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조바심에 눈살을 팍 구겼다.“꼭 그렇게 말해야겠어?”“그럼 어떻게 말하기를 원하는데요?”하윤이 반문했다.“바보처럼 도준 씨가 공은채랑 바다 위에서 얼마나 붙어먹었는지 모른 체하라는 거예요? 아니면 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잊으라는 거예요?”“그간 제가 해원에 가겠다는 걸 극구 말렸던 건 공은채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잖아요! 제가 바보처럼 도준 씨를 향해 계속 꼬리 흔들기를 원한 거예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말을 마친 하윤이 차에서 내리려 할 때, 도준이 그녀를 다시 안으로 잡아 끌었다.“이거 놔요!”“됐어. 그만해.”도준은 몇 번 만에 하윤을 제압사고는 아예 조수석에 있던 그녀를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아직 화풀이도 안 했으면서 도망치면 자기만 손해잖아. 내가 자기를 이렇게 괴롭혔는데 적어도 뭐라도 건지는 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만하고 우리 얘기 좀 해. 응?”하윤은 도준의 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튼튼한 그의 다리 위에서 도망도 칠 수 없었고, 힘있는 팔에 꽉 안겨 움직이지도 못했다.‘그런데 얘기 좀 하자고? 저는 나를 협박하고 있으면서.’하윤은 도준과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보이지 않으면 화도 덜할 테니까.하지만 도준은 이에 불만을 표하기는커녕 하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하윤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내가 잘못했어. 이혼하자는 것 빼고 뭐든 들어줄게.”“하, 그럼 공은채 목숨을 갖고 싶은데, 그건 돼요?”공기 속에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도준의 눈에 드리웠던 욕망은 이내 어둠으로 대체되었다.“착하지? 다른 거로 바꿔.”분명 귀를 간지럽히는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윤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다.이윽고 싸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안 되죠? 역시 공은채는 건드리지 못하겠죠?”한껏 구겨진 도준의 미간 아래 날카로운 눈빛은 하윤을 매섭게 보고 있었다.“앞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권하윤은 확신을 할 수 없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뭐라고요?”“복수 하라고.”싱긋 웃으며 내뱉은 도준의 말에 하윤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시간을 줘. 내가 공은채 심장을 다른 거로 바꾸어 줄 때까지.”말이 간단하지 거부 반응이 심한 심장 수술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무엇보다 수술 전에 이식 상대를 찾고 약도 먹으며 수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공은채가 순순히 협조할 리가 없었다.하윤의 걱정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공을 꽤 들이긴 해야지.”이윽고 하윤의 코를 살짝 잡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자기 달래는 것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그의 진심을 알아내려고 빤히 훑었다.그러자 도준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심 쓰듯 얼굴을 하윤 앞으로 바짝 들이 밀었다.하지만 도준의 속내를 그렇게 쉽게 읽어낼 수 있다면 하윤도 그간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다.오히려 궁금증만 남긴 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심장을 다시 바꾸면 공은채가 죽어도 괜찮아요?”도준은 여상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었다.“자기야,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자기뿐이야. 그러니까 화 풀어, 응?”왠지 모르게 하윤은 가슴이 저렸다.그건 자기 때문인지 도준 때문인지 하윤도 알 수 없었다.솔직히 하윤이 도준이라도 자기 가족의 유일한 흔적을 지우겠다는 요구에 쉽게 승낙하지 못했을 거다.만약 공은채가 협조를 해서 도준 어머니의 심장을 빼낸다 할지라도, 그건 하윤이 직접 도준 어머니의 유일한 혈통을 망가뜨리는 셈이다.그렇게 되면 하윤과 도준이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는 불 보듯 뻔하다.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가족이 죽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도준은 그런 하윤의 속내를 파헤치기라도 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또 미안해하네.’동의하지 않으면 늑대 새끼처럼 당장이라도 도준의 살점을 물어 뜯을 것처럼 달려 들
조관성이 최근 맡은 프로젝트 중 흥덕 마을도 속해 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이 마침 이곳으로 시찰을 오는 날이다.그 소식을 접한 흥덕 마을 이장은 아침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조관성을 맞이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경찰서를 시찰하는 도중, 임숙희 일행이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만 거다. 그 순간 마을 이장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렸다.하지만 그 무리에서 한민혁을 발견한 조관성의 낯빛도 이장 못지 않게 새파래졌다.“민 사장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이런 곳에서 지인을 만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민혁은 난감한 듯 웃었다.“도준 형은 지금 폭력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를 돌봐주고 있습니다.”그 말에 조과성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로 잠깐 불러 주시죠.”……민혁이 헐레벌떡 뛰어와 이 소식을 도준에게 전했지만 조관성이 저를 찾는 이유를 듣자마자 도준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내가 이미 떠났다고 해.”“크흠.”하지만 때마침 조관성의 불만 섞인 헛기침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조관성과 함께 온 영도들도 모두 조관성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고,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함으로 치달았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와서 하시죠!”도준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더니 차문에 기댄 채 피식 웃었다.“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조 국장님 아니에요?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도준의 태도에 조관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이제는 하다하다 외지에서까지 사고를 치고 다니네요.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사고라니요? 저는 그저 위기에 처한 시민을 도왔을 뿐인데.”가볍게 웃으며 말하는 도준의 목소리를 차 안에서 듣고 있던 하윤은 입술을 깨물더니 끝내 차에서 내려 설명했다.“사실 우리가 먼저 손 댄 게 아닙니다. 정씨 집안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우리를 때리려고 할 때, 도준 씨가 마침 나타나 우리를 구해준 겁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났고요.”……말뿐인 증언을 믿을 리 없는 조관성은 사람을 보내 상황을
권하윤이 가방을 챙겨 떠나려는 순간, 무거운 힘이 어깨를 짓누르더니 그녀를 차 문으로 밀쳤다. 이윽고 남자의 건장한 몸이 하윤을 바싹 내리 눌렀다.도준의 큰 키 때문에 그 밑에 깔린 하윤의 몸뚱어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아래로 하는 순간, 도준의 다리를 차는 가느다란 여자의 다리가 보일 뿐.하지만 하윤의 힘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온 힘을 다해 버둥대 봤지만 도준의 눈에는 그게 오히려 새끼 고양이가 사람을 긁은 것에 불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윤이 화를 내면 내는 대로 도준은 다 받아들이기만 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도준은 하윤에게 더 바싹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내 말 들어. 나 이미 흥분했으니까 더 건드리지 마.”그제야 뭔가 눈치챈 하윤은 더 이상 버둥대지 않았다.도준은 웃으며 하윤의 귀에 입을 맞췄다.“그 정신병자를 신경 쓰는 거 아니었어? 나랑 여기 단둘이 남겨 두고 떠나도 괜찮겠어? 그리고, 공은채 목숨을 원한다며? 남아서 나랑 계획을 세워야지. 안 그래?”장난스러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윤의 몸부림을 점점 무력화시켰다.도준의 말이 맞았다. 하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화가 난다고 훌쩍 떠나버릴 수 없었다.하윤이 조용해진 모습을 보자 도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하윤의 머리를 토닥였다.“착하네.”……조관성과 약속을 잡은 곳은 마을의 한 생선요리 식당이었다.낮에 조관성 곁에 따라붙었던 간부들이 없는 걸 봐서 도준과 단둘이 약속한 식사 자리인 듯싶었다.도준이 하윤을 데려온 걸 보자 조관성은 의외라는 듯 도준을 힐끗거렸다.이에 도준이 턱을 까딱이며 하윤에게 조관성을 소개했다.“조 국장, 전에 본 적 있지?”두 사람의 악수가 끝나자 조관성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술 좀 마시려 했더니, 그걸 내 빼려고 사모님까지 데려온 겁니까?”도준은 하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뭐 어쩌겠습니까? 제가 집사람한테 잡혀 살거든요.”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던 하윤은 이 식사 자리가 단지 술을 마시려는
둘만 남은 순간부터 아예 하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앉은 도준은 갑작스러운 하윤의 질문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이윽고 하윤을 의자채로 끌어와 자기 다리 사이에 하윤을 가두었다. 남자의 튼튼한 다리 사이 여자는 가느다란 다리를 꼭 붙인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왜? 이제는 관심이 생겨?”하윤은 도준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바라봤다.“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그 말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녔다.“내 마누라한테 말 못할 게 뭐 있어?”다정한 말투가 차가운 귀속으로 흘러들어서인지 하윤은 오히려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도준은 더 이상 말장난을 하지 않고 곧바로 하윤에게 알려 주었다.“조 국장이 추형탁과 정권 다툼을 한 지 한참이 되거든. 그런데 전쟁터는 정권다툼만 있는 게 아니라 경제력 다툼도 있어. 조 국장은 그래서 내가 공씨 집안 껍데기를 쓴 채 꿍꿍이를 품은 재벌가들을 먹어 치우기를 원하는 거고.”“그러면 도준 씨가 세력을 키워 나가는 건 안심할 수 있대요?”의아한 듯 되묻는 하윤의 말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그게 걱정이 돼서 나를 내세우는 거야.”그 말을 들은 하윤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도준이 아무리 경성에서 하늘을 가린다 해도 그 세력은 고작 경성 내부에만 국한된다. 세력이 없는 해원에서는 동맹이라고 조관성 뿐이고.“설마 도준 씨를 칼로 쓰겠다는 뜻이에요?”고민을 마친 하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응.”진지하게 생각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이제 알았으면 내가 공씨 가문을 봐준다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너무 손쉽게 도준한테 속마음을 들켜 버린 하윤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준 씨 같은 사람들은 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달라요?”그 말에 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다리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 이래.”……흥덕 마을은 밤 생활이 없는지라 저녁 8시 되
욕실의 물소리는 도준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빨리 멈췄다.솔직히 하윤이 샤워를 핑계로 안에서 시간을 끌다가 한참 뒤에야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실로 놀라웠다.‘뭐 그래도 많이 착해졌네.’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결혼한 것도 꽤 좋은 것 같았다.도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리면서 안에 몰려 있던 습한 물안개도 함께 흘러나왔다.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채 나온 하윤을 본 순간, 도준의 목 울대는 저도 모르게 꿀렁거렸다.하윤은 대충 말린 머리를 어깨에 드리운 채 침대를 쓱 훑어보더니 도준의 가슴을 훑었다.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두른 타월이 점점 느슨해져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 아래에 있는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도준이 손을 벋기도 전에 하윤이 몸을 숙였다.하윤이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은 도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하윤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뭐 하는 거야?”하윤은 도준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시중을 들려는 거잖아요. 제가 응당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순간 팍 식은 도준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복수를 도와달라고 이러는 거야?”하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제가 뭐라 하든 안 믿을 거잖아요.”“하, 그래. 좋아.”도준은 연신 좋아라는 두 글자를 중얼대더니 하윤을 삼켜버릴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나는 하윤 씨를 아내로 생각하는데, 하윤 씨한테 나는 고작 거래에 불과하다 이거야?”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훤히 드러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동작만으로도 이게 바로 하윤의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도준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거래라면 나도 사양할 거 없겠네.”하윤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가슴에 찬 바람이 불어 왔다.힘껏 잡아당긴 목욕 타월은 하윤의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을 남겼고, 따끔거리는 고통도 함께 선사했다.하윤을 누르는 힘은 마치 그녀를 침대에 박제하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했다. 하지만 하윤은 반항도
권하윤의 눈빛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왜, 왜 돌아왔어요?”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는 유달리 투명해 보여 차마 모질게 대할 수조차 없었다.이에 도준은 얼른 하윤을 이불 속에서 끄집어 냈다.“자기가 또 혼자 숨어서 울까 봐 왔지.”하윤은 그제야 부끄러웠는지 이내 부정했다.“아니거든요.”“아니라고?”도준은 손가락으로 당장 떨어지려던 눈물을 받아 하윤의 앞에 쑥 내밀었다.“그럼 방금까지 계속 운 사람은 누구야?”“…….”하윤이 멍해 있는 사이, 도준은 욕실에서 가운을 갖고 나와 하윤에게 입혀 주더니 풀어지지 않도록 허리춤을 꽉 묶어 주었다.“됐어. 오래 울었으니 체력 소모도 많이 됐겠는데 뭐라고 좀 먹어.”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둣국이 놓여 있었다. 그건 방금 전 도준이 사온 거다.그 만둣국을 한 술 먹는 순간, 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사랑은 참으로 이상한 거다. 한순간 한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고 한 사람에게 두꺼운 갑옷이 되어 주기도 하니까.심지어 닿는 순간 한 사람의 모든 의지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게 사랑이다.도준은 만둣국에 입도 대지 않고 담배를 문 채 오물오물 씹어 먹는 하윤을 바라봤다.하윤은 편식하는 고양이처럼 늘 밥은 제대로 먹지 않고 디저트나 아이스크림 같은 단 것만 쉴 새 없이 먹어댄다.그런데 웬일로 만둣국은 거의 다 먹어 치웠다.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도준은 피식 웃었다.“그렇게 맛있어?”솔직히 말하면 맛은 없었다. 껍질은 너무 두껍고 생강 냄새가 코를 찔렀으니.게다가 가게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지 만두피가 국물에 오래 담겨 있어 쫄깃함도 사라졌다.하지만 꽁꽁 언 체온을 녹여줄 만큼 따뜻했다.하윤은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아까는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해요.”“오?”도준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말 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윤은 기운 없는 듯 그릇에 남은 만두 두 개를 멍하니 바라봤다.“도준 씨는 고작 저 한 번만 속였고 저는 전에
민도준에게 시달릴 마음의 준비까지 끝낸 권하윤은 도준이 저를 쉽게 놓아주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이윽고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더니 감전이라도 된 듯 고개를 돌리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그, 그냥 자겠다고요?”도준은 남은 베개와 옷을 소파 위에 던져 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안 그러면? 혹시 뭐 할 거라도 있어?”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도준이 하윤을 침대 옆에 앉히더니 하윤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었다.“자기 한번 달래는 거 충분히 힘들어, 두 번은 귀찮아.”하윤은 당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뭐라 반박할지 몰라 마지못해 자리에 누웠다.하지만 이 곳에서 하룻밤 묵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해 잠옷을 챙겨오지 못한 바람에 호텔 가운 차림으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고개를 돌려 확인해 봤더니 도준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끝내 참다 못한 하윤은 자기 옷으로 갈아 입으려고 어둠 속에서 더듬대며 창가 옆 소파로 다가갔다.커튼을 연 하윤은 달빛을 빌어 손쉽게 본인의 청바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청바지로 갈아 입으니 오히려 더 불편했다.그러던 그때, 하윤의 시선은 마침 도준이 입고 왔던 검은 티셔츠에 멈췄다.‘어, 먼저 이걸 입고 있다가 내일 돌려주면 되겠네.’하윤은 얼른 가운을 풀어헤치고 가는 팔을 소매에서 꺼냈다.그 시각, 어두컴컴한 방 안에 유일하게 흘러 든 달빛은 마침 여자의 몸에 떨어졌다.가운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마침 허리 라인 위로 떨어졌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린 여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색기가 넘쳐 흘렀다.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옷의 정면을 찾느라 여념이 없는 하윤은 당연히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맹수 같은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그저 대충 정면을 찾고는 이내 옷을 몸에 걸치자 돌돌 말렸던 옷자락을 살짝 내렸다. 그 순간 헐렁한 옷과 가는 허리가 대비되어 한 손에 잡힐 듯한 허리가 더 잘록해 보였다.옷을 껴입고 긴 머리카락을 빼낸 하윤은 얼른 허리를 숙여 가운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