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주인이라는 말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케빈 씨가 정말 민재혁 쪽 사람이었어요?”“네.”민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재혁네 식구의 야심은 늘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여자라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시영도,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에 올렸으니 말이다.때문에 시영이 경호원을 필요로 할 때 기회를 틈 타 자기 쪽 사람인 케빈을 붙였던 거다.하윤은 방금 알게 된 사실에 말을 잃었다.“그러니까, 케빈 씨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언니한테 접근했다는 뜻인가요?”“네.”시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씨 집안 식구들이 아무리 서로 견제한다 해도 저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 아이까지 견제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민용재가 대단하다는 거죠.”게다가 케빈은 어찌나 시영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는지 시영의 곁에 붙여진 첫날부터 믿음을 얻었다.말수가 적었지만 시영이 필요할 때 언제나 제때에 나타났으니까.심지어 바삐 보내는 시영의 아버지보다, 매일 고객 대접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영의 어머니보다 케빈이 시영의 곁에 더 많이 있어 주었다.그래서 시영도 케빈에게 의지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그 사이, 케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앳된 목소리로 ‘케빈 오빠, 저 배고파요.’, ‘케빈 오빠 저 혼자 자기 무서워요.’라며 조잘대던 어린 아이는 풋풋한 소녀로 자라났다.‘케빈, 이 옷 예뻐?’‘케빈, 나 립스틱 없어졌어.’‘케빈 이 지퍼 좀 올려 줘’하지만 새초롬하던 소녀의 말투가 끝내 처절한 비명으로 변해 버렸다.‘케빈, 살려줘…….’‘살려줘…….’시영은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더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번 배신한 사람인데 도준 오빠라고 배신 못할까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알고 싶어요. 그래서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고요.”집념 가득한 시영의 모습은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기 자신과 겹쳐 보여서일까? 하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
권하윤이 모든 감정을 쏟아내자 전화 건너편에서 아무렇지 않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끝났어?”가벼운 말투는 두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 또 한 번 상기시켰다.순간 저 자신이 우스웠다.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이 도준한테는 그저 우스웠을 걸 생각하니 타오르던 분노마저 꺼지며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네, 끝났어요.”“끝났으면 이제 내가 말해도 왜?”상의하는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맞아. 비행기 폭발 사고 때 추형탁이 손써 두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정도쯤은 사고 당시 낙하산 타고 내려오면 피할 수 있는 거였어.”하윤은 반신반의하는 듯 물었다.“알았다면 왜 그렇게 됐어요?”“추형탁 말고도 손쓴 사람이 더 있었으니까.”“공은채요?”“응.”실험 훈련 실패한 사건과 뇌물수수에 연루된 사람의 생사가 불확실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그 때문에 도준이 실종되었을 때, 추형탁은 거리낌 없이 도준을 문제 삼아 조관성을 공격했고, 공씨 가문도 추형탁에게 줄을 섰을 거다. 그리고 그 덕에 두 무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고.그러니까 어찌 보면 공아림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도준이 조관성과 짜고 공씨 자문을 무너뜨린 것도 맞는 말이고, 그게 모두 공은채 때문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니까.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도준이 저 때문에 조 국장과 손잡았고, 그로 인해 정권 싸움에 연루된 줄 알고 밤잠까지 설쳤다는 게 참 가소로웠다.공은채라면 먼저 사고를 치고 나중에 통보한다 해도 도준은 아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그 뿐만 아니라 이 시끄러운 곳과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옛 감정이 다시 싹 텄을 수도 있고…….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하윤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끝내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문자는 도준 씨가 보낸 거 맞죠?”“응.”
“민혁한테서 들었어. 그 정신병자를 직접 흥덕 마을로 데려 가겠다고 했다며?”“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또 제 자유를 제한할 거예요?”날을 잔뜩 세운 권하윤의 말투에 민도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결론 내리고 화 내는 건 대체 뭐야?”하윤도 자기 자신이 지금 가시를 드러내고 경계하는 고슴도치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안다.하지만 이것도 이미 참을 만큼 참은 결과다.그때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하윤을 달래려는 듯한 말투였다.“가지 말란 말 안 했어. 가는 길에 나 보러 여기 들르는 건 어때? 나도 이제 막 혼인신고 끝낸 우리 마누라 보고 싶은데.”도준의 다정한 호칭에 하윤의 가슴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두근대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감정을 이내 꾹꾹 눌렀다. 본인이 참 못난 것 같았으니까. 대충 몇 마디 달랬다고 보고 싶어하는 게.결국 서슴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편, 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뚜뚜’ 거리는 소리에 도준은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애써 본인이 무시당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도준이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방 안 분위기는 여전히 뜨거웠다.도준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아부하느라 바빴고, 여직원은 또 술을 들고 도준에게 다가왔다.“민 사장님, 오늘 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세요? 술 좀 드세요.”“됐습니다.”여직원은 도준의 낯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 멋에 술을 따랐다.“민 사장님이 마시지 않으면 제가 저희 대표님한테 한 소리 들을 겁니다. 그러니 제 체면을 봐서라도 마셔 주세요.”붉은 액체가 와인잔 벽을 타고 흘러 들자 도준이 테이블 다리를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와 동시에 잔에 담겼던 액체가 찰랑거리며 넘쳐흘렀다.“안 마신다고. 씨X 못 들었어?”뜨거웠던 방 안 분위기는 한순간 싸늘해졌다.하지만 도준은 그것을 무시한 채 넥타이를 손으로 풀어 헤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도준의 태도에 더 이상 아무
전화를 끊은 조관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 민도준은 이제 막 지옥문을 나선 저승사자처럼 또 뭐가 불만인지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그 모습에 조관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도준과 손을 잡은 것을 또 다시 후회했다. 이로써 벌써 101번째 후회하는 거다.“추형탁 쪽 일은 이미 대충 끝난 것 같고, 공씨 집안은 아직 껍데기가 남았는데,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황혼 무렵, 불그스름한 햇빛이 남자의 눈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빛을 덜어주었다.“해원에서는 조 국장님이 실세인데, 제가 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해원과 경성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제가 먹고 싶어도 어디 먹을 수야 있어야죠.”조관성은 도준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민 사장님 식욕이 뛰어나다는 걸 제가 어디 하루이틀 안 줄 압니까? 이제 와서 겸손한 척하다니.”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뭐, 먹으려면 먹을 수는 있지만 또 싸움을 해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요.”“민 사장님도 번거로운 걸 꺼릴 때가 다 있네요?”조관성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힘이 남아 나질 않아서요. 집안 문제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울 수도 없고.”“…….”할 말을 잃어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던 조관성은 도준을 꿰뚫어 보려는 듯 위아래로 훑었다.솔직히 도준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공씨 가문을 손에 넣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양보를 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공씨 집안 일은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판 새로 깔 타이밍에 재벌가가 또 끼어들어 권세를 휘두르는 건 원하지 않거든요. 민 사장님이 나서서 그들을 눌러준다면 걱정도 줄어들 테고.”도준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조관성이 차에서 내리자 도준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이얼을 눌렀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번호는 또 차단 당해버렸다.‘쯧, 또 삐졌네.’……경성.도준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난 뒤 아무리 해도 시원치 않던 하윤의 마음은 도준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나서야 그나마
“일기요?”놀란 듯한 주영애의 표정에 권하윤은 바짝 긴장했다.“혹시 없어요?”“아니요.”주영애는 싱긋 웃어 보였다.“우리 애가 남한테 일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게 의외라서요. 그 일기를 엄청 소중하게 여겨 누구도 손 못 대게 했거든요.”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미소 지었다.“맞아요. 선배의 성격이 불 같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만약 누군가 본인 일기를 훔쳐봤다는 걸 알면 당장이라도 화 낼 거예요.”“그러게요. 그 애가 그런 면에서 고집이 좀 세야 말이죠.”주영애는 지금의 주림을 떠올리며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그런데 지금은…….”“아주머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마세요.”나지막한 위로에 주영애는 그제야 다정의 존재를 눈치챘다.“어머, 다정이구나. 그간 어디 갔었어?”익숙한 사람을 보자 다정도 전보다 긴장을 풀었는지 주영애한테 하윤이 자기를 어떻게 구해냈는지, 또 그간 어떻게 보살펴 주었는지 빠짐없이 설명하면서 하윤을 마치 신처럼 찬양했다.그 모습에 주영애는 질투하는 척 투덜거렸다.“그럼 이제는 이 아줌마보다 언니가 더 좋다는 거야?”“아니에요. 저 아주머니도 좋고 언니도 좋아요.”다급히 설명하는 다정의 모습에 주영애가 피식 웃었다.“착하네.”……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 다정은 주영애를 도와 반죽을 빚기 시작했고, 하윤은 주영애가 건네준 일기를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일기장 앞에 적힌 내용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매일 자기가 받은 영감 아니면 학교에서 겪은 일뿐이었다.심지어 대충 쓴 날도 있었고, 며칠 건너 쓰기도 했다.먼저 확인한 두 권에서 모두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하윤은 마지막으로 세번째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세번째 일기장에는 앞서 두 권에서 보지 못했던 ‘그 여자애’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었다.심지어 내용도 먼저 봤던 두 권과는 사뭇 달랐다.시작 즈음, 일기 속에서 ‘그 여자애’는 주림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주림의 음악에 대한 꿈도 알고,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어하는 마음
하지만 하필이면 한차례 공연 당시, 석지환은 사고로 음악 인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한쪽 팔도 잃게 되었다.이성호는 그때 그 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걱정에 시달렸었다. 결국 퇴원한 석지환이 오히려 이성호를 달래러 찾아온 적이 있다.게다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후배들 앞에서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됐어, 다들 그만 울어. 나 가업 이으러 돌아가는 거야’라고 말하던 석지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교실에 흘러 든 빛이 석지환에게 드리워 긴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석지환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어디에 떨어져 있든, 우리의 미래는 창창할 거야.’……기억이 뚝 끊긴 순간, 하윤은 일기장을 다시 들여다보며 황당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설마 그때 석지환 선배의 사고가…….’곧이어 본 일기장의 내용은 하윤의 그런 생각을 증명했다.극한의 분노를 쏟아낸 뒤, 주림의 일기에는 회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내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니.’‘내가 정말 마쳤나?’‘그 여자애는 분명 석지환이 경상만 입을 거랬는데, 왜 이렇게 됐지?’하윤은 볼수록 충격적인 내용에 얼른 인터넷으로 그때 아버지의 콘서트를 검색해 봤다.그랬더니 역시나, 석지환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연주할 기회는 결국 주림이 차지했다.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이 가빠왔다. 늘 동경해오던 사람이 하윤도 모르는 사이에 더럽혀졌다는 걸 아는 건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하지만 하윤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이런 일로 슬퍼할 때가 아니야.’‘고작 평범한 학생이었던 주림 선배가 어떻게 그런 일을 벌였지?’일기에 계속 언급되었던 ‘그 여자애’가 나선 거면 모를까.‘게다가 주림의 성격에 갑자기 변한 게 아마 공은채와 사귀고 난 뒤었으니…….’하윤은 자기의 생각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그러니까 공은채는 주림 선배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조종하려는 거였어.’‘대체 목적이 뭐지?’하윤은 얼른 일기장을 뒤로
권하윤이 일기를 가방에 넣자마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다정의 울음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이에 놀란 하윤이 다급히 밖으로 나왔을 때, 한껏 높아진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이 불길한 X,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우리 아들 돌려 내!”웬 노인이 장옥분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흔들어댔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니라 장옥분의 시어머니, 임숙희였다.“다들 봐 봐요! 우리 집에서 얼마나 잘해줬는데 아들도 못 낳으면서 내 아들이 조금 손찌검했다고 글쎄 남편을 죽였어요, 이 X이! 사람을 죽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내 오늘 너와 끝장을 낼 거다!”임숙희는 울부짖으며 장옥분의 멱살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다정이 임숙희의 팔을 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우리 엄마 때리지 마세요. 엄마 때리지 말라고요!”눈 앞의 광경에 하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계속 폭력을 행사하면 경찰 부를 거예요!”임숙희는 하윤의 차림새를 보더니 하려던 욕설을 목구멍으로 삼킨 채 투덜거렸다.“그쪽은 누군데 남의 집안 일에 끼어들어? 저리 비켜.”다정은 하윤을 보자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울며 달려갔다.“언니, 우리 엄마 좀 구해줘요.”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에 임숙희는 뭔가 알아챘는지 얼른 하윤에게 삿대질 해댔다.“그쪽이 우리 둘째 고발한 여자지? 내가 찾아가기도 전에 감히 제 발로 찾아오다니!”임숙희는 함께 끌고 온 친척들을 향해 얼른 소리쳤다.“우리 일용이를 해치고 손녀까지 빼앗아 도망 간 여자가 바로 이 예자예요. 당장 이 여자를 끌고 경찰소로 가서 우리 일용이를 구해냅시다!”정씨 집안 남자들이 하윤에게 달려들자 장옥분은 마음이 다급해 났다.“뭐 하는 짓들이야? 그게 하윤 동생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우리 일용이가 다정이한테 좋은 집안 찾아줬는데, 이 여자가 가서 일을 그르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인신매매범으로 몰아 감옥에 넣었다잖니.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네가 알고 지낸 사람
민도준은 이곳까지 운전으로 온 모양이다.심지어 그 사이 담배를 적잖게 피웠는지 문을 닫는 순간 차 안에서 나는 담배 연기가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한데 섞여 더 심각하게 코를 자극했다.답답한 공기에 하윤은 손을 들어 창문을 열었다. 이것으로나마 도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덜어내야 했으니.하지만 이런 겁 없는 행동에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이쪽도 열어줄까?”가슴이 점점 답답해 괴로웠지만, 방금 전 저를 도운 도준의 행동을 되새긴 하윤은 끝내 감정 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왜 왔어요?”도준은 하윤을 힐끗 살피더니 옆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마침 하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거리에서 멈췄다.“자기가 나 보러 오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직접 왔지.”“이제 봤으니 가요.”하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이제 방금 왔는데 벌써 쫓아낸다고?”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시선을 막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하윤의 귀를 따라 점점 내려갔다.그 순간, 머리카락이 막아주지 않은 탓에 남자의 숨결이 귓가에 직접 느껴졌다.“보기만 해서 될 리가 있나.”하윤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렸고 귀불까지 귀여운 홍조를 띄었다.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서 괴로움이 느껴지자 하윤은 불편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연달아 거절을 당하자 도준도 끝내 인내심이 바닥 났는지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감싸며 억지로 그녀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거친 동작에 하윤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도준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윤의 목덜미를 문질렀다.“자기야, 나 건드리지 마.”하윤은 더 이상 도준의 힘을 당해낼 수 없자, 자포자기하 듯 힘을 풀고 도준을 째려봤다.“왜요? 여기서 하려고요? 끝나면 갈 거예요?”‘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기 힘들단 말이지. 하지만 이 성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은데.’잠깐 고민하던 도준은 손가락을 하윤의 얼굴에 튕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어쩜 그런 생각밖에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