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영은 잔에 든 술을 마시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모든 게 지루해서요…….”짤막한 말과 함께 시영의 기억은 오후로 되돌아 갔다.송민우의 프러포즈는 웅장하고 낭만적이었다.송민우의 반지를 받아 주며 환호 속에서 그와 포옹도 했다.심지어 저녁에는 송민우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기까지 했다.그러던 그때, 시영의 사촌이 술에 취해서 농담을 건넸다“캬, 역시 민우 씨는 배포가 남다르네요.”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이 말 한마디는 바다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하지만 시영만은 그 말을 정확히 들어 버렸다. 명성을 신경 쓰는 사람인지 물으면, 시영의 답은 당연히 ‘노’다.명성은 시영에게 있어서 프로젝트가 채택되기보다 의미 없었다.솔직히 사촌의 도발에 얼어붙은 분위기는 대충 말 몇 마디면 이내 반전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방금 결혼을 약속했기에 굳이 제가 나서서 분위기를 풀 필요가 없었다.때문에 시영은 그저 송민우를 빤히 바라봤다.송민우 역시 시영을 바라보며 여전히 온화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술 취해서 꺼낸 말이니 신경 쓰지 마요.”……기쁜 장면이 눈 앞에서 막을 내리자, 시영은 얼른 슬픈 얼굴을 한 하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솔직히 저와 송민우가 결혼에 골인한다면 분명 순수한 의도는 아닐 거예요. 그런데…….”송민우는 오늘 벌어진 상황을 그저 묵인했다.어쩌면 송민우는 마음 속으로 시영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약속한 것만으로도 이미 시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다. 시영도 제 주제를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니까.하지만 이제 막 결혼을 약속했으면서 자기 약혼자를 모욕하는 말을 그저 묵인하는 건 안 되지.시영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같은 여자로서 하윤은 시영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럼,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거예요?”시영은 잔에 가득 든 술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해야죠. 저랑 송민우는 처음부터 파
민도준은 몸을 숙인 채 권하윤의 목에서 나는 향을 들이켰다. 하윤 특유의 체향이 술향기에 섞여 조금은 특별한 단내가 나는 듯했다.마치 술에 담근 과일사탕처럼 저도 모르게 취해 버리는 그런 향이었다.그리고 그 순간 하윤을 데리고 목욕하러 가려던 생각은, 갑자기 드는 생각에 의해 대체되었다.‘밤새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생고생을 했는데, 대가를 받아내지 않으면 좀 억울하겠는데?’심하게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하윤을 도준은 얼른 욕조에 눕혔다.얼음처럼 차가운 욕조 벽에 살이 닿은 탓에 하윤은 당황한 듯 손을 허우적대며 이것저것 만졌다. 그러던 와중 하필이면 수도꼭지를 잘못 다쳐 미처 온도를 조절하지도 못한 물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온도에 하윤은 낮은 비명과 함께 몽롱한 눈을 떴다.그 순간, 욕조 벽을 짚고 있는 남자의 울끈불끈한 팔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그 팔을 따라 올라가 보니 이내 하윤을 이렇게 만든 원흉의 얼굴이 보였다.하윤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도준이 왜 여기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물에 젖은 자기 잠옷을 본 순간 갑자기 변해버린 남자의 눈빛은 눈치채지도 못했다.오히려 취기 어린 눈으로 어눌하게 중얼거렸다. “꿈이 왜 이렇게 리얼하지?”방금까지만 해도 시영과 술을 마셨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곳에 나타나지 말하야 할 남자가 나타났다는 건, 꿈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됐다.“쏴!”그때, 욕조에 흘러 드는 따뜻한 물이 하윤의 추위를 이내 쫓아냈다.흠뻑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었고 긴 머리가 그대로 드리워 끝부분이 젖어 들었다.도준은 하윤이 사레가 들릴까 봐 일부러 물을 많이 담지는 않았다. 고작 반쯤 채워진 물 속에서 하윤은 흐리멍덩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누드 톤 슬립 원피스는 물에 흠뻑 젖어 하윤의 몸매 라인을 그대로 드러냈다.온풍기를 켠 욕실이 금세 더워졌다.심지어 등쪽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난로가 꼭 붙어 있어 더 더워났다.하윤은 뜨거운 열기를 쫓아내
다음날.숙취로 인해 무거운 머리를 겨우 쳐드는 순간, 누군가 하윤의 볼을 만졌다.“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어나.”‘이 목소리는…….’그제야 어젯밤의 기억이 되살아난 하윤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도준을 보자 순간 멍해졌다.“도, 도준 씨가 왜 여기 있어요?”도준은 손등으로 하윤의 볼을 만졌다.“내가 아니면 어젯밤 술 주정은 누가 받아줬겠어?”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어제의 기억을 한참 동안 더듬었다. 그제야 갑자기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오늘 실험 훈련 있는 날 아니에요? 도준 씨가 여기 오면 해원 쪽은 어떡해요?”도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계를 힐끗 쳐다보더니 여유롭게 대답했다.“아직 4시간 남았어. 정리하고 나와, 같이 가자.”“저도 같이요?”멍하니 있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얼른 이불을 걷으며 재촉했다.“더 꾸물대면 정말 늦어. 얼른 준비해.”비몽사몽 세수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다.‘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어? 도준 씨가 정말 돌아왔던 거야?’하윤은 입에 칫솔을 물고 얼버무리며 말했다.“제가 같이 가도 돼요?”도준은 화장실 문에 기대어 입가에 거품을 문 하윤을 보며 싱긋 웃었다.“내가 걱정되는 거 아니었어? 그래서 보여주려는 거야.”확실히 지난번의 일 때문에 실험 훈련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 나는 건 맞았다. 이런 불안함은 도준이 아무리 약속하고 장담해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런데 도준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게다가 전용기를 타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다.차에서 내린 하윤은 곧바로 전용기가 세워진 쪽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도준이 갑자기 하윤의 팔을 붙잡았다.시간이 너무 촉박한 탓에 하윤은 안달이 났다.“왜 그래요?”도준은 하윤더러 얼른 하늘을 보라는 듯 고개를 젖혔다.“눈 와.”눈꽃이 한 송이 한 송이 하윤의 얼굴에 떨어졌다.이건 경성에서 맞이하는 첫눈이다. 아직 섣달이 채 되지 않은 터라 살
권하윤은 깜짝 놀라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봤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민도준의 손이 하윤의 얼굴을 돌렸다.“움직이지 마, 주물러줄게.”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윤은 더 이상 버둥대지 않고 도준의 품에 파고들며 머리를 기댔다.작고 가냘픈 몸으로 도준의 커다란 몸에 기대니 그대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그때, 도준의 손바닥을 하윤의 관자놀이에 대고 느긋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저보다 두 배는 더 큰 손아귀의 힘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아팠지만 한참 문지르자 점점 편안해져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까지 나왔다.“편안해?”“그냥 그래요.”하윤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하지만 하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준의 다른 한쪽 손이 아래로 쓱 내려갔다. 이에 놀란 하윤은 눈을 번쩍 떴지만 크게 소리내지는 못한 채 아우성쳤다.“뭐 하는 거예요!”“다른 손이 놀고 있을 순 없잖아. 혈액 순환이라도 도와주려고 그러지.”“헛소리! 이렇게 혈액순을 돕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이거 민간요법이야, 걱정하지 마. 무슨 병이든 싹 다 낳게 해줄 테니까.”장난 섞인 도준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다른 꿍꿍이가 다분했다.하윤은 화가 난 나머지 발꿈치로 도준을 걷어찼다. 하지만 도준은 하윤의 그런 반항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제 멋대로 행동했다.그렇게 한참 뒤, 하윤이 나른해지고 나서야 도준도 손을 거두었다.가뜩이나 숙취가 있었는데 일찍 일어난 것도 모자라 한바탕 괴롭힘까지 당하자 하윤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도준은 그런 하윤을 제 자리에 눕히지 않고 그대로 꼭 안았다.착륙하면서 덜컹거리는 비행기 때문에 마지못해 눈을 떴을 때, 의자는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뒤로 젖혀져 있었고 곁에 있는 도준은 잠을 보충하고 있었다.‘그러고 보니 어제 밤새 운전한 것도 모자라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고, 이따가 또 실험 훈련까지 해야 하네.’충분히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도준을 깨우는 대신 턱을 괸 채 도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하윤의 시선은 호흡을
민도준이 떠난 뒤에도 권하윤은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멀리에서 헬기 특유의 소리가 들렸고, 도준의 말대로 하윤은 첫번째로 내달리는 비행기를 보게 되었다.도준이 바로 그 안에 있다는 걸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두꺼운 금속 덩이에서마저 생명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공중에서 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니 하윤은 더 이상 그 비행기를 찾을 수 없었다.“펑.”폭발 소리가 들려왔다.비록 몇 백 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연속된 폭발 소리에 하윤은 귀가 저릿해났다.애타는 시선으로 좇아가 보니 선두에 선 비행기에서 연기가 하늘을 찌르며 폭발했다. 그 모습은 마치 새벽의 구름을 뚫고 나오는 태양 같았다.저도 모르게 그 안에 도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솔직히 하윤은 이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수 없었다. 비행기의 갯수를 세어 사람의 안부를 판단하는 게 최선이었다.시간이 1분 1초가 지났지만,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자 하윤의 심장은 점점 요란하게 쿵쾅거렸다.그때 옆에 있던 민혁이 안절부절 못하는 하윤을 얼른 위로했다.“끝나면 아마 영도의 연설이 이어질 것 같은데 잠깐 차 안에서 기다릴래요?”하윤도 이런 중요한 실험 훈련이 단기간에 끝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신호를 막아 둔 탓에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어 하윤은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소리가 들렸다.하윤은 뭔가 느끼기라도 한 듯 얼른 내렸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딛지 딛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그때 헬리콥터에서 내린 도준이 안전모를 뒤로 던지더니 마중 나온 하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은 채 빙빙 돌았다.“성공했어, 자기야.”하윤은 도준의 여러 가지 모습을 봤었다. 포악한 모습,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피비린내 나는 모습, 그리고 미친 듯한 모습까지…….하지만 유독 이렇게 의기양양하고 멋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눈이 부셔서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민도준은 권하윤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옆구리 살을 살살 긁으며 농담조로 말했다.“우리 같이 도망칠까?”하윤은 도준의 어깨를 툭 내리쳤다.“저리 가요.”‘도망은 무슨, 결혼도 했는데 뭔 놈의 도망이래.’“우린 이제 경성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급할 거 뭐 있어?” 도준은 마치 무슨 장난감을 주무르듯 하윤의 어깨선을 따라 주물럭거리며 의미 심장한 말을 내뱉었다.“일단 어디 가서 좀 쉬자.”……두 번째로 방을 잡은 상황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경성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집이 있는데 돌아가지 않고 방 잡는 건 또 무슨 취미래?’그때, 도준이 딱딱한 카드키로 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해원이 자기 고향이잖아. 고향에 손님이 왔으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그러면 뭐, 여기에서 유명한 음식이라도 대접할까요?”고개를 홱 돌리며 말하는 순간, 도준이 단단한 팔로 하윤의 허리를 감쌌다.“아니야, 난 네가 더 좋아.” “아!”도준은 그대로 하윤을 들러 멘 채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닫힌 욕실 문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막아 버렸다.……두툼한 철문이 열렸다.“11072784번 수감자, 면회요.”유리로 분리된 공간 안, 특수 제작된 의자에 앉은 케빈 앞에는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무전기가 놓여 있었다.면회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케빈의 시선은 이미 유리 바깥쪽에 있는 여자를 휘감았다.시영의 시선도 오롯이 케빈을 향해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시영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따끔거렸다.시영은 무전기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잡아.” 비록 들리지 않았지만 케빈은 그래도 바로 시영의 명령에 복종했다.수화기를 들고 경건한 듯 귓가에 갖다 대더니 마른 침을 몇 번 삼키고 나서야 입을 뗐다.“아가씨.”하지만 돌아오는 건 시영의 역겨운 듯한 눈초리였다.“무슨 자격으로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 버려진 개 따위한테 그렇게 불리니 역겨워.”케빈은 아무 말
“게다가 너 이제 곧 살인범이 될 거잖아.”민시영의 말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케빈은 짧게 깎은 머리를 들며 시영을 바라보았다.“그건…….”몸을 살짝 앞으로 기운 시영의 눈에는 비아냥이 가득 섞여 있었다.“일부러 민재혁과 같은 감방을 고집한 게 그 원인 아니야? 내가 뭐 이제 갓 사랑에 눈을 뜬 어린애로 보여? 영웅을 좋아하게? 꿈 깨.”“주인의 말도 안 듣는 개 따위는 그저 날 짜증나게 할 뿐이야. 네가 나한테 진 빚은 사람 하나 죽이고 감옥살이한다고 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고작 그렇게 벗어나려고 해? 너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속죄해야 해!”케빈은 시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젯밤 숙취도 모자라 오늘 이 곳까지 오느라 고생해서인지 눈은 이미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솔직히 시영이 이토록 다급하게 이곳까지 온 것은 케빈이 살인을 저지를까 봐 겁나서다. 그러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으니까.시영은 케빈이 살아 있기를 원한다.심호흡을 한 케빈이 끝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알겠습니다.”“탁!”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영은 수화기를 탁 내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문 앞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문을 연 순간, 시영은 다시 민씨 집안 아가씨로 돌아왔다.이윽고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변호사를 바라보았다.“사건 다 파악했나요?”“네. 케빈 씨 사건에 허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추형탁과 민재혁의 범죄에 가담한 증거도 적고요. 기껏해야 방조죄인 데다, 죄를 자백하여 단서를 제공한 점을 감안해서 원래라면 경범죄로 처벌해야 합니다.”“그런데 케빈 씨가 변호사한테 협조하지 않고 재판에서 모든 죄를 인정하여 결국 중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만약 케빈 씨만 협조하면 제가 다시 재심 청구할 수 있습니다.”시영은 손을 닦던 물 티슈를 버리며 입을 열었다.“감형하면 얼마 정도죠?”“많아서 3년이요.”‘3년…….’“혹시 더 감형은 안 되나요?”변호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만약 케빈 씨가 한 일이 모두 스파이로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
점심 시간, 권하윤은 통화 목록을 넘겼다.“시영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저녁에 같이 식사하는 건 어때요?”민도준은 반찬을 짚어 하윤의 그릇에 올려 놓았다.“밥 먹을 때는 핸드폰 내려놔. 밥 다 먹고 얘기해.”“네.”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두 사람이 먹고 있는 건 다름아닌 하윤이 전에 말했던 해원의 특색 음식이다. 그리고 이 곳은 예전에 어머니의 음식이 지겨워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함께 외식했던 곳이다.사장은 음식을 내오면서 하윤을 알아보았는지 허허 웃으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 오빠랑 동생은 같이 안 왔네?”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사장은 밖에서 떠들어 대는 음악가 집안, 재벌 간의 경쟁 같은 건 모르는 듯했다. 그저 친근한 고향 사투리로 안부를 전할 뿐.하윤은 그 말에 눈을 내리깔며 애써 씁쓸함을 숨기려 했다.“일이 있어서 안 왔어요.”“그렇구나. 동생이 우리집 구운 만두를 그렇게 좋아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매번 올때마다 2인분씩 시켰잖아.”허허 웃으며 음식을 내려놓던 사장은 그제야 하윤의 맞은편에 남자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 총각은 혹시 남자친구?”자기가 자란 고향이라 그런지 하윤은 왠지 쑥스러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도준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한마디 보충했다.“혼인 신고까지 한 남자친구요.”사장은 활짝 웃었다.“오빠랑 우리 가게에 올 때만 해도 꼬맹이였는데, 벌써 결혼했다니. 시간 참 빠르네.”이윽고 반가운 마음에 농담을 던졌다.“오빠가 동생 참 아끼는 것 같던데, 동생 결혼하다고 엄청 울었겠네.”‘오빠…….’하윤의 눈에는 씁쓸함이 더해졌다. 승우는 하윤이 결혼한 것도, 혼인신고 한 것도 직접 본 적이 없다. 하윤도 가족을 본 지가 까마득하고…….사장이 떠난 뒤, 식욕이 떨어진 하윤은 만두를 젓가락을 쿡쿡 찌르며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그때 도준이 눈꺼풀을 쳐들며 하윤을 살폈다.“말해. 또 뭐?”“전에……, 저한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