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이 떠난 뒤에도 권하윤은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멀리에서 헬기 특유의 소리가 들렸고, 도준의 말대로 하윤은 첫번째로 내달리는 비행기를 보게 되었다.도준이 바로 그 안에 있다는 걸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두꺼운 금속 덩이에서마저 생명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공중에서 소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니 하윤은 더 이상 그 비행기를 찾을 수 없었다.“펑.”폭발 소리가 들려왔다.비록 몇 백 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연속된 폭발 소리에 하윤은 귀가 저릿해났다.애타는 시선으로 좇아가 보니 선두에 선 비행기에서 연기가 하늘을 찌르며 폭발했다. 그 모습은 마치 새벽의 구름을 뚫고 나오는 태양 같았다.저도 모르게 그 안에 도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솔직히 하윤은 이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수 없었다. 비행기의 갯수를 세어 사람의 안부를 판단하는 게 최선이었다.시간이 1분 1초가 지났지만,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자 하윤의 심장은 점점 요란하게 쿵쾅거렸다.그때 옆에 있던 민혁이 안절부절 못하는 하윤을 얼른 위로했다.“끝나면 아마 영도의 연설이 이어질 것 같은데 잠깐 차 안에서 기다릴래요?”하윤도 이런 중요한 실험 훈련이 단기간에 끝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신호를 막아 둔 탓에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어 하윤은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소리가 들렸다.하윤은 뭔가 느끼기라도 한 듯 얼른 내렸다. 하지만 바닥에 발을 딛지 딛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그때 헬리콥터에서 내린 도준이 안전모를 뒤로 던지더니 마중 나온 하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은 채 빙빙 돌았다.“성공했어, 자기야.”하윤은 도준의 여러 가지 모습을 봤었다. 포악한 모습,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피비린내 나는 모습, 그리고 미친 듯한 모습까지…….하지만 유독 이렇게 의기양양하고 멋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눈이 부셔서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민도준은 권하윤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옆구리 살을 살살 긁으며 농담조로 말했다.“우리 같이 도망칠까?”하윤은 도준의 어깨를 툭 내리쳤다.“저리 가요.”‘도망은 무슨, 결혼도 했는데 뭔 놈의 도망이래.’“우린 이제 경성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급할 거 뭐 있어?” 도준은 마치 무슨 장난감을 주무르듯 하윤의 어깨선을 따라 주물럭거리며 의미 심장한 말을 내뱉었다.“일단 어디 가서 좀 쉬자.”……두 번째로 방을 잡은 상황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 하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경성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집이 있는데 돌아가지 않고 방 잡는 건 또 무슨 취미래?’그때, 도준이 딱딱한 카드키로 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해원이 자기 고향이잖아. 고향에 손님이 왔으면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그러면 뭐, 여기에서 유명한 음식이라도 대접할까요?”고개를 홱 돌리며 말하는 순간, 도준이 단단한 팔로 하윤의 허리를 감쌌다.“아니야, 난 네가 더 좋아.” “아!”도준은 그대로 하윤을 들러 멘 채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닫힌 욕실 문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막아 버렸다.……두툼한 철문이 열렸다.“11072784번 수감자, 면회요.”유리로 분리된 공간 안, 특수 제작된 의자에 앉은 케빈 앞에는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무전기가 놓여 있었다.면회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케빈의 시선은 이미 유리 바깥쪽에 있는 여자를 휘감았다.시영의 시선도 오롯이 케빈을 향해 있었다. 죄수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시영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따끔거렸다.시영은 무전기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잡아.” 비록 들리지 않았지만 케빈은 그래도 바로 시영의 명령에 복종했다.수화기를 들고 경건한 듯 귓가에 갖다 대더니 마른 침을 몇 번 삼키고 나서야 입을 뗐다.“아가씨.”하지만 돌아오는 건 시영의 역겨운 듯한 눈초리였다.“무슨 자격으로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 버려진 개 따위한테 그렇게 불리니 역겨워.”케빈은 아무 말
“게다가 너 이제 곧 살인범이 될 거잖아.”민시영의 말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진 케빈은 짧게 깎은 머리를 들며 시영을 바라보았다.“그건…….”몸을 살짝 앞으로 기운 시영의 눈에는 비아냥이 가득 섞여 있었다.“일부러 민재혁과 같은 감방을 고집한 게 그 원인 아니야? 내가 뭐 이제 갓 사랑에 눈을 뜬 어린애로 보여? 영웅을 좋아하게? 꿈 깨.”“주인의 말도 안 듣는 개 따위는 그저 날 짜증나게 할 뿐이야. 네가 나한테 진 빚은 사람 하나 죽이고 감옥살이한다고 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고작 그렇게 벗어나려고 해? 너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속죄해야 해!”케빈은 시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젯밤 숙취도 모자라 오늘 이 곳까지 오느라 고생해서인지 눈은 이미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솔직히 시영이 이토록 다급하게 이곳까지 온 것은 케빈이 살인을 저지를까 봐 겁나서다. 그러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으니까.시영은 케빈이 살아 있기를 원한다.심호흡을 한 케빈이 끝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알겠습니다.”“탁!”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영은 수화기를 탁 내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문 앞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문을 연 순간, 시영은 다시 민씨 집안 아가씨로 돌아왔다.이윽고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변호사를 바라보았다.“사건 다 파악했나요?”“네. 케빈 씨 사건에 허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추형탁과 민재혁의 범죄에 가담한 증거도 적고요. 기껏해야 방조죄인 데다, 죄를 자백하여 단서를 제공한 점을 감안해서 원래라면 경범죄로 처벌해야 합니다.”“그런데 케빈 씨가 변호사한테 협조하지 않고 재판에서 모든 죄를 인정하여 결국 중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만약 케빈 씨만 협조하면 제가 다시 재심 청구할 수 있습니다.”시영은 손을 닦던 물 티슈를 버리며 입을 열었다.“감형하면 얼마 정도죠?”“많아서 3년이요.”‘3년…….’“혹시 더 감형은 안 되나요?”변호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만약 케빈 씨가 한 일이 모두 스파이로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
점심 시간, 권하윤은 통화 목록을 넘겼다.“시영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저녁에 같이 식사하는 건 어때요?”민도준은 반찬을 짚어 하윤의 그릇에 올려 놓았다.“밥 먹을 때는 핸드폰 내려놔. 밥 다 먹고 얘기해.”“네.”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두 사람이 먹고 있는 건 다름아닌 하윤이 전에 말했던 해원의 특색 음식이다. 그리고 이 곳은 예전에 어머니의 음식이 지겨워 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함께 외식했던 곳이다.사장은 음식을 내오면서 하윤을 알아보았는지 허허 웃으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 오빠랑 동생은 같이 안 왔네?”나이가 좀 들어서인지 사장은 밖에서 떠들어 대는 음악가 집안, 재벌 간의 경쟁 같은 건 모르는 듯했다. 그저 친근한 고향 사투리로 안부를 전할 뿐.하윤은 그 말에 눈을 내리깔며 애써 씁쓸함을 숨기려 했다.“일이 있어서 안 왔어요.”“그렇구나. 동생이 우리집 구운 만두를 그렇게 좋아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매번 올때마다 2인분씩 시켰잖아.”허허 웃으며 음식을 내려놓던 사장은 그제야 하윤의 맞은편에 남자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 총각은 혹시 남자친구?”자기가 자란 고향이라 그런지 하윤은 왠지 쑥스러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러다 맞은편에 앉은 도준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한마디 보충했다.“혼인 신고까지 한 남자친구요.”사장은 활짝 웃었다.“오빠랑 우리 가게에 올 때만 해도 꼬맹이였는데, 벌써 결혼했다니. 시간 참 빠르네.”이윽고 반가운 마음에 농담을 던졌다.“오빠가 동생 참 아끼는 것 같던데, 동생 결혼하다고 엄청 울었겠네.”‘오빠…….’하윤의 눈에는 씁쓸함이 더해졌다. 승우는 하윤이 결혼한 것도, 혼인신고 한 것도 직접 본 적이 없다. 하윤도 가족을 본 지가 까마득하고…….사장이 떠난 뒤, 식욕이 떨어진 하윤은 만두를 젓가락을 쿡쿡 찌르며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그때 도준이 눈꺼풀을 쳐들며 하윤을 살폈다.“말해. 또 뭐?”“전에……, 저한
해원은 겨울인데도 여전히 화창했다.따스한 햇볕 아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떠드는 학생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가뜩이나 눈에 띄는 민도준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길을 잡는 건 당연했다.그리고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분명 화를 내고 있지만 그 토라진 모습이 오히려 여자에게 더 생기를 입혀주었다.그 모습을 보던 일부 학생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도준과 하윤의 방향을 가리켰다.한 순간에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자 하윤은 더 이상 이 곳에 있기도 뭐해 곧바로 도준을 끌고 골목을 빠져나갔다.아까는 고개를 숙이고 걷느라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이 거리의 적지 않은 가게 주인이 바뀌었고 젊은 층들이 즐기는 핫플레이스로 된 듯했다.때마침 알록달록한 건물을 지날 때, 여자애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예전이라면 하윤도 사람들 중 한 명이었을 거다. 예쁜 각도를 찾아 사진을 찍고 오빠가 잘 찍지 못했다고 화를 내면서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근심걱정 없이 살던 때도 아니고, 사진을 몇 번 찍든 인내심 있게 곁에 있어주던 오빠도 없다.도준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을 때, 도준이 갑자기 하윤의 어깨를 잡으며 자기 쪽으로 돌렸다.“저기 서 봐. 사진 찍어 줄게.”손에 핸드폰을 들고 여자친구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남학생과 도준을 번갈아 본 하윤은 아무리 봐도 느껴지는 위화감에 이내 거절했다. “됐어요.”하지만 하윤이 움직이는 순간 도준이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거기서 움직이지 마.”뒤로 두 걸은 정도 물러 선 도준은 손에 분명 핸드폰을 들고 있었지만 왠지 큰 칼을 들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났다.게다가 옆에 모두 젊은 남자들이 있으니 왠지 사자가 양무리에 숨어든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하윤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도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모습을 사진에 남겼다.도준이 사진을 다 찍자 궁금했던 하윤은 얼른 손을 내밀었다.“어디 봐 봐요.”도준은 손을 높게 들며 핸드폰을 가지려는 하윤의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를 뒤쫓으려 했지만 앞에 끼어드는 웨이터 때문에 하윤의 시선은 막혀 버렸다.그리고 불과 몇 초 만에 그 그림자는 하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하윤은 곧장 그림자를 뒤쫓아 가 복도 반대편에 멈춰 섰다. 하지만 앞에 있는 수많은 방들 중 그 그림자가 사라진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아까 그 사람 공은채 맞나? 아니면 내가 잘못 봤나?’질주하고 난 뒤라 그런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하윤의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휙 스쳐 지나간 그림자는 하윤의 눈앞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졌다.웨이터가 시선을 막기 전 그 여자는 분명…….하윤 쪽을 바라봤다…….때마침 웨이터 하나가 한 룸안에서 빈 그릇을 들고 나오자 하윤은 얼른 앞에 막아서며 물었다.“저기 혹시 이 그릇을 가지러 간 방에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나요?”웨이터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죄송합니다만 주의해 보지 않았습니다.”그 뒤로 나오는 두 웨이터에게도 잇따라 물었지만 하윤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제서야 하윤은 이런 5성급 레스토랑에서 손님 정보를 쉽게 알려줄 리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어떡하지?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데?’게다가 공은채가 그 길로 레스토랑을 나갔는지 아니면 룸 안으로 들어갔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민도준]하윤은 복도를 흘깃 스쳐보고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화장실 한번 가는 것도 길 잃었어?”“배탈 났어요.”“아, 그래?”한참 동안 사람을 찾고 있던 하윤은 끝 음을 길게 늘어뜨리는 도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갑자기 긴 그림자가 하윤을 뒤덮었다.“어디 봐 봐, 대체 어떻게 배탈 났는지?”뻣뻣하게 굳은 채 돌아서 보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준이 핸드폰을 흔들며 하윤을 내려봤다.“여기가 화장실이야?”하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자 도준이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머
손을 들어 웨이터 한 명을 잡아 세운 민도준은 고개를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여기 있는 룸들 제가 다 계산할 테니, 문 좀 열어 주겠어요?”도준의 말에 웨이터는 첫 번째 룸을 열었다.안에는 연로한 부부가 있었는데 도준이 계산한다는 말에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두 번째 룸안에는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웨이터의 설명에 도준이 저들한테 관심을 보인다고 오해하는 해프닝까지 생겨 버렸다.곧이어 본 룸들 역시 모두 일반 손님들뿐이었다.그렇게 어느새 맨 마지막 룸에 도착했다.만약 이 곳마저 없으면 공은채는 정말 이곳에 없는 거다.웨이터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 번 노크했다.“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들어오세요.”낮게 깔린 음성이 안에서 들려왔다.왠지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사람을 찾는데 급급했던 하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때 문이 열렸고, 룸 안에 앉아 있던 두 남녀의 얼굴을 본 순간 하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오랜만이네요.”공태준은 웃는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하윤을 바라봤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태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고은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고은지가 입고 있는 옷이 마침 흰색 원피스였으니까.‘그럼 방금 내가 본 사람이 은지 씨였다고?’도준은 두 사람을 보자 눈을 가늘게 접더니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 저희가 방해한 건 아니죠?”태준의 시선은 하윤을 끈질기게 좇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죠?”“제 아내의 지인이 사라져서 찾아 주느라고요.”도준은 하윤을 제 품에 끌어 들였다.도준의 호칭 변화에 태준의 눈빛은 미세하게 변했고 나지막한 목소리에 살짝 힘이 실렸다.“아직 축하하지 못했네요…….”“지금 축하해도 늦지 않았어요.”도준은 상냥하게 웃었다.“공 가주님 글솜씨야 워낙 좋으니 덕담은 제가 안 그라쳐도 되죠?”살짝 올라간 목소리에 룸 안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그때 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공은채였다.공은채는 고은지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채 걸어오더니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고마워, 오빠.”“너 이러는 거 너무 위험해.”저를 빤히 바라보는 공태준의 시선에도 공은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치맛자락을 정리했다.“그 덕분에 오빠도 꿈에 그리던 사람 봤잖아요.”“네가 이러는 게 별 소용이 없다는 뜻이야.”미세하게 흔들리는 태준의 눈빛에 공은채가 피식 웃었다.“그건 오빠가 여자를 몰라서 그래요. 여자는 예민하고 의심 많은 동물이에요. 제 연적이자 원수가 나타난 걸 보고도 도준 씨와 다투지 않을 것 같아요?”“윤이 씨가 본 건 고은지잖아, 네가 아니라.”공은채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지.”……“시영 언니는 벌써 갔어요?”텅 빈 룸을 보자 하윤이 고개를 돌려 도준을 바라봤다.“응. 경성에 돌아가야 하거든.”“아, 그럼 우리도 이만 가요.”방금 전 일을 겪어서인지 바깥의 아름다운 경치에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하윤은 우울하기만 했다.하지만 갓 두 걸음 정도 떼었을 때, 긴 손가락이 하윤의 이마를 꾹 밀었다.“왜? 사람을 못 찾은 것도 나한테 화내는 거야?”공은채의 존재는 마치 머리 위에 매달린 칼과 같다. 때문에 하윤의 몸과 마음은 공은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싶은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러면서도 공은채가 차라리 제 앞에 나타나기를 바랐다. 더 이상 공은채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는 싫으니까.오늘 그 모든 걸 결판 낼 수 있나 했더니 하필이면 모두 오해였다니 하윤은 김이 빠졌다.기뻐할 힘도 화낼 힘도 없어 그저 고개를 저었다.“제가 잘못 봤어요. 죄송해요.”하윤은 굴복한 듯했지만 이렇게 기운 없는 모습은 오히려 아까처럼 발톱을 드러내고 화를 낼 때 보다 더 거슬렸다.도준은 발꿈치로 문을 닫아버렸다.그 모습에 하윤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안 가요?”하지만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어깨가 잡힌 채로 도준의 다리 위에 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