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문을 닫고 손에 있는 쪽지를 다급하게 펼쳐 보려고 돌아선 순간, 등 뒤에서 기다리던 한민혁과 그대로 맞닥뜨리고 말았다.민혁은 한참 동안 기다렸는지 하윤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며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건넸다.“도준 형 전화예요.”민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물에 빠진 듯 숨이 막혀 하윤은 손에 든 쪽지를 꽉 움켜 쥐었다.“싫어요.”짤막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돌아서는 하윤을 보며 민혁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전화 건너편에 상황 설명을 하며 하윤의 뒤를 따랐다.“도준 형, 하윤 씨가 받기 싫대.”“나도 귀 안 멀었어.”전화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그래, 나도 알지. 아니면 내가 좀 설득해 볼까?”“필요 없어.”“뚜뚜뚜…….”뚝 끊긴 전화와 어느새 사라진 하윤이 떠난 방향을 번갈아 보던 민혁은 지친 마음을 달래며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좀만 기다려요!”한편, 하윤은 겨우 따돌린 한민혁이 따라붙을까 봐 건네받은 쪽지를 얼른 펼쳐 보았다.그 위에는 단지 ‘일기’라는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그걸 보니 주민수가 저한테 딸 번호를 넘겨준 게 증언을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림의 일기를 받으라는 뜻인 걸 깨닳았다.마침내 진전이 생기자 며칠 동안 답답했던 하윤은 마침내 숨통이 트였다.‘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몰래 그 일기를 손에 넣지?’……돌아가는 길에 민혁은 조잘조잘 한참 동안 얘기했다. 냉전 상태인 하윤과 도준의 관계회복을 위해 도움을 주려는 의지가 다분했다.하지만 민혁이 아무리 입이 마르도록 조잘대도 하윤은 좀처럼 마음을 풀지 않았다.결국 민혁은 비굴하게 사정했다.“정 안 되면 도준 형 차단만 풀면 안 돼요? 그것만이라도 좋을 것 같은데.”그날 이후로 하윤은 도준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건 짜증을 내는 것도, 관심을 갈구하는 것도 아니다.단지 혼자만 어릿광대처럼 도준에게 끌려 다니기 싫어서였다.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하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실 안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 그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여자는 왠지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시영 언니.” 하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민시영은 여상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윤 씨, 인사도 없이 와서 미안해요.”“아니에요. 저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뭘. 그러는 언니야 말로, 회사 일로 바쁜데 어떻게 저 보러 왔어요?”싱긋 웃으며 묻는 말에, 시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그게…….”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시영에게서 처음 보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에 하윤이 놀란 듯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큰 일은 아니고.”시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손에 들며 눈을 내리 깔았다.“케빈이 실형을 선고 받았대요.”“뭐라고요?”충격적인 사실에 하윤의 눈이 둥그레졌다.“언제요?”“얼마 안 돼요. 이틀 정도 됐나?”분명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검푸른 다크서클과 흰자를 가득 메운 핏발을 보면 시영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이어진 대화에서 하윤은 케빈이 자수한 탓에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민재혁이 꾸민 짓을 모두 증언하고 민재혁과 추형탁이 꾸민 작당을 모두 실토한 것 때문에.“그래도 어찌 보면 좋은 일을 한 건데. 케빈이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이 일은 아마 더 오래 끌었을 거야 할 거예요.”‘증거?’‘그 증거들 모두 시영 언니가 모은 거 아닌가? 왜 케빈 씨가 제출한 게 됐지?’하윤은 잠깐 의아했지만 곧바로 어렴풋이 답을 찾았다.하지만 언제나 눈치 빨랐던 시영은 그런 하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7년 형을 선고 받았대요. 사실 7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죠. 아마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거예요. 내가 꼬마였을 때 케빈이 내 곁에 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벌써 십년도 넘게 흘렀으니.”케빈과 시영이 어릴 때부터 함께 커왔다는 건 하윤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케빈이 민용재 쪽 사람이라는 걸 들었을 때 충격이 컸던 거
원래 주인이라는 말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케빈 씨가 정말 민재혁 쪽 사람이었어요?”“네.”민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재혁네 식구의 야심은 늘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여자라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시영도,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에 올렸으니 말이다.때문에 시영이 경호원을 필요로 할 때 기회를 틈 타 자기 쪽 사람인 케빈을 붙였던 거다.하윤은 방금 알게 된 사실에 말을 잃었다.“그러니까, 케빈 씨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언니한테 접근했다는 뜻인가요?”“네.”시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씨 집안 식구들이 아무리 서로 견제한다 해도 저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 아이까지 견제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민용재가 대단하다는 거죠.”게다가 케빈은 어찌나 시영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는지 시영의 곁에 붙여진 첫날부터 믿음을 얻었다.말수가 적었지만 시영이 필요할 때 언제나 제때에 나타났으니까.심지어 바삐 보내는 시영의 아버지보다, 매일 고객 대접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영의 어머니보다 케빈이 시영의 곁에 더 많이 있어 주었다.그래서 시영도 케빈에게 의지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그 사이, 케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앳된 목소리로 ‘케빈 오빠, 저 배고파요.’, ‘케빈 오빠 저 혼자 자기 무서워요.’라며 조잘대던 어린 아이는 풋풋한 소녀로 자라났다.‘케빈, 이 옷 예뻐?’‘케빈, 나 립스틱 없어졌어.’‘케빈 이 지퍼 좀 올려 줘’하지만 새초롬하던 소녀의 말투가 끝내 처절한 비명으로 변해 버렸다.‘케빈, 살려줘…….’‘살려줘…….’시영은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더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번 배신한 사람인데 도준 오빠라고 배신 못할까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알고 싶어요. 그래서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고요.”집념 가득한 시영의 모습은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기 자신과 겹쳐 보여서일까? 하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
권하윤이 모든 감정을 쏟아내자 전화 건너편에서 아무렇지 않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끝났어?”가벼운 말투는 두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 또 한 번 상기시켰다.순간 저 자신이 우스웠다.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이 도준한테는 그저 우스웠을 걸 생각하니 타오르던 분노마저 꺼지며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네, 끝났어요.”“끝났으면 이제 내가 말해도 왜?”상의하는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맞아. 비행기 폭발 사고 때 추형탁이 손써 두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정도쯤은 사고 당시 낙하산 타고 내려오면 피할 수 있는 거였어.”하윤은 반신반의하는 듯 물었다.“알았다면 왜 그렇게 됐어요?”“추형탁 말고도 손쓴 사람이 더 있었으니까.”“공은채요?”“응.”실험 훈련 실패한 사건과 뇌물수수에 연루된 사람의 생사가 불확실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그 때문에 도준이 실종되었을 때, 추형탁은 거리낌 없이 도준을 문제 삼아 조관성을 공격했고, 공씨 가문도 추형탁에게 줄을 섰을 거다. 그리고 그 덕에 두 무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고.그러니까 어찌 보면 공아림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도준이 조관성과 짜고 공씨 자문을 무너뜨린 것도 맞는 말이고, 그게 모두 공은채 때문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니까.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도준이 저 때문에 조 국장과 손잡았고, 그로 인해 정권 싸움에 연루된 줄 알고 밤잠까지 설쳤다는 게 참 가소로웠다.공은채라면 먼저 사고를 치고 나중에 통보한다 해도 도준은 아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그 뿐만 아니라 이 시끄러운 곳과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옛 감정이 다시 싹 텄을 수도 있고…….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하윤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끝내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문자는 도준 씨가 보낸 거 맞죠?”“응.”
“민혁한테서 들었어. 그 정신병자를 직접 흥덕 마을로 데려 가겠다고 했다며?”“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또 제 자유를 제한할 거예요?”날을 잔뜩 세운 권하윤의 말투에 민도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서 결론 내리고 화 내는 건 대체 뭐야?”하윤도 자기 자신이 지금 가시를 드러내고 경계하는 고슴도치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안다.하지만 이것도 이미 참을 만큼 참은 결과다.그때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하윤을 달래려는 듯한 말투였다.“가지 말란 말 안 했어. 가는 길에 나 보러 여기 들르는 건 어때? 나도 이제 막 혼인신고 끝낸 우리 마누라 보고 싶은데.”도준의 다정한 호칭에 하윤의 가슴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두근대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감정을 이내 꾹꾹 눌렀다. 본인이 참 못난 것 같았으니까. 대충 몇 마디 달랬다고 보고 싶어하는 게.결국 서슴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편, 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뚜뚜’ 거리는 소리에 도준은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애써 본인이 무시당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도준이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방 안 분위기는 여전히 뜨거웠다.도준이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아부하느라 바빴고, 여직원은 또 술을 들고 도준에게 다가왔다.“민 사장님, 오늘 왜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세요? 술 좀 드세요.”“됐습니다.”여직원은 도준의 낯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 멋에 술을 따랐다.“민 사장님이 마시지 않으면 제가 저희 대표님한테 한 소리 들을 겁니다. 그러니 제 체면을 봐서라도 마셔 주세요.”붉은 액체가 와인잔 벽을 타고 흘러 들자 도준이 테이블 다리를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와 동시에 잔에 담겼던 액체가 찰랑거리며 넘쳐흘렀다.“안 마신다고. 씨X 못 들었어?”뜨거웠던 방 안 분위기는 한순간 싸늘해졌다.하지만 도준은 그것을 무시한 채 넥타이를 손으로 풀어 헤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테이블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도준의 태도에 더 이상 아무
전화를 끊은 조관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 민도준은 이제 막 지옥문을 나선 저승사자처럼 또 뭐가 불만인지 표정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그 모습에 조관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도준과 손을 잡은 것을 또 다시 후회했다. 이로써 벌써 101번째 후회하는 거다.“추형탁 쪽 일은 이미 대충 끝난 것 같고, 공씨 집안은 아직 껍데기가 남았는데,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황혼 무렵, 불그스름한 햇빛이 남자의 눈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빛을 덜어주었다.“해원에서는 조 국장님이 실세인데, 제가 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해원과 경성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제가 먹고 싶어도 어디 먹을 수야 있어야죠.”조관성은 도준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민 사장님 식욕이 뛰어나다는 걸 제가 어디 하루이틀 안 줄 압니까? 이제 와서 겸손한 척하다니.”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뭐, 먹으려면 먹을 수는 있지만 또 싸움을 해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요.”“민 사장님도 번거로운 걸 꺼릴 때가 다 있네요?”조관성이 의외라는 듯 말하자 도준이 피식 웃었다.“힘이 남아 나질 않아서요. 집안 문제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울 수도 없고.”“…….”할 말을 잃어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던 조관성은 도준을 꿰뚫어 보려는 듯 위아래로 훑었다.솔직히 도준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공씨 가문을 손에 넣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양보를 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공씨 집안 일은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판 새로 깔 타이밍에 재벌가가 또 끼어들어 권세를 휘두르는 건 원하지 않거든요. 민 사장님이 나서서 그들을 눌러준다면 걱정도 줄어들 테고.”도준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조관성이 차에서 내리자 도준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이얼을 눌렀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번호는 또 차단 당해버렸다.‘쯧, 또 삐졌네.’……경성.도준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난 뒤 아무리 해도 시원치 않던 하윤의 마음은 도준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나서야 그나마
“일기요?”놀란 듯한 주영애의 표정에 권하윤은 바짝 긴장했다.“혹시 없어요?”“아니요.”주영애는 싱긋 웃어 보였다.“우리 애가 남한테 일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게 의외라서요. 그 일기를 엄청 소중하게 여겨 누구도 손 못 대게 했거든요.”하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미소 지었다.“맞아요. 선배의 성격이 불 같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만약 누군가 본인 일기를 훔쳐봤다는 걸 알면 당장이라도 화 낼 거예요.”“그러게요. 그 애가 그런 면에서 고집이 좀 세야 말이죠.”주영애는 지금의 주림을 떠올리며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그런데 지금은…….”“아주머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마세요.”나지막한 위로에 주영애는 그제야 다정의 존재를 눈치챘다.“어머, 다정이구나. 그간 어디 갔었어?”익숙한 사람을 보자 다정도 전보다 긴장을 풀었는지 주영애한테 하윤이 자기를 어떻게 구해냈는지, 또 그간 어떻게 보살펴 주었는지 빠짐없이 설명하면서 하윤을 마치 신처럼 찬양했다.그 모습에 주영애는 질투하는 척 투덜거렸다.“그럼 이제는 이 아줌마보다 언니가 더 좋다는 거야?”“아니에요. 저 아주머니도 좋고 언니도 좋아요.”다급히 설명하는 다정의 모습에 주영애가 피식 웃었다.“착하네.”……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 다정은 주영애를 도와 반죽을 빚기 시작했고, 하윤은 주영애가 건네준 일기를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일기장 앞에 적힌 내용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매일 자기가 받은 영감 아니면 학교에서 겪은 일뿐이었다.심지어 대충 쓴 날도 있었고, 며칠 건너 쓰기도 했다.먼저 확인한 두 권에서 모두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하윤은 마지막으로 세번째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세번째 일기장에는 앞서 두 권에서 보지 못했던 ‘그 여자애’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었다.심지어 내용도 먼저 봤던 두 권과는 사뭇 달랐다.시작 즈음, 일기 속에서 ‘그 여자애’는 주림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주림의 음악에 대한 꿈도 알고,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어하는 마음
하지만 하필이면 한차례 공연 당시, 석지환은 사고로 음악 인생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한쪽 팔도 잃게 되었다.이성호는 그때 그 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걱정에 시달렸었다. 결국 퇴원한 석지환이 오히려 이성호를 달래러 찾아온 적이 있다.게다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후배들 앞에서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됐어, 다들 그만 울어. 나 가업 이으러 돌아가는 거야’라고 말하던 석지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교실에 흘러 든 빛이 석지환에게 드리워 긴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석지환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어디에 떨어져 있든, 우리의 미래는 창창할 거야.’……기억이 뚝 끊긴 순간, 하윤은 일기장을 다시 들여다보며 황당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설마 그때 석지환 선배의 사고가…….’곧이어 본 일기장의 내용은 하윤의 그런 생각을 증명했다.극한의 분노를 쏟아낸 뒤, 주림의 일기에는 회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내가 정말 그런 짓을 했다니.’‘내가 정말 마쳤나?’‘그 여자애는 분명 석지환이 경상만 입을 거랬는데, 왜 이렇게 됐지?’하윤은 볼수록 충격적인 내용에 얼른 인터넷으로 그때 아버지의 콘서트를 검색해 봤다.그랬더니 역시나, 석지환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연주할 기회는 결국 주림이 차지했다.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이 가빠왔다. 늘 동경해오던 사람이 하윤도 모르는 사이에 더럽혀졌다는 걸 아는 건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하지만 하윤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이런 일로 슬퍼할 때가 아니야.’‘고작 평범한 학생이었던 주림 선배가 어떻게 그런 일을 벌였지?’일기에 계속 언급되었던 ‘그 여자애’가 나선 거면 모를까.‘게다가 주림의 성격에 갑자기 변한 게 아마 공은채와 사귀고 난 뒤었으니…….’하윤은 자기의 생각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그러니까 공은채는 주림 선배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조종하려는 거였어.’‘대체 목적이 뭐지?’하윤은 얼른 일기장을 뒤로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