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권하윤은 온몸이 차가운지 침대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수많은 생각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다.그들 가족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왜 공은채는 하윤의 아버지를 해하려 했을까?‘은채와 아버지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주림 선배도 분명 은채와 접점이 있었는데, 그사이에 또 어떤 연관이 있을까?’하윤은 어떻게 은채에게 복수해야 하는 걸까?민도준이 하윤이 은채를 해치는 것을 허락할지는 둘째 치고, 은채 몸속에는 도준 부모님이 남긴 것이 있었기에 도준은 은채를 보호할 것이었다. 하윤이 은채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동안 도준은 뭘 생각하고 있을까?천장을 올려다보며, 하윤은 자신이 이렇게 지쳐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에게 은채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렸을까, 왜 자신에게 도준이 본인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일까…….이 모든 시련 속에서 하윤과 그녀의 가족은 깊은 수렁에 빠졌고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하윤은 배후의 조종자들이 누구일지 감히 추려낼 엄두조차 없었다. 도준, 공태준……, 그들은 모두 은채가 가짜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하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비로소 해답을 찾게 되었다. 태준과 도준이 주고받았던 메시지들, 그리고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은채.태준은 항상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고 부단히 도준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비밀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그들은 겁을 잔뜩 먹었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은채를 죽였다고 주장한 하윤이 얼마나 우스웠을까?우습게 느껴질 게 분명했다. 분명 피해자임에도 자신을 가해자로 만들어 비참하게 벌을 받고 진범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서커스를 보는 것보다도 더 우스웠을 것이었다.과거를 회상하며, 하윤은 자조하며 웃었다. “하하……, 하하하…….”“…….”고막을 찌르는 하윤의 웃음소리가 밤중에 울려 퍼지자 더욱 스산하게 들려 소파에서 자던 한민혁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 민혁은 집에 귀신이 들어
병원에서, 정다정은 권하윤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며칠간의 치료를 받은 후, 다정의 정신 상태는 많이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는데 심지어 기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언니, 오셨어요. 나 약도 잘 먹고 치료도 열심히 받았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다정이 용기를 내어 도준이 다치지 않았다고 말했을 때, 다정을 믿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권하윤은 마음이 쓰라렸다. 하윤은 다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안 화났어. 미안해,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널 못 믿었어.”다정은 괜찮다는 하윤에 기뻐했다. “언니, 정말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언니를 속여서 뭐 해요?”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마을에서 도준 씨를 만났다고 했잖아.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나?”“그건 몇 년 전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방학 때였어요.”시간을 계산해 보니 4년 전이었다. 이로써 공은채가 주림 선배와 먼저 교제했고, 그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와 관계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정과 조금 더 같이 있었고, 하윤이 떠나려고 할 때 다정은 갑자기 베개 밑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언니, 이거 줄게요.” 다정이 건넨 봉투를 열어보니 작은 봉지의 사탕이었고 하윤은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다정은 하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언니가 좋아한다니 다행이에요.”……하윤이 병실을 나서며 다정에게 받은 사탕을 떠올렸고 마침 간호사가 다정에게 약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이게 뭐죠?”간호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환자가 어려서 약 먹은 후에 사탕을 주는 거예요. 한 번 맛보시겠어요?”그러자 하윤은 단번에 이해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약을 먹어야 하나요?”“다섯 번이요.”하윤은 손바닥 위에 사탕을 올려놓고 세어보자 사흘동안 딱 15개였다. 다정은 쓴 약을 먹고 단 사탕을 하윤에게 주려고 남겨두었던 것이었다.갑자기 차가운 느낌이 든 하윤이 볼을 쓱 닦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윤은 눈물을 닦고 그녀를
권하윤은 몇 마디 위로를 건네고는 이내 물었다.“그렇다면 혹시 주림 선배가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아세요?”“휴, 말하기도 부끄럽네요. 어미가 되어서 아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다니.”생각지도 못한 답에 하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주영애도 그 이유를 모른다면 주민수가 저한테 번호를 준 게 더 이해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하윤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주영애는 낮은 소리로 자책했다.“그동안 가족을 부양하겠다고 돈 버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주림에게 너무 무심했어요. 특히 여자친구를 사귄 후에는 집이라도 장만해 주려고 돈만 열심히 벌려고 더 열심히 일만 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너무 후회돼요.”여자친구라는 글자를 듣는 순간 하윤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더 꽉 움켜 잡았다.“여자친구요? 혹시 본 적 있어요?”“봤죠. 엄청 예쁜 아이였어요. 아들이 나 더러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고 했는데, 보통 집안 아이는 아니었어요. 우리 같은 집안은 쳐다도 못 볼. 하지만 우리 애가 좋다는데 어쩌겠어요.”“참, 그러고 보니 그 아이도 이 교수 제자라고 하던데, 공은채라고. 하윤 씨도 본 적 있죠?”하윤은 눈을 감으며 애써 자기의 이상함을 숨겼다.“네, 봤어요.”주영애의 말을 들어보니 두 사람은 1년 정도 사귀었다고 한다. 그간 주림이 공은채를 두 번 정도 집에 데려왔는데, 나중에 졸업 공연 때문에 집에 들를 시간이 적어지면서 공은채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한참 동안 말을 이어가던 주영애가 갑자기 기억을 더듬으며 제 생각을 덧붙였다.“어느 한번 새해가 다가와서 은채라는 아이에 대해 물어봤더니 주림이 크게 화내더라고요. 더 이상 그 얘긴 하지 말라면서. 아마 헤어진 것 같아요.”“…….”전화를 끊은 뒤 아무리 생각해도 하윤은 이해할 수 없었다.‘주림 선배가 공은채가 사귀었다면, 공은채와 아빠의 일을 듣고 나서 왜 오히려 아빠 편에 섰지?’이 전화로 궁금증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복잡해졌으니.‘역시 주
주림의 병실을 나서니 복도에서 한창 간호사와 얘기 중인 한민혁이 눈에 들어왔다.민혁도 마침 병실에서 나온 하윤을 봤는지 얼른 다가와 멋쩍게 웃었다.“하윤 씨, 병문안 잘 했어요? 그럼 다른 병실로 갈까요?”“선배 할아버지는 어때요? 혹시 많이 아픈가요?”“네?”병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민혁은 하윤이 단순히 주민수의 건강을 염려한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말아요. 도준 형이 이미 가장 좋은 약과 의료진을 붙여달라고 병원 측에 일러 뒀어요. 게다가 암 초기에 일찍 발견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암 초기라고?’‘어쩐지, 주림 선배의 의식이 또렷한데 한마디도 안 한다 했어. 누군가 선배의 입을 막은 게 분명해.’하윤의 표정에서 자기가 말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 챈 민혁은 당장이라도 자기 뺨을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수습하기 위해 얼른 말 머리를 돌렸다.“도준 형이 두 사람한테 엄청 잘해줘요. 병원비도 면제해 주고, 먹고 자는 것도 최고급으로만 취급하고. 도준 형 아니었다면 두 사람 아마 깊은 산골에서 계속 시간만 끌다가 병만 악화했을 거예요. 안 그래요?”하윤은 더 이상 민혁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고, 도준에 관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만 알고 싶을 뿐.대충 고개를 끄덕인 하윤이 이내 다정의 병실로 걸어갔다.그 사이, 말없이 떠나가는 하윤의 뒷모습에 전전긍긍하던 민혁은 끝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어, 도준 형, 있잖아……, 혹시 형이 아주 믿는 부하가 말실수하면 용서해 줄 거야?”“…….”“다정아, 자, 선물.”정교한 상자를 받아 든 순간, 다정의 얼굴에는 마침내 즐거운 미소가 드리웠다.하지만 예쁜 리본을 풀기 전 습관처럼 한 번 더 확인했다.“언니, 이거 정말 저 주는 거에요?”“응, 그래.”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 짓는 하윤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다정은 기쁜 마음으로 선물 상자를 뜯었다.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건 다름 아닌 손목시계였다. 붉은색
병실 문을 닫고 손에 있는 쪽지를 다급하게 펼쳐 보려고 돌아선 순간, 등 뒤에서 기다리던 한민혁과 그대로 맞닥뜨리고 말았다.민혁은 한참 동안 기다렸는지 하윤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며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건넸다.“도준 형 전화예요.”민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물에 빠진 듯 숨이 막혀 하윤은 손에 든 쪽지를 꽉 움켜 쥐었다.“싫어요.”짤막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돌아서는 하윤을 보며 민혁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전화 건너편에 상황 설명을 하며 하윤의 뒤를 따랐다.“도준 형, 하윤 씨가 받기 싫대.”“나도 귀 안 멀었어.”전화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그래, 나도 알지. 아니면 내가 좀 설득해 볼까?”“필요 없어.”“뚜뚜뚜…….”뚝 끊긴 전화와 어느새 사라진 하윤이 떠난 방향을 번갈아 보던 민혁은 지친 마음을 달래며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좀만 기다려요!”한편, 하윤은 겨우 따돌린 한민혁이 따라붙을까 봐 건네받은 쪽지를 얼른 펼쳐 보았다.그 위에는 단지 ‘일기’라는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그걸 보니 주민수가 저한테 딸 번호를 넘겨준 게 증언을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림의 일기를 받으라는 뜻인 걸 깨닳았다.마침내 진전이 생기자 며칠 동안 답답했던 하윤은 마침내 숨통이 트였다.‘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몰래 그 일기를 손에 넣지?’……돌아가는 길에 민혁은 조잘조잘 한참 동안 얘기했다. 냉전 상태인 하윤과 도준의 관계회복을 위해 도움을 주려는 의지가 다분했다.하지만 민혁이 아무리 입이 마르도록 조잘대도 하윤은 좀처럼 마음을 풀지 않았다.결국 민혁은 비굴하게 사정했다.“정 안 되면 도준 형 차단만 풀면 안 돼요? 그것만이라도 좋을 것 같은데.”그날 이후로 하윤은 도준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건 짜증을 내는 것도, 관심을 갈구하는 것도 아니다.단지 혼자만 어릿광대처럼 도준에게 끌려 다니기 싫어서였다.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하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실 안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이, 그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는 여자는 왠지 어딘가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시영 언니.” 하윤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민시영은 여상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윤 씨, 인사도 없이 와서 미안해요.”“아니에요. 저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뭘. 그러는 언니야 말로, 회사 일로 바쁜데 어떻게 저 보러 왔어요?”싱긋 웃으며 묻는 말에, 시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그게…….”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시영에게서 처음 보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에 하윤이 놀란 듯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큰 일은 아니고.”시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손에 들며 눈을 내리 깔았다.“케빈이 실형을 선고 받았대요.”“뭐라고요?”충격적인 사실에 하윤의 눈이 둥그레졌다.“언제요?”“얼마 안 돼요. 이틀 정도 됐나?”분명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검푸른 다크서클과 흰자를 가득 메운 핏발을 보면 시영이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이어진 대화에서 하윤은 케빈이 자수한 탓에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것도 민재혁이 꾸민 짓을 모두 증언하고 민재혁과 추형탁이 꾸민 작당을 모두 실토한 것 때문에.“그래도 어찌 보면 좋은 일을 한 건데. 케빈이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이 일은 아마 더 오래 끌었을 거야 할 거예요.”‘증거?’‘그 증거들 모두 시영 언니가 모은 거 아닌가? 왜 케빈 씨가 제출한 게 됐지?’하윤은 잠깐 의아했지만 곧바로 어렴풋이 답을 찾았다.하지만 언제나 눈치 빨랐던 시영은 그런 하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7년 형을 선고 받았대요. 사실 7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죠. 아마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거예요. 내가 꼬마였을 때 케빈이 내 곁에 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벌써 십년도 넘게 흘렀으니.”케빈과 시영이 어릴 때부터 함께 커왔다는 건 하윤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케빈이 민용재 쪽 사람이라는 걸 들었을 때 충격이 컸던 거
원래 주인이라는 말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케빈 씨가 정말 민재혁 쪽 사람이었어요?”“네.”민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재혁네 식구의 야심은 늘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여자라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시영도,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세력이 있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에 올렸으니 말이다.때문에 시영이 경호원을 필요로 할 때 기회를 틈 타 자기 쪽 사람인 케빈을 붙였던 거다.하윤은 방금 알게 된 사실에 말을 잃었다.“그러니까, 케빈 씨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언니한테 접근했다는 뜻인가요?”“네.”시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민씨 집안 식구들이 아무리 서로 견제한다 해도 저와 나이가 비슷한 어린 아이까지 견제할 필요는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민용재가 대단하다는 거죠.”게다가 케빈은 어찌나 시영의 마음에 들게 행동했는지 시영의 곁에 붙여진 첫날부터 믿음을 얻었다.말수가 적었지만 시영이 필요할 때 언제나 제때에 나타났으니까.심지어 바삐 보내는 시영의 아버지보다, 매일 고객 대접하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영의 어머니보다 케빈이 시영의 곁에 더 많이 있어 주었다.그래서 시영도 케빈에게 의지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그 사이, 케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앳된 목소리로 ‘케빈 오빠, 저 배고파요.’, ‘케빈 오빠 저 혼자 자기 무서워요.’라며 조잘대던 어린 아이는 풋풋한 소녀로 자라났다.‘케빈, 이 옷 예뻐?’‘케빈, 나 립스틱 없어졌어.’‘케빈 이 지퍼 좀 올려 줘’하지만 새초롬하던 소녀의 말투가 끝내 처절한 비명으로 변해 버렸다.‘케빈, 살려줘…….’‘살려줘…….’시영은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더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번 배신한 사람인데 도준 오빠라고 배신 못할까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알고 싶어요. 그래서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거고요.”집념 가득한 시영의 모습은 답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기 자신과 겹쳐 보여서일까? 하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
권하윤이 모든 감정을 쏟아내자 전화 건너편에서 아무렇지 않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끝났어?”가벼운 말투는 두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다른지 또 한 번 상기시켰다.순간 저 자신이 우스웠다.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이 도준한테는 그저 우스웠을 걸 생각하니 타오르던 분노마저 꺼지며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네, 끝났어요.”“끝났으면 이제 내가 말해도 왜?”상의하는 듯한 도준의 말투에 하윤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맞아. 비행기 폭발 사고 때 추형탁이 손써 두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정도쯤은 사고 당시 낙하산 타고 내려오면 피할 수 있는 거였어.”하윤은 반신반의하는 듯 물었다.“알았다면 왜 그렇게 됐어요?”“추형탁 말고도 손쓴 사람이 더 있었으니까.”“공은채요?”“응.”실험 훈련 실패한 사건과 뇌물수수에 연루된 사람의 생사가 불확실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그 때문에 도준이 실종되었을 때, 추형탁은 거리낌 없이 도준을 문제 삼아 조관성을 공격했고, 공씨 가문도 추형탁에게 줄을 섰을 거다. 그리고 그 덕에 두 무리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고.그러니까 어찌 보면 공아림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도준이 조관성과 짜고 공씨 자문을 무너뜨린 것도 맞는 말이고, 그게 모두 공은채 때문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니까.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도준이 저 때문에 조 국장과 손잡았고, 그로 인해 정권 싸움에 연루된 줄 알고 밤잠까지 설쳤다는 게 참 가소로웠다.공은채라면 먼저 사고를 치고 나중에 통보한다 해도 도준은 아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그 뿐만 아니라 이 시끄러운 곳과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에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으니, 옛 감정이 다시 싹 텄을 수도 있고…….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하윤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끝내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문자는 도준 씨가 보낸 거 맞죠?”“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