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의 눈빛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왜, 왜 돌아왔어요?”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는 유달리 투명해 보여 차마 모질게 대할 수조차 없었다.이에 도준은 얼른 하윤을 이불 속에서 끄집어 냈다.“자기가 또 혼자 숨어서 울까 봐 왔지.”하윤은 그제야 부끄러웠는지 이내 부정했다.“아니거든요.”“아니라고?”도준은 손가락으로 당장 떨어지려던 눈물을 받아 하윤의 앞에 쑥 내밀었다.“그럼 방금까지 계속 운 사람은 누구야?”“…….”하윤이 멍해 있는 사이, 도준은 욕실에서 가운을 갖고 나와 하윤에게 입혀 주더니 풀어지지 않도록 허리춤을 꽉 묶어 주었다.“됐어. 오래 울었으니 체력 소모도 많이 됐겠는데 뭐라고 좀 먹어.”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둣국이 놓여 있었다. 그건 방금 전 도준이 사온 거다.그 만둣국을 한 술 먹는 순간, 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사랑은 참으로 이상한 거다. 한순간 한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고 한 사람에게 두꺼운 갑옷이 되어 주기도 하니까.심지어 닿는 순간 한 사람의 모든 의지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게 사랑이다.도준은 만둣국에 입도 대지 않고 담배를 문 채 오물오물 씹어 먹는 하윤을 바라봤다.하윤은 편식하는 고양이처럼 늘 밥은 제대로 먹지 않고 디저트나 아이스크림 같은 단 것만 쉴 새 없이 먹어댄다.그런데 웬일로 만둣국은 거의 다 먹어 치웠다.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도준은 피식 웃었다.“그렇게 맛있어?”솔직히 말하면 맛은 없었다. 껍질은 너무 두껍고 생강 냄새가 코를 찔렀으니.게다가 가게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지 만두피가 국물에 오래 담겨 있어 쫄깃함도 사라졌다.하지만 꽁꽁 언 체온을 녹여줄 만큼 따뜻했다.하윤은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아까는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해요.”“오?”도준은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말 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윤은 기운 없는 듯 그릇에 남은 만두 두 개를 멍하니 바라봤다.“도준 씨는 고작 저 한 번만 속였고 저는 전에
민도준에게 시달릴 마음의 준비까지 끝낸 권하윤은 도준이 저를 쉽게 놓아주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이윽고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더니 감전이라도 된 듯 고개를 돌리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그, 그냥 자겠다고요?”도준은 남은 베개와 옷을 소파 위에 던져 버리고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안 그러면? 혹시 뭐 할 거라도 있어?”하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도준이 하윤을 침대 옆에 앉히더니 하윤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었다.“자기 한번 달래는 거 충분히 힘들어, 두 번은 귀찮아.”하윤은 당장 반박하고 싶었지만 뭐라 반박할지 몰라 마지못해 자리에 누웠다.하지만 이 곳에서 하룻밤 묵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해 잠옷을 챙겨오지 못한 바람에 호텔 가운 차림으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고개를 돌려 확인해 봤더니 도준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끝내 참다 못한 하윤은 자기 옷으로 갈아 입으려고 어둠 속에서 더듬대며 창가 옆 소파로 다가갔다.커튼을 연 하윤은 달빛을 빌어 손쉽게 본인의 청바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청바지로 갈아 입으니 오히려 더 불편했다.그러던 그때, 하윤의 시선은 마침 도준이 입고 왔던 검은 티셔츠에 멈췄다.‘어, 먼저 이걸 입고 있다가 내일 돌려주면 되겠네.’하윤은 얼른 가운을 풀어헤치고 가는 팔을 소매에서 꺼냈다.그 시각, 어두컴컴한 방 안에 유일하게 흘러 든 달빛은 마침 여자의 몸에 떨어졌다.가운이 바닥에 떨어진 순간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마침 허리 라인 위로 떨어졌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린 여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색기가 넘쳐 흘렀다.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옷의 정면을 찾느라 여념이 없는 하윤은 당연히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맹수 같은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그저 대충 정면을 찾고는 이내 옷을 몸에 걸치자 돌돌 말렸던 옷자락을 살짝 내렸다. 그 순간 헐렁한 옷과 가는 허리가 대비되어 한 손에 잡힐 듯한 허리가 더 잘록해 보였다.옷을 껴입고 긴 머리카락을 빼낸 하윤은 얼른 허리를 숙여 가운을 주었다.
검은 천에 팔이 묶인 채 시선까지 가려져 하윤의 눈에는 그저 희미한 실루엣만 보였다.벗어나려고 마구 버둥대도 보았지만 오히려 남자의 악랄한 웃음만 불러올 뿐이었다.“착하지? 이러는 게 예뻐.”화가 난 하윤이 다리를 올려 도준을 차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남자의 손에 잡혀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 도준은 커다란 손으로 꽉 잡은 하윤의 다리를 쓱 쓸어 올렸다.“그러고 보니 우리 혼인 신고하고 나서 합방도 안 했네?”“누가 도준 씨랑……, 읍…….”입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하윤의 항의 소리가 흘러나왔다.“작게 말해. 목 아껴뒀다 이따가 소리 내.”“…….”하윤의 가슴에 떨어졌던 달빛은 결국 남자의 손에 부서졌다 남자가 원하는 모양대로 다시 빚어졌다.다시 샤워를 하고 난 뒤 하윤은 소원대로 편한 옷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하윤은 그것도 모른 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곤히 잠들어 버렸다.다음날.도준이 깨어 났을 때, 하윤은 그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도준의 커다란 옷 때문에 넥 라인이 비뚤어져 어깨를 훤히 드러낸 모습으로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어른의 옷을 훔쳐 입은 어린아이처럼 우스꽝스러웠다.도준에게 안겨 다시 침대에 누운 하윤은 열원이 갑자기 멀어지자 추운 듯 몸을 움츠린 채 머리를 베개 밑으로 파고들려고 했다.도준은 그런 하윤의 머리를 다시 베개 위에 올려 놓은 뒤, 하윤의 얼굴을 몇 번이고 문질렀다.그 힘이 컸는지 하윤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딱 봐도 단잠을 방해받아 불쾌한 모습이었다.결국 도준의 방해에 하윤은 흐릿한 눈을 비비며 깨어나더니 자리에 앉아 있는 도준을 보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벌써 가요? 옷 돌려 줄게요.”하윤이 움직이려는 찰나,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아 다시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됐어. 이 옷 입고 있는 게 예뻐. 그대로 입고 있어.”하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이해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드러내자 도준은 피식 웃었다.“내 앞에서 옷 마구 벗으면 나더러
두 사람을 번갈아 일으켜 세우며 진땀을 뺀 후에야 두 사람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장옥분은 여전히 격동된 마음으로 눈물을 훔쳤다.“동생, 걱정하지 마. 내가 가진 건 없어도 은혜를 꼭 갚는 성격이거든. 물론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퇴원하면 꼭 변호사 비용과 병원비를 갚을 게.”“그럴 필요 없어요. 그때 언니가 구치소에서 저 많이 챙겨줬잖아요. 언니가 없었다면 저 그 안에서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저도 은혜 갚은 것뿐이에요.”“아니야. 이게 어떻게 비교가 돼?”장옥분은 흐느끼는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동생이 몰라서 그렇지, 동생이 나한테 정말 큰 도움을 준 거야.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동생이 다정이를 그 놈들 손에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우리 다정이의 인생은 아마 그대로 망가졌을 거야.”“다정이 참 철들었더라고요.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거예요. 그런데…….”하윤은 다정을 바라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정씨 집안 사람들 쉽게 나가 떨어질 것 같지 않던데, 앞으로 또 귀찮게 하면 어떡해요?”그 말에 장옥분이 놀란 듯 물었다.“설마 모르는 거야?”‘뭘요?’하윤은 어리둥절했다.“정씨 집안 사람들 어제 일로 한바탕 돈을 뜯어내려고 했는데, 어제 동생과 같이 왔던 남자가 오늘 찾아갔더니 놀라서 바지에 오줌까지 지렸대.”‘도준 씨 말하는 건가?’하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러니까 어제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던 원인이 그 사람들 겁주러 가려던 거였어?’솔직히 도준의 성격에 장옥분과 다정의 생사를 걱정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도준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는 건 하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을 거다.그걸 인지하는 순간, 차갑던 하윤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 더 이상 도준을 차갑게만 바라볼 수 없었다.장옥분은 하윤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산전수전 다 겪어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그 사람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이지? 조금 무섭다 뿐이지 생긴 건 정말 잘생겼던데. 그래도
다시 병실로 돌아가는 정다정의 뒷모습을 보며 한민혁은 낮게 중얼거렸다.“그래도 두 모녀가 생각보다 단단해서 다행이네요.”“그러게요.”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두 사람은 권하윤의 도움으로 더 편한 생활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모녀는 그러지 않았다.장옥분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자 하윤은 얼른 민혁에게 물었다.“오늘 아침 혹시 도준 씨와 함께 정씨 집안 식구들 찾아갔어요?”“네. 그 집 식구들이 도준 형 때문에 겁먹어서 헛구역질을 해대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하윤 씨는 모르죠? 저는 그 자리에서 웃겨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민혁은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심지어 하하 소리 내어 웃다가 이내 뭐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어, 혹시 도준 형이 말 안 해 주던가요?”“안 했어요.”하윤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민혁은 하윤의 기색을 한참 동안 살펴보다가 하윤이 화를 내지 않자 또 다시 도준의 칭찬을 이어갔다.“솔직히 그 정도 일에 도준 형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는데, 그 사람들이 주제도 모르고 하윤 씨한테 손찌검했잖아요.”하윤은 어느새 마음이 풀려 저도 모르게 도준을 걱정했다.“그래도 그렇지 조 국장과 함께 시찰하러 온 사람들이 아직 안 떠났는데 정씨 집안 사람들이 또 소란을 피우면 어쩌려고 그랬대요? 여긴 경성도 아닌데,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는지.”하윤의 말에 민혁은 더 분발해서 말을 이었다.“그러게 말이에요. 그러니까 도준 형한테 전화해서 좀 뭐라고 해요.”민혁은 하윤이 얼른 도준의 연락처 차단을 풀었으면 하는 바람에 열과 성의를 다해 도준 편을 들었다. 도준이 이미 직접 손을 썼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그렇다고 민혁의 그런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하윤이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도준의 번호를 눌렀으니까.대기음이 약 두 번 정도 울리는가 싶더니, 통화는 이내 연결되었다.“혹시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전류에 섞여 흘러나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가볍고 느릿했다.“그
[뭐 갖고 싶은 거 있어?]권하윤은 문자를 보고 어리둥절했다.‘갖고 싶은 거?’아무리 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한마디에 하윤은 어안이 벙벙해 얼른 답장을 작성했다.[혹시 다른 사람한테 보낼 거 저한테 잘못 보낸 거예요?][나 다른 사람의 소원 같은 거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분명 도준 씨 말투 맞는데?’‘그럼 정말 나한테 물어본 건가?’하윤은 잠깐 동안 생각해 보다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자 대뜸 대답했다.[딱히 갖고 싶은 게 없어요.][없으면 천천히 생각해, 생각 날 때까지.]하윤은 도준이 또 무슨 병이 도졌다고 생각해 더 이상 상대도 하지 않았다.강원에 있는 며칠 동안, 하윤의 주위는 늘 떠들썩했는데 경성에 돌아오니 순간 썰렁해졌다.그도 그럴 게, 며칠 전에는 집에 그나마 다정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혼자 남았으니 그렇게 느껴질만도 했다.다정이가 집에 돌아온 후 겪은 일을 들은 유정인은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문뜩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참, 이건 제가 전에 다정이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건데, 그동안 보관하고 있었어요.”유정인이 건넨 종이를 받아 보니, 그 위에 다정이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연필로 간단히 스케치한 그림이었는데 어찌나 열심히 그렸는지 곳곳에 지우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여기저기 많이 구겨지기까지 했다.그림에 담긴 자신의 옆모습을 본 순간, 하윤은 눈시울이 약간 뜨거워졌다.모퉁이에 남겨진 글자체는 앳되고 미숙했다. [다정.]……이틀 동안 혼자 답답한 나날을 보내던 끝에, 사흘째 되던 날 저녁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시영 언니? 왜, 왜 그래요?”인상 속에서 늘 흐트러짐 없던 민시영은 양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지어 하윤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술 냄새를 풍기기까지 했다.“많이 놀랐죠?”하윤은 시영을 부축해 앉히더니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 술은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눈에 취기가 가득한 시영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오히려 일이라면 좋은 일이
민시영은 잔에 든 술을 마시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모든 게 지루해서요…….”짤막한 말과 함께 시영의 기억은 오후로 되돌아 갔다.송민우의 프러포즈는 웅장하고 낭만적이었다.송민우의 반지를 받아 주며 환호 속에서 그와 포옹도 했다.심지어 저녁에는 송민우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기까지 했다.그러던 그때, 시영의 사촌이 술에 취해서 농담을 건넸다“캬, 역시 민우 씨는 배포가 남다르네요.”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이 말 한마디는 바다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하지만 시영만은 그 말을 정확히 들어 버렸다. 명성을 신경 쓰는 사람인지 물으면, 시영의 답은 당연히 ‘노’다.명성은 시영에게 있어서 프로젝트가 채택되기보다 의미 없었다.솔직히 사촌의 도발에 얼어붙은 분위기는 대충 말 몇 마디면 이내 반전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방금 결혼을 약속했기에 굳이 제가 나서서 분위기를 풀 필요가 없었다.때문에 시영은 그저 송민우를 빤히 바라봤다.송민우 역시 시영을 바라보며 여전히 온화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술 취해서 꺼낸 말이니 신경 쓰지 마요.”……기쁜 장면이 눈 앞에서 막을 내리자, 시영은 얼른 슬픈 얼굴을 한 하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솔직히 저와 송민우가 결혼에 골인한다면 분명 순수한 의도는 아닐 거예요. 그런데…….”송민우는 오늘 벌어진 상황을 그저 묵인했다.어쩌면 송민우는 마음 속으로 시영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약속한 것만으로도 이미 시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다. 시영도 제 주제를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니까.하지만 이제 막 결혼을 약속했으면서 자기 약혼자를 모욕하는 말을 그저 묵인하는 건 안 되지.시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같은 여자로서 하윤은 시영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럼,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예요?”시영은 잔에 가득 든 술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해야죠. 저랑 송민우는 처음부터 파
민도준은 몸을 숙인 채 권하윤의 목에서 나는 향을 들이켰다. 하윤 특유의 체향이 술향기에 섞여 조금은 특별한 단내가 나는 듯했다.마치 술에 담근 과일사탕처럼 저도 모르게 취해 버리는 그런 향이었다.그리고 그 순간 하윤을 데리고 목욕하러 가려던 생각은, 갑자기 드는 생각에 의해 대체되었다.‘밤새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생고생을 했는데, 대가를 받아내지 않으면 좀 억울하겠는데?’심하게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하윤을 도준은 얼른 욕조에 눕혔다.얼음처럼 차가운 욕조 벽에 살이 닿은 탓에 하윤은 당황한 듯 손을 허우적대며 이것저것 만졌다. 그러던 와중 하필이면 수도꼭지를 잘못 다쳐 미처 온도를 조절하지도 못한 물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온도에 하윤은 낮은 비명과 함께 몽롱한 눈을 떴다.그 순간, 욕조 벽을 짚고 있는 남자의 울끈불끈한 팔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그 팔을 따라 올라가 보니 이내 하윤을 이렇게 만든 원흉의 얼굴이 보였다.하윤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도준이 왜 여기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물에 젖은 자기 잠옷을 본 순간 갑자기 변해버린 남자의 눈빛은 눈치채지도 못했다.오히려 취기 어린 눈으로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꿈이 왜 이렇게 리얼하지?”방금까지만 해도 시영과 술을 마셨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곳에 나타나지 말하야 할 남자가 나타났다는 건, 꿈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됐다.“쏴!”그때, 욕조에 흘러 드는 따뜻한 물이 하윤의 추위를 이내 쫓아냈다.흠뻑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고 긴 머리가 그대로 드리워 끝부분이 젖어 들었다.도준은 하윤이 사레가 들릴까 봐 일부러 물을 많이 담지는 않았다. 고작 반쯤 채워진 물 속에서 하윤은 흐리멍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누드 톤 슬립 원피스는 물에 흠뻑 젖어 하윤의 몸매 라인을 그대로 드러냈다.온풍기를 켠 욕실이 금세 더워졌다.심지어 등쪽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난로가 꼭 붙어 있어 더 더워났다.하윤은 뜨거운 열기를 쫓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