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4월 16일, 길일. 결혼하기 좋은 날.3년 전, 검은색 안경을 낀 점쟁이가 붉은색 종이 위에 그 몇 글자를 적어 놓고 듣기 좋은 말을 해줬다. 부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이고 자손도 많이 볼 것이라고 말이다.고작 그 몇 글자에 유시아는 기분이 좋아져 점쟁이에게 큰돈을 쥐어줬었다.그러고는 들뜬 채로 그 붉은색 종이를 들고 임재욱의 곁으로 달려갔다.“재욱 오빠, 점쟁이가 그러던데 4월 16일이 길일이래요. 우리 결혼식 이날로 하는 거 어때요? 길일이라니 좋잖아요!”임재욱은 미소 띤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았다.“좋아. 시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그러나 점쟁이의 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3년 전 4월 16일은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었다.결혼식장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입구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가득했으며 유명 인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유시아는 고급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고 정교한 화장을 했다. 이제 막 결혼식이 열릴 호텔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유시아는 신랑 임재욱에 의해 경찰차에 타게 됐다. 그녀가 들고 있던 새빨간 에콰도르 장미꽃은 바닥에 떨어져 피처럼 보였다.그때 호텔 입구의 LED 전광판에서 그녀와 임재욱이 함께 찍은 웨딩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배경음악은 결혼 행진곡이었다.그날, 반 이상의 정운시 사람들이 유시아의 얼굴과 그녀의 신분을 기억했을 것이다.대우 그룹 사모님 유시아가 결혼식 당일 감옥에 갔으니 말이다.3년이 지나 또 4월 16일이 되었다. 유시아는 너무 커서 몸에 잘 맞지 않는 연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짐이 든 가방을 챙겨 정운시 여자 교도소 입구에 서있었다. 고개를 돌린 유시아는 등 뒤의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무려 3년이다. 그녀는 저 안에서 천여 일이 넘는 시간을 버텼다.여자 교도소 앞의 흙길을 따라 유시아는 한참을 걸었다. 두 다리가 시큰해질 때쯤 되어서야 그녀는 조금 넓은 아스팔트 길을 밟을 수 있었다.길가에 선 유시아는 멀지 않은
임재욱의 눈빛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유시아는 자신의 눈빛을 거두고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임재욱 씨, 우리 사이의 빚은 3년 전 이미 다 청산했을 텐데요. 아닌가요?”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은 것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임재욱은 유시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빈정거렸다.“빚을 청산했는지 안 했는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임재욱이 손을 들자 차에서 두 명의 검은색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내렸다. 그들은 각각 유시아의 왼팔과 오른팔을 잡고 다짜고짜 그녀를 벤틀리 안으로 밀어넣었다.임재욱도 뒤따라 차에 올라타며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예운 별장으로 가도록 해요.”예운 별장이라는 말에 유시아는 화들짝 놀랐다.예운 별장은 3년 전 임재욱이 그녀와의 결혼 준비를 할 때, 두 사람의 신혼을 위해 샀던 신혼집이었다. 집 안쪽은 마치 궁전처럼 금빛 찬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으리으리한 집에 대단한 미인이라도 숨겨둔 것처럼 말이다.그러나 이제 그곳에 유시아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 임재욱이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려는 건 그녀를 모욕하기 위해서가 틀림없었다.그러나 애석하게도 유시아는 과거에도, 현재도 임재욱에게 반항할 힘이 없었다.3년 전과 3년 후인 지금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40분 뒤, 차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임재욱은 유시아가 반항을 하든 말든 그녀의 팔목을 단단히 쥔 채로 억지로 그녀를 끌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유시아는 3년 전에도 이 별장에 온 적이 있었다. 별장은 그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벽에 큰 액자가 많이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액자 속 미인은 스타일도 표정도 제각각이었지만 사실 모두 동일 인물이었다.그녀는 임재욱이 사랑했던 신서현이었다.신서현은 과거 아주 잘 나가는 연예인이었다. 매스컴에서는 그녀를 새로 떠오르는 신인이며 전도가 유망하다고 했다.그러나 4년 전, 뺑소니를 당한 그녀는 TH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언론은 발칵 뒤집
임재욱과 신서현이 그런 사이였다는 걸 유시아는 정말로 몰랐다.예전에 유시아가 임재욱을 쫓아다녔을 때, 임재욱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잘생겼지만 차가웠고, 온몸에서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것은 겨우 중2였던 유시아에게 치명적인 매력으로 느껴졌다.그리고 그때 신서현은 이미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유명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여 많은 팬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촬영하고 제작발표회를 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법한 삶을 살았다.여자 연예인과 대학생은 전혀 다른 집단이었다.3년 전, 유시아는 임재욱과 교집합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언젠가 신서현의 죽음 때문에 3년간 감옥에 갇힐 줄은 더더욱 예상치 못했다.유시아의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으로 신서현을 죽게 한 빚을 갚으려고 했으나 임재욱은 겨우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시아의 애정과 신뢰를 이용하여 그녀를 속여서 여러 서류에 사인하게 했고, 종국에는 그녀를 경제범죄자로 만들어 결혼 당일 감옥에 보냈다.그들의 관계에서 임재욱은 갑이었고 유시아는 을이었다. 유시아는 임재욱을 사랑했지만 임재욱은 유시아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말이다.임재욱은 살아있는 유시아를 지옥으로 몰아넣었고 그녀를 처참히 짓밟았다. 그러나 죽은 신서현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그의 마음속에 살고 있었다.유시아는 신서현과 달리 살아있지만, 그 대가로 임재욱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견뎌야 했다.“그래, 넌 나와 서현이 일을 몰랐겠지. 하지만 네 아버지는 알고 있었어!”유시아를 바라보던 임재욱의 입가에 서늘하면서도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네 아버지는 네가 날 사랑하고, 내가 서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에게 손자로 인정받고 곧 대우 그룹을 이어받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어.”그러니 유병철은 자기 딸이 재벌가에 시집갈 수 있게 길을 닦아놓고 장애물을 치워버리려 했을 것이다.“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우리 아빠는 그
손 하나가 나타나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거실 샹들리에가 밝혀졌다.유시아는 비참함과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문고리를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덫에 걸려 절망에 빠진 사슴 같았다.유시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임재욱 씨, 우리는 이미 이혼한 사이에요. 그런데 임재욱 씨가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이러는 거죠?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거냐고요!”3년 전 감옥에 들어갈 때, 그는 변호사를 데리고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유시아에게 이미 사인을 마친 이혼합의서 2부를 건넸다. 이혼합의서에 적힌 내용대로 그녀는 임재욱의 재산을 나눠 갖지 않았다.그때 임재욱은 유시아가 유병철의 딸이라서, 신서현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녀에게 천국을 보여준 거라고 했다.그래야만 그녀를 짓밟고 지옥으로 밀어 넣었을 때 그녀가 더욱 아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그날 임재욱은 검은색 정장에 흰색 셔츠, 버건디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클래식한 세 가지 색상이 그의 완벽에 가까운 미모를 돋보여줬다. 그는 마치 지옥에서 걸어 나온, 홀릴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아수라처럼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그때부터 유시아는 임재욱을 향한 마음을 접었다.임재욱은 그녀의 꿈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지척에 있는 그는 그녀를 가둬둔 감옥이 되었다.“자격? 그런 게 중요한가.”계단에서 내려온 임재욱은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이렇게 끝낼 수는 없잖아. 난 아직 충분히 즐기지 못했는데 말이야. 내가 먼저 그만한다고 하기 전까지 넌 이 게임을 끝낼 자격이 없어.”유시아는 입술을 깨물면서 손을 들어 힘껏 그의 뺨을 때리려 했다.“나쁜 놈!”유시아는 온 힘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때리고 나니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였다. 임재욱은 그녀에게 뺨을 맞아 머리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유시아의 목을 콱 조르며 그녀를 문쪽으로 밀쳤고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입을 맞췄다기보다는 물어뜯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
“재욱 오빠, 오빠가 그렇게 잘났어요? 날 좋아하면 죽기라도 해요? 아니면 뭐 큰일 나요?”석양 아래,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잘생긴 소년이 농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죽는 것보다 더 괴롭겠지.”유시아는 뻔뻔하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오빠 여자친구 없잖아요? 나랑 사귀어 보자니까요. 어쩌면 오빠가 날 좋아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결국 고개를 돌린 소년이 오만한 표정으로 소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미안하지만 이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더라도 너랑은 안 사귈 거야.”“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오빠 엄마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안 가르쳐줬대요?”줄곧 뻔뻔하던 유시아도 결국 임재욱 때문에 화가 나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가녀린 뒷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아낼 수 있었다.1층 소파에 앉아있던 임재욱의 머릿속에 그때 그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지우려 해봐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마치 각인된 것만 같았다.임재욱은 어쩐지 짜증이 치밀어올라 들고 있던 와인잔을 치우고 테이블 위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빨았는데 호흡이 흐트러진 탓에 사레에 들린 임재욱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격하게 기침했다.그는 조금 전 담배를 피울 때 유시아의 입가에 피를 묻힌 모습과 그녀가 침대에서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를 줄은 몰랐다.아니, 이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3년 전에 끝난 사이였다.유병철이 신서현을 차로 치어죽인 그 시점부터 둘은 평생 이어질 수 없었다.임재욱은 신서현의 남자였기에 평생 유시아의 남자가 될 수 없었다.임재욱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들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고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날이 거의 밝을 때쯤, 커튼이 열렸고 눈부신 햇빛이 유시아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유시아의 눈처럼 하얀 피부는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유시아가 흰 피부를 타고 나서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