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닫혔다.고개를 돌려 텅 빈 별장을 보자 권하윤의 마음도 덩달아 허전했다.결국 혼자서 꾸물거리며 어수선한 부엌을 정리하며 방금 전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는 만두를 보자 하윤의 마음은 더 다운되었다.하지만 민도준이 이렇게 갑자기 떠난 것도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이유는 아마 하윤이 벌인 일과 관련이 있을 거고.때문에 도준을 탓할 수 없었다.쓸쓸히 계단을 올라 방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응?’소리를 따라 확인해 보니 유선전화에서 울리는 소리였다.하윤은 번호를 슬쩍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하윤은 손가락으로 전화선을 칭칭 감았다.“제가 도준 씨를 위해 힘들게 만두 빚었는데 먹지도 않고 가버렸잖아요.”“주식을 먹었으니 반찬은 안 먹어도 괜찮아.”“…….”주식이라 불린 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전화 건너편에서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떠나는 거예요?”“응.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되도록이면 밖에 나가지 마. 어디 갈 거면 장욱한테 같이 가달라고 하고. 말 잘 들어, 걱정하게 하지 말고, 알았지?”도준의 당부에 하윤의 마음 한 켠은 달콤해졌다. 하지만 결국은 ‘알았어요’라는 한 마디로 목까지 차 올랐던 수많은 말을 대신했다.“참, 주림 선배와 주민수 할아버지도 강원에 있어요? 걱정이 돼서 보고 싶어요.”“지금 안전한데 굳이 가보겠다면 안전은 장담 못해.”“네.”기어들어간 목소리만 들어도 하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어둠 속, 도준은 전용기 옆에 서 있는 우원준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됐어. 기운 차려. 못 보게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돌아가면 같이 보러 가자.”“정말요? 역시 도준 씨밖에 없어요.”전화 건너편에서 들리는 쪽 하는 소리에 도준은 또 몇 마디 농담을 더했다.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원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헤어진
전화를 끊은 뒤 권하윤은 유선전화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그러다가 손바닥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천 조각을 보며 고뇌에 잠겼다.민도준이 너무 급히 떠나는 바람에 하윤은 그에게 솔직히 고백할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솔직히 이 기회에 천 조각에 적힌 번호로 전화하고 싶었지만 이대로 전화한다면 또 도준을 속인 일이 하나 늘어나는 것이 된다.‘그동안 도준 씨를 믿지 못해 다른 사람의 입에서 진실을 들으려고 한 건데.’하윤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끝내 천 조각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아니야. 일주일 뒤면 도준 씨가 나랑 같이 주민수 할아버지 찾으러 간다고 했는데 이러면 안 돼.’떳떳하게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두고 뒤에서 도준 몰래 일을 꾸미고 싶지 않았다.‘고작 일주일인데 그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야.’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하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그러다가 심심한 나머지 또 레시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도준이 돌아오면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어서였다.도준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떠올리며 내일 장 볼 채소를 정리한 뒤 하윤은 단잠을 청했다.다음날.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소파에는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어…….”하품하고 있던 장욱은 하윤을 보자 침을 꼴깍 삼켜 참고는 손가락 두개를 이마 앞으로 들어 올리며 멋쩍게 인사했다.“좋은 아침입니다.”그 모습을 보자 하윤은 순간 느끼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어, 여긴 어떻게?”“저 오늘부터 하윤 씨의 경호원이자 보모이자 친구이니 하고 싶으면 말씀하세요.”장욱은 윙크를 하며 대답했다.그러더니 또 다시 윙크를 한번 날리더니 말을 보탰다.“저는 하윤 씨 결정에 따를게요.”그런 장욱을 보고 있자니 하윤은 왠지 모르게 한민혁이 보고싶어졌다.하지만 하윤은 티를 내지 않고 장욱과 함께 슈퍼로 향했다.물론 운전하는 동안에도 장욱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하윤은 맨 처음 예의상 웃으며 대꾸하던 데로부터 어느새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그 뒤의 기억은 마치 안개에 뒤덮은 것처럼 희미했다.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물방울이 되어 주위에 뚝뚝 떨어져 물방울 소리와 심장 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남자의 악마 같은 속삭임과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 때문에 정신이 말짱할 때는 차마 할 수 없었던 행위를 해 나갔다.그러다가 권하윤이 이불 속에 몸을 파묻자 텅 빈 공간 속에 전류음만 남았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밭은 숨소리가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재밌어?”“아니요!”이불 속에 숨어 있는 하윤의 목소리는 딱 들어도 화난 듯해 보였다.하지만 민도준은 마치 눈치채지 못한 듯 야릇한 농담을 이어갔다.“그래. 그러면 돌아가서 더 재밌는 거 놀자.”“싫거든요. 아예 오지 마요.”“내가 안 가면 하루 종일 칭얼댈 거면서.”“흥.”인내심 가득한 도준의 목소리에 하윤은 콧방귀를 뀌었다.“됐어. 그만하고 이제 자. 끊을게.”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하윤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하윤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샤워를 하는 동안 하윤은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를 계산했다.나흘, 아직도 나흘이나 지나야 도준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괴롭게만 느껴졌다.……상황은 닷새째부터 달라졌다.예전에 도준은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전화를 했지만 닷새째 되던 날부터 도준은 연락마저 끊겨 버렸다.그 사실에 하윤은 불안감이 몰려왔다.하윤은 별장 안 유선 전화로 한민혁과 로건한테 상황을 여쭈어 보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도준이 바쁠 뿐 잘 있는다는 대답만 반복했다.‘그러면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연락은 왜 또 안 되고?’7일째 되던 날, 하윤은 그래도 도준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아침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도준을 기다리기 시작했다.며칠 동안 장욱한테서 요리를 배운 덕에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이제 가정 음식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한 하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음식이 점점 식어가고 파랗던 야채들이 누렇
‘일부러 실패를 조성했다고? 게다가 뭐? 매수?’‘아니야, 그럴 리 없어. 도준 씨는 누구한테 매수당할 사람이 아니야. 누군가 일부러 함정을 판 게 분명해.’‘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그 몇 대의 전투기에 도준 씨가 타고 있었는지, 현재 무사한지 가장 중요해.’‘그런데 요즘 연락도 안 됐는데 설마 벌서…….’“윤이 씨, 저 약 받아왔어요. 이제 가요.”“윤이 씨?”하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하윤의 낯빛에 장욱은 깜짝 놀랐다.“왜 그래요?”“도준 씨한테 무슨 일 생긴 거죠?”“…….”질문을 할 때까지만 해도 하윤은 어느 정도 희망을 품고 있었다. 자기가 잘못 본 것일 거라고, 도준은 이미 전투기에서 내려왔을 거라고.하지만 장욱의 말은 희망이 불씨에 찬물을 끼얹었다.“어떻게 알았어요? 누구한테서 들었어요?”하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었네……, 이럴 수가. 왜 이런 일이…….”장욱은 핏기 하나 없이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은 하윤을 보자 그녀가 이대로 무너지기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아니에요. 우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보스가 이미 해원에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거예요.”잇따른 대화 속에서 하윤은 이 사고가 이미 사흘 전 벌어졌다는 걸 알아 차렸다. 그건 바로 도준의 연락이 끊긴 그날 부터다.그날이 바로 정식으로 시험 보고가 있었던 날이며 고위층 간부들이 모두 한 곳에 모인 날이다.원래 시험에 성공하면 기술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응용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이런 사고가 벌어진 거다.현재 도준과 조종사 몇 명의 생사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조관성도 직무 정지 통보를 받아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게다가 도준의 계좌에 갑자기 들어온 의문의 돈까지,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보면 이번 사태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현재 일이 많이 커진 상황이에요. 조 국장의 정적들이 이번 일을 꾸
권하윤의 눈시울은 이미 붉게 물들었다.“뭐라고요?”우원준은 장욱을 흘끔 보더니 주먹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도준이가 가기 전에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고 말했어요.”알 듯 말 듯한 몇 마디로 하윤이 받은 충격이 가셔지는 건 불가능 했다. 오히려 기회를 잡은 하윤이 따져 물었다.“언제 말했나요? 정확히 어떻게 마했죠? 위험한 상황이 있을 거라는 걸 말했다는 거예요? 아니면 행방불명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했다는 거예요?”잇따른 질문에 원준은 머리가 어지러워 바로 질문을 장욱에게 토스했다.“물어 보잖아!”뜬금없이 자기한테 던져진 질문에 놀란 장욱은 하마터면 옆에 있는 기둥을 씹어버릴 뻔했다.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말을 반복했다.“아, 네 맞아요. 행방불명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말을 시작하니 그 다음은 쉬웠는지 술술 이어나갔다.“민 사장님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창백한 낯빛을 한 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욱을 바라봤다.“거짓말. 진짜 그렇다면 일주일 뒤에 돌아올 거라고 저한테 약속하지 않았을 거예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고 해도 미리 언질이라도 줬을 거고. 이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증발해 버린 건 갑자기 사고가 벌어졌다는 뜻이잖아요!”하윤의 목소리는 점차 날카로워졌다.장욱도 그런 기세에 눌렸는지 질문을 또 원준에게 넘겼다.“보스, 물어보잖아요.”대충 속이려던 작전이 먹히지 않자 원준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꾸했다.“저한테 그렇게 물어보면 저는 누구한테 물어봅니까? 도준이 그 자식이 대체 뭐 하느라 자기 몸뚱어리마저 그렇게 폭파시켜 버렸는지 알게 뭐예요. X발, 배도 벌써 열 몇 척이나 빌려서 건져내고 있는데도 못 건져냈어요. 젠장.”“…….”욕지거리를 내뱉고 난 뒤, 원준은 방안의 온도가 순간 내려갔다는 걸 느꼈다.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침대를 후벼 파던 하윤의 눈은 점점 공허해졌고 심지어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사기 전화라면 바로 끊는 걸 권장합니다.”“던 씨.”던은 하윤의 목소리를 알아챘는지 몇 초 지난 뒤 다시 입을 열었다.“윤이 씨?”“네.”하윤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열심히 조직한 말을 내뱉었다.“혹시 지금 통화 가능해요?”짙은 콧소리와 더듬거리는 말투.“저는 가능하지만 윤이 씨가 불편해 보이네요.”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면서 애써 진정했다.“사실 왜 전화 했냐면, 도준 씨 일…… 던 씨도 들었죠?”“네, 유감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게요.”하윤은 당장이라도 도준은 살아있다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지금 그런 것을 따진다고 한 들 아무 의미가 없었다.이에 씁쓸함을 삼킨 하윤이 애써 목소리를 냈다.“아직 사고가 난 전투기를 찾지 못했다는데 혹시 인양하는 거 도와줄 수 있나요?”하윤은 던이 거절할까 봐 한 마디 보충했다.“던 씨가 도와준다면 소원은 이대로 없었던 일로 할게요.”한 번 도움을 주는 것과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도와주는 것 중에 당연히 전자가 더 편리할 거다.“이게 윤이 씨 소원인가요?”던이 반문했다.“네.”다른 건 모두 나중으로 미룰 수 있지만 도준은 하루라도 늦으면 생존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던이 몇 초간 고민하는 것마저 하윤에게는 몇 년처럼 느껴졌다.바다에서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던보다 더 적합한 인물을 찾을 수는 없다고 하윤은 생각했다.그도 그럴 게, WM은 선박 사업 규모나 전문성을 놓고 볼 때 단연 세계 제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업의 대표가 나선다면 도준은 아마, 아니 꼭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윤이 거의 숨 막혀 질식하려 할 때쯤 전화 건너편에서 던의 목소리가 울렸다.“도와줄게요.”“고마…….”“그런데 조건이 있어요.”전화기를 잡고 있던 하윤의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말해요.”“첫째, 제가 수색은 도울 수 있으나 시간 기한 없이 도와줄 수는 없어요. 만약 한 달 내에 진전이 없으면 수색은 중단할 겁니다.”선박이 바다 위를 항행한다면 초 단
우원준은 며칠 동안 민도준을 구조하는 작업에 몰두하느라 그 일을 조사할 여유가 없었다.그 때문인지 권하윤의 말을 들은 순간 개의치 않은 듯한 태도를 취했다. 사람도 없어진 마당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다.“그런 도준이 그 자식 찾은 다음에 얘기하죠.”하지만 하윤의 태도는 완강했다.“도준 씨 계좌에 뜬금없이 돈이 들어왔다면 분명 스파이가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도준 씨를 찾는다 해도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수 있어요. 게다가 만약 그 사람을 그대로 두면 수색을 방해할지도 몰라요.”원준이 고민에 빠진 태도를 보이자 하윤은 얼른 말을 보탰다.“만약 단순히 기술적인 실패라면 조 국장도 기껏해야 징계를 받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정직 처분까지 받았다는 건 이 돈과 관련이 있을 거예요. 그 출처를 밝혀내면 조 국장도 하루 빨리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이 일이 이상하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조관성이 정말 모함에 빠진 거라면 그 뒤에 무조건 배후가 있을 거고 이번 싸움이 가져올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지금은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싸움일 뿐만 아니라 두 세력 간의 대결이기도 하다.도준은 죽어서도 져서도 안 된다.원준은 일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겪을만큼 겪은 사람인지라 대충 생각해도 답을 보아낼 수 있었다.“알겠어요. 제가 사람을 풀어 해원에 가 조사해 볼게요.”해원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원준은 순간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하윤이 또 따라 가겠다고 소란일 피울까 봐 두려워서였다.하지만 하윤은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예의 있게 인사를 할 뿐이었다.“고마워요.”그런 하윤의 태도에 원준은 어안이 벙벙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하윤이 기회를 엿봐 도망칠까 봐 걱정했다.하지만 하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또 어디론가 전화를 할 뿐.“…….”원준은 곧바로 장욱에게 나가라는 눈빛을 보냈다.그렇게 문 앞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또 귓속말로 대
민시영은 권하윤의 말을 듣자마자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했다.“알았어요. 제가 바로 칩 응용 실험에 참여했던 팀원들을 위주로 최근 움직임을 알아볼게요.”두 사람은 상세한 계획에 관해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그렇게 얼마간 이어진 통화가 끝났을 때, 하윤은 온 몸의 힘을 순간적으로 잃은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하윤은 등을 침대 기둥에 기댄 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쉽게도 갑자기 덮치는 질식감이 하윤을 가만두지 않았다.하필이면 하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기다림은 구조 작업에 직접 뛰어 들기보다 더 사람 피를 말렸다.하윤은 차라리 해원으로 가서 직접 구조 작업을 돕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하지만 충동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하윤은 자기 팔을 꼬집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안돼.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 도준 씨 말 들어야 돼. 내가 말을 잘 들어야 도준 씨가 돌아올 거야.”……흐리멍덩한 상태로 하윤은 밤을 새웠다.심지어 그 사이 기억도 드문드문 나지 않았다. 그렇게 누군가 자기를 부를 때에 하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식탁 앞에 앉았다.“윤이 씨?”장욱은 또 전매특허인 윙크를 시전해 보이며 하윤을 설득하고 있었다.“미녀가 밥을 거르면 안 되죠. 얼른 한 술이라도 떠요.”하윤은 거절하지 않았다. 장욱이 건네는 젓가락을 받은 하윤은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이대로 쓰러질 수 없었으니까. 걱정 끼치지 말라던 도준의 약속도 지켜야 했다.’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하윤은 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입 안에 넣기를 반복했다.“띠리링.”그때 위층에서 전화벨이 울리자 하윤은 젓가락을 내팽개 치고 미친 듯이 위층으로 달려갔다.슬리퍼가 어느새 떨어졌는지도 상관할 겨를이 없이 하윤은 송수화기를 귓가에 갖다 댔다.“여보세요. 혹시…….”“윤이 씨, 왜 그래요?”시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하윤의 기분은 낭떠러지로 추락했고 살갗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던 심장에도 고통이 전해졌다.그 때문인지 목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