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림의 병실을 나서니 복도에서 한창 간호사와 얘기 중인 한민혁이 눈에 들어왔다.민혁도 마침 병실에서 나온 하윤을 봤는지 얼른 다가와 멋쩍게 웃었다.“하윤 씨, 병문안 잘 했어요? 그럼 다른 병실로 갈까요?”“선배 할아버지는 어때요? 혹시 많이 아픈가요?”“네?”병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민혁은 하윤이 단순히 주민수의 건강을 염려한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말아요. 도준 형이 이미 가장 좋은 약과 의료진을 붙여달라고 병원 측에 일러 뒀어요. 게다가 암 초기에 일찍 발견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암 초기라고?’‘어쩐지, 주림 선배의 의식이 또렷한데 한마디도 안 한다 했어. 누군가 선배의 입을 막은 게 분명해.’하윤의 표정에서 자기가 말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 챈 민혁은 당장이라도 자기 뺨을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수습하기 위해 얼른 말 머리를 돌렸다.“도준 형이 두 사람한테 엄청 잘해줘요. 병원비도 면제해 주고, 먹고 자는 것도 최고급으로만 취급하고. 도준 형 아니었다면 두 사람 아마 깊은 산골에서 계속 시간만 끌다가 병만 악화했을 거예요. 안 그래요?”하윤은 더 이상 민혁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고, 도준에 관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만 알고 싶을 뿐.대충 고개를 끄덕인 하윤이 이내 다정의 병실로 걸어갔다.그 사이, 말없이 떠나가는 하윤의 뒷모습에 전전긍긍하던 민혁은 끝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어, 도준 형, 있잖아……, 혹시 형이 아주 믿는 부하가 말실수하면 용서해 줄 거야?”“…….”“다정아, 자, 선물.”정교한 상자를 받아 든 순간, 다정의 얼굴에는 마침내 즐거운 미소가 드리웠다.하지만 예쁜 리본을 풀기 전 습관처럼 한 번 더 확인했다.“언니, 이거 정말 저 주는 거에요?”“응, 그래.”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 짓는 하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다정은 기쁜 마음으로 선물 상자를 뜯었다.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건 다름 아닌 손목시계였다. 붉은색
병실 문을 닫고 손에 있는 쪽지를 다급하게 펼쳐 보려고 돌아선 순간, 등 뒤에서 기다리던 한민혁과 그대로 맞닥뜨리고 말았다.민혁은 한참 동안 기다렸는지 하윤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며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건넸다.“도준 형 전화예요.”민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물에 빠진 듯 숨이 막혀 하윤은 손에 든 쪽지를 꽉 움켜 쥐었다.“싫어요.”짤막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돌아서는 하윤을 보며 민혁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전화 건너편에 상황 설명을 하며 하윤의 뒤를 따랐다.“도준 형, 하윤 씨가 받기 싫대.”“나도 귀 안 멀었어.”전화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그래, 나도 알지. 아니면 내가 좀 설득해 볼까?”“필요 없어.”“뚜뚜뚜…….”뚝 끊긴 전화와 어느새 사라진 하윤이 떠난 방향을 번갈아 보던 민혁은 지친 마음을 달래며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좀만 기다려요!”한편, 하윤은 겨우 따돌린 한민혁이 따라붙을까 봐 건네받은 쪽지를 얼른 펼쳐 보았다.그 위에는 단지 ‘일기’라는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그걸 보니 주민수가 저한테 딸 번호를 넘겨준 게 증언을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림의 일기를 받으라는 뜻인 걸 깨닳았다.마침내 진전이 생기자 며칠 동안 답답했던 하윤은 마침내 숨통이 트였다.‘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몰래 그 일기를 손에 넣지?’……돌아가는 길에 민혁은 조잘조잘 한참 동안 얘기했다. 냉전 상태인 하윤과 도준의 관계회복을 위해 도움을 주려는 의지가 다분했다.하지만 민혁이 아무리 입이 마르도록 조잘대도 하윤은 좀처럼 마음을 풀지 않았다.결국 민혁은 비굴하게 사정했다.“정 안 되면 도준 형 차단만 풀면 안 돼요? 그것만이라도 좋을 것 같은데.”그날 이후로 하윤은 도준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건 짜증을 내는 것도, 관심을 갈구하는 것도 아니다.단지 혼자만 어릿광대처럼 도준에게 끌려 다니기 싫어서였다.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하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실 안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 그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여자는 왠지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시영 언니.” 하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민시영은 여상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윤 씨, 인사도 없이 와서 미안해요.”“아니에요. 저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뭘. 그러는 언니야 말로, 회사 일로 바쁜데 어떻게 저 보러 왔어요?”싱긋 웃으며 묻는 말에, 시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그게…….”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시영에게서 처음 보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에 하윤이 놀란 듯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큰 일은 아니고.”시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손에 들며 눈을 내리 깔았다.“케빈이 실형을 선고 받았대요.”“뭐라고요?”충격적인 사실에 하윤의 눈이 둥그레졌다.“언제요?”“얼마 안 돼요. 이틀 정도 됐나?”분명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검푸른 다크서클과 흰자를 가득 메운 핏발을 보면 시영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이어진 대화에서 하윤은 케빈이 자수한 탓에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민재혁이 꾸민 짓을 모두 증언하고 민재혁과 추형탁이 꾸민 작당을 모두 실토한 것 때문에.“그래도 어찌 보면 좋은 일을 한 건데. 케빈이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이 일은 아마 더 오래 끌었을 거야 할 거예요.”‘증거?’‘그 증거들 모두 시영 언니가 모은 거 아닌가? 왜 케빈 씨가 제출한 게 됐지?’하윤은 잠깐 의아했지만 곧바로 어렴풋이 답을 찾았다.하지만 언제나 눈치 빨랐던 시영은 그런 하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7년 형을 선고 받았대요. 사실 7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죠. 아마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거예요. 내가 꼬마였을 때 케빈이 내 곁에 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벌써 십년도 넘게 흘렀으니.”케빈과 시영이 어릴 때부터 함께 커왔다는 건 하윤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케빈이 민용재 쪽 사람이라는 걸 들었을 때 충격이 컸던 거
원래 주인이라는 말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케빈 씨가 정말 민재혁 쪽 사람이었어요?”“네.”민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재혁네 식구의 야심은 늘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여자라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시영도,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에 올렸으니 말이다.때문에 시영이 경호원을 필요로 할 때 기회를 틈 타 자기 쪽 사람인 케빈을 붙였던 거다.하윤은 방금 알게 된 사실에 말을 잃었다.“그러니까, 케빈 씨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언니한테 접근했다는 뜻인가요?”“네.”시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씨 집안 식구들이 아무리 서로 견제한다 해도 저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 아이까지 견제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민용재가 대단하다는 거죠.”게다가 케빈은 어찌나 시영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는지 시영의 곁에 붙여진 첫날부터 믿음을 얻었다.말수가 적었지만 시영이 필요할 때 언제나 제때에 나타났으니까.심지어 바삐 보내는 시영의 아버지보다, 매일 고객 대접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영의 어머니보다 케빈이 시영의 곁에 더 많이 있어 주었다.그래서 시영도 케빈에게 의지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그 사이, 케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앳된 목소리로 ‘케빈 오빠, 저 배고파요.’, ‘케빈 오빠 저 혼자 자기 무서워요.’라며 조잘대던 어린 아이는 풋풋한 소녀로 자라났다.‘케빈, 이 옷 예뻐?’‘케빈, 나 립스틱 없어졌어.’‘케빈 이 지퍼 좀 올려 줘’하지만 새초롬하던 소녀의 말투가 끝내 처절한 비명으로 변해 버렸다.‘케빈, 살려줘…….’‘살려줘…….’시영은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더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번 배신한 사람인데 도준 오빠라고 배신 못할까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알고 싶어요. 그래서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고요.”집념 가득한 시영의 모습은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기 자신과 겹쳐 보여서일까? 하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
권하윤이 모든 감정을 쏟아내자 전화 건너편에서 아무렇지 않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끝났어?”가벼운 말투는 두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 또 한 번 상기시켰다.순간 저 자신이 우스웠다.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이 도준한테는 그저 우스웠을 걸 생각하니 타오르던 분노마저 꺼지며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네, 끝났어요.”“끝났으면 이제 내가 말해도 왜?”상의하는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맞아. 비행기 폭발 사고 때 추형탁이 손써 두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정도쯤은 사고 당시 낙하산 타고 내려오면 피할 수 있는 거였어.”하윤은 반신반의하는 듯 물었다.“알았다면 왜 그렇게 됐어요?”“추형탁 말고도 손쓴 사람이 더 있었으니까.”“공은채요?”“응.”실험 훈련 실패한 사건과 뇌물수수에 연루된 사람의 생사가 불확실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그 때문에 도준이 실종되었을 때, 추형탁은 거리낌 없이 도준을 문제 삼아 조관성을 공격했고, 공씨 가문도 추형탁에게 줄을 섰을 거다. 그리고 그 덕에 두 무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고.그러니까 어찌 보면 공아림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도준이 조관성과 짜고 공씨 자문을 무너뜨린 것도 맞는 말이고, 그게 모두 공은채 때문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니까.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도준이 저 때문에 조 국장과 손잡았고, 그로 인해 정권 싸움에 연루된 줄 알고 밤잠까지 설쳤다는 게 참 가소로웠다.공은채라면 먼저 사고를 치고 나중에 통보한다 해도 도준은 아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그 뿐만 아니라 이 시끄러운 곳과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옛 감정이 다시 싹 텄을 수도 있고…….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하윤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끝내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문자는 도준 씨가 보낸 거 맞죠?”“응.”
“민혁한테서 들었어. 그 정신병자를 직접 흥덕 마을로 데려 가겠다고 했다며?”“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또 제 자유를 제한할 거예요?”날을 잔뜩 세운 권하윤의 말투에 민도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결론 내리고 화 내는 건 대체 뭐야?”하윤도 자기 자신이 지금 가시를 드러내고 경계하는 고슴도치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안다.하지만 이것도 이미 참을 만큼 참은 결과다.그때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하윤을 달래려는 듯한 말투였다.“가지 말란 말 안 했어. 가는 길에 나 보러 여기 들르는 건 어때? 나도 이제 막 혼인신고 끝낸 우리 마누라 보고 싶은데.”도준의 다정한 호칭에 하윤의 가슴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두근대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감정을 이내 꾹꾹 눌렀다. 본인이 참 못난 것 같았으니까. 대충 몇 마디 달랬다고 보고 싶어하는 게.결국 서슴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편, 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뚜뚜’ 거리는 소리에 도준은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애써 본인이 무시당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도준이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방 안 분위기는 여전히 뜨거웠다.도준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아부하느라 바빴고, 여직원은 또 술을 들고 도준에게 다가왔다.“민 사장님, 오늘 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세요? 술 좀 드세요.”“됐습니다.”여직원은 도준의 낯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 멋에 술을 따랐다.“민 사장님이 마시지 않으면 제가 저희 대표님한테 한 소리 들을 겁니다. 그러니 제 체면을 봐서라도 마셔 주세요.”붉은 액체가 와인잔 벽을 타고 흘러 들자 도준이 테이블 다리를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와 동시에 잔에 담겼던 액체가 찰랑거리며 넘쳐흘렀다.“안 마신다고. 씨X 못 들었어?”뜨거웠던 방 안 분위기는 한순간 싸늘해졌다.하지만 도준은 그것을 무시한 채 넥타이를 손으로 풀어 헤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도준의 태도에 더 이상 아무
전화를 끊은 조관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 민도준은 이제 막 지옥문을 나선 저승사자처럼 또 뭐가 불만인지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그 모습에 조관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도준과 손을 잡은 것을 또 다시 후회했다. 이로써 벌써 101번째 후회하는 거다.“추형탁 쪽 일은 이미 대충 끝난 것 같고, 공씨 집안은 아직 껍데기가 남았는데,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황혼 무렵, 불그스름한 햇빛이 남자의 눈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빛을 덜어주었다.“해원에서는 조 국장님이 실세인데, 제가 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해원과 경성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제가 먹고 싶어도 어디 먹을 수야 있어야죠.”조관성은 도준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민 사장님 식욕이 뛰어나다는 걸 제가 어디 하루이틀 안 줄 압니까? 이제 와서 겸손한 척하다니.”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뭐, 먹으려면 먹을 수는 있지만 또 싸움을 해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요.”“민 사장님도 번거로운 걸 꺼릴 때가 다 있네요?”조관성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힘이 남아 나질 않아서요. 집안 문제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울 수도 없고.”“…….”할 말을 잃어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던 조관성은 도준을 꿰뚫어 보려는 듯 위아래로 훑었다.솔직히 도준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공씨 가문을 손에 넣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양보를 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공씨 집안 일은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판 새로 깔 타이밍에 재벌가가 또 끼어들어 권세를 휘두르는 건 원하지 않거든요. 민 사장님이 나서서 그들을 눌러준다면 걱정도 줄어들 테고.”도준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조관성이 차에서 내리자 도준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이얼을 눌렀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번호는 또 차단 당해버렸다.‘쯧, 또 삐졌네.’……경성.도준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난 뒤 아무리 해도 시원치 않던 하윤의 마음은 도준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나서야 그나마
“일기요?”놀란 듯한 주영애의 표정에 권하윤은 바짝 긴장했다.“혹시 없어요?”“아니요.”주영애는 싱긋 웃어 보였다.“우리 애가 남한테 일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게 의외라서요. 그 일기를 엄청 소중하게 여겨 누구도 손 못 대게 했거든요.”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미소 지었다.“맞아요. 선배의 성격이 불 같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만약 누군가 본인 일기를 훔쳐봤다는 걸 알면 당장이라도 화 낼 거예요.”“그러게요. 그 애가 그런 면에서 고집이 좀 세야 말이죠.”주영애는 지금의 주림을 떠올리며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그런데 지금은…….”“아주머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마세요.”나지막한 위로에 주영애는 그제야 다정의 존재를 눈치챘다.“어머, 다정이구나. 그간 어디 갔었어?”익숙한 사람을 보자 다정도 전보다 긴장을 풀었는지 주영애한테 하윤이 자기를 어떻게 구해냈는지, 또 그간 어떻게 보살펴 주었는지 빠짐없이 설명하면서 하윤을 마치 신처럼 찬양했다.그 모습에 주영애는 질투하는 척 투덜거렸다.“그럼 이제는 이 아줌마보다 언니가 더 좋다는 거야?”“아니에요. 저 아주머니도 좋고 언니도 좋아요.”다급히 설명하는 다정의 모습에 주영애가 피식 웃었다.“착하네.”……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 다정은 주영애를 도와 반죽을 빚기 시작했고, 하윤은 주영애가 건네준 일기를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일기장 앞에 적힌 내용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매일 자기가 받은 영감 아니면 학교에서 겪은 일뿐이었다.심지어 대충 쓴 날도 있었고, 며칠 건너 쓰기도 했다.먼저 확인한 두 권에서 모두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하윤은 마지막으로 세번째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세번째 일기장에는 앞서 두 권에서 보지 못했던 ‘그 여자애’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었다.심지어 내용도 먼저 봤던 두 권과는 사뭇 달랐다.시작 즈음, 일기 속에서 ‘그 여자애’는 주림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주림의 음악에 대한 꿈도 알고,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어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