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필이면 한차례 공연 당시, 석지환은 사고로 음악 인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한쪽 팔도 잃게 되었다.이성호는 그때 그 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걱정에 시달렸었다. 결국 퇴원한 석지환이 오히려 이성호를 달래러 찾아온 적이 있다.게다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후배들 앞에서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됐어, 다들 그만 울어. 나 가업 이으러 돌아가는 거야’라고 말하던 석지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교실에 흘러 든 빛이 석지환에게 드리워 긴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석지환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어디에 떨어져 있든, 우리의 미래는 창창할 거야.’……기억이 뚝 끊긴 순간, 하윤은 일기장을 다시 들여다보며 황당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설마 그때 석지환 선배의 사고가…….’곧이어 본 일기장의 내용은 하윤의 그런 생각을 증명했다.극한의 분노를 쏟아낸 뒤, 주림의 일기에는 회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내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니.’‘내가 정말 마쳤나?’‘그 여자애는 분명 석지환이 경상만 입을 거랬는데, 왜 이렇게 됐지?’하윤은 볼수록 충격적인 내용에 얼른 인터넷으로 그때 아버지의 콘서트를 검색해 봤다.그랬더니 역시나, 석지환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연주할 기회는 결국 주림이 차지했다.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이 가빠왔다. 늘 동경해오던 사람이 하윤도 모르는 사이에 더럽혀졌다는 걸 아는 건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하지만 하윤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이런 일로 슬퍼할 때가 아니야.’‘고작 평범한 학생이었던 주림 선배가 어떻게 그런 일을 벌였지?’일기에 계속 언급되었던 ‘그 여자애’가 나선 거면 모를까.‘게다가 주림의 성격에 갑자기 변한 게 아마 공은채와 사귀고 난 뒤었으니…….’하윤은 자기의 생각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그러니까 공은채는 주림 선배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조종하려는 거였어.’‘대체 목적이 뭐지?’하윤은 얼른 일기장을 뒤로
권하윤이 일기를 가방에 넣자마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다정의 울음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이에 놀란 하윤이 다급히 밖으로 나왔을 때, 한껏 높아진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이 불길한 X,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우리 아들 돌려 내!”웬 노인이 장옥분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흔들어댔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니라 장옥분의 시어머니, 임숙희였다.“다들 봐 봐요! 우리 집에서 얼마나 잘해줬는데 아들도 못 낳으면서 내 아들이 조금 손찌검했다고 글쎄 남편을 죽였어요, 이 X이! 사람을 죽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내 오늘 너와 끝장을 낼 거다!”임숙희는 울부짖으며 장옥분의 멱살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다정이 임숙희의 팔을 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우리 엄마 때리지 마세요. 엄마 때리지 말라고요!”눈 앞의 광경에 하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계속 폭력을 행사하면 경찰 부를 거예요!”임숙희는 하윤의 차림새를 보더니 하려던 욕설을 목구멍으로 삼킨 채 투덜거렸다.“그쪽은 누군데 남의 집안 일에 끼어들어? 저리 비켜.”다정은 하윤을 보자 마치 구세주를 본 것처럼 울며 달려갔다.“언니, 우리 엄마 좀 구해줘요.”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에 임숙희는 뭔가 알아챘는지 얼른 하윤에게 삿대질 해댔다.“그쪽이 우리 둘째 고발한 여자지? 내가 찾아가기도 전에 감히 제 발로 찾아오다니!”임숙희는 함께 끌고 온 친척들을 향해 얼른 소리쳤다.“우리 일용이를 해치고 손녀까지 빼앗아 도망 간 여자가 바로 이 예자예요. 당장 이 여자를 끌고 경찰소로 가서 우리 일용이를 구해냅시다!”정씨 집안 남자들이 하윤에게 달려들자 장옥분은 마음이 다급해 났다.“뭐 하는 짓들이야? 그게 하윤 동생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우리 일용이가 다정이한테 좋은 집안 찾아줬는데, 이 여자가 가서 일을 그르친 것도 모자라 사람을 인신매매범으로 몰아 감옥에 넣었다잖니.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네가 알고 지낸 사람
민도준은 이곳까지 운전으로 온 모양이다.심지어 그 사이 담배를 적잖게 피웠는지 문을 닫는 순간 차 안에서 나는 담배 연기가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한데 섞여 더 심각하게 코를 자극했다.답답한 공기에 하윤은 손을 들어 창문을 열었다. 이것으로나마 도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덜어내야 했으니.하지만 이런 겁 없는 행동에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이쪽도 열어줄까?”가슴이 점점 답답해 괴로웠지만, 방금 전 저를 도운 도준의 행동을 되새긴 하윤은 끝내 감정 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왜 왔어요?”도준은 하윤을 힐끗 살피더니 옆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마침 하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거리에서 멈췄다.“자기가 나 보러 오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직접 왔지.”“이제 봤으니 가요.”하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이제 방금 왔는데 벌써 쫓아낸다고?”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시선을 막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하윤의 귀를 따라 점점 내려갔다.그 순간, 머리카락이 막아주지 않은 탓에 남자의 숨결이 귓가에 직접 느껴졌다.“보기만 해서 될 리가 있나.”하윤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렸고 귀불까지 귀여운 홍조를 띄었다.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서 괴로움이 느껴지자 하윤은 불편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연달아 거절을 당하자 도준도 끝내 인내심이 바닥 났는지 커다란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감싸며 억지로 그녀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거친 동작에 하윤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도준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윤의 목덜미를 문질렀다.“자기야, 나 건드리지 마.”하윤은 더 이상 도준의 힘을 당해낼 수 없자, 자포자기하 듯 힘을 풀고 도준을 째려봤다.“왜요? 여기서 하려고요? 끝나면 갈 거예요?”‘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기 힘들단 말이지. 하지만 이 성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은데.’잠깐 고민하던 도준은 손가락을 하윤의 얼굴에 튕기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어쩜 그런 생각밖에 안 해
민도준은 조바심에 눈살을 팍 구겼다.“꼭 그렇게 말해야겠어?”“그럼 어떻게 말하기를 원하는데요?”하윤이 반문했다.“바보처럼 도준 씨가 공은채랑 바다 위에서 얼마나 붙어먹었는지 모른 체하라는 거예요? 아니면 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잊으라는 거예요?”“그간 제가 해원에 가겠다는 걸 극구 말렸던 건 공은채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잖아요! 제가 바보처럼 도준 씨를 향해 계속 꼬리 흔들기를 원한 거예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말을 마친 하윤이 차에서 내리려 할 때, 도준이 그녀를 다시 안으로 잡아 끌었다.“이거 놔요!”“됐어. 그만해.”도준은 몇 번 만에 하윤을 제압사고는 아예 조수석에 있던 그녀를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아직 화풀이도 안 했으면서 도망치면 자기만 손해잖아. 내가 자기를 이렇게 괴롭혔는데 적어도 뭐라도 건지는 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만하고 우리 얘기 좀 해. 응?”하윤은 도준의 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튼튼한 그의 다리 위에서 도망도 칠 수 없었고, 힘있는 팔에 꽉 안겨 움직이지도 못했다.‘그런데 얘기 좀 하자고? 저는 나를 협박하고 있으면서.’하윤은 도준과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보이지 않으면 화도 덜할 테니까.하지만 도준은 이에 불만을 표하기는커녕 하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하윤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내가 잘못했어. 이혼하자는 것 빼고 뭐든 들어줄게.”“하, 그럼 공은채 목숨을 갖고 싶은데, 그건 돼요?”공기 속에는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도준의 눈에 드리웠던 욕망은 이내 어둠으로 대체되었다.“착하지? 다른 거로 바꿔.”분명 귀를 간지럽히는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윤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다.이윽고 싸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안 되죠? 역시 공은채는 건드리지 못하겠죠?”한껏 구겨진 도준의 미간 아래 날카로운 눈빛은 하윤을 매섭게 보고 있었다.“앞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권하윤은 확신을 할 수 없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뭐라고요?”“복수 하라고.”싱긋 웃으며 내뱉은 도준의 말에 하윤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시간을 줘. 내가 공은채 심장을 다른 거로 바꾸어 줄 때까지.”말이 간단하지 거부 반응이 심한 심장 수술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무엇보다 수술 전에 이식 상대를 찾고 약도 먹으며 수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공은채가 순순히 협조할 리가 없었다.하윤의 걱정에 도준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공을 꽤 들이긴 해야지.”이윽고 하윤의 코를 살짝 잡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자기 달래는 것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도준의 태도에 하윤은 그의 진심을 알아내려고 빤히 훑었다.그러자 도준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심 쓰듯 얼굴을 하윤 앞으로 바짝 들이 밀었다.하지만 도준의 속내를 그렇게 쉽게 읽어낼 수 있다면 하윤도 그간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다.오히려 궁금증만 남긴 하윤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심장을 다시 바꾸면 공은채가 죽어도 괜찮아요?”도준은 여상스럽게 웃으며 손으로 하윤의 머리카락을 쓸었다.“자기야, 내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자기뿐이야. 그러니까 화 풀어, 응?”왠지 모르게 하윤은 가슴이 저렸다.그건 자기 때문인지 도준 때문인지 하윤도 알 수 없었다.솔직히 하윤이 도준이라도 자기 가족의 유일한 흔적을 지우겠다는 요구에 쉽게 승낙하지 못했을 거다.만약 공은채가 협조를 해서 도준 어머니의 심장을 빼낸다 할지라도, 그건 하윤이 직접 도준 어머니의 유일한 혈통을 망가뜨리는 셈이다.그렇게 되면 하윤과 도준이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는 불 보듯 뻔하다.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가족이 죽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도준은 그런 하윤의 속내를 파헤치기라도 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또 미안해하네.’동의하지 않으면 늑대 새끼처럼 당장이라도 도준의 살점을 물어 뜯을 것처럼 달려 들
조관성이 최근 맡은 프로젝트 중 흥덕 마을도 속해 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이 마침 이곳으로 시찰을 오는 날이다.그 소식을 접한 흥덕 마을 이장은 아침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조관성을 맞이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경찰서를 시찰하는 도중, 임숙희 일행이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보고 만 거다. 그 순간 마을 이장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렸다.하지만 그 무리에서 한민혁을 발견한 조관성의 낯빛도 이장 못지 않게 새파래졌다.“민 사장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이런 곳에서 지인을 만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민혁은 난감한 듯 웃었다.“도준 형은 지금 폭력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를 돌봐주고 있습니다.”그 말에 조과성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로 잠깐 불러 주시죠.”……민혁이 헐레벌떡 뛰어와 이 소식을 도준에게 전했지만 조관성이 저를 찾는 이유를 듣자마자 도준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내가 이미 떠났다고 해.”“크흠.”하지만 때마침 조관성의 불만 섞인 헛기침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조관성과 함께 온 영도들도 모두 조관성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고, 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함으로 치달았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와서 하시죠!”도준은 입안에서 혀를 굴리더니 차문에 기댄 채 피식 웃었다.“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조 국장님 아니에요?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도준의 태도에 조관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이제는 하다하다 외지에서까지 사고를 치고 다니네요.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사고라니요? 저는 그저 위기에 처한 시민을 도왔을 뿐인데.”가볍게 웃으며 말하는 도준의 목소리를 차 안에서 듣고 있던 하윤은 입술을 깨물더니 끝내 차에서 내려 설명했다.“사실 우리가 먼저 손 댄 게 아닙니다. 정씨 집안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우리를 때리려고 할 때, 도준 씨가 마침 나타나 우리를 구해준 겁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났고요.”……말뿐인 증언을 믿을 리 없는 조관성은 사람을 보내 상황을
권하윤이 가방을 챙겨 떠나려는 순간, 무거운 힘이 어깨를 짓누르더니 그녀를 차 문으로 밀쳤다. 이윽고 남자의 건장한 몸이 하윤을 바싹 내리 눌렀다.도준의 큰 키 때문에 그 밑에 깔린 하윤의 몸뚱어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아래로 하는 순간, 도준의 다리를 차는 가느다란 여자의 다리가 보일 뿐.하지만 하윤의 힘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온 힘을 다해 버둥대 봤지만 도준의 눈에는 그게 오히려 새끼 고양이가 사람을 긁은 것에 불과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윤이 화를 내면 내는 대로 도준은 다 받아들이기만 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도준은 하윤에게 더 바싹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내 말 들어. 나 이미 흥분했으니까 더 건드리지 마.”그제야 뭔가 눈치챈 하윤은 더 이상 버둥대지 않았다.도준은 웃으며 하윤의 귀에 입을 맞췄다.“그 정신병자를 신경 쓰는 거 아니었어? 나랑 여기 단둘이 남겨 두고 떠나도 괜찮겠어? 그리고, 공은채 목숨을 원한다며? 남아서 나랑 계획을 세워야지. 안 그래?”장난스러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윤의 몸부림을 점점 무력화시켰다.도준의 말이 맞았다. 하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화가 난다고 훌쩍 떠나버릴 수 없었다.하윤이 조용해진 모습을 보자 도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하윤의 머리를 토닥였다.“착하네.”……조관성과 약속을 잡은 곳은 마을의 한 생선요리 식당이었다.낮에 조관성 곁에 따라붙었던 간부들이 없는 걸 봐서 도준과 단둘이 약속한 식사 자리인 듯싶었다.도준이 하윤을 데려온 걸 보자 조관성은 의외라는 듯 도준을 힐끗거렸다.이에 도준이 턱을 까딱이며 하윤에게 조관성을 소개했다.“조 국장, 전에 본 적 있지?”두 사람의 악수가 끝나자 조관성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술 좀 마시려 했더니, 그걸 내 빼려고 사모님까지 데려온 겁니까?”도준은 하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뭐 어쩌겠습니까? 제가 집사람한테 잡혀 살거든요.”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던 하윤은 이 식사 자리가 단지 술을 마시려는
둘만 남은 순간부터 아예 하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앉은 도준은 갑작스러운 하윤의 질문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이윽고 하윤을 의자채로 끌어와 자기 다리 사이에 하윤을 가두었다. 남자의 튼튼한 다리 사이 여자는 가느다란 다리를 꼭 붙인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왜? 이제는 관심이 생겨?”하윤은 도준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바라봤다.“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요.”그 말에 도준이 피식 웃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녔다.“내 마누라한테 말 못할 게 뭐 있어?”다정한 말투가 차가운 귀속으로 흘러들어서인지 하윤은 오히려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도준은 더 이상 말장난을 하지 않고 곧바로 하윤에게 알려 주었다.“조 국장이 추형탁과 정권 다툼을 한 지 한참이 되거든. 그런데 전쟁터는 정권다툼만 있는 게 아니라 경제력 다툼도 있어. 조 국장은 그래서 내가 공씨 집안 껍데기를 쓴 채 꿍꿍이를 품은 재벌가들을 먹어 치우기를 원하는 거고.”“그러면 도준 씨가 세력을 키워 나가는 건 안심할 수 있대요?”의아한 듯 되묻는 하윤의 말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그게 걱정이 돼서 나를 내세우는 거야.”그 말을 들은 하윤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도준이 아무리 경성에서 하늘을 가린다 해도 그 세력은 고작 경성 내부에만 국한된다. 세력이 없는 해원에서는 동맹이라고 조관성 뿐이고.“설마 도준 씨를 칼로 쓰겠다는 뜻이에요?”고민을 마친 하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응.”진지하게 생각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의 눈에 미소가 번졌다.“이제 알았으면 내가 공씨 가문을 봐준다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너무 손쉽게 도준한테 속마음을 들켜 버린 하윤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도준 씨 같은 사람들은 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달라요?”그 말에 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다리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다 이래.”……흥덕 마을은 밤 생활이 없는지라 저녁 8시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