에서 가득 쇼핑한 물건들은 하나도 챙겨오지 않았다는 것을.임재욱은 알고 있다. 아무리 많은 이유라도 유시아를 위한 핑계라도 그게 무엇이든 이미 상처를 줬고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밥을 먹고 난 유시아는 집에 머물지 않고 바로 외출했다.화실 쪽에는 아직 시간이 넉넉한 편이고 하여 이채련 병문안을 가려고 생각했다.오랜만이라 이채련을 떠오르니 보고 싶기도 했다.정운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큰데, 오로지 이채련 만이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처럼 자기를 품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어머님.”유시아는 백합 한 다발을 들고 문 앞에 서서 웃으며 이채련에게 인사를 건넸다.“요즘 어떠셨어요? 저 보고 싶지 않으셨어요?”이채련은 마침 가위를 들고 침대 옆에 있는 화분을 다듬으려던 참이었다.들려오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유시아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이채련은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시아 왔구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5화

    30년간의 결혼 생활을 유지해 온 이채련이다.그 말인즉슨, 어린 친구들의 사소한 감정에 대해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신서현에 대한 임재욱의 마음은 그녀의 죽음에 따라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이 숨겨둔 것뿐이다.신서현 부모님의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것도 그 감정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것이다.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유시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면 도리를 어긋나는 짓에 비견된다.신서현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유병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유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머님 말씀대로 할 게요.”이채련은 꽃다운 나이의 유시아를 바라보며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아이 생기는 거 보고 싶었는데...”아이가 태어나면 그와 함께 희망과 희열도 피어나게 되어 있다.그러나 숨을 거두기 전까지 보기 어려울 것 같았고 평생 ‘할머니’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 것이다.때론 ‘인과응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늙은 나이에 유일한 아들을 잃고 위암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겠는가...이채련의 말에 유시아는 순간 슬픔이 밀려와 울컥했지만,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며 몇 마디 더 위로하고서 병원에서 나왔다....요즘 임재욱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고 있다.회사 일을 제외하고도 신서현 부모님의 장례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있다.매일 밤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며칠 동안 얼굴을 마주치지 못한 듯했다.임재욱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시아는 이미 잠에 들었고, 이튿날 아침 임재욱이 일찍 일어나 출근하면 유시아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두 사람의 거리는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가깝지만 실제로는 무척이나 멀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상황은 무려 월말까지 이어져 갔다.그러던 어느 날,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던 화실 학생 중 한 명이 갑자기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이마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일이 생기게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6화

    신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유시아 쪽으로 향하려고 발버둥을 쳤다.“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유시아는 화들짝 놀란 동시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해외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미워한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오랜만에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지만 그 한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깊어져 간 것만 같았다.‘뭔가 이상해.’유시아 옆에 서 있던 학생도 살짝 놀랐는지 유시아의 치맛자락을 꼭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시아쌤, 무서워요.”“괜찮아.”유시아는 바로 학생을 들어 안았고 천천히 다독였다.“다른 거 먹으러 가자.”말을 마치고 학생을 데리고 바로 그 식당에서 걸어 나왔다.단숨에 한참을 내달리고서 근처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햄버거 세트를 주문해 주었다.학생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인지, 머리가 인제 아프지 않아서인지, 주위에 위험한 요소가 없어서인지 갑자기 말 문이 터졌다.“시아쌤, 조금 전에 그 아주머니는 누구예요? 왜 재욱 아저씨랑 같이 있는 거예요?”임재욱은 가끔 유시아의 화실을 찾아갔었고 기분이 좋을 때 학생들에게 사탕까지 나누어 준 적이 있다.하여 학생들은 임재욱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유시아의 남자 친구라는 것도 알고 있다.요즘 아이들은 하도 일찍 성숙하는 편이라 모르는 게 거의 없다.“시아쌤, 혹시 조금 전에 본 그 아주머니 말이에요... 제삼자예요?”“함부로 말하면 안 돼.”유시아는 티슈 한 장으로 학생의 입가를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조금 전에 네가 본 그 아주머니는 아저씨 친구야. 지금 몸이 좀 아프셔서 아저씨 도움이 필요한 거야.”신시연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임재욱은 이미 유시아에게 말해 준 바가 있다.그러한 전제 상황을 알고서 조금 전 그 상황과 연결해 본다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입맛이 없는 유시아는 학생이 다 먹기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검사 결과를 찾았다.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고 피부만 살짝 긁힌 것뿐이었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게 되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7화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

최신 챕터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5화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4화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3화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2화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1화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80화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9화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8화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 사랑이라는 죄로   제477화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